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 원본 (https://arca.live/b/counterside/48995495)



길었던 싸움이 끝났습니다.

 

타가리온, 아니, 타기리온이었던가요? 이름이야 어쨌건, 못된 마왕이 죽었습니다.

싸움에 모든 힘을 쏟아낸 남자는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윌버 님?"

 

"가게 둬라. 엘카노."

 

"그러나, 성냥팔이 님. 저 부상으로는…"

 

"내버려 둬. 약속했잖냐. 서로의 염원을 이루고 나면 붙잡지 않기로. 여기가 녀석의 끝인 거야."

 

함께 싸워온 동료들은 비틀거리며 떠나는 남자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호라이즌 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녀석도 떠났겠지. 그토록 미워했던 남자다. 마지막은 지켜보게 해주자고."

 

 * * *

 

아주, 아주 오래전이었죠. 남자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ㅡ 스타게이저 슈트 에너지 잔량 0.1%. 동력 부족.

 

처음부터 목적지가 정해진 여행은 아니었습니다. 실낱같은 기대감으로 나선 길이었죠. 

 

왜 떠났냐구요? 글쎄요. 남자는 기억력이 좋지 않았기에 곧 잊어버렸습니다.

 

혹은 잊어버리기로 결심했던가요.

 

내려놓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만큼 험한 여로였거든요.


모든 여행길에는 미처 떨쳐내지 못한 속죄와 자기혐오가 질척하게 따라붙었습니다.

남자가 가야 할 길은 너무나 멀었기 때문에, 그 감정들도 점차 하나씩 내려놓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몇 번째 거쳐가는 곳인지 세는 것조차 잊었을 때 쯔음,


ㅡ 에너지 잔량 0.1%. 동력 부족. 생명유지장치 가동 중단.


고된 여행이 남자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신 기억과 감정이 온통 마모되어 갔죠.

그렇게  텅 비어버린 가슴에는, 우습게도 가장 먼저 비워냈던 약속만이 남았습니다.

내용은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단지, 소중한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했습니다.


ㅡ 에너지 잔량 0.1%. 탑승자 신체에 잔여 진통제 다량 투여.


약속을 이루기 위해 남자는 계속 걸었고, 어느 순간부터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남자는 별로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카운터? 택도 없는 소리. 

그냥 흔한 삼류. 찌질한 악당이었죠. 손가락질 받기 좋은 오만한 쓰레기. 남들을 이용해서 어떻게 한 몫 챙겨보려는 기회주의자.


그런데도 남자는 싸웠습니다. 넘어지고, 구르고, 다치고, 바닥을 기어다니며, 온갖 추한 짓을 서슴지않고 남자는 싸웠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이름을 가진 사람을 스스로 죽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랬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남자는 꽤 결벽적으로 그 일을 반복했거든요.


자기 자신과 싸우고, 저마다의 정의를 가진 온갖 사람들과 싸우고, 

자신을 죽이려 드는 인공지능 소녀와 싸우고, 침식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들과 싸우고,

결국, 남자를 한낱 개미로 취급했던 마왕과도 싸웠습니다.


그러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많은 싸움들을 전부 이기지는 못했지만, 마지막에 가서 남자는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승리했고 싸움은 끝났습니다만.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ㅡ 에너지 잔량 0%. 스타게이저 슈트. 가동을 중단합니다.


한 몸 같았던 슈트가 무거워진 남자는 그것을 벗어던졌습니다.

오래전에 시신경이 전부 타버렸기 때문일까요. 슈트를 떠나 바라본 세상은 온통 새까만 어둠이었습니다.

습-하. 인공 호흡기 없이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다리는 너무 무거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죠.


남자는 너무 지치고 피곤했기 때문에, 더는 약속을 찾아 걷고 싶지 않았습니다. 


음. 이제 어떡해야 할까. 고민한 남자는 잠깐 자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털썩. 걷던 자리에 대강 주저앉았습니다.

이대로 누워서 머리만 대면 곧바로ㅡ


삑.


"윌버. 여기서 누우면 입 돌아간다."


"ㅡ어?"


잠이 들기 직전에, 온몸을 뒤흔들어 놓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만약 남자가 기계였다면, 


멈추었던 심장에서 덜컥, 하는 쇳소리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꼴이 이게 뭐냐. 변함없이 형편없는 남자로군. “


“너,”


한참동안 쓰지 않았던, 몸 안을 타고 흐르는 혈관들이 어색하게 움직였습니다. 가슴이 욱씬거렸습니다.


"너어, 는."


"뭐 해. 내 술이라도 훔쳐 먹었냐? 막 사람 말 따라하는 걸 배운 앵무새처럼 말하고 있어. "


누구였을까요. 얼굴을 보면, 

분명 이름이 기억날 것 같은데. 


"너어, 너어, 너어는."


머리를 감싸쥐었습니다. 고개를 돌려봐도 온통 컴컴한 세상에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 대신,


"뭐야, 혹시 잊어버렸냐? 내 이름."


장난스럽게 투덜대는 말투에 꽁꽁 숨겨둔 섭섭함.


사람의 온기를 바라면서, 그걸 참을 수 없이 어색해 했던 여자.

부드럽게 등을 타고 내려오던 녹색 머리카락. 항상 껄렁하게 풀어헤쳤던 양복. 어디엔가 숨겨다니던 휴대용 술병. 


남자는 낡은 사진첩에서 이름 하나를 끄집어 내었습니다. 


"리, 타. 리타. 리타."


"닭살돋게 왜 그렇게 여러번 부르냐. 기분 나빠."


"리타, 아르세니코."


“그래. 맞으니까 그만 불러. 그보다, 역시 네 말솜씨는 형편없네.”


"무슨, 말이야."


"하늘. 허구한 날 떠들어 댔던 구린 설명보다 훨씬 이쁘잖냐."


하늘? 왜 하늘 얘기를 하는 걸까요.


"뭐하고 서있어. 꼬맹아. 너도 이리 와."


삑.


"아저씨."


다음 이름을 기억해 내는 건 조금 더 쉬웠습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칠칠맞던 꼬맹이. 늘 울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싱글벙글 웃고 다니던 녀석.

 

사람의 악의라곤 하나도 눈치채지 못하고, 어떻게든 좋은 점만 찾아내려는 바보여서.


남자 같은 쓰레기조차도 포기하지 못한, 약속을 건네주었던 아이.


"ㅡ대시."


"응. 저에요."


말라붙었던 감정과 기억들이 하나, 둘. 찬연히 피어나 비어있던 남자를 채웠습니다.


"여기 별들이 엄청 예뻐요. 아저씨."


그리고,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약속을 기억해냈습니다.


일어나야 해. 손을 짚었던 그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정신은 또렷한데, 한편으로는 너무 졸렸거든요.


"그러냐. 예쁘다. 예쁘단 말이지. 내가 너무 늦은 거 아니냐?"


"늦긴요. 봐요. 우리 셋. 여기 다 같이 있잖아요."


삑.


"얘는 개 쪽팔리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삑.


“아이, 언니! 저도 가끔 멋있는 척 하고 싶단 말이에요!”


삑.


"이런 쓰레기한테 멋있어봤자 아무런 의미 없어. 꼬맹아."


삑.


"히잉. 그래도 연습한 건데…"


온 몸이 나른했습니다. 이 밉상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요. 


“시끄러워, 자식들아. 졸려 죽겠는데 조잘조잘대지 마라.”


삑.


“아니. 어떻게 온 자리인데 졸립다고?”


“그래. 좀, 좀 많이 걸었거든. 피곤한가봐.”


“...그런가. 너같은 겁쟁이가 용캐 여기까지 왔다면 뭐, 쉽지 않았을지도.”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힘든 일이 많이, 엄청, 엄청 많이 있었죠.


오래전, 남자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고작 삼류악당이었던 그에게, 고된 여정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습니다. 

몇백, 몇천, 몇만을 넘어 셀 수 없는 밤을 눈물과 비명으로 보냈죠.

매 순간 길을 벗어나, 도망치고 싶어 울부짖었습니다.


그 끔찍했던 기억들을 토해내는 대신,

남자는 그냥, 참으로 오랜만에 웃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럴리가. 동네 산책나온 것보다 쉬웠다. 멍청이들아.”


삑.


"으엑 괴상한 얼굴. 설마 울려는 거 아니죠?"


"난 울어본 적이 없어 등신아. 이건 웃는거야. 근육을 오랜만에 써서 그런거다."


삑.


"뭐래. 딱 죄송합니다 리타 님, 하면서 머리 박기 직전 표정이랑 똑같은데.”


삑.


"언니! 따뜻하게 말할 줄도 알아야죠! 아무리 사실이라도 아저씨는 속이 좁은 휴ㅁ, 사람이라서 삐진단 말이에요! 이럴 땐 알아도 모르는 척, 고생했어요! 하고 말해줘야 한다니까요!"

 

삑. 


“너나 해. 부끄러움 같은건 삭제된 꼬맹아.”


남자는 몸을 가누기 힘들어 털썩 누웠습니다. 

새까만 세상에 반짝이는 점들이 하나, 둘 찍혔습니다. 처음 보는 반짝임. 남자는 그게 무엇인지 금방 깨달았습니다.

꿈꿔왔던 것보다 훨씬 근사했습니다.


“그래! 사실 존나 힘들었다! 씨발!"


남자의 세상은, 그들의 세상은 침식으로 오염된 보랏빛 하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반짝임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죠.


"존나, 존나 힘들었지. 그래도 해냈나 보다."


졸음이 몰려들어, 후들거리는 팔을 쫙 벌렸습니다. 얼마나 바랬던 광경인데요.

조금이라도 더 깨있고 싶었거든요.


그토록 기다렸던, 셋이 함께 보는 하늘인데ㅡ


"리타. 대시. 보이냐? 눈이 있다면 보이겠지."


오래전, 남자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좀 늦었지만, 해냈다." 


삑.


"응. 약속. 지켜주셨네요."


누가 가 본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는 몇 번이고 넘어져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걷고, 또 걷고, 


한없이 걸어,


시곗바늘마저 전부 녹슬어 새빨갛게 변한 시간 속을 걸어나가.


남자는 빼곡히 펼쳐진 별하늘의 아래에 도달했습니다.


"어떠냐, 죽이게 멋있지. 자식들아……"


그리하여 마침내, 


남자는ㅡ




 













 

 

 

 







삑.


“윌버.”

 

두 걸음 떨어져 걷던 호라이즌은 스타게이저의 기억 메모리를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윌버. 아직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긴 세월, 둘은 서로를 죽이려 싸우고, 때로는 서로의 적을 죽이려 어깨를 맞대고 싸웠습니다.

 

“제게 윌버 웨이틀리는 오직 한 명 뿐입니다. 구제불능의 휴먼. 제거하여야 할 쓰레기. 여전히 당신을 제거 대상으로 여깁니다. 앞으로도 그러겠지요." 


그 시간 동안 남자는 작게라도 웃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에는 부디ㅡ "


호라이즌은 한 걸음을 내딛어, 남자의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좋은 꿈 꾸십시오. 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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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냥-윌 코스로 돌렸으니까 세탁기는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