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 하염없이 걷는다. 검은 공간. 검은 길. 온통 검은 세상이었다. 목적지도 없이 한참을 걸었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 때쯤 바람이 불어왔다. 슬며시 다가와 귓가를 때리고 머리카락을 흐트려놓는 바람. 희미하게 들어오는 꽃 내음, 그리고 따듯함.
바람은 무료했던 걸음에 동행자가 되었다. 더 이상 추위 때문에 고통 받지 않아도 되니 좋은 일이었다. 혹여나 온몸이 얼어붙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너무나 차가운 손 때문에 자신의 몸조차 만지길 꺼려 했던 이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니, 좋은 일이었다.
바람은 덧없이 포근했지만, 답을 가져다주진 않았다.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여러 의문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뭐, 이 또한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나는 계속해서 끝없는 심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란 개념이 희미해질 때쯤 변화가 일어났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의 궤적이 불규칙 한 것 말고는 일정했던 공간에 이변이 일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저 너머 멀리 지평선에서 흰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간에서 어떻게 빛을 낼 수 있는 거지? 눈앞에 드리워진 희미한 빛에 나는 그런 궁금증을 표했다.
또 한참을 걷자 빛을 내던 흰 형상의 정체가 드러났다. 새하얀 회중시계였다. 하나같이 뒤틀리거나, 부서지거나, 깨지거나, 금이 가거나, 반쪽만 남아 있거나 하는 비정상적인 시계였다. 초침과 분침과 시침이 멈춰 돌아가지 않았고, 시간을 표시해주던 숫자는 모자이크를 한 듯 흐려져 알아볼 수 없었다. 위치를 통해 대략적인 시간을 유추하는 게 다였다.
그 시계들이 이 공간의 시간을 대변해 주는 건 아닌 듯했다. 초침, 분침, 시침들 전부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이런 공간에 시간이란 것이 존재할 리 없었다.
계속해서 걸어가자 시계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많아봐야 다섯 개 정도였던 시계의 수가 점점 늘어나 10개 100개 1000개 10000개 그리고 100000개.
수를 세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회중시계는 점차 늘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불어나 세상을 뒤덮었다. 처음엔 바닥에서 기던 것들이, 어느샌가 언덕이 되고, 산이 되고, 벽이 되었으며, 하늘이 되었다.
공간을 시계가 차지했다.
그럼에도 내가 가는 곳 앞은 항상 비어 있었다. 장애물이 없어 시계가 불어난다 해도 내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걸음은 그랬다. 그 무엇도 멈출 수는 없었다.
세 번째 이변은 빠르게 찾아왔다. 영원히 평탄하고, 말끔해야 했던 길 위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툭, 투둑.
높이 쌓여진 시계의 산맥 에서 시계 하나가 굴러떨어져 길 위에 착지 했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길에서 벗어날 수 없어 시계를 만져볼 수 없었는데,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저 시계를 만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떤 무지의 두려움이 존재했다. 그래서 시계를 만지길 망설였다.
움직이지 않으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때론 망각하고, 때론 외면하는 진리였다.
나는 어떠한가? 그 진리에 반하지 않으려 끊임없이 걷지 않았는가? 굳이 모험을 해야 할까?
사실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끝이 나지 않는다는 걸, 하염없이 걷는 걸 움직임 이라 할 수 있을까?
눈으로 확인한 시계는 다른 시계들과 다름없이 정상이 아니었다. 유리는 잔뜩 금이 가 있었고, 여러 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굳은 결심을 한 채 시계에 손을 뻗었다. 방해물은 없었다. 바람은 따듯했고, 시계로 이루어진 산맥은 장대했으며, 시계로 이루어진 하늘은 압도적이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 끝과 시계의 표면이 맞닿았다. 세계에 울려 퍼진 두 번째 소리였다.
그리고, 세계는 격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이루어진 이상 현상은 진동이었다. 툭, 투둑, 투두둑 시계가 무너진다. 세상이 흔들리고, 몸이 휘청인다. 세상에 울려 퍼진 진동이었다. 지진이었다.
지진은 세계의 진리에 저항했다. 진리를 부순 것이다. 더 이상 길 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은 팽창이었다. 흔들리는 세상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시계 하나, 하나가 늘어나며 부피를 견디지 못하고, 일그러지는 것이다. 시계는 커졌으며, 기이했다.
마지막은 소리였다. 적당히 따듯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점점 거세지며, 재해에 가까운 모습을 취했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강한 바람이 전해주는 소리. 그것도 목소리였다.
여러 소리가 뒤섞여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한 소리였다.
-사, 살려*&(%^사>?:^*랑...!#@%$^&_)#$!
마지막은 색채였다. 검은색, 혹은 흰색밖에 존재하지 않던 세계에 색 이란 것이 입혀졌다. 여러 색이 겹쳐져 결국은 검은색을 향했지만,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것들은 분명히 화려한 색 이었다.
끝으로 세계가 녹아내렸다. 기이하게 뒤틀린 시계가 흐물흐물 고개 숙인 것을 시작으로, 세상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의 색을 통해 이 세상에 색을 채웠다. 마치 하나의 물감 같았다.
결국, 내가 손으로 건드린 시계를 제외한 모든 시계가 세상에 색을 더한 후에야 기이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더 이상 검은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검은 길도, 기분 좋은 바람도, 잔뜩 쌓여 있던 회중시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계가 만들어 낸 세상은 새로웠다. 하늘이 푸르렀으며, 땅은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생명들은 파릇파릇해 보였다.
내 품에서 꺼져가던 소녀를 제외하고는.
언제부턴가 나는 한 소녀를 안고 있었다. 은빛이 감도는 흰 머리에, 보석 같이 붉은 눈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
중학생 정도의 작은 채구를 가지고 있는 소녀는 입에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척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튀어나와 내 얼굴을 칠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은 굉장히도 슬퍼 보였다.
"나...죽어?"
말할 힘도 없는지,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꺼낸 말의 내용이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죽는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기엔 너무 비참했다. 그 말을 한다면 모든 것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너 안 죽어.'
위로의 말을 꺼내려 했다. 분명히 입을 열고 말한 것 같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항하던 찰나 입은 제멋대로 의지와 다른 말을 시작했다.
"미안..."
입에서 지껄인 말은 '미안해' 아무런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는 참으로 무책임하고, 쓸모없는 말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나 자신을 격하게 탓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내 절망 섞인 말을 들은 소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차마 눈을 뜨고 이야기하기 힘든지,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사장...나 하고 싶은 일이...너무 많았어."
사장, 나를 사장이라 부른다. 소녀가.
"...사장도 알지...? 나 진짜...더럽게 살았잖아...사장 만나기 전까진..."
소녀의 목소리와 표정이 너무나 구슬퍼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콜록...콜록..."
이제는 기침조차 힘이 없었다.
"그래서...사장 만나고 나...너무 행복했거든...? 세상이...이렇게...아름다운지...처음 알았는데..."
소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이 더 창백해 지고, 입에선 피가 줄줄 새고 있었다.
"같이...마시멜로 파티도 하고...싶었는데...초콜릿 수영장에도...들어가 보고...또..."
소녀는 그대로 하고 싶었던 일을 줄줄이 읊다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말했다.
"그러니까...내가 진짜로...하고 싶은 말은..."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너무 많이 묻어 있었다.
"살아. 꼭 살아남아. 발버둥 치고...또 발버둥 쳐서, 아무리 추해져도...사장은 꼭... 살아남아."
그 말을 끝으로 소녀는 더 말을 잇지도, 눈을 뜨지도 않았다.
시계가 돌아간다. 어느샌가 손에 쥐고 있던 회중시계가, 고장 난 회중시계가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또 찾아오는 어둠. 그리고 눈을 떴을 때.
"...!"
붉은 눈동자의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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