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숨겨도 하필 그런 곳에 숨기냐?”
“흥.”
로이가 화를 내자 엘리자베스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차갑게 고갤 돌렸다.
아니, 센서를 가슴 사이에 숨기다니. 스파이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을 법한 발상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여자가 이제는 삐쳐서 이쪽은 쳐다도 안 본다.
어째선지 상처밖에 남지 않은, 사실상 피로스의 승리였다.
한동안 어떻게 보스를 달랠까 고민하던 로이는 장고 끝에 그녀의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아프잖아요! 물벼루… 욱.”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종래엔 눈치를 보듯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다. 하지만 얼굴을 붙잡힌 그녀는 로이를 뿌리치지 못한 채, 끄트머리에서 소심하게 톡 쏘아붙였다. 그녀도 양심에 찔리긴 한 모양이었다.
“… 뭔데요. 할 말 있으시면 빨리 하시던가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로이의 모습에, 그녀도 각오를 다지고 이쪽을 똑바로 마주한다.
“그러니까.”
로이가 입술을 달싹인다.
이건 좀 억지인가?
찰싹 달라붙은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는 정당한 내기의 승자였고, 승자의 권리를 휘두를 자격이 있었다. 피로스의 승리라고 했지만, 승리는 승리인 것이다.
“내기 내용, 기억하지? 그러니까 명령이야. 화 좀 풀어, 이 삐순이야.”
“삐, 삐순이요?”
“그럼 네가 삐순이 아니면 뭐냐? 뭐만 하면 삐치고, 화내고, 난폭해지고.”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붉혔다. 화가 나서 그런지 부끄러워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한결 풀어진 모습에 로이의 긴장도 함께 풀어졌다. 그는 묘하게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내기는 유효한 거 맞지?”
“귀, 귀족은 한 입으로 두 말 안 합니다.”
“진짜? 내가 볼 땐 아닌 거 같은데….”
허공을 유영하던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로이의 팔뚝에 우뚝 멈춰 선다. 그녀의 나이프가 스쳐서 난 상처가, 모든 게 끝난 지금에 와서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챈 로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목 놓아 웃었다.
“푸하핫! 너 진짜 웃긴다.”
고작 이런 생채기 가지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그간 보인 이미지와 대비되어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웠다.
“우, 웃지 마세요! 진짜 무심코 힘을 팍 담아서 던졌단 말이에요! 제대로 맞았으면 이 정도 상처로 안 끝났어요!”
“뭐, 가해자가 그리 말해주니까 또 고맙네. 나름대로 걱정해주는 거잖아?”
평소 맞을 땐 화내고 억울하다며 징징거리더니 오늘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능글맞아진 로이의 모습에 그녀가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각오하세요, 물벼룩. 오늘 하루만 지나면….”
“아! 하나 더. 날 물벼룩이라 부르지 않기.”
로이의 검지가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난 물벼룩이 아니라 로이 버넷이야.”
“… 좋아요. 오늘 하루는 그렇게 불러드리죠.”
그러니까, 라고 운을 뗀 엘리자베스가 잠시 주먹을 턱에 댄 채 멈칫했다.
반사적으로 버넷 경이라고 부르려던 그녀는 과연 이 호칭을 써도 되는가 망설였다.
답지 않게 한참이나 고민한 후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버넷… 경은 좀 그렇고. 타협해서 로이라고 불러드리죠.”
“이야아. 괜찮은데? 이래야 이긴 보람이 있지.”
필립 신부를 제외하면 꽤 오랫동안 불리지 않은 호칭에 묘한 간지러움을 느낀 로이가 괜히 자신의 콧잔등을 긁었다.
뭔가 다사다난했던 거 같지만, 아직 하루는 길다. 호칭에 익숙해질 시간 또한 아직 충분하단 뜻이다.
로이는 중천에 뜬 태양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마침 카페테리아가 근처에 있는 거 같은데. 네 의견은 어때?”
“찬성이에요. 저도 릴렉스 할 티타임이 필요한 참이었어요.”
다음 목적지는 어트랙션이 아닌 음식점이 잔뜩 모인 카페테리아였다. 약간의 트러블은 있었으나 둘은 비교적 가까워진 모습으로 나란히 걸었다. 어느새 닿을 듯 말듯한 묘한 거리감이 익숙해진 둘이었다.
“먹고 싶은 건 있어?”
“글쎄요. 딱히 떠오르는 건 없지만, 가급적이면 가벼운 걸로 부탁드리죠.”
아직도 G익스의 후유증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엘리자베스가 최대한 얌전한 걸 요구하자 로이도 팜플렛을 펼친 뒤 고민에 빠졌다.
“어디 보자. 여기 음식점이 생각보다 많은데?”
중식부터 시작해서 양식, 한식, 일식 전부 가리지 않고 한 집씩은 마련되어 있었다. 로이에겐 익숙한 패스트푸드 체인점과 각종 카페도 있었는데, 전부 거르고 거르다보니 가장 무난한 게 화덕 피자였다.
‘기억해둬, 양아치. 여자의 호불호 맞추기가 어려울 땐 무조건 파스타야. 파스타면 평타는 친다고.’
잘은 모르겠지만, 여성과 데이트에 별다른 조언을 해주지 못한 나머지 셋과 달리 매운맛 중독자는 데이트 때 참고할 온갖 조언을 해주었다. 파스타도 그 중 하나였다.
“화덕 피자에 파스타는 어때?”
비록 매운맛 중독자의 조언을 대부분 지키지 못했지만, 그래도 하나 정돈 들어주자며 로이가 넌지시 제안했다.
“흠. 나쁘지 않네요. 그럼 그쪽으로 갈까요?”
“어, 어라?”
“왜 그러시죠?”
“아, 아무것도 아냐!”
엘리자베스가 수상쩍은 시선을 보내지만, 로이는 미처 답할 여유가 없었다.
‘효, 효과가 있었어?’
로이는 새삼 그녀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걸 후회하며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뭔가 위화감을 느낀 건, 둘이 식당 구역인 카페테리아에 들어선 후, 주변 손님들의 모습이 점차 줄어드는 걸 눈치 채면서였다.
“야, 홍차 폭탄.”
“눈치 채신 모양이네요.”
한창 점심시간인데도 점점 줄어드는 사람과 소음. 의심이 피어날 수밖에 상황 속에서 떠오르는, 줄곧 둘을 괴롭혀온 한 가지 요소.
“또 이상한 이벤트니 뭐니 하는 거 아냐?”
합리적인 의심에 엘리자베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기 힘드네요. 슬슬 이 티켓을 선물한 저의가 뭔지 따지고 싶은 참이었어요.”
어쩌면, 원수와 친해지는 건 꽤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바이올렛 가든에 어서 오십쇼.”
수상할 정도로 조용한 식당가.
로이의 제안을 따라 둘은 대놓고 손님을 유혹하는 화려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고급 레스토랑을 지나쳐 패스트푸드점을 방문했다. 평범한 패스트푸드점이라면 잠시 들렸다가 나온다 한들 이상할 게 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 당첨이구만.”
단순히 확인 차 들렸을 뿐인데. 아니나 다를까. 귀찮은 이벤트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너희 대체 정체가 뭐냐?”
“원래 이벤트란 게 이토록 강제적인 거였나요? 설명이 필요한데요.”
“아하하.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집사처럼 차려입은 노령의 남성이 정중히 허리를 굽힌다.
“이번 이벤트는 여러분의 이동 루트를 예상하여, 미리 이곳 식당가의 모든 내부 인테리어를 교체해놓았죠. 어느 가게를 들어가든 전부 이곳과 똑같은 상황이었을 겁니다.”
집사 같은 노인의 설명에 둘의 시선이 교차한다.
고작 티켓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아 붓는 어드민 랜드의 대응은 커플 이용권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과한 느낌이 있다.
로이는 고급 레스토랑을 방불케 하는 내부 인테리어를 훑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즉 다른 데로 가도 다 여기랑 똑같다는 거지?”
“다른 구역으로 가면 어떻게 되나요?”
“글쎄요?”
집사는 대답 대신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락이라도 준비해올 걸 그랬네요.”
“동감이야. 나도 편의점에서 뭐라도 챙길 걸 그랬다.”
하지만 둘은 도시락을 챙기지 않았고,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긴 요원해 보였다.
결국, 둘은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뭐, 좋아. 고작 식사잖아? 괜찮겠지.”
“확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군요.”
“두 분 모두 걱정 마시길. 저희 바이올렛 가든은 두 분을 위한 특별한 코스 요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겁니다.”
무릇 세상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란 명언이 있다.
두 사람은 집사의 안내를 따라 레스토랑 정 가운데에 배치된 테이블로 향했다.
“꽤나 본격적이구만.”
고급스러운 건 인테리어뿐이 아녔다.
테이블보부터 시작해 의자, 그리고 식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비싸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특히 고급스런 식기와 촛대는 평소 이런 곳과 도통 연이 없었던 로이가 절로 주눅이 들 정도였다.
오직 둘만을 위한 테이블엔 실링 왁스 스탬프로 찍힌 고급스런 편지 봉투가 메뉴판 대신 놓여 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짐짓 자연스런 손짓으로 봉투를 개봉했다.
“메뉴판이네요.”
“예. 점심에 부담스럽지 않게 준비해보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서로 말을 주고받는 집사와 엘리자베스를 구경하며, 로이는 어색한 손길로 냅킨을 허벅지에 덮었다.
접시 위에 놓인 봉투는 로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개봉한 봉투에서 나온 메뉴판을 읽어도, 그가 알아낸 건 메인 요리가 오리고기란 것뿐이었다.
집사 뒤로 웨이터 복장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폭발적인 근육을 갖춘 떡대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식전 음료와 간단한 전채 요리입니다.”
“어, 이게?”
대충 샐러드가 나오겠거니 했던 로이는 생각지 못한 음식의 모양새에 당황했다. 급사들이 내온 요리는 샐러드보단 과자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녹색 음료는 딱 봐도 맛이 없게 생겼다.
“카나페군요.”
“카나페?”
엘리자베스가 가볍게 카나페를 한 입 베어서 입에 문 뒤 설명을 이었다.
“기본적인 전채요리 중 하나예요. 오르되브르는 들어보셨죠?”
“몰라. 그런 교양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왔으니까.”
로이는 엘리자베스를 흉내 내 손으로 카나페를 집어왔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손으로 먹어도 되나 되게 눈치 보여.”
“후훗. 저희가 빵을 썰어서 포크로 찍어 먹진 않잖아요?”
“그렇긴 하지.”
로이가 답답한 듯 목 주변 옷깃을 잡아당겼다.
“나 테이블매너 같은 건 아예 모르는데. 괜찮겠냐?”
“제가 가르쳐드리죠. 별로 어려울 것도 없네요.”
“그… 아니, 됐다.”
뭔가 더 말하고 싶으나, 말을 아끼는 모습에 엘리자베스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진 않으나, 명백히 의식하고 있는 급사들과 집사. 그리고 그들이 신경 쓰이는 듯 좀처럼 편치 못한 로이의 태도.
“하아. 진짜 손이 많이 가는 남자네요.”
냅킨으로 가볍게 입가를 닦아낸 엘리자베스가 손을 들자 대기 중이던 집사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제가 사교 모임에 온 건 아니잖아요. 그죠?”
“그, 그렇지요?”
집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부디 사용인분들께 자리를 좀 비워달라고 해주실 수 있나요? 친애하는 분과의 식사는 오붓하게 단 둘이서 즐기고 싶거든요.”
“아아. 저희가 뒤에 대기하고 있는 게 불편하셨나보군요. 죄송합니다. 그저 재현율에 신경 쓰다 보니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양입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집사가 짝짝 박수를 치자 급사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절도 있게 등을 돌려 나란히 홀을 비우기 시작했다.
저들의 행렬을 지켜보던 엘리자베스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그럼, 부디 오붓한 시간되시길.”
모두가 빠져나간 걸 확인한 집사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허리를 굽힌 뒤 물러났다.
“푸하!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인가요?”
오죽 답답했는지 이미 충분히 시원한대도 손부채질을 하던 로이가 고갤 끄덕였다.
“난 코핀에서 연말 파티를 할 때도 현장에 없었잖냐. 뭐, 있었어도 구석에 숨어서 음식이나 축내고 있었을 거 같지만.”
당시 프리드웬 기관의 긴급 호출을 받아 파티에 참석할 수 없었던 로이가 턱을 괸 채 카나페를 집어 한 입 콱 베어 물었다.
“아으. 내 싸구려 입맛엔 잘 안 맞네, 이거.”
“그만큼 긴급 상황이었어요. 당신이 없었으면 폭주한 아티팩트와 마왕의 파편이 공명해 무슨 참사가 일어났을지 모르죠.”
“알아. 내가 뭐라고 했냐? 그냥 그렇다는 거지. 이미 네 명령대로 코핀에 잠입했을 때부터 예견된 미래였어.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할 지경이라고.”
로이는 푸념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표정만은 웃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불편한 표정으로 카나페와 함께 서빙 된 루꼴라에이드를 한 모금 들이켰다. 녹즙 같은 음료를 마시는 모습은 우아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로이와 다르게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에이드를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혹시 그만두고 싶진 않으신가요?”
“갑자기 또 무슨 소리냐, 넌?”
로이가 심드렁한 시선으로 녹즙을 쳐다보다 컵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나는 말이지.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로이?”
굳게 닫힌 입술이 삐뚤어지고, 혀를 차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뭐, 그냥 그런 이야기야. 아무리 좋은 직장과,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사람은 쉽게 안 바뀌더라고.”
누구 말마따나, 학식도 품위도 미래도 없는 남자니까.
“….”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다가가고자 하는 목표는 멀기만 하다. 인생에 녹아든 버릇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진짜….”
저 멀리, 트레이에 음식을 싣고 오는 집사를 바라보며 로이가 무미건조하게 웃었다.
“이런 곳은 완전히 쥐약이라니깐.”
그래도 고기를 마다할 순 없지. 로이는 어정쩡한 자세로 나이프와 포크를 쥐었다.
“아직 메인 요리는 나오지도 않았어요.”
“그, 그러냐?”
제법 도전적이었던 자세는, 엘리자베스의 지적과 동시에 침몰해버렸지만.
잠시 후.
“으아. 진짜 밥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모르겠네.”
“뭘 잘난 듯이 말씀하시나요. 결국, 전부 제가 먹여드린 거잖아요.”
차마 그것 때문이라곤 말대꾸하지 못하는 로이였다. 고기 하나 제대로 썰지 못하고 낑낑대는 모습에 참다못한 그녀가 자리서 일어나 등 뒤에서 그의 팔을 감싸며 직접 테이블매너를 주입시켰으니까.
“…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샅샅이 보고해달라고 했는데.”
자칭 제자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로이는 아무래도 오늘 일은 알려주긴 힘들 거 같다며 관련 기억을 싹 포맷했다.
“아무튼, 배도 채웠겠다. 다음엔 뭘 하고 싶냐?”
“기왕이면 서바이벌 룸처럼 때려 부술 수 있는 걸로 부탁드리죠.”
로이가 죽은 눈으로 팜플렛을 살폈다.
다행히 그런 시설은 없었다. 끽해야 범퍼카 정도?
오락 시설이 밀집된 곳에 가면 또 모르겠지만, 이런 곳은 대부분 추가 이용료를 따로 지불해야 했다. 커플 이용권이면 또 무료로 즐길 수 있을 거 같지만, 귀찮은 일은 사양이다.
“아무래도 네가 원하는 시설은 없는 거 같은데. 그냥 가장 가까운 데로 가지?”
“… 어쩔 수 없네요.”
정말로 아쉬움이 가득한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식후인 만큼 거칠지 않으면서도 차분히 즐길 수 있는 어트랙션을 찾았다.
하지만 어드민 랜드의 구조는 쉬이 로이의 소원을 이뤄주지 않았다.
“하필 여기서 제일 가까운 게 자이로드롭인가.”
그 밖에도 바이킹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절규 머신들이 잔뜩 모인 구역이었다.
과연 식후 어트랙션으로 옳은지 의심스러운 순서였지만, 로이는 순순히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해당 구역으로 향했다.
대신 산책을 겸해 먹은 걸 소화 시키고자 일부러 조금 돌아가는 길을 이용했다.
“식사는 어땠어?”
“글쎄요. 요리사의 실력은 의문이나 식재료는 비싸고 신선한 것들이었어요. 식재료가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고작 커플 이용권을 사용한 고객이라고 해서 미쉐린 가이드에 들어갈 법한 셰프를 고용하는 것도 우습죠.”
“그, 그러냐?”
비록 정신이 없긴 했어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맛에 대한 기억은 썩 나쁘지 않았던 로이는 당황했다. 물론, 그가 좋게 평가한 맛은 고기랑 수프 같은 익숙한 메뉴에 한정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평가는 신랄했다.
“그래도 환경을 비롯해 이런저런 사안들을 고려해서 종합해보자면, 썩 나쁘진 않다고 할 수 있겠네요. 노력상 정도는 줄 수 있겠어요.”
진짜 빈말이라는 건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한 건 전문 요리사의 솜씨는 결코 아녔어요. 마치 유명 셰프의 레시피를 어설프게 흉내를 낸 느낌이에요. 그 수상한 노인이나 급사가 보인 매너들도 어딘가 엉성한 구석이 있었고요.”
심지어 나름의 타당한 이유도 있었다. 로이는 신기한 듯이 그녈 쳐다봤다.
“난 전혀 몰랐는데. 급사도 그냥 ‘몸이 좀 좋네. 운동하나?’ 정도였지.”
“저희 교육이 그만큼 미비했던 거겠죠.”
드물게, 그녀가 로이를 책망하지 않았다. 대신 잔소리가 이어졌다.
“이건 단순한 참견이 아니라 충고에요. 기회가 되면 새디어스 아저ㅆ… 아니, 모건한테서 눈썰미를 기르도록 하세요. 빼어난 눈썰미와 직감은 당신의 생명과 직결되니까요.”
“뭐, 노력은 해볼게. 근데 기대는 마라? 내 눈썰미라고 해봐야 도박장에서 속임수를 알아차리는 정도가 한계니까.”
“아뇨, 당신은 해낼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버넷 경의 손자이자, 저희 프리드웬 기관의 요원이니까요.”
“… 거 되게 부담주네.”
익숙지 않은 올려치기에 로이가 시큰해진 코끝을 훌쩍였다.
“설마 쑥스러우신가요?”
“아니거든!”
엘리자베스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쳐드리죠. 저는 자비심이 아주 많으니까요.”
“됐고! 점심도 지났겠다. 슬슬 사람 몰릴 시간이니까 빨리 가자!”
이젠 재수 없으면 어트랙션 하나 타는데도 한참 기다려야한다며 로이가 걸음을 재촉했다. 못 이기는 척 그의 손길에 끌려가면서도, 엘리자베스는 의심어린 시선을 뒤로 향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날카로운 시선 끝에는 이제 잔영밖에 보이지 않는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뭔가, 수상하네요.’
부디 예감은 예감에서 그치길.
링크 다는 거 은근히 귀찮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