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나는 챔피언이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나이에 복싱에 투신했고몰려오는 배고픔을 참아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운이 좋게도 몇 번이고 승리를 이어나가며 신인왕 자리에 올라섰고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프로 복싱 챔피언 결정전의 도전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난다. 20xx년 07월 16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들떠 오르는 고양감관장님의 진심어린 격려와 숨죽여 지켜보는 누나까지… 몇 번이고 정타를 허용하며 다운을 빼앗겼지만꿋꿋이 자세를 잡고 일어나 경기를 계속해서 질질 끌고 갔고 12라운드까지 가는 혈투 끝에 결국 한국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관중들의 환호성과 어마어마한 상금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귀한 가장으로서의 성취감심판이 내 오른손을 들고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져나갔을 때 나는 여태껏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한국 챔피언이 된 뒤로는 옆 나라 일본으로 향했다동양 챔피언 결정전의 도전자 자리를 얻기 위한 빌드업으로서 진행했던 모 일본 선수와의 시합에서나는 내 운명을 바꾸게 된 10초의 순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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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노련미가 돋보이는 선수였다. 상대방을 다운시켜서 10카운트 동안 회복할 시간을 주기 보다는 지속적으로 정타를 맞추며 피로를 누적시키고 포인트를 따는 식으로 싸웠고,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경기는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순식간에 체력이 빠졌고 자연스레 가드도 내려가기 시작했다. 8라운드쯤이었나몇 번 잽을 날려 견제를 한 이후 잠시 동안 가드가 내려간 순간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갑작스럽게 그 선수가 태세를 전환했다순식간에 튀어나오는 소나기 같은 연타이전까지의 패턴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 순간 어찌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고 안면과 몸통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펀치들 속에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 2, 3… 무정하게 울리는 카운트 소리만이 귓가를 스쳐지나가듯 흘러갔다그 순간 갑작스럽게 가슴속에서 뜨거운 통증이 피어났다마치 심장이 불타는 듯한 느낌심장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에너지가 온 몸으로 퍼져나갔고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줄과는 별도로 몸이 알아서 파이트 자세를 잡고 있었다경기속행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심판이 신호를 주고공이 울리자 이번에는 내 몸이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더킹대시… 라고 말하기에는 뛰어드는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다일반적인 더킹대시보다 서너 배는 빠른 속도로 뛰어들어 지근거리까지 파고들었고 완전히 가드가 비어있는 턱을 향해 어퍼컷을 날렸다너무나도 완벽하게 들어간 어퍼컷은 손이 아릴정도로 묵직한 감각으로 다가왔고작은 충격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순식간에 이어진 한방에 상대 선수는 그대로 뻗어버렸고, 10초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이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10초의 카운트가 끝나기를 기다렸다오만가지의 생각과 불안감이 교차하던 순간 비로소 10초 카운트가 끝나고 승리가 확정되었다승리가 확정되는 공이 울리자마자 이내 몸뚱이는 이전까지의 힘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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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자 모르는 천장이 보였고, 의사와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관장님께서는 간병인용 의자에 앉은 채로 여태껏 보여준 표정 중 가장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혈액검사 결과 미약하게나마 CRF 반응이 확인됩니다죄송합니다만더 이상 프로복싱 무대에 서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만으로도 얼추 감이 잡히긴 했다평소 같지 않은 관장님의 축 처진 모습마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연구하는 것 마냥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한 눈에 봐도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장비들까지 보고 있으면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어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으리라하지만결코 아니기를 바래왔던 운명이 의사선생님의 한 마디와 함께 쐐기가 꽂히듯 날아들자 여태껏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는 절망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져버리는 듯 했다.

 

의사선생님을 필두로 한 하얀 옷의 무리가 병실을 나선 뒤태산보다 무거운 침묵만이 이어지던 순간 관장님께서 먼저 입을 열었다.

 

카운터인지 뭔지 되고나면평범한 일반인 복싱하는 것 보다 돈 많이 번다고 한다더라.”

 

의외로 관장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은 돈 이야기였다하긴… 내가 가족들 먹여 살려야 하니까 복싱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가장 먼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전담 트레이너가 되어주셨던 분이니까.

 

나도 아는 친구 녀석한테 들은 이야기인데이터니움이라는 걸 채굴하면 쏠쏠하게 돈이 벌린다고 하더구나그 친구 사업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아주 세상 사는게 불공평하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니까

 

맞다카운터들은 평범한 일반인 용병들보다 이면세계에 뛰어드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고이터니움 채굴이면세계 조사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유복하게 살 수 있었다분명히 가족들 먹여 살리는 것을 넘어 부를 쌓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겠지실제로 운동선수 출신 카운터는 평범한 카운터에 비해 힘을 사용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일반인에 비해 월등해서 이런저런 기업에서 인재로 모셔가기까지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이렇게 모든 것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트레이너와 복서라는 견고한 인연이 카운터와 민간인이라는 미묘한 거리감에 의해 갈라지는 듯 했다차라리 그 때 KO패를 당하고카운터인지 뭔지 와는 인연이 없는 채로 삶을 이어갔다면 마음이 편했으리라미묘한 거리감 속에 어색한 공기만 맴돌았고긴 침묵 끝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관장님죄송합니다.”

 

이전의 경기결과는 언론통제로 인해 큰 파장 없이 지나갔다고 이야기를 듣긴 했다하지만 내가 카운터라는 사실그리고 그 경기에서 무의식적으로 카운터의 능력을 이용해서 역전했다는 소식이 공개되는 순간 관장님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당사자인 나야 그렇다 쳐도 전혀 당사자가 아닌 관장님에게 까지 피해가 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거라는 보장은 없었지만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 또한 없었다이른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서 오갈 데 없이 방황하던 나와 내 가족들을 아버지와도 같이 이끌어주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죄송스럽기만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관장님께서 입을 열었다

 

네가 죄송할 것 없다카운터 라는 게 원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냐

 

맞는 말이었다카운터로서 능력을 얻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복불복의 영역에 가까웠다누군가는 카운터가 되고 싶어서 오만 노력을 다 해도 숟가락 구부리는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고또 다른 누군가는 카운터로서의 능력을 거부하고자 했지만 자신도 원하지 않았던 능력 탓에 파멸에 이르기까지 했다그런 의미에서 나의 경우는 도리어 축복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복서로서의 커리어는 박살났지만적어도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지는 않았고 도리어 이 능력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럼이제 태스크포스인지 뭔지를 알아보고 면접 보러 돌아다니면 되는 걸까요차라리 아무 걱정 없이 복싱에만 매달리는 게 속 편했는데 말이에요.”

 

어느 정도의 실력이 된다는 전제하에서 운동선수가 프로생활을 하면 운동에만 전념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과는 달리카운터는 구직자로서 적극적인 구직활동을 해야하고 취업하고 나서도 사내정치니 뭐니 하는 불편한 과정들에 노출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누군가에게 아부하거나 비위를 맞춰주는 성격이 못 되었기에 더더욱 걱정되는 것이 없지도 않았다.

 

명훈아내가 아는 지인분 중에 태스크포스에서 일하시는 분이 있다그 분께 네 소개를 좀 해주마그리 크지는 않은 회사지만네가 카운터 생활에 적응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회사일거다한 번해볼 수 있겠나?”

 

어떤 태스크포스를 알아봐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의외로 관장님께서 먼저 제안을 주셨다평소에도 여러 가지로 우리 가족을 돌봐주셨던 관장님이었기에두 말 할 것 없이 승낙했다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서병원에서 재활훈련을 하는 도중에 계약서를 쓰고 정식 입사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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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 울면서 복싱을 배우고 싶다고 바짓가랑이를 붙들던게 엊그제 같더니,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다 되었구나. 정말, 대견하구나.”

 

회사에서 제공해준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을 본 관장님이 나지막이 말씀하셨다사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관장님께서 갖고 계셨던 인연내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좋은 조건으로 취업하게 해준 사장님그리고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삐걱거림 없이 돌아가게 한 천운까지…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게 준비된 것 같은 모습에 새삼 놀라면서도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늘 몸조심하고밥 꼭 챙겨먹어라.”

 

재활을 마치고 회사에서 제공해준 차량을 타고 첫 출근을 하는 날관장님께서 마지막으로 조언을 해주셨다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피보다도 더욱 짙은 땀으로 엮인 아버지지금 이 자리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며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른다그리고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지막 큰 절을 올린다.

 

여태까지정말 오랫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이 은혜는평생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마지막 인사가 될지 모르는 인사를 드리고 준비된 차량에 탑승한다여태껏 지내왔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카운터로서의 삶이 두려우면서도마음 속 한 가운데에서는 왠지 모를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낀다그것은 분명새로운 시작을 환영하는 제 마음 속의 축포일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20**년 09월 26일 입사하여 데이마인 채굴 4팀으로 배치 받은 유명훈이라 합니다잘 부탁드립니다!!”

 

내 이름은유명훈.

한 때웰터급 한국챔피언이었던 남자.

그리고 지금은… 데이마인 채굴 4팀의 신입사원, 사원 유명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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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제 막 카운터가 된 신입사원의 시점에서 글을 써보고 싶었음.

솔직히 존나 못 쓴 것 같긴 한데, 관대한 마음으로 봐줬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