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arca.live/b/counterside/41713701



2편: https://arca.live/b/counterside/42828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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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이란


그것을 받는 자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부여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다른 누군가에겐 그 대상을 향한 질투나 원망과도 같은 악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차등적인 분배로 이루어진 완벽한 수평의 감정.


그것이 바로 서윤이 생각하는 애정이란 감정이었다.


그것을 갈구하는 자에게 응당히 되돌아가야만 할 것은 때에 따라 해당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의 손에 쥐어지기도 하니,



"뭐야, 서윤. 너 여기서 뭐하냐?"



지금 눈앞에 서있는 그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어머, 미나야. 오랜만이네?"


갑자기 벽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유미나를 보며 서윤은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곤 말했다.



"어...뭐, 오랜만이긴한데..."


활기차보이는 서윤의 태도에 유미나는 오른손으로 볼을 긁으며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끝을 흐렸다.


평상시에도 싹수가 없는 것으로 사내에서 소문이 자자한 그녀다.


굳이 그 대답에 트집을 잡을 이유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서윤은 능청스레 웃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나야 뭐 기숙사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지~. 그러는 너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여긴 펜릴 소대 숙소랑 완전히 반대편이잖아?"


"어..? 앗...아, 아니 그게..."


"?"


서윤의 입장에선 무심코 던진 말이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반응은 예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유미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른손을 허공에 허둥지둥 휘둘렀다.


그녀의 보랏빛 눈은 초점을 잡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이마와 볼의 한 켠에는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방울이 서윤의 눈에 띄기도 했다.


마치 도둑이 제발 저린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그녀의 왼손을 보지 못한 것은 기분탓일까.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에, 서윤은 의구심을 곁들인 웃음을 품고 그녀를 쳐다봤다.



서윤은 원체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방금까지와 같은 기분에선 더더욱 그녀와 마주하기를 꺼려했지만, 이야기가 지금처럼 흘러 간다면 말은 달라졌다.


어떠한 분야에서든 유미나를 골탕 먹일 수만 있다면, 서윤은 그녀를 꼼짝도 못하게끔 만드는 완벽한 천적으로 변모하기 때문이었다.





"아, 아냐! 됐어! 넌 신경끄고 갈 길이나 가! 아무 일도 아니니까."


그 섬뜩한 웃음에 유미나가 성질을 내며 말했다.


재빨리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그녀의 천적이 입맛을 다신 지금에 이르러선 이미 늦은 참이었다.




"어딜 그렇게 빨리 가려고 그래, 미나야~. 사람을 불러세웠으면 왜 불렀는지 얘기는 해야지?"


서윤이 그렇게 말하며 한손으로 유미나의 어깨를 잡자, 순간적으로 떨리는 감각이 온 손바닥에 퍼져 나갔다.


"어...저기 그냥 갑자기 나오길래 깜짝 놀라서..." 

유미나는 말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줄래?"


"...미안하다, 미안해! 나 좀 그냥 보내주면 안 되냐? 나 지금 좀 급하거든?!"



그녀가 한숨을 쉬며 귀찮다는 표정으로 서윤을 쳐다봤지만, 그녀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세를 유지했다.



오히려 손에 더욱 힘을 주곤 눈썹을 싱긋 늘어뜨리며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근데 우리 미나 왼손에 있는 그거...뭔지 나도 참 궁금한데... 같이 봐도 될까?"




흠칫


순간적으로 유미나의 온몸을 관통하는 진동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유미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서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뭐라고...?"


"그 왼손에..."


그렇게 말하며 서윤은 유미나의 등 뒤로 손을 뻗었고,


"있는 거 말이야!"


그녀가 보물처럼 소중히 왼손에 쥐고 있던 컵라면을 뺏어들었다.


"아...아..."


유미나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컵라면을 든 서윤의 손을 올려봤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러한 그녀의 표정은 천적의 기분을 더욱 들뜨게 해줄 뿐이었다 



"우리 미나, 바쁜 일이 뭔가 했더니만."


염동력을 사용해 공중에서 컵라면을 이리저리 돌리며 서윤은 말을 이었다.


"컵라면 훔쳐 먹기였구나?"


"야, 그거 이리 안 내놔??!!!"


흥분한 유미나는 서윤이 들고 있는 컵라면을 향해 양팔을 뻗었지만, 서윤은 해당 물체를 빙그르르 돌리며 저돌적인 그녀를 가벼이 흘러 넘겼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조소 섞인 미소를 선보이며 말했다.


"하하하. 너 같으면 주겠니?"


"으아아아!!"


그렇게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지 약 1분의 시간이 흘렀다.


유미나는 여전히 그녀의 물건을 되찾지 못했고, 서윤은 그런 그녀를 보며 즐겁게 웃어댔다.


그리고 1분이 더 흐르자 이 볼품 없는 행태에 만족할만큼 만족한 서윤은 유미나를 향해 컵라면을 던졌다.


"야, 너 가만 안 둬....어..?!"


"이제 됐어, 가져가서 먹어. 부사장님께는 비밀로 해줄 테니까."


"어...어...고맙다...?"


평소와 다른 서윤의 태도에 유미나는 컵라면을 집어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서윤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 원래 가던 길을 향했다.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씩씩대기만 하는 미나를 놀리는 것은 재밌는 일이지만, 오늘은 그렇게까지 그녀와 놀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눈앞의 상대와 오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기가 빠지는 것은 그녀 또한 피차일반이기도 했다.


그러니 놀려먹는 것은 여기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유미나를 등 뒤로 하고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려던 찰나, 유미나가 한 마디 말을 던졌다.


"야, 근데 너 요즘 왜 그러냐?"


순간 서윤의 발걸음이 멈췄다.

발바닥에 진흙이라도 눌러붙은 듯 다음 한 발자국이 떼어지지 않았다.


서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만을 살짝 뒤로 돌렸다.


"무슨 뜻이야?"


"아니 그냥...요즘 좀 기분이 안 좋아보이길래. 너무 그러고 다니지 마라. 보는 사람까지 피곤해지니까."



싸가지 없기는.


컵라면을 그냥 부사장님께 조공해드렸어야 했는데.


서윤은 즉각적인 표정의 일그러짐을 감지했고, 이를 멈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동시에 감정의 어느 한 부분이 형용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로 버무려져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표정 관리를 못 했다고? 내가?'


'내가 지금 뭐 때문에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입만 나불거리기는.'


'그러는 너는 어째서 그렇게 태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데.'


'아직까지도 탕비실에서 컵라면이나 훔치고 있다니. 팔자도 좋네.'


그것은 자책이기도 했고, 원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주 커다랗고 칠흑같은 독을 품은 질투의 감정이기도 했다.


그녀의 마음 속에 훤히 펼쳐졌던 수평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렁이는 파도에 그 모습을 가리웠다.





역시 서윤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떠나간 마음을 돌려보려고 해도, 그녀라는 사람 자체가 자신과 맞지 않음을 다시금 직시했다.


"하하, 걱정 고마워, 미나야."


서윤은 안달을 쓰며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는 말했다.


그 표정을 구성하는 정교한 연산이 조금이라도 틀어졌을 때,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소리를 멈추고 서로를 응시했다.


아마 그녀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몇 초 가량의 시간이 더 지나갔을 때, 서윤의 머리속에 문득, 조금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녀는 사장님이 사라진 것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


여기서 대화를 더 이어간다면 자신의 이성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할 것이 뻔했음에도, 서윤의 이성을 그녀의 욕구를 제어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윤은 말했다.


"그런데 미나야, 그래도 탕비실에서 컵라면 훔치는 건 좀 자중하는게 좋지 않을까? 요즘 사장님도 실종되셔서 회사 분위기도 흉흉한데 말이야."


주사위는 던졌다.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할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서윤으로선 하나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내도 짜증이 날 것만 같았다.


슬퍼하는 표정을 지을까? 반성하는 표정을 지을까? 즐거운 표정을 지을까? 그리워하는 표정을 지을까?


서윤은 조심스레 눈길을 치켜올리며 유미나의 표정을 살펴봤다.


그러나 그녀의 만면에 부상한 표정은 그런 예측들을 아득히도 초월하는 어떤 것이었다.








"응? 뭐야, 사장님 실종됐었어?"


얼굴에 떠오른 것은 완전한 무지.


그런 소식을 들어본 적도,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는 표정으로, 유미나는 서윤을 맹하게 쳐다봤다.


"어쩐지 요즘 회사 분위기가 안 좋더라니."

유미나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뭐, 어차피 별로 상관 없지 않아? 배터리 떨어져서 공장이라도 다시 찾아간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태평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걸까.


짜증을 낼 힘마저도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서윤은 그녀의 가장 큰 연적이, 누구보다도 둔감하고 누구보다도 무지하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애정이라는 감정의 선택을 받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였다는 점에 서윤은 분개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녀만이 사장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것일까.





그녀보다 자신이 더욱 그를 존경하고,

그녀보단 린이 더욱 그를 진심으로 대하며,

가은이라는 소녀가 그녀보다 훨씬 더 그를 향한 애정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사장은 저런 그녀에게만 한없이 관심 어린 애정을 쏟는 것일까.



저런 멍청한 모습이 좋은 것일까? 아님 저렇게 스스로의 감정을 올곧이 헐벗는 모습이 좋은 것일까?


서윤으로선 그 이유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오늘 만나온 이들이 느꼈을만한 분노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서윤은 대충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대답했다.


이후 고개를 다시 돌린 채 그녀는 유미나를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그대로 길을 걸어갔다.













서윤은 기숙사에 들어와 벽에 붙어있는 전등의 스위치를 매만졌다.



전등에 불이 들어오고 어둠이 빛으로 가리워지자, 그녀는 곧 책상 맨 윗칸의 서랍을 뒤적였다.


그곳에는 소중히 모셔놓은 것처럼 보이는 이상한 장치가 하나 있었다.


서윤은 그 장치를 손에 들고 한동안 가만히 그것만을 쳐다보았다.


그 물체는 리플레이서 사태가 마무리되고 사장에게 임무의 인센티브로 받은, 서윤의 과거와 관련된 정보들이 빼곡히 들어있는 usb 파일이었다.



그녀는 사장이 사라지기 전부터, 항상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이 usb를 열어보았다.


근본적인 이유는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와 가족을 보며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사장에게 받았던 최대의 관심을 되새김질한다는 의미 또한 내포돼있음을 그녀 스스로도 알아차리진 못했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습관적으로 이 파일을 다시금 열었고, 조용히 파일 안에 달았던 내용들을 감상했다.



불행한 과거와 강제로 빼앗긴 윤서라는 그녀의 이름. 


누군가에겐 떠올리는 것조차 치욕스러울 일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그녀에게 이는 축복이었다.


설령 제 아무리 불행했던 과거라도, 누구나 인생에서 간직하고자 하는 소중한 부분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녀는 침착한 마음으로 수도 없이 보았던 그 파일을 찬찬히 음미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무언가의 허기짐이 메꿔지지는 않았다.




알고 있다. 이것이 무엇인지쯤은.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 감정에서 눈을 돌렸다.


사장을 향한 애정과 그 주위의 여성들을 향한 질투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서윤은 멍청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을 직시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저 다른 이들과 자신의 격차를 실감할 뿐이었다.


그리고 미나와 자신의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차이를, 멍청하게 인지할 뿐이었다.






"사장님...보고 싶어요..."


오늘따라 그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앞으로도 이어질 나날 속에서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사랑을 품을 것이다.


그에게 위로를 청할 수도, 그를 위한 도구로서 무언가를 해줄 수도 없다.


그저 가만히 앉아, 그가 버리고 간 세계에서 앞으로 다가올 멸망을 달관하면 될 뿐.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 그의 주위에 있던 인물들 또한 모두 기약 없는 사랑을 꿈꾸게 된다는 것일까.


이렇게 말하는 자신이 너무나 역겨웠기에,


서윤은 usb를 빼서 주머니에 넣고는 책상에 엎어져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오늘도 성과는 없는 것 같군요, 서윤양."


"뭐 그런 것 같네요, 부사장님."



그 일이 있고로부터 며칠 뒤, 따사로운 햇살이 눈앞의 책상을 매만지는 정오에, 서윤과 부사장은 회사의 한 사무실에서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에겐 물과 기름과도 같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두 사람은 모두 이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 조숙하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슥 들이마셨고, 책상에 다시 조심스레 내려놨다.





사장이 사라지고 비밀을 공유하게 된 직후부터, 이 둘은 정기적으로 이러한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모임의 내용은 당연스럽게도 사장의 행방에 관한 추적 및 앞으로의 향방에 대한 토의였다.


매일매일이 결국은 무건설적인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모임이었지만서도, 그들은 한 가닥의 희망을 잊지 못한 채 그 모임을 지속했다.


아마 둘 모두가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참으로 의미없는 짓이라고, 서윤은 속으로 한탄하며 옆에서 살갗을 자극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름이 무성하던 나뭇가지는 앙상한 뼈대만을 드리우고 있었고, 지저귀던 새들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온데간데 없었다.


곧 성탄절이 다가온다는 것을 축복하듯 거리 곳곳에는 트리가 널려있었으며, 코트를 껴입은 연인들은 손을 꽉 잡은 채 그 거리를 하염없이 걸어갔다.




그 광경은 밝았다.


너무나도 눈부셔서 눈을 찡그리게 될 만큼이나, 밝다.


앞으로 이 밝은 풍경을 볼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는 거죠?"

한동안 서윤이 멍한 상태를 유지하자 부사장이 물었다.


"그냥...밖이요..."

서윤은 대답했다. 흐릿한 목소리와 아련한 눈빛으로.


이에 부사장은 그녀를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함께 바라봤다.


조금 시간이 흘렀다.

시선을 계속 창밖을 향하며 서윤이 입을 열었다.


"부사장님."


"네."


"저희,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발버둥은 쳐봐야겠죠. 저는 그렇게 간단히 죽어줄 생각이 없어서요." 이수연이 단호히 말했다.


"하하, 부사장님다운 답변이시네요."


"뭐, 그런 셈이죠."


약간의 정적이 흘렀고, 서윤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 사장님이 돌아오신다면...


"..."


서윤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러나 만약 말을 끝마쳤다 하더라도, 이수연의 반응이 극적으로 달랐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둘은 서로만의 공상에 잠긴 채, 굳은 표정으로 턱을 괴고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봤다.


곧 다가올 세상의 멸망을 걱정하는 듯한 말투를 지었지만서도,


그녀에게있어 세상의 멸망 따위는 어찌되든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그를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왜 버리고 갔느냐 따지고 싶었고, 왜 이제 왔느냐며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들을 버리고 다음 세계를 준비하러 갔다.

단지 그뿐이다.


참 모든 것이 부질 없는 일에 불과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다시 한곳을 응시하다 이수연이 서윤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만약 사장님이 돌아오신다면..."


바로 그때였다.


"부사장님...!!! 헉헉...여기...계셨네요...!"


"하나양..?"


사무실의 문이 덜컥 열리더니 검은 오피스룩을 반듯이 차려입은 김하나가 들어왔다.


방금까지 회사의 온구석을 뛰어다니다 온 것 마냥 숨이 찬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수연은 하던 말을 끊고 그녀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하나양? 그렇게 급하게."


김하나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손가락으로 로비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헉헉...지금...로비로 가보셔야 될 것 같은데요...?"








**







이수연이 먼저 로비를 향해 달려나갔고, 서윤이 그 뒤를 따랐다.


무엇일까. 


무엇이 저리도 그녀를 급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서윤은 헛된 기대일뿐이라며 고개를 젓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로비에 다다르자 무언가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멀찍이서 로비의 정문 부근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회사의 여러 직원들이 있었고, 린이 있었고, 사장의 딸이 있었다. 여러 기계들이 있었고, 메이드복을 입은 집단이 있었으며, 미나가 있었다.



"하...하..."


그리고 계속해서 달리던 이수연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앞에서 멈춰섰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서윤은 그녀의 뒤에서 그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첫 눈이 왔다.


세상을 백색으로 만드는 새하얀 함박눈.




그리고 그 눈을 뒤로한 로비의 정문에는,



커다랗고도 네모난 로봇이 서있었다.


특유의 사교성으로 주변에 모인 직원들을 다독여주고 있었고, 가당치도 않는 농담으로 그들을 웃게 해주려는 기계가 있었다.





놀라야만 했을 장면이었음도, 그동안 그토록 기다려왔던 장면이었음에도, 놀라움이라는 감정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김하나가 뛰어 들어왔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지금의 이 장면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그리고 또 한 발자국. 

저 멀리 있는 그를 향해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함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 전에는 너무 멀어 들리지 않던 이야기들이 자신의 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주인님,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베로니카가 말했다.



"하하. 사장님도 참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으시다니까요?" 주시윤이 말했다.



"사장님, 대체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엉엉..." 오열하며 그의 몸에 매달린 샤오린이 말했다.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셨는지, 어째서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사라지셨던 건지, 자세한 이야기는 사무실에 가서 듣도록 하죠." 어느덧 그의 앞에 도착한 이수연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깡통을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찼다.


그덕에 사장의 몸체는 한번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금 뽈뽈거리며 건물로 들어왔다.


"더럽게 튼튼하네요." 아쉽다는 표정으로 이수연이 말했다.



서윤은 발은 더 이상 땅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갈 수 없었다. 

거대한 올가미가 자신의 다리 전체를 옭아매는 듯한 느낌마저 받을 지경이었다.













나는 저곳에 가서 어떤 표정으로, 어떤 다정한 말과 함께 그를 맞이해야할까.












서윤의 머릿속엔 단지 이 하나의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의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은 동시에 연적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사장이 사라진 동안 그녀는 온전히 그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을 주로 키울 수 있었지만,


막상 사장이 다시 눈앞에 돌아온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모든 상대가 연적이었고 질투심의 대상이었다.


지금 그녀는 그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을 키우고 있었다.




자신이 저 자리에 서있는 이들보다고 더욱 그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을까.


지금 저곳에서 "뭐야 사장님, 진짜 실종됐던 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유미나 이상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럴리는 없겠지.


서윤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린 마냥 울고불며 그에게 매달려 본심을 드러내도, 베로니카처럼 업무적으로 그를 대해도, 자신은 그만큼의 관심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그녀에게 있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발걸음을 멈추고 멀찍이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손에 무언가가 걸려왔다. 정말로 물리적인 무언가가 걸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주머니의 겉표면 사이로 울긋 솟아나있던 하나의 usb였다.


서윤은 이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 물건은 사장과 자신의 유일한 연결고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가 그녀를 인정해주었다는 증표이자, 사장에게 받은 유일하고도 최대의 관심을 증명하는 물건.



서윤은 이 물건을 보며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이 물건을 받을 수 있던 것은 '그녀가 그녀다웠기' 때문이었다. 


남을 뒤통수치고 다된밥에 재를 뿌리는데 특화된, 암여우와 같은 그녀였기에 그녀는 사장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받고 대가로서 이 물건을 받을 수 있던 것이다.



자신이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면 이 물건을 받는 것이 가당키나 했을까.

아니, 애초에 사장님을 만나고 그의 관심을 받는 것이 가능이나 했을까.


서윤의 머릿속에선 조용히 그런 생각이 흘러갔다.



그와는 상반되게도 사장과 직원들이 있는 로비의 한 가운데는 참으로도 시끄러웠지만,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그녀를 더욱 침착하게 만들어주었다.



조금의 파동도 허락하지 않는 고요한 연못과 같이, 그녀는 생각했다.


'자기다움'이라는 것은 운명이 점지해준 자신만의 무기이다.


저기 있는 저들도, 저들이 저들다웠기에 사장과 저러한 관계를 맺은 것이고,


자신 또한 자신다웠기에 지금의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 관계를 애써 부정하는 것은 저들과 사장에 대한 모욕이며, 그렇다고 그들의 감정과 행동을 모방하는 것은 자신과 사장에 대한 모욕임에 틀리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그의 더 많은 관심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녀로서는 자신의 무기만을 사용해 주변의 다른 연적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싶었다.


다른 사람으로서가 아닌, '서윤 으로서.




다른 누군가의 손을 빌린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땅바닥에 무겁게 밀착해있던 발이 다시 허공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서윤은 샤오린을 떠올렸다.

그녀와 같이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자신은 하지 못한다.


또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서윤은 가은을 떠올렸다.

그녀와 같이 한없는 의존을 드러내는 것 또한 그녀는 하지 못했다.


또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서윤은 유미나를 떠올렸다.

그녀와 같이 사장을 향해 어떤 특이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을 그녀는 하지 못한다.


한 발자국.


그녀는 언제나 여우같이 행동하며, 항시 누군가를 배신한다는 가능성이 도처에 잠재되어있을 때 그녀로서의 가치가 증명이 되는 것이며,



한 발자국.


자신이 원하는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발자국.


그렇다면 자신은 그 강점을 늘려나가면 될 뿐이다.



한 발자국.



누구보다도 매혹적으로 사람들을 홀리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게 감정을 감추고 행동하면 될 뿐이다. 


그렇다면 그 또한, 조금이라도 관심을 더 쏟아주지 않을까.




어느덧 서윤의 발은 사장의 앞에서 멈춰섰다.


사장은 의아한 듯 서윤을 올려다봤고, 서윤은 그런 그를 웃으며 바라봤다.





그녀의 한껏 늘린 눈꺼풀은 사랑에 빠진 청순한 여학생의 그것과 같았고,


위로 당긴 입꼬리는 비가 온 뒤 빛을 맞이하는 무지개의 꼬리를 연상케끔 했다.


그렇게 한없이 해맑게 웃는 표정으로, 그녀는 말했다.






"어머, 사장님. 돌아오셨네요?"







진심을 거짓으로 의심하고, 거짓을 진심으로 혼동하도록.


조금은 약삭 빠른 여우와도 같이.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