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카운터사이드 cs10.2 - Luppykiy의 일러스트 - pixiv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11편 12편 13편 14편 15편 16편

17편 18편 19편 20편 21편 22편 23편

24편 25편






(26) 교차점을 지나



--------------------------------------------------



"진성은 참으로 깊고도 오묘하니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


하나 안에 일체요 모두 안에 하나

하나가 곧 일체요 모두가 곧 하나이다."

 

- 의상대사, '화엄일승법계도' 中



--------------------------------------------------







쓰러지다시피 걸터앉은 주시윤의 곁에서 주한과 연화가 양 손을 잡아주었다.


주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생각했다.


가족을 잃고, 소중한 이를 잃고, 마지막에는 영혼이 잡혀먹힐 우리의 운명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런 가련한 운명을, 이 공허한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한참의 고민을 깨고 구도자가 말을 건넸다.



"괜찮은가요?"


"하하.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렇게나 알고 싶었던 진실인데, 이제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느낌이 들어요. 지금 드는 생각이라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정도?"



주시윤은 괜찮은 척을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보였다. 거짓말은 익숙하니까.


정작 웃음 너머 그의 마음은 타들어가고 찌들어가고 있었다.


웃음을 거두자 주시윤의 표정은 다시 혼란으로 가득 차 얼빠진 듯한 모습으로 변했다.


마음이 받은 충격은 그리 쉽게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차라리 뱀이 자신을 꼬드기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해주길 바랬다.


믿고 싶지 않다 할지라도, 덮어놓고 부정한다고 해도,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만 포기하거라. 한 많은 그 삶에는 어떤 의미도 없는 편이 나을지니.


이 자리에 뱀은 없었음에도, 주시윤은 자신의 곁에서 뱀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눈을 한 차례 질끈 감았다.


그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 목소리에 순응할 수 없어서, 주시윤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우리는... 뭘 할 수 있는 건가요? 어떻게 해도 우리의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가치가 있는 건가요? 네?"


"....."


"이런 운명 가운데 살아야 했다는 것이 원망스럽진 않으신가요? 후회되진 않으시나요


이런 결말을 맞을 수 밖에 없다면 태어나지 않는게 좋았을걸, 왜 나는 이런 저주를 머금은 채살아가야 하는걸까.


그런 생각, 한 번이라도 안해보셨나요?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맺어질 인생들이 아니었잖아요?


제 인생은, 여러분들의 인생은, 도대체.... 뭐였던 겁니까?"



주시윤은 마음 속에서 울려대는 부정적인 목소리를 지우기 위해 일부러 토해내다시피 말을 이어갔다.


깊은 그림자가 주시윤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절망을 향해 고개가 아래로 떨어진다.


구도자도, 주한과 연화도, 계속 떠들썩했던 영혼들 중 그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누가, 이 상처받은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여기 모인 모든 상처받은 이가, 무슨 자격으로 위안을 건넬 수 있을까.



"아뇨. 무의미하지 않아요."


"??"



침묵을 깨고 맑고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목소리에 주시윤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고개를 들자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가 다시 말했다.



"우리의 삶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아요. 그건 오빠의 부모님께서 가장 잘 아실거에요."


"어머니... 아버지....?"


"뱀에게 잡아먹히던 오빠를 위해 두 분께서 희생하셨을 때, 두 분께선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나요? 슬퍼하셨나요? 분노하셨나요?"


".....!"



주시윤은 주한과 연화가 보여줬던 그 당시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주한과 연화는 웃고 있었다. 자기 대신 뱀에게 영혼을 먹히고 있었음에도, 두 사람의 얼굴에는 부정적인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윤아. 사랑한다.'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도 어린 자신을 바라보며 애틋하게 읊조린 그 말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두 분께서 희생하셨기 때문에 오빠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어요. 두 분의 희생은 무의미하지 않아요. 오빠의 삶 역시, 무의미하지 않아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 이렇게.... 뱀에게 무력화되고 말았죠. 가려져 있던 기억을 찾고 싶다는 고집 때문에 부모님께 받은 목숨을 허투루 날려버렸고요.


부모님께서 희생하셨다 한들, 뱀이 의도한 대로 전 이렇게 몸을 빼앗기고 그 미궁 속을 헤매게 됐잖아요? 이게 결국-"


"자자. 이해해. 네가 어떤 기분일지. 이 자리의 누구라도 그 뱀 자식을 술로 담궈버려서 술병째로 깨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거야."



장발의 여성 모습을 한 영혼이 말했다. 알트 소대의 리더인 서윤을 연상케 하는 쾌활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내가 살았던 모든 순간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선 안 돼.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려. 그리고 그게 뱀이 가장 원하는 것일테지."


"......"



주시윤은 침묵했다. 여성의 영혼은 다시 주시윤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있잖아. 난 모든 인간의 인생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생각해. 네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고 쳐보자.


중간에 그림도구를 잃어버린다던지, 다른 곳으로 이사가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려온 그림의 의미나 존재 가치가 사라지진 않잖아?


삶 역시 그런거야. 날 포함해서 용혈을 가진 모두가 멸망에 얽메인 운명이라 한들, 그 각각의 삶에 의미가 없는 건 아니라고 봐.


이 자리의 모두가 각자의 그림들을 그려왔어. 그 그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우리 자신이야.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역시 우리 자신이고."


"그래요. 그림을 못 그리게 된다 해도 그림의 의미가 사라지진 않죠. 하지만 그 그림을 불태워버린다면, 그림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건 이미 사라진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절 포함한 여러분들 모두의 삶이, 그런 식으로 사라지고 말았는데.... 저희는...."



뒤이어 근엄한 얼굴을 한 왕의 영혼이 입을 열었다. 나이가 든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호걸과도 같은 중저음의 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후회는 말거라. 짐은 스스로 이 결말을 맞기까지, 한 나라의 왕으로서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결코 말이다. 저 아이도 그러하고, 저 예술가 소녀 역시 그러하겠지."


"세 분 모두.... 오랫동안 안식에 들지도 못하셨으면서, 후회하질 않으신다고요...?"



왕은 가엾은 눈을 하고 주시윤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 주시윤의 마음은 텅 비어있었다.


마음을 좀먹던 절망의 떼는 부모와의 만남을 통해 벗겨졌지만, 마이너스에서 0으로 회귀했을 뿐이다.


이 가련한 아이의 마음을 채우려면 다른 것이 필요했다.


아주 강한 희망의 힘, 절망 속에서 그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걸어가게 했던 힘이.



"그래. 그대의 부모님의 경우와 같다. 사랑하는 시민들을 위해, 사랑했던 신료들을 위해, 짐은 기꺼이 싸우는 것을 택했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한 명의 목숨이, 한 명의 삶이 더 이어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결과적으로 짐의 세계는 멸망하고 말았다만, 세상이 멸망했다고 해서 내가 해왔던 모든 선택과 노력에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건...."


"우리가 살아온 삶이 결과에 의거해 평가받을 뿐인, 그런 무가치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느냐? 아까 저 예술가 소녀가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


"다시 묻겠다. 남이 멋대로 규정한 결과 따위에 흔들릴 만큼, 그대가 살아온 삶이 그렇게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대가 만나왔던, 겪어왔던, 모든 인연과 추억들이, 한 순간의 백일몽으로 끝나길 바라느냐?


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왕의 영혼은 주시윤을 둘러싼 모든 영혼들을 한 눈에 담았다. 그리고 손을 치켜올리며, 우렁차게 소리친다.


같은 처지의 아이를 위해, 그가 고개를 들고 다시금 태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같은 목적지에 도달한 다른 이들이여! 그대들 역시 그러했는가? 그대들의 삶이 정녕 한순간의 꿈과도 같이 허망하다고 생각하는가!?"



한때나마 가장 영광스러웠던 자의 우렁찬 호령이 희망을 노래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있었다. 



삶이 고통으로 얼룩져 있을지라도, 그 모든 순간이 은혜였어요.


우리의 의지는 거짓된 것이 아니에요.


의미없지 않아요. 괜찮아요.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아요.


내 삶은 내 의지의 표명이었어요.


당신의 삶은 허망한 것이 아니에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결말에 이를 때까지 자신만의 색으로 자신의 삶을 물들이세요.


당신에겐 그럴 힘이 있어요.


포기하지 말아요. 미래를 향해 다른 선택을 이어가세요. 



"....!!!!"



희망의 돌림노래가 이어졌다. 주시윤을 둘러싼 영혼들은 각자 자신의 의지를 주시윤에게 분명하게 전했다.


주시윤은 들려오는 목소리들 가운데 무의미함을 입에 담는 단 하나를 찾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패배에 절어있지 않았다. 모두가 끔찍한 고통을 억겁의 세월 동안 겪어왔을 터임에도, 단 하나의 영혼도 절망을 노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수 있다는 듯, 장하다며 토닥여주듯 주시윤을 두둔했다.


의미를 정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에요. 선택을 멈추지 마세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없이 자애로운 목소리가 마무리를 장식했다. 주시윤의 어머니인 연화였다.



"괜찮아. 아들. 여기서 멈춰도 돼. 너무 지쳐서 더는 나아갈 힘이 없다면, 세상에 남은 미련이 없다면, 선조님들과 함께 여기 있어도 괜찮아."


"어머니..."


"하지만 아직 해야할 일이나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우리의 손을 잡으렴. 우리가 네 두 다리가 되고, 네 힘센 두 팔이 되어줄게. 이젠 더 이상 아들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게."



코끝이 시큰거렸고 마음이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뭉클해졌다. 주시윤은 울음이 나올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주시윤은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 이렇게나 자신을 격려하고 지지하고 있었다.


정말 자신의 삶에, 이 영혼들의 삶에 의미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들이 날 위로할 수 있겠는가?


뱀에게 당하기 전에 자신은 스스로의 의지로 진실을 알기 위해 발버둥쳐왔다. 결과적으로 주시윤은 돌아가신 부모님과 재회하고, 모든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단지 절망적인 진실의 무게 앞에 눈이 가려져 마음이 꺾였을 뿐.


그리고 삶의 의미란 것이 결과에 좌우된다면, 수도 없이 많은 실패를 겪고도 끝까지 보호자로 남고자 했던 힐데의 삶은 어떠한가?


자신의 삶이 무가치하다고 해서, 그 모든 시간에 의미가 없다고 규정짓는 것이 옳은가?


결코 아니다.


이젠 느껴졌다. 마음 속에는 공허함이 남기고 간 지독한 아픔 대신 수많은 이들의 찬사와 축복이 가득했다.


죽음 가운데 찌들어 부숴지고 뒤틀렸던 아이의 마음이, 수많은 희망의 세례로 다시 맥동하기 시작했다.


한 차례 감동의 도가니를 겪고 나자, 코를 풀며 주시윤은 먹먹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당신은 그저 조금 많이 지쳤을 뿐이에요. 시간 감각마저 잃어버릴 만큼 고통받아왔으니까."



구도자는 힘을 주어 주시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주시윤의 푸른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이 보였다. 비어있던 주시윤의 마음이 점점 채워져가기 시작했다.


구도자는 한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전할 때였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당신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고. 거기에는 사과 말고 다른 것 또한 있습니다. 후손이여. 여기가 어딘지 아시나요?"


"글쎄요. 제 정신세계라도 되는 건가요?"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뱀의 육신으로 예정되어 있던 당신이 어떻게 나의 후손들을 지금처럼 한데 모을 수 있었는지."


"네...?"



주시윤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그가 느끼기에도 확실히 어딘가 이상했다.


뱀이 준비한 미궁 속에서 수도 없이 괴물들에게 뜯어먹히고 그들의 기억을 이어받았다지만,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 걸까?


기억을 이어받았을 뿐인데, 그 기억의 주인들이 왜 여기에 머물러 있는걸까?



"뱀은 용혈을 오염시켜 영혼이 계승될수록 강해지는 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힘이 흐르는 육체는 자연히 수많은 의지를 온전히 담을 수 있게 되죠. 그렇게 만들어져야 강대한 뱀의 신격을 담을 수 있으니까요."


"네. 그렇겠죠."


"하지만 당신은 그 죽음의 미궁 속을 끝없이 헤매며, 뱀의 신격 대신 다른 것들을 몸에 담아왔습니다.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



주시윤이라는 존재는 가장 순수한 용혈을 갖고 뱀의 육신이 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뱀이 주시윤을 바로 집어삼키지 못한 것은, 힐데의 보호에 의해 그의 용혈은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몸에 적응할 시간을 확보할 겸 주시윤의 영혼을 굴복시키기 위해 뱀은 주시윤의 영혼만을 자신이 만들어낸 미궁으로 유폐시켰다.


지극히 당연한 선택임에도, 그 선택은 뱀조차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한때 용혈의 계승자였던 뱀의 하수인들이 주시윤의 영혼을 포식함으로서 잠자던 용혈을 깨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주시윤이 갇혀 있는 곳은 죽어도 죽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미궁이다.


그의 영혼을 포식하려 들었던 하수인들은 그 존재를 잃고, 주시윤의 올곧은 영혼에 의해 응당 있어야 할 곳으로 하나 둘씩 인도되고 있었다.


마치 뱀의 신격 앞에 인간의 영혼이 무력하게 잡아먹히듯, '신의 그릇'으로 예정되어 있던 주시윤의 몸은 죽을 때마다 뱀의 하수인들을 역으로 집어삼켜갔다.



"그 육신이 가장 먼저 담은 것은 주인의 신격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채 같은 피를 나눈 이들의 영혼을 하나 둘씩 모아왔죠.


당신이 이 순간까지 어떤 선택을 해왔건, 당신이 없었다면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여기에 모이지 못한 채 멸망과 절망 속에 버려졌을 겁니다."


"그런 거였군요...."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상처받고 꺾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이런 생각을 할 뿐이죠.


하지만 절 포함해서 그 의미 없이 스러져간 목숨들은 전부, 여기에 이렇게 당신 곁에 모여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덕분에요."



구도자는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락한 방이었던 풍경은 어느새 또 바뀌어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꽃이 가득한 낙원이 되었다.


청명한 하늘이 밝은 미래를 암시하듯 고고하게 흘러갔다. 구도자의 목소리를 악보 삼아 꽃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계획은 이미 궤도를 이탈했습니다. 그러니, 주시윤. 자랑스런 나의 후손이여. 이것만큼은 기억해주세요.


당신은, 이 자리의 모인 모두의 출생은 결코 저주받지 않았다는 것을.


만들어진 창조물이 전혀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신들 모두의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이,


주시윤, 당신의 존재로 인해 증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그러하다! 우리를 모은 것도 그대이며, 우리에게 안식을 허락한 것 역시 그대이지 않는가? 묻혀 사라졌을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이가 짐의 앞에 있는데, 내 어찌 후회하겠느냐?"



왕의 영혼이 내지른 호탕한 선언에 모든 영혼들이 한 마음으로 응했다.


처음으로 주시윤에게 무의미하지 않다며 말을 건넨 아이가 눈을 빛내며 주시윤에게 다가왔다.



"이제 어떠신가요? 아직도 후회하고 계시나요?"



첫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그때와 달리 주시윤의 마음은 더 이상 비어있지 않았다. 모든 진실을 깨우친 그의 마음은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1분 가량을 가만히 있다가 주시윤은 비로소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내세운 답은 처음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멋쩍다는 듯 뒷통수를 긁으며 어색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그래도 이젠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인형으로 점지되어 태어난 제가 당신들을 구해왔다면, 저에게도 정해진 길 외에 다른 길을 걸을 힘이 있다는 거니까."



각자가 그린 그림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설령 잊혀진다 한들, 그림에 남은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한, 그 연결 속에서 이어져 온 선택들은 새로운 꽃으로 피어나니까.


그래. 지금의 자신이 조상의 영혼들과 한데 모여 있는 것처럼.


주한과 연화가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을 지켰던 것처럼.


힐데가 부모이자 스승으로서 자신을 보호했던 것처럼.


운명이라는 여정 가운데에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인간이 가진 힘.


선택들이 모두 모여 결말로 이끌게 될 것이라는 루시아의 말을, 주시윤은 이제서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설령 지금껏 실패만 해왔을지라도 괜찮아. 그 선택들이 모두 모여 언젠가 너를 결말로 이끌거니까.'

"설령 지금껏 실패만 해왔을지라도, 이제 그 선택들이 모두 모여 저를 결말로 이끌어줄 테니까요."


"....!!"



구도자는 후드 너머의 어둠에서 미소지으며 주시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주한과 연화가 아들의 성장에 대견스러워하듯, 머나먼 후손이 비로소 성장했다는 사실에 그 역시 감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죠? 이 지긋지긋한 미궁에서 나갈 방법은 있는 건가요?"


"네. 저와 제 후손들 모두가 당신에게 용혈을 계승시켜 올바른 용혈의 힘을 올바르게 일깨우겠습니다.


당신의 몸은 그 누구보다 순도 높은 변종 용혈로 가득 차 있지만, 아직 단련되지 않은 상태이죠. 저와 이 후손들의 힘이 주입된다면 분명 전성기의 저 이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으니, 뱀은 아마 고순도의 변질된 용혈을 주시윤의 몸에 흐르게 만들었을 터.


뱀이 현실세계에서 주시윤의 몸에 잠재된 힘을 온전히 사용하는 순간, 그 때를 노려 주시윤의 용혈을 깨워낸다.


지나친 순수함은 되려 완전한 파멸을 부르는 법.


뱀에게 있어 고순도의 변질된 용혈은 달콤한 꿀처럼 보일진 몰라도, 이쪽과 저쪽에서 동시에 용혈을 일깨우는 순간 그 반발력으로 뱀의 영향력은 서서히 붕괴할 것이다.



구도자는 주시윤을 향해 팔을 뻗어 손바닥을 펼쳤다. 수많은 후회의 순간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뱀의 손에 의해 희생되었다. 자신은 무력하게 그 모든 비극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끝을 맺어야 할 때였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나는 그 오랜 시간들을 고통 속에서 기다려왔는지도.


구도자는 주시윤에게 말했다. 이렇게 밝게 말해본 것은 얼마만일까. 그의 목소리에는 광명이 서려 있었다.



"묻겠습니다. 주시윤. 나의 머나먼 후손이여. 그대는 용혈을 받아들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시겠습니까?"



이전의 그였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주시윤은 달랐다. 용혈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자신의 근원은 무엇이었는지, 모든 것을 명확히 깨닫고 있다.


더 이상 그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칼이 나아갈 방향을 잃으면 칼은 폭력이 된다.


그러나 칼이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으면, 그것은 정의가 된다.



"네. 덧없이 스러져간 이들을 위해,


선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른 이들을 위해,


저주받은 운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택이 가치 있었음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지금도, 홀로 세상을 떠안은 채 몸부림치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엄숙하게 주시윤은 무릎을 꿇었다. 구도자는 주시윤의 머리에 손을 위치시켰다.


주시윤은 구도자를 향해 실눈을 하고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물론, 제 개인적인 복수의 의향도 아주 없진 않습니다만. 감히 누구의 몸을 저렇게나 함부로 굴리다니, 뜨거운 맛을 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군요."



어둠 때문에 후드의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주시윤은 그 너머에서 구도자가 한껏 웃고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주시윤은 눈을 감았다. 구도자를 따라 영혼들은 모두 손을 뻗어 주시윤에게로 갖다대었다.


뒷 줄의 영혼은 앞의 영혼에게, 그 뒤의 영혼은 다시 앞의 영혼에게, 수십 수백의 영혼들이 주시윤을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원형을 이루었다.


빛이 모여든다. 빛의 군체가 주시윤의 몸을 감싸고,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이루어낸다.


감고 있던 눈이 자연스럽게 뜨이는 느낌이 주시윤에게 찾아왔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무언가가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껏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새가 지저귀는 노래, 하늘의 운율, 물이 흐르는 세레나데, 공기가 부르는 왈츠, 자연 만물이 신에게 바치는 찬가가.


다른 세상의 이들이 보고, 듣고, 겪었던 모든 기억들이, 그들의 존재가, 별개이자 하나의 형으로 느껴졌다.


이윽고 주시윤은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복장도 사뭇 달라져 있었다. 어깨를 덮고 있는 검은 케이프, 귀에 차고 있는 염주, 그리고 왼쪽 어깨에 떠오른 신성한 광륜이 권위의 빛을 사방에 뿌려주었다.


검은 빛깔의 옷을 입고 검붉은 빛깔의 검을 든 주시윤의 모습은 칠흑의 성자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푸른 눈동자가 구도자를 응시했다. 한껏 평화로워진 표정으로 주시윤은 구도자에게 말했다.



"조상님. 진심으로 당신은 제가 이 용혈을 온전히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힘에 취해 스스로를 잃고 날뛰게 되진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당신은 저와 이 아이들을 저주로부터 끊어내고, 미래로 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으니까요.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도와줄 차례입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잃지 않게 붙들겠습니다. 언제까지나."



구도자는 주시윤의 손을 힘차게 잡아주었다. 맞잡은 손으로부터 굳은 신뢰가 느껴졌다.



"이제 가세요. 다시는 이 세계에 저와 이 아이들 같은 불운한 운명이 생겨나지 않도록, 함께 만들어가죠."



다음은 주한과 연화였다. 두 사람은 질세라 아들을 양 쪽에서 강하게 끌어안았다.



"시윤아. 가서 스승님께 안부 전해드리렴. 우린 굉장히 잘 지내고 있다고."

"아들. 언제나 사랑해. 밥 잘 챙겨먹고, 좋은 친구들 사귀고, 여자친구는 절대 아빠처럼 둔한 사람 만나지 말고?"


"이 사람이, 나처럼 자식에게 진심인 아빠가 어딨다고 그래?"


"후후. 농담이란다. 누굴 만나든 응원할게."


"감사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자, 주시윤의 뒤로부터 하얀 백향목 재질의 문이 나타났다.


주시윤은 천천히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찬란한 빛이 새어나와 주시윤의 몸을 감쌌다.


문턱에서 걸음을 멈춘 그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선 더 이상 수심이나 어둠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깨달은 듯한, 홀가분하고 환한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것은 감히 불자佛者의 미소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한없이 자애로웠다.






출처 :  #카운터사이드 cs10.2 - Luppykiy의 일러스트 - pixiv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곧이어 거대한 빛의 파도가 주시윤의 몸을 세마포 천처럼 덮어 씌웠다.


꽃의 천국도, 주한과 연화도, 구도자도, 수많은 자신의 조상들도, 빛의 저 너머로 멀어져만 갔다.


주시윤의 뒤에서 짙은 죽음의 냄새가 풍겨왔다. 뒤돌아 보자 정처없이 떠돌던 그 미궁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나 무서웠던 곳인데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과 결속되어 있는 지금, 그에게 공포 따위는 적이 아니었다.


주시윤은 거대한 검집으로부터 검을 뽑아 허공에 휘둘렀다.


마치 유리로 된 바닥이 부숴지듯 경쾌한 소리와 함께, 죽음의 미궁은 공간 째로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죽음도, 절망도, 두려움도, 모든 것이 유리처럼 부숴져간다.





.....



........






제8봉인역

????

p.m.????





".....!!!"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주시윤은 의식을 되찾았다.


눈 앞에 있는 검은 뱀의 모습과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이 다시 그를 반겼다.


영혼을 먹히기 바로 직전의 그 상황으로 돌아오자, 뱀은 크게 당황한 듯 흉흉한 붉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말도 안돼...!! 네가 여길 어떻게.... 어떻게 다시 돌아온 거냐!!?"

"하하. 글쎄요~ 저희 가문이 워낙 착하게 살아서 그런가, 전생에 조상님들이 쌓아온 공덕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어떻게 그 미궁을 빠져나왔던 거지?


오만가지의 의문이 뱀을 괴롭혔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분위기에 뱀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뱀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주시윤은 농담으로 응수했다.


그의 청명한 눈은 뱀의 흉물스런 모습을 분명히 담고 있었음에도 더 이상 미치지 않았다.



"다시 만나네요. 가증스러운 조상님. 제 몸을 갖고 노시는건 즐거우셨습니까?"

"웃기는 소릴 하는구나.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 몸은 내 것이다. 원래부터 그랬고, 태고로부터 예정되어 왔노라. 패배자면 패배자답게 시체로 남아 있는 것이 좋을 것을."

"누가 그러던가요? 체험판 종료입니다. 계속 이용하고 싶으시다면 추가 이용료를 내셔야 하는데 말이죠~"



주시윤의 왼쪽 어깨에 광륜이 형성됐다.


연화蓮華라는 글자가 새겨진 거대한 칼집으로부터 붉은 빛의 장검이 뽑혀 나왔다.


악신을 마주하여 굴복했던 나약한 소년은 이제 없었다.


거대한 악 앞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평정심을 유지하는 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범어가 적혀있는 헤일로가 원반처럼 회전한다.


더러운 곳에서 피어나는 고고한 연꽃과도 같이, 저주와 악으로 뒤덮인 이 오탁 가운데에서 신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본디 그랬어야 할 형태로 올바르게 각성한 용혈의 힘은 뱀이 만들어온 클리포트 인자의 육신과 공명하며 폭발적인 성광을 뿜어냈다.







클리포트 인자 각성


Type : Chakravartin전륜성왕



붉은 빛의 장검, 어머니인 연화가 물려준 검을 뱀에게 치켜들며 주시윤은 당당하게 소리쳤다.



"당신의 목숨으로 말이죠."





----------------------------------------


뭔가 존나 많이 쓴거같은데 막상 보면 내용 ㅈㄴ 없음 ㅋㅋㅋㅋㅋ


진짜 거의 다 왔다. 이제 마지막 전투씬만 남았어!!!!!!!!!!!!!!!!



+) 예전에 썼던 것들도 전부 조금씩 뜯어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