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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진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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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관계를, 평화롭게 만드는 건

진실보다 거짓일 때가 많다.


거짓은 잠시 갈등을 봉합하고 불안을 잠재운다.

진실은 거짓보다 불편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진실 앞에서 눈을 감는다.

진실을 전하는 건 늘 고통스럽다."



- 박수하, '너의 목소리가 들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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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지저귀는 듯한 활기찬 웃음소리가 추억이 가득한 방을 한껏 메웠다.


둘러앉은 세 사람 사이에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주시윤은 주한과 연화와 함께 오랜만에 가족간의 회포를 풀 수 있었다. 


주한과 연화는 자신들의 영혼이 뱀에게 잡아먹혀 괴물이 됐으며, 나나하라 저택 습격전에서 주시윤을 습격한게 자신들이었음을 고백했다.


주시윤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부모님과 함께 나누었다.


힐데와 지내면서 있었던 일화들, 코핀 컴퍼니에 들어갔던 일, 임무 중에 겪었던 이야기들, 유미나라는 후배를 만났던 것.


그 소소한 찰나들은 정말 평범하면서도 영원하게 빛나서, 이야기하는 내내 주시윤의 마음 속 떼를 씻어내주었다.


주시윤은 일상의 빛에, 소박한 일화들에 둘려있는 빛 속에서 진정한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럼, 슬슬 일어날까?"



때 아닌 주한의 말에 주시윤은 고개를 돌려 답했다. 아버지를 보는 아들의 푸른 눈동자에 아쉬움이 아른거렸다.



"가셔야 하나요?"


"그럼. 아들도 같이."


"널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들이 있거든."


"저를요??"



주한과 연화는 싱긋 웃으며 주시윤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앉아있던 방을 나서서 바로 건너편에 문이 하나 보였다. 백향목 재질의 문이 그 숭고한 백색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 집에 이런 문이 있었던가? 그런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시윤은 무언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본능적인 느낌에 문을 열어젖혔다.






"....!!"



문이 열리자, 세 사람을 반기는 것은 향긋한 꽃내음과 함께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문 너머의 공간은 그야말로 별천지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온 천지가 꽃이 만발해 있었고, 개울가에는 깨끗한 물이 흘렀다.


잡티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은 그 청명한 햇살을 온 동산에 아낌없이 나눠주고 있었다.


꽃의 천국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꽃밭 속에서 뛰어노는 소리, 냇가에서 물장구를 치는 소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한과 연화와 함께 주시윤은 동산 안으로 들어섰다. 동산에 흩날리는 꽃잎을 밟자 향긋한 꽃내음이 오감을 자극했다.


얼마쯤 걸어갔을까. 곳곳에서 떠들썩하던 목소리들이 줄어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곳곳에서 빛으로 이뤄진 형체들이 주시윤에게로 서서히 다가왔다.



"아버지, 어머니. 이것들은 대체....?"



빛의 형체들은 주시윤에게로 모여들며 그의 주변을 춤추듯이 돌기 시작했다.


빛으로부터 노래가 들려왔다. 아이와 어른의 웃음소리, 활기차고 밝은 목소리가 함께 노랫가락을 꾸며주었다.



'드디어 왔어, 네가 시윤이구나, 얘기는 많이 들었단다.'



주시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빛의 형상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 섞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단순한 빛의 군체가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얼굴이 있었고, 각자 다른 외모를 갖고 있었다.


주변을 돌며 말을 거는 것이, 영락없는 사람의 행동을 연상케 했다.


더욱 많은 빛의 형체들이 주시윤에게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주시윤의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오랜 고향 친구의 귀향을 반기는 시골 마을 사람들처럼 영혼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빠가 뱀이랑 싸웠다면서? 대단해!!"


"이야, 젊은 친구가 제법이더군. 하하!!"


"용혈도 깨우지 않은 채 뱀이랑 대면했다며? 어떻게 살아 있는거야?"


"과연 훌륭하다! 용혈을 이은 자다운 용기로구나."



갑작스럽게 일약 대스타가 된 이 상황이 주시윤은 영 익숙하지 않았다.


어찌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주시윤은 영혼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명량한 아이의 얼굴, 산전수전 다 겪은 용사의 얼굴, 세월의 인자함을 품은 노인의 얼굴, 그 외에도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보였다.


선생님, 병사, 학자, 평범한 가장, 왕관을 쓴 왕, 마도사, 그 외 각양각색의 직업과 표정을 지닌 사람들.


그들 모두가 만난 적은 없을지언정 전부 아는 사람들이었다.


주시윤의 마음 한 켠에서 그리움이 솟구쳐올랐다.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화색이 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이 곳에 모인 영혼들 전부가 주시윤이 숱한 죽음의 과정 동안 받아들인 기억의 주인들인 것을.



"당신들은....!"



반가움에 젖어 아는 척을 하려던 그 때였다. 저 너머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들은 모두, 다른 세계에서 용혈을 이어온 자들, 당신의 머나먼 혈통, 저의 실패로 인해 대물림되어온 멸망에 묶인 자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남성의 목소리가 주시윤의 마음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켰다.


주시윤은 본능적으로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권위와 안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마치 인간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존재를 영접하는 듯 했다.


영혼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다른 영혼들과 달리 그 사람은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관록이라고 해야할까, 위엄이라고 해야할까,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자신의 기억 속에 이런 사람은 없었기에 곤란하다는 얼굴로 주시윤은 고개를 돌려 주한과 연화를 쳐다보았다.


주한과 연화는 그저 조용히 웃으며 대화를 나누라는 듯 손짓할 뿐이었다.


별 수 없지.



"실례지만.... 누구...?"


"....그는 이름마저 잃어버린 채,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그 흔적만을 남긴 자."

"우리의 시작이 됐으며, 용서받길 원하지 않는 자, 그럼에도 동정할 수 밖에 없는 자이지."


"조상님의 조상님의 조상님의 조상님."


"우리들의 왕할아버지세요!"


".....아하하, 네에..."



질문은 후드를 쓴 남자에게 했는데 사방에서 영혼들이 그 답을 각자의 말투대로 던져주었다. 그 광경이 흡사 돗데기 시장을 연상케 했다.


분명 조상들과 마주하는 자리라면 보다 진중하고 격식이 있을 것 같았는데, 주시윤은 그렇게 믿었던 자신이 바보였음을 실감해야 했다.


그래. 왕할아버지구나. 그리 불릴만한 존재는 자신이 알기론 단 하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요동친다. 신성한 존재를 영접이라도 하듯 마음이 활짝 열린다.


주시윤은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럽게, 그러나 경건하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그 구도자로군요. 저와 제 부모님의... 머나먼 조상 되시는."


"예. 나의 머나먼 후손이여. 처음 뵙겠습니다."



구도자는 장갑이 끼워진 양 손을 들어 주시윤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잡은 손에는 힘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굉장히 온화한 무언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뵐 수 있어서 너무나 좋군요."


"뱀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의 정체부터, 마지막 행적까지. 전부요."


"그랬던 겁니까.... 기어코 그것이 당신에게까지...."



구도자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적의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안정시키던 그의 목소리에서 이례적으로 노기가 느껴졌다.


주시윤은 후드의 어둠 너머로도 그가 분명 화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녀석이 보여준 그 모든 것이 진실인 양 믿은 채로 오랜 시간을 방황하고 말았죠."


"오, 신이시여. 어찌.... 어찌 이 작은 아이에게마저 이런...."



구도자는 주시윤의 손을 다시 잡고는 천천히 어루만졌다. 너무나 미안하다는 듯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듯이,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피가 이어졌다는 실감은 없지만, 그에게서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잠시 비춰졌다.



"만나고 싶다고 하셨죠? 절 만나러 오신 이유가 뭔가요?"


"전 당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알려드리고, 당신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촛불을 불어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풍경이 별안간 뒤바뀌었다. 주시윤은 그제야 자신이 안락한 붉은 빛의 소파에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꽃의 낙원 대신 주변의 풍경은 작은 방이 되어 있었다. 햇살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방을 비추고, 눈 앞에는 물이 담긴 유리잔이 대리석 식탁에 올려져 있었다.



"주시윤. 나의 후손. 당신에게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위해서요."


"사과...를요? 갑자기요?"


"사과 겸, 더 많은 종류의 진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영혼들은 주시윤과 구도자의 주변에 여전히 명절 날의 친척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고 구도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뱀에게 들으셨으니, 지루한 얘기는 아닐 겁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의 세계가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과정이었다.



......

.........



현자로부터 용혈의 힘을 얻은 구도자는 그 압도적인 힘으로 세상 모든 악을 지워내는데 거의 성공했다.


구도자의 힘과 그가 결집한 세력에 대항할 악의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갔다.


세상은 다시 웃음과 평화를 찾아갔다. 인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구원의 순례길 도중에 가장 믿음직한 동료를 배우자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모든 악을 멸하고, 역병의 떼를 벗겨내는 여정의 끝에, 이제는 마왕을 봉인시켜 끝을 맺는 것만이 남아있을 뿐.


구도자는 그토록 바라던 인류의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의 성공을, 인류의 생존을 허락해줄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마왕의 사도들을 전부 해치운 뒤에 마왕이 거하고 있다 알려진 제단 최심부에 들어선 그 때가 모든 엇갈림의 시작이었다.


마왕의 제단으로 알려진 곳에 마왕은 없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생각지도 못한 배신이었다.


구도자와 함께 최심부까지 동행했던 그의 약혼자가, 갑자기 돌변하여 구도자의 심장을 뒤에서 칼로 후벼파냈다.


피가 울컥거리며 흘러나왔다. 핏방울 섞인 의문이 뇌리를 가득 채워갔다.


어떻게 된거지?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그녀가 갑자기 왜?


심장이 꿰뚫리고 숨이 멎어가는 그 고통 가운데 구도자는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애초에 마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정확히는, 지금에서야 나타났기 때문에 그 동안 없는게 당연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믿었고,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자신의 약혼자가 바로 마왕이었으니까.


그래. 처음부터 계획된 배신이었다. 그것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배신.


마치 특정 기한이 되면 자동으로 설치되는 프로그램과도 같이, 그릇이 될 존재에 자신의 신격을 집어넣는다.


미리 선택해둔 평범한 사람이 구도자의 곁에 남아 평생을 함께 살아가다가, 최종국면에 다다르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덧씌워지도록 조건을 맞춰둔 것이다.


그것이 8번째 클리포트의 마왕 '아드라멜렉'의 반신이자, 구도자의 세계를 잠식해가던 마왕 '뱀'의 계획이었다.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도 그녀가 뱀의 그릇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신묘한 용혈의 힘으로도 그녀에게 뱀의 술수가 들어있음을 알아낼 수 없었다. 아니, 알아내지 못할 수 밖에.


그 제단에 가지 않았다면 뱀이 그녀의 몸을 빌어 나타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구도자의 세계는 뱀의 농간에 의해 놀아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



주시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연실색하였다.


뱀의 힘에 대해서는 직접 겪어본 바가 있음에도, 구도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자신이 겪은 것 그 이상이었다.



"그런 말도 안되는.... 놈은 신이라도 되는 겁니까?"


"신이라고 해도 되겠죠. 그것의 이름은 태초의 뱀. 최초의 인간을 유혹한 것으로 알려진 존재. 우린 그런 것과 싸우고 있었던 겁니다."



괜히 힐데가 치나츠를 몰아세우며 뱀을 죽일 수 없다고 단언한게 아니었음을, 주시윤은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인간의 인지를 한참 뛰어넘은 영역에서 수를 설계하고, 세계를 제 입맛대로 구워삶고 요리할 수 있는 존재.


그런 것을 죽여야 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억소리가 날 만큼 황당한 이야기임에도 구도자는 차분한 말투를 유지한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






(브금반복)


구도자가 정신이 들었을 때, 죽은 줄 알았던 그의 몸은 거대한 제단의 한복판에 제물처럼 묶여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 당시의 그는 약혼녀에게 심장을 꿰뚫려 적출당했음에도 죽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


몸을 비틀어 좌우를 둘러보자 약혼녀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얼굴을 봤음에도 구도자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배신당했다는 의아함과 분노가 구도자를 부채질했다.


이제 눈을 떴냐며 약혼녀가 말을 걸어왔다. 사랑스러웠던 약혼녀는 구도자의 눈 앞에 더 이상 없었다.


그가 배제하고자 했던 악의 근원, 뱀이 약혼녀의 몸을 입은 채로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릴 뿐이었다.


구도자는 뱀을 향해 물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고. 진짜 목적이 무엇이냐고.


뱀은 안될 거 없다는 듯 흔쾌히 털어놓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깃들고자 하는 그릇을, 육신을 만들고 싶어서.


구도자가 가진 용혈이라는 힘을 본 순간 저 힘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육신에 걸맞노라고. 그렇게 결정했다.


그것이 온 세상의 생명을 하찮게 짓밟고 멸해온 이유의 전부.


대를 거듭하여 용혈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가고, 그렇게 '조정한' 용혈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완전한 육신'을 만들어내는 것.


그걸 위해 구도자와 결혼을 할 운명으로 예정되어 있던 '그릇'을 움직이게 했고, 그녀가 아이를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존재를 덧씌운 그녀자신의 몸으로 그 아이를 낳아, 다른 세계로 자손을 퍼트려 용혈을 이어나가게 만든다.


용혈을 퍼트리는데 성공한 '씨받이' 들은 영혼을 먹어치워 자신의 권속으로 삼고, 그들의 용혈을 자신이 흡수한다.


대가 거듭되어가면 용혈에 자신의 클리포트 인자가 섞여가며 뱀에게 맞는 힘으로 바뀌어갈 것이다.


그렇게 클리포트 인자의 농도가 가장 짙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육신을 먹어치워 자신의 영혼 전체를 덧씌우는 것으로 이 모든 계획은 완수될 것이다.


하지만 미지의 힘을 활용하는 것은 그에 맞는 지식을 요구하는 법. 육신을 배양해내는 장기 프로젝트를 위해선 용혈의 특성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필요했다.


구도자가 바로 그 계획을 위한 교보재였다. 용혈이 어떤 힘인지를 연구하기에 딱 좋은 최적의 교과서.


그래서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다.


육신의 구성, 업의 계승, 씨받이, 영혼의 포식, 듣는 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박탈당할 만큼 너무나 끔찍한 말들이었다.


그 모든 말들을 자신의 약혼녀였던 이에게서 듣고 나니 구도자는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구도자는 미친 듯이 자신의 약혼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미쳤냐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느냐고.


그런 구도자에게 뱀은 약혼녀의 육신을 빌어 간단히 답했다.


그 어떤 사물보다도 냉담하고, 그 어떤 쾌락보다도 고혹적이고, 그 어떤 무기보다도 잔혹하게.



곧 알게 될거야.


그동안 수고했어. 앞으로도 수고해주길 바래.


우리의 귀여운 아이들을 위해.



그것이 구도자가 제정신인 채로 듣게 된 마지막 말이었다.


전부 사라진 줄 알았던 마왕의 군세는 어디서 나타난 건지 세계를 뒤덮고도 남을 만큼 범람하기 시작했다.


인세에는 지옥이 도래했다. 구도자가 지키고자 했던 생명, 인연, 가치, 그 모든 것들은 잔학무도한 힘 앞에 쓰레기처럼 부숴지고 버려졌다.


온 세상이 불타고, 살점과 뼈가 튀기고, 비명소리가 낭자하고, 피가 온 강산을 뒤덮어 거대한 바다를 이루었다.


세계는 멸망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 모든 과정을 뱀은 구도자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잔혹하게 죽어가는 순간은 특히 자세하게, 동료가 죽는 순간은 더욱 자세하게, 어린이가 죽는 순간의 비명은 더더욱 자세하게.


죽음의 순간, 순간들이 생중계되는 스너프 필름을 구도자에게 강제로 보여주었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을 찢어서라도 보게 했다.


보게 하면서 뱀은 구도자에게 계속 저주를 퍼부었다.



똑똑히 봐. 내 사랑. 이게 네가 없는 세계의 결말이야.


그 누구도 널 찾지 못하고, 그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해.


이게 너희 필멸자들의 운명이야. 넌 아무것도 지킬 수 없어.


그 감상을 들려줘봐. 어때? 너만을 위해 준비한 나의 이 계획은?


어린이가 목이 잘려나갈 때의 기분은 어땠어?

바그너가 반으로 갈라져 죽을 때는 어땠어?

우리가 자주 갔던 단골 술집의 제프리 씨가 온 몸이 찢겨나갈 때는?


그 입이 달려있을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쉽잖아?


마지막으로 널 위해 준비한 이 한 폭의 그림들의 감상을 제대로 남겨줘야 하지 않겠어?


응? 응? 응? 응? 사랑하는 나의  【Data Explunged】? 나만의 구도자님? 어때?



뱀이 구도자에게 건네는 말은 이미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한참 넘어버렸다. 구도자의 정신은 그 때 죽어버리고 말았다.


육신이 죽은 것은 그 이후의 일.


뱀에 의해 구도자의 살과 뼈는 전부 분해되어 용혈을 연구하고 타락시킬 재료가 되었다.


남은 영혼은 갈기갈기 찢기고 기워진 채 뱀의 충실한 수하가 되었다.


이제 구도자라는 존재는 뜻대로 할 수조차 없는 저주받은 육신에 갇힌 채, 뱀이 조성해 놓은 클리파 차원의 미궁을 끝없이 배회하는 짐승으로 전락했다.


평생 고통받는 나락으로 떨어져 끝없이 고통받는 가운데, 죽음과 삶의 구분조차 애매해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정신이 꺾여 죽고, 영혼이 찢겨나가고, 살이 갈려나가는 고통에도, 구도자는 후회하는 것 단 하나만큼은 멈출 수 없었다.


내가 오만했다고.


구원이라는 주제 넘는 꿈을 꾼 대가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내가 현자로부터 용혈을 받아들이지만 않았다면,


뱀에게 잡혀 그 노리개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


............



"이렇게나 수많은 사람들이, 안식을 얻지 못할 일도 없었을 텐데요."



시종일관 차분했던 구도자의 목소리가 풀피리 소리처럼 서글픈 음을 남겼다. 후드를 뒤집어쓴 그의 신형이 한순간 파르르 떨렸다.


좌우를 돌아보며 구도자는 자신의 후손들이었을 이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전부 눈에 담았다.


이 모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나라는 단 한명으로 인해 전부 원치않는 멸망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사실이 구도자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고, 또 괴로웠다.



"당신들을 멸망 가운데에 끌어들이고 말아서.... 정말 미안합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도자는 손을 배에 갖다대고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먼 옛날에 자행된 대학살을 기리는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던 국가의 지도자처럼.


겸허하게, 진심을 담아서, 공손한 자세로 다소곳이.


구도자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후손들 한 명 한 명에게 빠짐없이 사죄했다.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뱀이 한 것인데 왜 자신이 그 모든 죗값을 안으려고 하느냐고.


그러나 이미 마음이 꺾여버린 구도자에게 누군가를 저주하고 탓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와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과거를 끝없이 후회하고 정죄할 뿐.


그것이 구도자가 자신으로서 무너지지 않고 인간다움을 붙들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요, 최후의 선택이었다.


구도자가 사과를 전부 마치고 나니 시간은 한참 흘러가 있었다.


숙연해진 분위기를 깨고 처음으로 주시윤이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로, 우리의 운명이었군요. 뱀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 제물."



미궁 속에서 끝없이 헤매며 얻은 결론이 사실임이 입증되자, 그 이상 주시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은 충격을 크게 받으면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 주시윤 역시 너무나 허탈하여 화조차 낼 수 없었다.


네가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구도자의 직계 혈통이니라. 뱀은 그렇게 말했다.


어째서인지 봉인되어 있는 뱀과 너 사이에 영혼이 연결된 듯한 흔적이 있어. 루시아는 그렇게 말했다.


구도자로부터 들려온 이야기는 뱀과 루시아에게 들은 이야기와 한데 어우러지며 주시윤을 잔혹한 진실로 안내했다.


뱀이 자신의 조상임을 자처한 것은, 구도자의 피를 이은 후손들이 뱀을 모체로 한 혈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뱀과 자신 사이에 영혼이 연결된 흔적이 있다는 것은, 같은 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 그 모든 것이 거짓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진실을 가리키는 빌어먹을 이정표였다.


뱀은 그렇게 자녀들을 대대로 클리포트에 오염된 용혈을 전승, 개화시켜서 그 영혼을 잡아먹어왔다. 그리고 다음 대의 용혈 보유자에게 그 힘을 전가한다.


자신이 나나하라 저택과 그림자 미궁 속에서 봤던 괴이한 침식체들은 그렇게 잡혀먹힌 영혼이 누더기처럼 기워져 탄생한 망집의 결정체였다.


결과적으로 대가 이어질수록 클리포트 인자의 힘은 증폭되고, 용혈 본래의 힘은 그 반발로 약해져간다.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그런 방식으로 수없이 많은 이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단지 뱀이 원하는 완벽한 용혈을 가진 육신을 만들어내기 위한 부품으로 쓰이고 버려졌다.


이래서야 가축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주시윤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소파에 걸터앉았다. 단 두가지 문구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그럼 우리의 삶이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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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짜리인데 너무 길어져서 둘로 또 나눔.


현생때문에 일요일에도 계속 글을 못쓰게 되는게 너무 슬프다.


몇 주일씩이나 밀리는게 일상인 글이라도 혹여나 읽어주는 사람이 아직 있다면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