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D wallpaper: gray house illustration, anime, torii, artwork, lantern, fence | Wallpaper Flare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11) 소실



--------------------------------------------------



"우리라는 이름의 관계가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는 없었던 것일지도."



--------------------------------------------------



달빛 한 줄기 정도만이 들어오는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딸깍 하고 통화음이 들린다.


저택 내 대부분의 인원들이 각자의 방 안에서 쉬고 있을 느지막한 시간에, 외진 곳에 있어서 사용하지 않는 방이라 들킬 염려는 없었다.


버려진 방 내부의 어둠이 안에 있는 누군가의 정체를 철저히 숨겨주었다.


희미한 빛무리 너머로 금색의 머리칼이 찰랑였다. 간드러지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나설 타이밍인 것 같아. 당신이 말해준대로, 이쯤에 나서면 되는거겠지?"


[그래. 아드라멜렉 건 이후로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계약에 응해줘서 정말 고맙네.]



힐데와 주시윤이 일본에 오기 몇 주 전.


당시 아드라멜렉은 클리파 차원의 일부를 절개하여 강제로 현실에 부상했고, 오사카에 강림해서 그 일대의 생명을 모조리 파멸시켰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극독의 힘을 다루는 탓에 일말의 힘만 갖고도 대도시 구획 하나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인류사 이래 최대 최악의 재해.


그런 아드라멜렉은 코핀 컴퍼니의 부사장 이수연과의 일기토 끝에 가까스로 격퇴당했다.


그 유해는 클리파 차원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누군가에 의해 봉인됐다.


아슬아슬한 싸움이었다. 마왕이 편법을 써서 현실에 강림했으니 망정이지, 정식 절차를 밟아 침공에 나섰다면 못 막았을지도.


물론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은 주체는 따로 있었지만.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한다.



"너희의 힘으로는 마왕을 아직 감당할 수 없기도 하고, 하나를 먼저 쳐 꺾을 수 있다면 이쪽에서도 반가운 소식이라서 말야."


[뜻이 일치했기에 다행이지. 솔직히 자네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와도 같아. 그렇기에 더욱 감사하고 있네. 진심이야.]



전화 너머로 들리는 무거우면서도 진중한 미성. 듣기만 해도 차분해지는 목소리가 감사를 전해왔다.


립서비스 하나만큼은 최고 수준이란 말이야. 그녀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차피 마무리지어야 할 일이라면 빚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진 않았거든. 게다가, 할 수 있다면 너희가 활용할 목적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자네답군. 아. 무장은 잘 도착했는가?]


"그래. 어제 하야미 씨를 통해서 전달받았어."



잠시 고개를 뒤로 돌린다. 사람 키 만한 검은 케이스 재질의 물건이 방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꼭 필요한 핵심 재료라고 말을 해두긴 했다만, 그녀조차도 설마 이걸 복원해낼 줄은 몰랐다.


훌륭하다. 준비가 매끄럽게 되어가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더욱 자신감을 머금었다.



"외부에 들키지 않도록 처리해볼게. 다른 마왕이라던지, 그 동사무소 대적자 놈팽이라던지."


[후후. 그 친구를 너무 미워하진 않았으면 좋겠네. ]


"싫어. 허세에 찬 듯한 그 분위기가 영 마음에 안 들어. 나이가 몇살인데."


[그렇다 할지라도 내게 있어선 소중한 동맹이네. 그 친구 역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동맹이 꼭 우호적인 이미지를 보장해주진 않아. 하던 얘기, 계속 해줘."



같은 목적을 가진 아군이니 건들지 않는 것 뿐이다. 남남이었다면 평생 관심도 갖지 않고 살았겠지.


조용히 만들어 드리겠다니, 그 따위 실력으로 뭘 할 수 있냐느니,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가 당장이라도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지. 자네도 알겠지만 시윤 군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카드네. 의뢰의 성공 여부 이전에, 그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여겨주게.


도박에 가까운 계획이니만큼 자네의 보조가 절실해. 절대로 시윤 군의 영혼이 뱀에게 넘어가선 안 돼.]



통화 너머의 목소리가 무게를 머금었다. 그만큼 이 통화 상대에게도 이번 일이 중대한 사안이라는 것일 터.


희미한 달빛이 소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선연히 물들였다. 장난기가 섞인 웃음이 얼굴에 드리워졌다.



"다소의 희생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건 괜찮지?"


[농담은 그만두게.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자네에게 맡긴 거니까.]


"노력은 해보겠는데.... 너도 알고 있잖아? 이 계획의 성패는 나의 노력 여하가 아니라 그 아이에게 달려 있다는걸 말이야.


그 아이가 뱀을 빨리 제압하지 못한다면 몸이 휘둘리는 과정에서 희생자는 당연히 나올거야. 이 부분은 지금의 내 몸으론 완벽히 커버할 수 없어."


[......]



통화 너머의 상대도 직감하고 있다는 듯 말이 없어진다.


모든 싸움이 그렇다지만, 사람의 목숨을 갖고 판을 짠다는 것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독이는 듯한 톤으로 여성이 차분하게 말했다.



"걱정 마. 최선을 다해볼테니. 그 아이를 믿어. 영 못 미덥지만 발키리도 여기 함께 와 있잖아?"


[알겠네. 이만 끊도록 하지.]



통화를 끊고, 메시지를 열어 확인한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대로 연락이 와 있다. 할 말이 있으니 방으로 와줄 수 있냐는 메시지였다.


소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반쯤은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운이 따라주는 것인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일이 쉽게 풀려왔다. 앞으로도 그러길 바라며 소녀는 방문을 몰래 열고 나왔다.



----------------------------------



나나하라 대저택

힐데의 방

p.m.10:20



자신의 행동이 너무 과했다.


그것이 몇 시간동안의 고민 끝에 힐데가 내린 결론이었다.


주시윤이 자신의 출생을 궁금해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힐데는 억지로 숨기려 들었다.


틀어막는 과정에서 그가 상처받더라도, 앞으로 펼쳐질 고된 미래에 비하면 모르는 것이 나으리라.


적어도 대화를 나눠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아..."



내가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힐데는 후회가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를 알고자 하는 주시윤의 마음은 힐데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사제 관계까지 내팽개칠 각오를 한다는 것은 보통의 각오 정도론 할 수 없다.


주시윤에게 과거의 진실은 그만큼 무겁고도 절박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힐데는 양 손의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더는 억누를 수 없는 수준까지 참고 있었음을, 항상 생글생글 웃고만 있어서 알지 못했다. 


그런 제자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지키겠다는 것은 너무나 냉혹하고도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입장만이 옳은 것인 양, 주시윤의 의견을 깔아 뭉게기에 바빴다.


자신의 독선으로 제자의 가장 민감한 부분에 독을 바르고 말았다. 


이래서야 스승 실격이지 않은가.


방을 나오면서 수십 번을 미안하다고 사과했음에도, 힐데는 여전히 주시윤을 향한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사과해야 했다.


힐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 마련되어 있는 서랍 위에 쌓인 화과자와 초콜렛 몇 점이 보인다. 힐데는 손을 뻗어 그것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채비를 마친 힐데는 방을 나섰다.


죄를 지어 발치에 쇠고랑을 찬 것처럼 주시윤의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 만근같이 무거웠다.


주시윤이 받은 상처가 고작 이런 다과들로 풀릴 리는 없다. 그저 사과를 할 구실을 만들기 위한, 물질적인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명분 따위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힐데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것에 굉장히 서툴렀다.


이수연에게 몇 년동안 일언반구 없이 회사를 냅두고 사라진 것을 사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투르면 어떤가.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시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사과할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힐데는 주시윤에게 해줄 말을 속으로 미리 골라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주시윤의 방문 앞에 다다르자, 힐데는 문을 똑똑 두들겼다.

 


"주시윤. 나다. 방에 있나?"



방 너머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문고리에 손을 대봤지만 문은 잠겨있지 않은 상태였다.


화장실이라도 간 것일까. 힐데는 미리 들어가 있으면 금방 돌아오겠거니 하고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



방 안은 아까처럼 불도 켜져있지 않은 채로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침대 위에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주시윤은 방 안에 없는 것이 확실했다.


힐데는 방의 전등 스위치를 켰다. 방이 환해지면서 내부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공허한 분위기가 방 전체에 감돌았다.


방 안으로 깊이 들어온 힐데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방에서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화장실에는 불이 켜져있지 않았다.


아까 가져다준 저녁 식사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침대 옆에 남아 있다. 밥과 국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침대보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주시윤이 평상시에 벗고 다녔던 장갑이나 장검도 보이지 않았다.



"......?"



뭔가 이상했다.


생활의 흔적은 전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방.


주시윤이라는 한 인간의 흔적만 깔끔하게 사라지고 없는 이 방.


화장실 말고 다른 곳을 갔을 가능성도 있다. 가령, 요깃거리를 찾기 위해 저택을 돌아다닌다던가 하는 경우.


하지만 그런 일상적인 이유로 방을 비운다면 최소한 장검을 들고 가지는 않는다. 주시윤은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장검마저 사라졌다면 단순한 이유로 방을 비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주시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이지?


강한 위화감이 힐데의 등 뒤를 싸하게 훑고 지나갔다. 오랜 세월을 전투로 보내온 그녀의 감이 경종을 우린다.


힐데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주시윤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착신음만이 나지막이 울렸어야 할 적막 속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벨소리가 침묵을 깨고 들려왔다.


잠깐만. 방 안이라고?






핸드폰을 들고 있는 힐데의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상황이 어딘가 이상함을 계속 경고한다.


뚜루루 하고 계속 메아리치는 컬러링. 을씨년스러운 방 분위기와는 확 대조되는 활기찬 벨소리.


힐데는 황급히 침대보를 걷어 치웠다.


거기에는 주시윤의 핸드폰만이 벨소리를 흩뿌리며, 주인과 떨어진 채 싸늘하게 울리고 있었다.



".....!!!!!"



주시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시윤아....!!"



쏜살같이 방을 뛰쳐나가며 힐데는 주시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저택 내 복도를 질주했다.


홀로 남겨진 핸드폰, 손대지 않은 저녁 식사, 싸늘하게 식어있는 방 내부, 사라진 주시윤의 장구류.


주시윤은 일반적인 이유로 방에서 사라진 것이 아님을 모든 증거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최소 납치거나, 모종의 목적을 갖고 자취를 감춘 것이 분명했다.


침식체에게 당해 의식을 잃고, 무의식 중에 환상을 보고, 뱀이 등장하는 꿈까지 꾸는 사람이 갑자기 단독 행동을 한다고?


절대로 그냥 둬선 안된다. 뱀이 그것을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주시윤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일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주시윤을 찾아야 한다. 주시윤을 지켜야 한다.


힐데의 머릿속이 온통 주시윤의 걱정으로 물들어갔다. 몸 전체의 기관들이 비상벨을 울려대며 만전의 상태로 위기감을 격상시킨다.


힐데는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보이는 사람마다 주시윤의 행방을 캐물었다.



"자네들, 주시윤을 못봤는가?"


"예? 아뇨...? 보지 못했습니다."



경비 임무를 띄고 있는 이들에게,



"자네들, 내 제자가 어디갔는지 아는가?"


"아뇨.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어머, 소대장님?"



저택 내부의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아. 소대장님. 이 시간에 무슨 일로...."


"토다 가주. 혹시 내 제자를 봤는가?"


"이 밤에요? 아뇨. 야간에 경계를 서는 인원들이면 알지 않겠습니까?"



새로 임명된 토다 가문의 가주에게까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주시윤을 봤다는 답은 들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저택 외부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인원들에게도 연락을 취해봤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긍정적인 대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상황은 갈수록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어갔다.


저택 내부에도, 저택 외부에도, 주시윤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이 대저택을 벗어나는 것이 가능키나 할까?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주시윤이 자신의 카운터 능력인 공간계열 능력을 이용하여 저택을 빠져나간 것.


하지만 어디까지가 가능성일 뿐. 주시윤에게 모종의 협력자가 있지 않고서야 구태여 저택을 나설 이유는 없다.


혼자 생각해서는 답이 나오질 않는 문제였다. 


힐데는 탐문수사를 깔끔하게 접고 다른 수를 꺼내들었다.


현재 상황을 총괄하는 가문연합의 가주, 나나하라 치나츠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 터다.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힐데는 치나츠의 방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소대장님? 이 밤중에 무슨 일이신가요?"



운이 좋았다. 힐데는 가주의 방을 향해 가는 길에 치나츠와 치후유 자매를 마주칠 수 있었다. 단 둘이 무언가 얘기를 하고 돌아가려던 것 같았다.


힐데는 안절부절 못하며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주시윤이 없어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네? 시윤 씨가요?"


"빨리 찾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시윤이가...."


"잠시만요. 일단 진정하시죠 소대장님. 시윤 공을 이렇게 애타게 찾아 헤매시는 이유가-"


"그 아이의 목숨이 위험하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올라 힐데는 언성을 높혔다.


주시윤을 향한 걱정과 그를 벼랑 끝으로 몰고 말았다는 죄책감은 힐데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치후유는 깜짝 놀라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힐데 또한 아차 싶어 미안한 기색으로 치후유를 바라봤다.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앞뒤 사정도 모르는 상대가 어찌 알겠는가. 힐데는 치후유를 향해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소리쳐서 미안하구나. 두 사람 다, 시윤이를 찾는 것을 도와줄 수 있겠나?"


"소대장님. 시윤 씨가 저택 바깥으로 나갔다면 루시아 양의 결계가 탐지해내지 않았을까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치나츠의 명석한 두뇌는 일곱 가문의 리더에 걸맞는 총명함을 발휘했다.


그 말대로, 저택을 감싸고 있는 결계의 제작자라면 저택의 안팎을 오고가는 존재를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듯한 치나츠의 말에 따라 힐데는 두 사람을 데리고 루시아의 방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루시아의 방 앞에 도착한 힐데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한기가 방 안에서 느껴졌다.



"없다....?"



힐데가 찾던 금발 머리의 소녀는 방 안에 없었다. 루시아의 방 또한 주시윤의 방처럼 인기척이 없이 공허함만이 감돌았다.


힐데의 마음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악의 상황이다. 주시윤의 행방에 관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을 거의 유일한 사람마저 부재중이라니.


이제부터 어찌 해야한단 말인가. 주시윤은 어디로 갔지? 루시아는 어디에 있는거지?


그들이 갔을 법한 곳은? 도쿄 에어리어 내의 시가지인가? 봉인지인가? 만일 봉인지라면 8개의 봉인 중 어디지?


생각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정보의 홍수가 힐데의 사고를 점점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주시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생각이 힐데의 마음을 잡아 흔들었다. 힐데는 불안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꽉 쥔 채 초조한 숨을 내쉬었다.


불온한 공기가 세 사람 주위를 타고 흘렀다.



".......!!!"



순간, 힐데 옆에 서 있던 치나츠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무엇을 본 것인지, 몸에 연결된 실이 끊어진 것처럼 그녀의 작은 체구가 힘없이 흔들렸다. 치후유가 곁에서 재빨리 치나츠의 몸을 잡아 부축했다.



"언니! 괜찮으십니까?"


"아... 아아....!!!"



바람의 목소리가 치나츠의 귓가에 속삭인다.


다만 이번에는 평소와 같은 은은한 목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매서운 겨울 바람과도 같은 혹독한 경고가 들려왔다.



.....



          사람아이                                꾀임에

냉엄한 바람이, 재앙을 선포하듯 불어온다.


                     생명의 봉인                               무너리라-

장막 너머의 미래가, 어둠 가운데에 보인다.


어둠 저 너머로 두 사람의 인영이 보인다.


하나는 어깨까지 오는 금발 머리카락의 소녀, 나머지 하나는 금발의 소녀 곁에 서 있는 누군지 모를 사람.


시체 썩은내가 진동한다. 지독한 독기가 느껴진다.


무너져가는 공간이 보인다.


땅에 널브러진 이들의 신음과 탄식이 온 사방에서 들려온다.


금발의 소녀 곁에 서 있는 사람으로부터, 악령이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글자의 형태로 보여진다.



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


경배하라경배하라태초의 뱀께서경배하라경배하라깨어나실 준비가경배하라경배하라갖춰졌다


살을 고 내장을 꺼내 온 세상을 로 물여라


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



"설마.... 설마....!!"



치나츠는 바람의 목소리의 예언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연이어 뒤흔들었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분명 바람의 목소리는 그녀가 무해한 존재라고 말해줬을 터.


그렇다면 지금 보였던 이 풍경은 대체-



"가주. 무슨 일인가? 무엇을 본 거지? 진정하고 말해봐라."


"...소대장님. 당장 두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치나츠는 힐데가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결연했고, 어느 때보다도 두려움에 차 있었다.



"뭔가 알아낸 건가?"


"불길한 바람이 느껴져요. 아니, 그냥 불길한 정도가 아니에요. 이건... 이 정도로 불길했던 적은 뱀이 풀려날 뻔했던 순간 외에는 없었어요..."


".....!!!"



힐데는 치나츠가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총명한 치나츠조차 저리 표정이 굳어있을 정도면 무엇을 보았는지는 안봐도 비디오였다. 아마 최악의 미래를 전해들은 것이겠지.


여기서 더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며, 힐데는 자신의 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치나츠 가주. 나는 먼저 봉인지 쪽으로 가보겠다."


"잠시만요, 소대장님! 8개의 봉인 중에 어디로 갔는지 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어디인지는 알고 있다. 치후유 양."



여기서부턴 가설이다. 


만일 주시윤이 말한 '나름의 방법'이 협력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방법이란 것이 뱀과의 접촉과 연관되어 있다면, 주시윤이 갈 법한 곳은 단 하나. 


뱀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는 봉인진 정중앙 뿐이다.



"가주, 그대는 다른 가주들을 모아주게! 그대가 들은 미래가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모든 준비를 마쳐야만 해."



결전을 암시하는 말을 단호히 내뱉으며, 힐데는 나나하라 자매를 뒤로 하고 자신의 방을 향해 뛰었다.


무슨 일이 있을까 하여 챙겨온 드래곤 버스터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다. 


사용할 기회가 없길 바라며 만약을 기해 챙긴 것이건만.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이야.


리플레이서 사태나 마왕을 눈앞에 뒀을 때처럼, 세계의 파멸을 노리는 적을 상대할 때나 썼던 무장이다.


그것을 이제는 자신의 제자를 향해 겨누게 됐다는 아이러니함에 힐데는 복잡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힐데가 떠나간 복도 한가운데에서 치나츠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치후유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치후유."


"네. 언니."


"모든 가주들을 소집해줘. 지금 당장."



두 자매의 눈빛이 서로를 응시했다.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았다.


치나츠와 치후유 모두 잔뜩 긴장한 표정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났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종막이 오르려 하고 있었다. 





(BGM out)






- 1시간 전

주시윤의 방

P.M.09:17



힐데와 언쟁을 벌이고 난지 얼마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주시윤은 고개를 들었다.



"빨리 오셨네요?"


"누구의 부탁인데. 얼른 달려왔지."



간드러지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이 찰랑인다.


결계술사 카운터, 루시아 테일러가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미소를 띈 채 주시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과연 뭐길래 날 이렇게 불렀을까?"



----------------------------------------------------------


이제 절반 왔다! 이거 언제까지 쓰냐 진짜 돌겠네 하 속도는 느린데 쓸건 많고.


11화까지 어떻게 쓰긴 했지만 아마 예상 화수는 20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까 싶어. 계속 봐주는 게이들에겐 항상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노...


이제부터 밝은 내용은 없을거임. 꽉 잡아!! 내려간다!!!!



Tip. 주시윤의 핸드폰 벨소리는 몰?루겜의 ost인 Target for love로, 본 문학 속 세계선에서는 글로벌 갓흥겜이다. 카운터사이드? 그게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