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하라편 통합 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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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까만 밤하늘에 먹구름이 하나, 둘 몰려든다.
비가 오려는 지도 모른다.
어느새 밤은 살금살금 새벽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어둠을 몰아낼 여명은 아득히 멀리 있었다.
해가 고개를 내밀었을 때, 이 땅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상황에 어울리는 의문은 아니었으나 주시윤은 그게 못내 궁금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려나.
거의 탈진하기 직전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그래서 더 선명히, 날붙이가 몸을 뚫고 들어오는 소름끼치는 이물감을 느꼈다.
"의미없는, 짓은. 그만하시죠."
"나도 고어 취미는 없거든? 그러니까 슬슬 피를 깨우는 게 어떨까."
"싫은데요."
이수연이 싱긋 웃었다. 예쁜 눈썹이 휘어졌다. 가학심으로 가득찬 새빨간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육중한 대검의 끄트머리 부분이 또 가슴께에 놓였다. 아주 조금, 겨우 일 미리가 될까 말까 한 깊이를 밀고 들어왔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세심히. 조금씩, 조금씩 파고든다. 정말 온 신경을 집중해야 느껴질 만큼. 날카로운 아픔을 더해온다.
아직은 살가죽 아래를 뚫고 들어온 정도에 불과했으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이대로 이수연이 손을 놓기만 해도 꼬챙이에 꿰인 살덩이가 될 것이다.
본능적으로 찾아오는 공포에 이빨이 딱딱거렸다.
그의 반응을 한껏 즐긴 이수연이 검을 되돌렸다.
이미 온 몸이 흠뻑 젖을만큼 흘렸지만, 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긴장으로 굳어져 참았던 거친 호흡이 터져나왔다.
아무리 각오한들, 주시윤은 아직 애송이였다. 죽음 앞에 초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미쳐버린 여자는 작업을 반복하며 주시윤이 보이는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일까. 그가 결국 공포 앞에 완전히 무너져 피의 힘을 깨울 때까지 계속할 작정인지도 모른다.
"허억. 헉. 미친년. 당신은 진짜 미친년이야."
"칭찬 고마워. 후배. 네 반응 진짜 재밌다."
스승의 진심 중 일부를 엿보았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무엇을 우선할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구원은 오지 않을 것이다.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아 세웠던 계획은 실패했다.
이 상황을 넘길 남은 방법은 딱 하나 뿐이었다. 주시윤은 그 수단을 선택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차라리 이 여자의 손에 죽으면 모를까.
스승의 검에 자신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자, 또 해볼까?"
다시 주시윤에게 지옥과도 같은 순간이 찾아오기 직전, 시끄러운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든 이수연이 발신자를 확인했다.
"진짜 타이밍 하고는."
그녀는 와락 얼굴을 찌푸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칼을 땅에 꽂은 채 휴대폰을 귀에 댔다.
목소리가 커서 통화 내용의 일부가 들릴 정도였다. 상대는 활달한 여자였다.
주시윤은 자신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기가 찼다.
다 잡아둔 물고기니 걱정없다는 모습이 아니꼬왔다.
물론 실제로 움직일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갈비뼈도 몇 대 나갔는지 숨쉬기도 불편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심했다.
이미 완전히 패배했다. 무력함을 한층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뭘 어떡해야 할까. 그저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고집스럽게 버틸 뿐이었다.
"미안. 통화 좀 하느라. 기다렸지?"
"그냥 갈 길 가셔도 됐는데."
숨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이 주시윤을 덮쳤다. 이수연이 명치 바로 아래를 걷어찼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커흑. 동그랗게 몸을 굽히자 다시 등 뒤에 발길질이 가해졌다. 부서질 듯 아팠다.
데굴데굴,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갔다.
조약돌을 차듯 주시윤을 굴린 이수연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포켓에서 궐련을 꺼내 불을 붙였다. 음. 쌍대로군. 모자랄 수도 있겠는데.
헐떡이던 주시윤이 낮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씨이, 발!"
"아, 듣기 좋아라. 우리 후배는 욕도 참 맛깔스럽게 잘해."
우르르릉. 지진이 일었다. 주시윤이 낮게 비명을 내질렀다. 저택도 덩달아 신음했다.
여진으로 남은 흔들림마저 뚝 멎을 즈음에, 꽈릉. 하고 땅이 울부짖는 소리에 화답하듯 하늘도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유롭게 마약 한 대를 다 태운 이수연이 다시 정원으로 내려왔다.
꽁초를 튕긴 그녀는 엎어진 주시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진동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커흑, 흐으. 흐. 하아...그을, 쎄요. 걍 아파 죽겠는데요."
"봉인이 깨졌다는 신호야. 몇 개정도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규모라면 셋에서 네번째 정도겠네.
곧 뱀이 일어날 수도 있단 얘기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스승님과, 후우. 미나 양이 실패할 리가 없으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후배. 그러니까 이렇게 일을 벌인거지.
아무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결판이 날 때 까지 삼십분 정도 걸리려나?
그래서 말인데. 새끼 뱀. 내기 하나 할까."
"집어치시죠...판돈으로 걸 것도 없습니다."
"네 의지를 반영해주겠다고 말했던 적 없어. 그냥 듣기만 해.
만약 다음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년이 어디에 있을지 난 그게 궁금하거든.
우리 스승은 영악한 여자니까. 지금쯤 내가 널 몇 번은 아작내고도 남는다는 걸 아주 잘 알텐데 말야.
과연 이 자리에 나타날지 너도 궁금하지 않아?"
"내, 기의 가치가 없군요. 스승님은. 헉. 오시지 않을 겁니다."
"희망이라도 가져 보는게 어때? 넌 나와는 다르다면서. 버림받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럼 우리의 잘난 스승이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어."
"콜록, 거 되게 신경쓰시는군요. 그렇게 제가 부러우십니까?"
이수연이 으르렁대며 주시윤의 복부를 걷어찼다.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신물밖에 올라오지 않았다.
거칠게 머리채를 붙잡혔다. 이글거리는 두 눈이 그를 노려보았다. 주시윤은 지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도 한 구석으로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으나 로자리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스승은, 전전긍긍하면서도 막상 결심하고 나면 기계처럼 해야 할 일을 해냈다.
주시윤이 짐작조차 하지 못할 만큼 오랜 시간 그래왔을 것이다.
그러나 로자리아는 기계와는 달리 감정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을 턱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을까.
그렇기에, 한없이 미워하면서도 끝에 가서는 그녀를 용서하려는 마음이 들고 말았다.
"아가리 좀 조심해. 네 꼴을 봐. 버림받지 않았단 말이 우습잖아."
"허억, 학. 학. 개소리 집어치세요. 스승님이 오지 않아도, 저는, 당신처럼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해하니까요.
이 자리도, 제가 선택한겁니다."
"뭐?"
때문에, 자신보다 그녀를 먼저 만났고, 더 오래 함께 있었으면서도 스승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의 마음에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물론 이수연에게도 사연이 있겠지. 그게 얼마나 기구하던간에, 주시윤이 알 바는 아니었다.
"후욱, 하아. 내 의지로 왔다고. 약쟁이년아. 스승님이, 후욱. 쓰레기처럼. 버린. 여자를 비웃어주고 싶었거든."
"이 씹새끼가 진짜."
짝, 뺨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우악스럽게 몸을 뒤집혔다.
하늘을 보고 누워, 피가 섞인 기침을 토했다. 고통스러웠으나 작은 승리감을 느꼈다.
이수연은 신경질적으로 마지막 까치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의 도발에 과할 정도로 반응하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약 기운이라도 밀어넣지 않으면, 침착해지지 않으면 주시윤을 당장 죽여버릴 것 같았다.
"거기까지만 하지 그래."
터지기 직전인 분위기에, 목소리 하나가 새로 끼어들었다. 두 사람 모두 잘 아는 목소리였다.
"우리 귀중한 사원을 더 괴롭히면 곤란해."
하.
이수연은 연기와 함께 깊게 한숨을 내뿜었다. 그리곤 번개처럼 주시윤의 뒷목을 가격했다. 찢어질듯 부릅떠진 눈이 스르르 감겼다.
후두둑. 떨어져 내린 빗방울이 어깨를 적셨다. 건방진 후배가 남긴 유일한 상처가 따끔했다.
쏴아아아. 밤을 더욱 어둡게 물들이던 구름들은 기어이 소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연기를 훅 뿜어올린 다음 손으로 탁 털었다. 겨우 세 모금 빨았다. 장초였는데. 아쉽네.
땅을 뒹구는 꽁초는 금방 물기를 머금어 젖어들었다. 그녀는 우울한 눈초리로 그 꼴을 잠시 노려보았다.
로자리아가 오지 않을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서프라이즈 좋아하잖아?"
"아닌데. 너도 잘 알다시피. 난 돌직구를 좋아해."
남자는 미끄러지듯 정원으로 걸어들어왔다. 코핀 컴퍼니 부사장. 나유빈이었다.
"그랬었나? 취향이 바뀌었나 싶었지. 세월이 야속하긴 해. 예뻐졌다곤 못 말하겠다. 수연아."
"이왕이면 원숙해졌다고 칭찬하지 그러니."
둘은 잠시 침묵했다. 재회의 형태가 그리 아름답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알았다.
그럼에도, 막상 맞닥뜨리자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나 현실은 상상보다 지독했다. 그래서 서로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만보았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시절의, 반짝였던 모습들은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이수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온통 핏빛으로 얼룩졌던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가슴 한 구석이 아렸다. 잊고 있었던 감정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무어라고 불러야 했더라. 그리움, 애달픔. 혹은 다른 무언가. 한 단어로 시원히 정의할 수 없는 그것을, 꾹 눌러담았다.
나유빈을 꽉 끌어안고 싶었다. 동시에 이 자리에서 당장 사라지고 싶었다.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나유빈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어조였으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둘 다 쉽게 눈치챌 만큼.
"덕담이나 주고받을 장소와 분위기가 아니잖아. 시윤 군을 데려가도 될까?"
"안 된다면 어쩔건데."
"글쎄. 간만에 드잡이질이라도 할까. 네가 녹이 좀 슬었는지 볼겸."
"양 팔 전부 달고 있을 때도 내가 다 이겼던 거 기억하나 모르겠네."
"강산이 두 번은 바뀌었어. 수연아. 네가 아직도 관리국의 최고 에이스인지 시험해볼래?"
피식 웃은 그녀는 검을 땅에 꽂았다.
"관두자. 새끼 뱀이야 힘 조절이 됐지만, 넌 살살 칠 자신이 없거든."
비록 다른 선택을 했으나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그와 왠만해서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주시윤을 몰아넣을 상황은 앞으로도 더 준비되어 있었다.
"스승님이 널 보냈니?"
"그래.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지."
"하. 썅년이긴 해. 그치?"
"어허. 수연아. 그래도 스승님이야."
씁쓸하게 웃는 나유빈의 얼굴을 보며 포켓을 더듬었다.
아. 그랬지. 약이 없었다. 깨닫자 약기운이 남아 있음에도 익숙한 두통이 찾아왔다.
"한 대 줄까?"
"아니. 됐어."
"그래. 아무튼 싸울 마음이 없다면 고마운 일이네. 물러나 주겠어?"
양 손을 쫙 펴 비무장 상태임을 보인 나유빈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수연은 멈춰 선 자신을 스쳐 지나가기 직전에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곤 자기도 모르게 흠칫, 하고 떨었다. 의수. 강철의 느낌은 차가웠다.
"왜 이래."
"나유빈."
"아. 이제야 이름을 불러주는 거야?"
다시 만나면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면 좋을까. 꽤 여러번 생각했었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부터 던질 사이는 아니었다. 둘이 걷는 길은 너무나도 달라졌으니까.
입술을 우물거렸다. 떠다니는 말들이 너무 많았다. 하나를 골라잡았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그리고 이미 한 번 꺼냈던 적이 있는 질문이었다.
"그 여자를, 용서했니?"
과거의 나유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절망, 같은 배신감을 느꼈음에도 함께 떠나자는 그녀의 애원에 나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까지 떠나면, 스승님은 혼자 남아.
이수연이 바랬던 답이 아니었다.
"아니."
그러나, 이 자리에 선 남자는 그녀의 질문에 똑바로 답했다.
"단 한번도 용서한 적 없어. 스승님이 그래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지."
움찔, 하고 이수연은 몸을 떨었다.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진 새파란 눈동자 속에는 펄펄 끓어오르는 용암같은 분노가 숨어있었다.
또박또박, 나유빈은 진심을 꺼내놓았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거야. 그 배신자를."
"그럼, 늦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겠는데."
"아니."
나유빈이 팔을 움직여 이수연의 손을 떼어냈다. 허공을 휘젓던 그녀의 손이 힘없이 늘어졌다.
그대로 걸어가 주시윤의 앞에 섰다. 몸을 굽혀 상태를 확인했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다시 일어나 이수연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스승님은 죄인이야. 하지만 나와 너도 다를바없지. 모두 죄를 짓고 있어. 알아, 수연아? 우리에겐 이제 찌든 피 냄새가 나.
순수한 마음으로 싸웠던 그 시절과 다르지. 한없이 떨어져 가고 있어."
멀쩡한 손을 들어보였다. 손바닥에 이내 빗물이 고였다. 손금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따라 눈동자가 움직였다.
"스승님에게는 나름의 속죄가 준비되어 있겠지. 치뤄야 할 죗값은 각자에게 넘치도록 있어.
마주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유예해두었을 뿐이야. 그러니. 당장 복수를 운운하고 싶지 않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난, 난 못 해."
"수연아."
"그 지옥에서 나보다 더 상처입은건 너야! 더, 더 분노해야 하는 것도,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도 너라고! 이 병신아!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격정적으로 감정을 터뜨리는 이수연에게 나유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직도 우리가 바랬던 것을 위해 싸우고 있어."
화를 참지 못한 이수연이 발걸음을 떼었다. 빗물이 젖은 볼을 타고 흘러내려 흐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나유빈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는 대신, 거절의 의미를 담아 강철 의수를 내밀었다. 가슴 한구석이 찌르는 듯 아팠으나 무시했다.
차가운 금속으로 다시금 그녀를 거부함으로써 그 자리에 못박아버렸다.
"무엇도, 그것보다 우선시 될 수 없어."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쳤다. 파랑과 빨강이 만나 뒤섞였다. 어느 쪽이나 잔뜩 닳아버린 눈이었다.
"너는 어떠니?"
증오와 분노로 타오르는 지옥불 속을 걸었으나, 아직도 이수연은 인류의 편이었다.
나유빈이 내린 결론과 그녀가 택한 것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피해자인 자신들이 감내해야 하는 상처가 괴로웠다.
온갖 말들이 멤돌았다. 감정을 더 열렬히 토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쏟아낼 감정의 홍수를 받아낼 사람은 나유빈이 아니었다. 여기에 없었다. 한층 증오가 끓어올랐다.
"...돌아가겠어, 오늘은."
새빨간 두 눈을 다시 불태우며, 이수연은 비가 쏟아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작별인사는 남기지 않았다. 나유빈도 붙잡지 않았다. 또 마주칠테니까.
나유빈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그 날의 대화를 또렷이 기억한다.
첫 만남의 자리. 막 교육을 마친 새파란 애송이였던 둘에게,
그들보다도 더 어린 외모의 전대장은 나른한 표정으로 물었다.
흐응. 새로 온 핏덩이들이구나. 보자, 너희는 무얼 위해 싸우느냐?
누구보다 앞서서, 열정적으로 달려나갔던 소녀는 자랑스럽게 외쳤었다.
세계 평화!
가장 뒤에 머물렀으나, 누구보다 이상을 소중히 여겼던 소년은 쑥스럽게 속삭였다.
세계 평화요.
둘의 공통된 대답을 들은 여자는 박수까지 치며 깔깔 웃었다.
한참을 웃은 그녀는 새빨개진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어디 따라와 보거라. 할 수 있나 보자꾸나.
수없이 많은 전장을 거쳤다. 무수한 승리를 쌓았다.
함께 남긴 궤적들은 고달팠지만 소중했다. 한 걸음씩, 소원에 근접해갔다. 그런 기억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핏빛의 파도에 쓸려 사라졌다.
유치하지만 찬란하게 정의를 부르짖었던 그 시절의 소년과 소녀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수줍게 품었던 이상의 한 줌만을 겨우 건져올렸다. 마모되어버린 가슴에 남은 것은 오직 대의뿐이었다.
이수연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나유빈도, 그녀도 알았다.
두 사람은 파도에 쓸려나간 잔해를 붙잡고 있었다. 형태가 다르더라도, 폭풍 속에서 희미한 빛을 좇고 있었다.
차가운 빗방울은, 그보다 더 차가운 강철 의수를 타고 떨어져 내렸다. 주먹을 꽉 쥐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로자리아 르 프리데를 증오했다.
지긋지긋한 환상통에 시달릴때면, 이 여정이 너무도 고되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해묵은 분노가 냉철하려 애쓰는 정신을 헤집어 놓았다.
한편으로, 사무치는 배신을 겪었음에도, 그걸 감내하면서까지. 혼자 내버려두고 싶지 않을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제멋대로에 이기적인, 이유가 무엇이었건 맡겼던 마음을 배신한 쓰레기같은 여자였다.
그러나 그가 품었던 꿈을 이끌어주었던,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선사했던 그녀를 온전히 증오의 대상으로 놓을 수가 없었다.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녀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줄타기를 반복하는 감정 중 어느 쪽이 우위에 서건, 손을 들어줄 수도 없었다.
절대 쉬이 잘라내선 안되었던, 타인의 소중한 감정들을, 인생들을 잘라내왔다. 자신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맞이할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로자리아는 꼭 필요한 퍼즐조각이었다.
모든 감정의 정산은, 나중의 일이다.
삑삑거리는 호출음이 그의 정신을 되돌렸다. 코핀함에서 보내는 신호였다. 그래. 작전 중이었지.
부상을 입은 주시윤도 챙기고, 유미나와 로지라아가 돌입한 봉인지의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시윤 군. 들립니까?"
가볍게 뺨을 두들겨보았으나 답이 없었다.
혼절한 그를 들쳐멨다. 오늘 주시윤은 용혈의 힘을 깨우지 않았다. 의외였다.
관리자가 그린 그림의 실행자로서, 나유빈은 변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변수는 확정되어 있지 않았기에 변수라 불리었다. 그가 어떤 상황을 가정하든 판을 찢고 튀어나갈 수 있는 것들.
주시윤도 그 중 하나였다. 거기다 나유빈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게임판에 올려진 말이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통제할 수 없는 기물.
그가 가진 변종 클리포트 인자는 언젠가는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것이다.
허나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없었다. 주시윤은 로자리아를 흔드는 거센 바람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용혈의 본질을 드러냈다면 오늘 손수 폐기할 생각이었다.
용혈의 잠재력이 어떻던간에, 가치판단에 있어 주시윤은 결코 로자리아보다 위에 놓일 수 없었으니까.
어찌됐든 오늘의 주시윤은 운이 좋았다. 그의 고집이 목숨을 살렸다.
물끄러미 의식을 잃은 주시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로자리아. 죄 많은 그 여자는 이 남자에게, 그와 이수연에게 남긴 흉터와는 또다른 상처를 남겼다.
주시윤에게도 나름의 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유빈과 이수연이 내릴 답과는 다를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모두가 만족하는 결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없이 떨어진. 흉악한 죄인들이다.
우리에겐 행복한 끝을 맞이할 자격이 없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흘려온 피의 무게는 무시할 양이 아니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각자의 죗값을 형량할 것이다.
인류의 해피엔딩을 위해 싸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피날레가 울려퍼지고 커튼콜이 내리는 때에, 낙원에 우리의 자리는 마련되어선 안 되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 만들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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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수연 전투신을 기대했다면 미?안해? 사실 그런 건 없어...
거의 일주일을 붙잡고 고쳤는데도 영 불만족스럽네 더 늦기엔 좀 그래서 들고왔는데 먹을만한 맛이 잘 났는지 몰루겠어
대략 네 편 남은거 같은데 분량을 이쯤으로 줄이면 아마 8월 중순 전후로 끝낼 수 있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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