1편: https://arca.live/b/counterside/29263264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이전의 옛날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약 8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였다.

 

평소에는 조용하기만 했던 호라이즌 파이낸셜의 사무실이 그날따라 유독 시끄러운 참이었다.

 

 

 

“이...이 비열한 속물 같으니라고...! 이 대단한 연구의 가치도 못 알아보다니, 이래서 무식한 것들이란...! 하..하긴 당신 같은 깡패가 뭘 알겠어?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멍청이 같으니!”

 

그 원인은 사무실의 문밖에서 소리를 질러대는 남성에게 있었다.

길게 늘어진 금갈색의 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린 비열해 보이는 풍채의 남성.

 

리타에게 대들어 문밖으로 걷어차인 그 남성은, 그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유식하시면서 갚지도 못할 거금은 왜 빌리셨나? 꼴도 보기 싫으니까 빨리 꺼져, 윌버.”

 

그러나 그의 독설에도 리타는 눈썹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그녀는 냉정하게 문을 닫았고, 이에 윌버는 계속해서 저주를 내뱉으며 사무실을 떠나갔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사무실에서, 리타는 소파에 기대어 한숨을 내뱉었다.

 

왜 돈을 빌리는 놈들은 항상 저런 인간들 밖에 없는 걸까.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신만이 잘난 줄 알고 남을 깔보는 쓰레기들.

 

항상 보아왔던 똑같은 풍경에 리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고 있으니 어디선가 나타난 호라이즌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리타.”

 

“계속 숨어있던 주제에 말이 많군.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

 

“책상 밑에 있었습니다. 휴먼들은 위험하니까요.”

 

호라이즌이 그 몸체를 이리저리 움직여대며 키득거렸다.

아마 로봇식 개그였나보다.

 

“그래서 오늘은 뭘 하면 되지?”

 

“오늘 할 일은 다 끝났습니다. 그럼 시간도 남는데, 할 것도 없으면 저랑 장이나 보러 가지 않겠습니까?”

 

이것도 로봇식 개그였던 걸까?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리타는 답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차 질문을 했다.

 

“뭐라고?”

 

“장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마침 연료가 다 떨어졌거든요. 저도 먹고는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풉.”

 

두서없는 녀석의 말에 무심코 리타에게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마 이번 개그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어찌됐든, 대화를 마치자 리타는 나갈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장보러 가자는 핑계 같지도 않은 핑계를 사용하긴 했지만, 이 녀석이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는 건 무슨 목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목적이 무엇일지 모르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그녀는 그에 응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제가 자주 가는 단골 가게가 있습니다. 일단 거기부터 가시죠.”

 

“단골가게? 얼마나 싸돌아 다니길래 그런 것도...응?”

 

호라이즌과 잡다한 대화를 나누며 문 밖을 나서려는 그때, 문에서 덜컹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문 아래에서 무언가가 걸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의문을 품으며 시선을 내렸을 때, 그곳에는 거대한 낫을 지고 눈이 쌓인 길바닥 위로 쓰러진 소녀 한 명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대시에요...대시.”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기절해있던 그녀가 깨어나자, 그들은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양에 이르렀다.

 

리타는 그녀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고자 했지만, 웬일인지 호라이즌의 완강한 고집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사무실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나저나 대시라...어디선가 한 번 들어봤던 듯한 이름에 리타는 눈썹을 찡그렸다.

 

“좋아, 대시. 넌 왜 이런데 쓰러져 있던 거지?”

 

“그게...며칠 째 굶으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자니 갑자기 어지러워져서...정말 죄송합니다... 돌봐주신 건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걸 보니, 주변에 가족이나 지인은 없었나보지?” 

 

“부모님은...10년 전쯤에 돌아가셨고... 그 뒤로 쭉 혼자였어요...”

 

“...”

 

소녀는 어딘가 결손되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해서 우중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리타는 왠지 모를 동정심을 느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지인이라곤 적밖에 없었던 자신과 그녀가 비슷하게 보였던 것이다.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 있다면 자신은 이런 식으로 남들에게 비쳐오지 않았을까.

 

그녀를 보며 리타는 불현 듯 그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굳이 이를 겉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저 턱을 괴고 정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호라이즌 갑작스레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정말 딱한 사연이군요. 연료통 사이로 눈물 대신 기름이 줄줄 샐 지경입니다.”

 

“아...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한동안 이 사무실에서 저희와 같이 살아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름 시설도 괜찮고, 먹을 것도 풍족한 편입니다.”

 

“...네?”

 

“뭐라고?!”

 

질문의 대상은 한 명이었지만, 그 대답은 두 명에게서 돌아왔다.

리타와 대시는 한 마음이라도 된 듯 당황한 표정으로 호라이즌을 쳐다봤다.

 

그러나 호라이즌은 오히려 그런 그들이 이상하다는 몸짓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왜들 그러십니까? 제가 이상한 소리라도 했습니까?”

 

“괘...괜찮아요, 신경 안 써주셔도.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아닙니다. 마침 리타랑 저 밖에 없어서 좀 허전하다 느끼기도 했거든요. 사람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어...정말요...?”

 

“당연하죠! 인간들과 다르게 로봇은 거짓말하는 방법 자체를 모릅니다.”

 

“...너 잠깐 나와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타는 미간을 찌푸리곤 저항하는 호라이즌을 강제로 문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녀는 호라이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녀석이 이야기했던 것은 어려움에 빠진 다른 사람을 도와주자는, 순전한 선의에서 나올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인이 아니었다. 되려 악인에 가까운 편이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는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구원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어려움에 빠뜨리는 쪽이었다.

 

그녀의 사정이 딱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와 같은 사람을 이번에 처음 본 것 또한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녀석은 그녀를 거둬들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리타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호라이즌에게 질문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리타, 로봇은 인간보다 기억력이 훨씬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뭐?”

 

“저희는 동력과 회로만 있으면 수많은 것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10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도 말입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리타는 녀석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리타는 이전보다도 더욱 얼굴을 찌그러트렸지만, 호라이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제 말 들으십시오, 리타. 이건 부탁이 아니라 사장으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녀석의 속내는 알 수가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완강히 나오는 것을 마다할 수는 없었다.

 

리타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알았다”라고 대답하고는 사무실로 들어가,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그녀에게 말했다.

 

“야, 꼬맹이. 한 달만 여기서 살아. 다른 보금자리 생기면 당장 떠나고. 알겠어?”

 

“...정말 감사합니다...!”

 

가냘프게 눈물을 굴리는 대시를 뒤로 하며 방에서 나온 리타는 자주 가는 술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호라이즌은 그저 뒤에서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들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첫째 날, 그들은 아무 대화도 없이 하루를 보냈다. 

대시는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있기만 했고, 리타는 그녀가 어색했는지 일도 없으면서 계속 잦은 외출을 일삼았다.

 

 

둘째 날, 그날 또한 첫째 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대시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냈고, 리타는 그녀와 조금의 얘기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사무실의 안과 밖만을 오갔다.

호라이즌은 가끔 사무실을 들릴 뿐, 리타보다도 그 흔적이 묘연한 편이었다.

 

 

셋째 날, 호라이즌의 권유로 두 명과 한 기의 로봇은 외식 시간을 가졌다.

밥을 먹으며 내적인 거리를 가깝게 하자는 호라이즌의 주장을 맞춰주기 위함이었다.

이틀 동안 나름의 경계심을 품고 있던 대시도 이제는 그들이 편해졌는지 마음 놓고 음식을 집어먹었고, 리타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넷째 날, 그들은 드디어 서로 통성명을 나눴다.

대시는 리타에게 이름과 나이를 물었고, 이를 듣고난 뒤 “앞으로 리타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리타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거절은 하지 않았고,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다섯째 날, 그날은 다른 날보다는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대시와 리타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대화를 시작하게 된 날이자, 리타 스스로 대시에 대한 마음을 열게 된 날.

 

그들이 대화를 가지게 된 것은, 도시가 잠들 무렵인 11시 즈음이었다.

조명이 꺼지는 도시와는 반대로, 그때까지도 불이 훤하게 밝혀져 있던 사무실 내에서는 조용한 적막감이 맴돌고 있었다.

리타와 대시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마주보며 계속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런 침묵이 어색했는지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리타였다.

 

“그래, 꼬맹이. 여기 생활은 지낼만해?”

 

“...네, 네! 정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요! 대표님도 친절하시고, 언니도... 좋으신 분인 것 같고요...”

 

“그 말이 맞습니다. 리타가 원래 좀 서투른르지만 사람만은 착한 편이긴 하죠.”

 

“회로가 고장난 것 같군, 호라이즌. 가서 쉬는게 어때?”

 

“전 멀쩡합니다.”

 

“뭐 어쨌든, 혹시나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 웬만한 건 이 녀석이 해결해 줄테니 말이야.”

 

피식하고 웃음을 지으며 리타는 술잔을 들어올렸다.

 

몇푼 되지 않는 싸구려 양주였지만, 값싸게 적당한 취기를 돋구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요 며칠 대시와 지내보며 그녀가 느꼈던 것은, 그녀가 생각만큼 나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처음 만났을 당시의 그녀는 우울하고 어두침침해보였고, 게다가 지금도 그 모습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리타는 그녀의 내면에 감출 수 없는 선한 모습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이 썩 불쾌히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쾌했다.

 

그녀가 들어오고 나서부턴 무색무취에 불과했던 삶에 생기가 돌아오는 기분이었으니까.

 

리타는 내심 그녀가 들어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가 무슨 생각을 지내고 있을지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대시가 조심스레 손을 들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그렇다면 혹시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

 

“그... 언니가 그냥 절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잘 땐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거나 하시면서, 왜 정작 깨어있을 땐 밖에 나가시기만 하는 거예요!“

 

리타는 먹던 술잔도 내려놓고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밤에 이불을 덮어주거나 몰래 밥을 준비해두는 둥 리타는 알게 모르게 그녀를 계속 신경써왔다.

 

당연히 그녀가 모를 것이라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나름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 걸렸던 건가? 걸렸다면 언제부터?

 

 

옆에서 호라이즌이 “티가 안 날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까...”라며 중얼거렸지만, 리타는 이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에 리타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었고, 그녀는 잽싸게 다시 술을 들이마시며 대답했다.

 

“...생각해볼게.”

 

뭐, 그녀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나 보다.

 

 

 

여섯째 날, 그들은 부쩍 대화하는 빈도수가 늘어났다.

리타도 의미 없는 외출을 줄이고 사무실에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대시도 그런 그녀를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아홉째 날, 그날부터 리타는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밀려있던 업무들이 한 번에 쏟아진 것이다.

그녀는 한 번 나간 뒤로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오고 나서도 피곤한 탓인지 그저 수면을 취했다.

 

 

열일곱째 날, 한동안 리타를 숨 가쁘게 했던 업무의 늪이 끝났다.

이렇게도 돈을 빌리는 이들이 많으니, 한 십년간은 망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대시를 신경써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리타는 사무실로 돌아온 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꼬맹이, 뭐해?”

 

“아, 리타 언니.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이제 일이 다 끝났거든. 그래서 뭐하고 있었어?”

 

“대표님과 얘기 중이었어요. 언니의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는데, 후후 재밌는 이야기였어요.”

 

“그렇고말고요. 그때의 리타는 얼마나 귀여웠는지...”

 

“더 얘기하면 그냥 고물상에 팔아버린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호라이즌이 대시의 말동무를 해주고 있었다는 것쯤은.

 

그럼에도 자신이 그녀에게 ‘뭐하고 지냈냐’며 물은 것은,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오늘 날씨 좋네’와 같은 안부 차원의 인사였다.

 

다음에 이어갈 말을 리타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으니 대시가 질문을 하나 건네왔다.

 

“저...근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언니랑 대표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 건가요?”

 

그 말을 듣자마자 리타는 흠칫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채업자라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그녀에게 밝히지 않고 있었다.

 

괜히 문제 생길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자신을 돌봐주는 이들은 그런 악한 인물임을 어린 그녀가 알게끔 만들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리타는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게...음...금융업 비슷한...일이라고 생각하면 돼.” 

 

“와! 그럼 막 은행 같은 그런 거예요?”

 

“뭐...뭐, 그렇지.”

 

“우와! 역시 대단하네요!”

 

해맑게 싱글벙글 웃음을 띄는 대시를 보며 리타는 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진실을 감출 수도 없는 일.

그녀는 그날부터 마음속에 작은 고민을 품게 되었다.

 

 

 

스물둘째 날, 창틀로 은은한 달빛이 새어들어오는 적막한 밤에, 리타와 대시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리타는 싸구려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대시는 간단하게 물 한 잔을 마시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장소의 분위기에, 리타는 도수가 약한 맥주를 마셨음에도 취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시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 어슴푸레한 새벽의 달빛에 취한 탓이었는지 대시는 평소에 하지 않던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언니는 가족이 있어요...?”

 

가족이라...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평소라면 말을 돌렸을 리타는 왠지 오늘따라 솔직하게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없어. 기껏해야 호라이즌 정도...뭐, 조금 넓게 보자면 너까지 포함이려나.”

 

그 말에 거짓은 한 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20일 정도 밖에 같이 살지 않았지만, 그 20일은 리타에게 있어 하나의 오아시스였다.

 

삭막하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 오아시스.

 

비록 그것이 자신의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그녀는 그 환상을 조금이라도 더 음미하고 싶었다.

 

어찌됐든, 그녀의 대답에 대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후후,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언니나 대표님이 정말 가족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자신이 오글거리는 이야기를 한 것을 깨닫자 리타는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그 얘기는 왜 꺼낸 건데?”

 

“저도 언니처럼 가족이 없어요. 아주 오래 전에...잃어버렸거든요...”

 

소녀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한 10년 전쯤이었어요. 

어떤 사채업자들이 부모님의 돈을 모두 뺏어갔고, 부모님은 그 길로 목숨을 끊으셨죠. 정말 나쁘지 않아요? 

아무리 어렵더라도 챙겨야 할 애가 있는데 목숨을 끊다니...혹시 제가 짐 덩어리처럼 느껴지기라도 했던 걸까요?”

 

“...그렇진 않을 거야.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헤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리타의 대답에 대시는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정작 대답을 한 리타의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사실 처음부터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생김새에, 들어본 듯한 이름. 그리고 방금 들은 익숙하게 느껴지는 과거사까지.

 

마치 그녀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께름칙한 기분이 리타의 온몸을 휘감았다.

 

 

“근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거야?”

 

“그냥 갑자기 이야기하고 싶어졌어요. 

아! 어쩌면 이제 언니가 진짜 가족처럼 편하게 느껴져서 그런 게 아닐까요?”

 

리타는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하였지만, 리타의 귀에 그런 잡담은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너스레를 떨 타이밍이었음에도, 그녀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 사채업자, 생김새는 기억해?”

 

“? 생김새요? 음...잘 모르겠어요. 지금와선 부모님 얼굴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런게 기억이 날 리가 없죠~”

 

“그런가...”

 

“아, 그래도 이거 한 가지는 기억이 나요!”

 

“...뭔데.”

 

‘그 사채업자가 어린 저를 데려가려고 했었대요. 담보라고 했나? 어려운 이야기라서 잘 기억은 안 나요.“

 

아.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리타는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제야 모든 것이 들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던 것 같은 이유도, 호라이즌이 10년 전 이야기를 운운하며 굳이 그녀를 데려왔던 이유도, 그리고 그녀에게 익숙한 감정이 들었던 이유도, 모두 단 하나의 사실로 귀결되기 위한 요건들이었다.

 

자신이 10년 전에 데리고 오지 않았던 그 여자아이. 도박 중독자들에게서 구하지 못했던 그 여자 아이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소녀였다는 사실로 말이다.

 

그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리타는 정체 모를 감정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를 향한 죄책감이었고,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이었다.

 

뻔뻔하게도 그녀를 두고 가족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다니.

 

그렇게 여러 가지 감정이 버무려진 상태에서 리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리타는 내심 실낱 같은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혹시나 그녀가 그때의 자신을 용서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설령 이것이 위선이자 이기적인 생각에 불과할지라도 그녀는 이를 확인하고 싶었고, 그녀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그 사채업자들을...아직도 원망하고 있니...?”

 

“네, 당연하죠.”

 

돌아온 것은 즉답.

계속 실실 웃던 그녀는 어디로 갔는지, 눈앞에는 정색한 표정을 띠는 여성만이 앉아 있었다.

 

“그 인간들은 저와 제 가족의 인생을 망쳐버렸어요. 

아직도 아버지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이 기억나요. 

‘대시. 그 사채업자들을 기억해. 그 녀석들이 너와 우리를 이 꼴로 만들었어. 비록 우리는 죽지만, 네가 우리 대신 그 녀석들에게 복수를 해줘.’ 라면서요. 

제가 거리를 떠도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에요. 이렇게 떠돌아 다니다보면, 언젠가 그 인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그렇구나...”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서 돌아온 말은 조금 더 날카로운 비수처럼 리타의 가슴에 꽂혔다.

 

환상을 깨고 현실을 인식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출 수 없던 리타는 담배 한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언니 어디 가요?”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게. 조금 있다 들어올 테니까 자고 있어.”

 

“네, 언니!”

 

언제 정색했냐는 듯 다시 해맑게 웃고 있는 저 소녀는, 자신이 그녀가 그토록 증오해마지않는 원수임을 알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리타는 조용히 문밖을 나섰다.

 

 

 

스물셋 째날, 리타는 창고에서 한 종이 묶음을 꺼내 호라이즌에게 다가갔고, 그녀를 향해 종이 뭉치를 던져내었다.

 

“너,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뭘 말입니까?”

 

“대시가 10년 전의 그 꼬맹이였다는 거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죠, 휴먼?”

 

“그 미친 연놈들이랑 꼬맹이 이름이 이 종이에 그대로 적혀 있잖아. 안 보여?”

 

한동안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오갔다.

잠시 조용히 리타를 바라보던 호라이즌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하...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너 제정신이야? 네가 뭔데 멋대로 이런 짓을 해.”

 

“리타.”

 

“뭐.”

 

“당신이 그 소녀 일로 아직까지 괴로워한다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호라이즌이 꺼낸 것은 10년 전의 이야기.

 

그들은 함께 많은 날들을 지새워왔고, 많은 사건들을 경험해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은 타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유대감을 키워왔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동반자였고, 서로에 대한 이해자였다. 그렇기에 호라이즌이 얘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객관적인 시각에서의 진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리타에겐 그 사실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닥쳐.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저는 항상 고민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해야 그 고통을 떨쳐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던 중 그 소녀가 나타났습니다. 저는 보자마자 그 소녀가 10년 전의 그 아이임을 눈치챌 수 있었고...”

 

“닥치라고..”

 

“그래서 그녀를 데려왔습니다.

그녀와 같이 살며 이야기를 나누면, 당신의 그 고통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단지 그뿐, 그 외의 다른 일들은 모두 우연에 불과합니다.“

 

우연이라, 세상에는 참 형편 좋은 이야기들이 많다.

 

흔히들 필연이라 일컫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우연의 연속이라니. 

 

이것이 정말 우연이라면, 이런 우연을 내려준 신이 새삼 증오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리타에겐 이 의미 없는 논쟁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호라이즌에게 악의가 없었던 것도 알고 있고, 이 모든 일이 결국엔 모두 그녀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일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그녀에 대한 처분을 뒤로 미루었고, 당장 눈앞에 있던 종이들을 책상 서랍에 밀어 넣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서른 번째 날, 사건은 일어났다.

 

그날의 사무실은 왠지 무척이나 조용했다. 

 

리타와 호라이즌은 일 때문에 모두 외출해있었고, 사무실에 홀로 남아있던 대시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방의 이곳저곳을 뒤지던 참이었다.

 

그렇게 사무실을 뒤지던 도중, 그녀는 책상 서랍에 끼어있는 이상한 서류 뭉치를 발견했다.

 

 

 

 

“다녀왔어.”

 

일을 마치고 리타와 호라이즌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종이를 든 채 울고 있는 대시의 모습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오싹한 기분이 리타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

 

“언니...이거 뭐예요...?”

 

리타는 그녀가 흔들거리는 서류뭉치를 보았다.

 

일주일 전 그녀가 창고에서 꺼냈던, 빚쟁이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명단이었다.

 

어째서 그녀가 저것을 들고 있는 것일까.

 

“왜 여기에 제 부모님이랑 제 이름이 적혀 있어요...? 네...? 대답해봐요, 언니...”

 

“...”

 

“대답해봐요...대답해봐..! 대답해보라고!!!”

 

그녀가 괴성을 질렀다.

 

사람의 소리라고도 하기 힘든, 울부짖는 어린 소녀의 고성.

 

그녀는 품 안에서 커다란 낫을 꺼내들고 리타를 향해 그 칼날을 겨누었다.

 

“설마...당신이 그 사채업자들이었던 거야?”

 

최근 한 달 동안, 리타는 서서히 그녀가 끼고 있던 두터운 겉옷을 벗고 있던 중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대시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온 뒤로 온통 회색에 불과하던 리타의 세상이 밝은 색채로 물들게 됐으니까.

 

그녀가 온 뒤로, 그녀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버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품고 있는 가능성을 믿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그녀와 같은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그것들은 모두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다시 그 두터운 겉옷을 껴입었고,

 

“...그래.”

 

그녀의 살기 어린 질문에 무덤덤하게 대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