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카운터사이드 cs10.2 - Luppykiy의 일러스트 - pix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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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구원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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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 Ardua Ad Astra,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하여


Altiora Petamus.

더 높은 것을 추구하게 하소서.


Volente Deo, Lucete Stellae."

주의 뜻대로, 별들이여 빛나라.



- M2U & Nicode, 'Myosotis'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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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이라고? 네가 나를?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놓아버렸던 주제에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제아무리 스스로 정신을 차렸다 한들 넌 어차피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지금의 제겐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까요." 


"가소롭도다. 용혈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말 몇마디만에 정신을 놓아버리는 나약한 네가, 힘이 있음을 논하느냐?"



뱀은 한껏 주시윤을 비웃었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만큼 짙은 공포가 배어나는 웃음이 이 일대에 천둥처럼 울려댔다.


인간은 신에 범접할 수 없다.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와도 같은 명제에 이 소년은 정면으로 다시 덤비려 한다.


우습지 않은가. 그렇게 철저하게 부숴지고도, 그 한계를 뼈저리게 알았음에도, 어리석은 짓을 멈추지 않는다니.


그래. 정 계속 덤비겠다면,


자신의 육신이 될 아이라지만 조금 험하게 다뤄서라도 그 의지를 완전히 꺾어놔야 하리라.



"내가 이전에 말했을 터다. 네가 가진 그 힘 역시, 그 근원은 나로부터 시작됐음을.


모든 용혈의 주인과도 같은 내게 용혈로 덤비겠다니 드디어 겁을 상실했구나."



물이 거꾸로 흐르는 소리가 주시윤의 귀를 자극한다.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공간 너머 이면의 풍경이 드러난다.


미궁에서 지겹도록 봐왔던 뱀 형상의 침식체들이 튀어나왔다.


하나 둘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 나나하라 저택을 습격했던 침식체 군단을 방불케 할 만큼 어마어마한 수가 주시윤의 주변을 둘러쌌다.


섭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존재들, 그 기이함으로부터 비롯된 공포가 주시윤의 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인간인 이상 그들을 앞에 두고 공포에 젖지 않는 이는 없다.


그것이 태생적인 한계니까.



"현실에서 한번 본 적이 있겠지. 그 때랑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 클리파 차원에서 직접 힘을 공급받는 이상, 이것들의 힘은 너희가 입에 담는 4종이니 5종이니 하는 것들에 육박하니까."



자. 나의 아이들아.


모든 독의 왕, 공포의 왕, 인간의 영혼을 포식하는 자가 그 혐오스러운 혓바닥으로 저주를 쏟아냈다.


정신을 잠식하고 물들이는 공포의 하수인들이 기괴한 비명을 질러대며 주시윤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들었다.


하나가 되자며, 그분의 뜻에 무릎 꿇으라며,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 언어의 독이 이 공간 일대를 가득 채웠다.


빠져나갈 곳 따윈 없다. 앞, 뒤, 어디를 봐도 주시윤의 주변에 있는 것은 살의, 공포, 독, 저주.


그러나 주시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그저 검을 쥔 손을 위로 치켜든다.


온 세상이 그의 죽음을 바라는데도, 마치 태풍의 눈 한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고요하고 평안하게 서 있었다.



"뭐, 몸풀기 정도 수준으론 딱 알맞겠네요."



절대적인 열세에 처한 사람에게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


주시윤은 별 거 아니라는 듯 평화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치켜든 검을 사선으로 내려 벤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은 청명한 소리와 함께 주시윤의 검은 군더더기 없는 부드러움으로 하나의 길을 그려낸다.


저 너머 다른 세상에서 강림하는 존재를 예비하는, 신성한 길을.



아미타 팔상검 阿彌陀 八相劍

도솔래의상 兜率來儀相



주시윤에게 정신이 나간거냐며 되묻기도 전에, 뱀은 자신이 하려던 말을 도로 집어넣어야만 했다.


무언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거대한 소음이 한 차례 울렸다.


단 한 번의 휘두르기로 인해 불러낸 침식체들의 대다수가 육편이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단순히 검격이었을 뿐인데도 검이 그린 궤적에 닿은 모든 침식체들은 무력하게 조각이 났다.


마치 '존재할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는 선언과도 같은 공격.


천상의 존재가 강림하는 곳에는 어떠한 악도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되니까.



"......!!!!"



한 번, 또 한 번, 붉은 장검이 휘둘러진다. 그럴 때마다 침식체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육편이 나뒹구는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침식체들도 공격에 나섰으나, 검의 근처에 있기만 해도 전부 터져나갔다.


이건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한명이 다수를 상대로 뛰어다니며 마구잡이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정신을 물들이는 공포와 영원한 죽음을 상징하는 뱀의 하수인들이, 되려 공포에 질려 죽어가고 있었다.


뱀은 아연실색하여 할 말을 잃었다.


이것이 용혈이 가진 힘이라는걸 모르지는 않았다.


본래 용혈이란 절대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피의 현현이 아닌, 사악한 존재에 한해서 극한의 성능을 발휘하는 정화병기.


주시윤이 용혈을 올바른 형태로 각성한다면 침식을 정면으로 거부할 수 있는 힘이 되리라는 것 쯤은 뱀도 알았다.


구도자가 생전에 그렇게 세계를 구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구도는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현실 세계도 아니고 클리파 차원이다. 뱀이 불러낸 이 하수인들은 자신의 근거지에서 최고의 보정을 받아 싸우고 있다.


그런 것들이 수천 마리다. 아무리 강한 인간일지라도 이정도나 되는 규모의 하수인들을 전부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하수인들이, 걸어다니는 공포이자 살아있는 맹독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학살당하며, 쓰레기처럼 바닥에 널브러진다.


위험해.


어떻게 한거지? 라는 의문 대신에 뱀은 정말 오랜만에 큰 경각심을 느꼈다.


눈 앞의 이 소년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주시윤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억겁의 세월에 달하는 동안 공들여 만들어낸 육신.


때문에 그 몸이 품고 있는 잠재력은 가히 마왕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신의 역작이 자신에게 칼을 들이민 것과 같다. 진지하게 싸우지 않으면 위험했다.


뱀은 붉은 눈을 부라리며 주시윤을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인간을 한없이 넘어선 지성이 소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래. 냉정히 따져본다면 잠재력은 잠재력일 뿐. 그 힘을 담고 있는 그릇은 여전히 인간인 채이다.


피조물은 창조물의 의지를 거부할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게다가 이곳은 클리파 차원. 봉인당했다 한들, 자신의 근거지이자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서 끌어다 쓸 수 있는 힘은 제약이 없다.


그렇다면 힘으로 눌러버리면 그만이다.


거대한 뱀의 대가리 위에 검붉은 광륜이 나타난다.


클리포트 인자가 용솟음치며 그것에게 끓어오르는 무한한 권능을 안겨준다.




괄목하라.


피조물이여.




"-?!"



주시윤은 뒤늦게서야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언제 느꼈다 한들 대항할 수 없었다.


절대자의 언령이 존재의 근원을 강제로 열어젖힌다. 뱀의 속삭임이 주시윤의 골수를 쪼개고 영혼을 더듬는다.



지금 이 순간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느냐?

모든 것이 거짓이요 죽음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노니

네가 느끼고, 보고, 듣는 이 모든 감각들이 꾸며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냐?

그대의 짐을 내려놓고 본래 하나되어야 할 주主께 모든 것을 맡기라 그가 너희에게 구원의 법도를 설파하는도다



시야가 뒤틀린다. 정신이 흔들린다. 사고가 변형된다.


떨어지는 유성, 수면 위를 흐르는 공포, 

창백한 피의 강, 별들의 탄생과 죽음, 

존재의 시작과 끝, 세계 저 너머의 진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영혼에 아로새겨진다.


여기는, 여기는, 여기는 어디지?


나는 누구지? 나는-


끝없는 의문이 주시윤에서 주시윤을 향해 던져진다.



"......."



정신을 차리자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주시윤을 덮쳤다. 큐브를 짜맞추듯 드르륵 하는 소리가 귀를 울려댄다.


어딘가 익숙한 바닥, 시야가 겨우 보일만큼 짙은 어둠, 공포가 물처럼 흐르는 듯한 이 분위기.


숨이 막힐 것처럼 탁한 공기가 호흡을 가로막는다.


눈 앞의 풍경은 주시윤이 지겨울 정도로 헤맸던 바로 그 죽음의 미궁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몸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는 점일까.


시체에서나 느껴질 법한 차가움이 주시윤을 팔다리가 잘려나가도록 강하게 옥죄었다.


느껴지는 감촉으로 보건데 목과 양 팔, 다리에 각각 사슬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몸을 동여매고 있는 것은 냉기 뿐만이 아니었다. 뱀의 거대한 육신으로 보이는 몸체가 주시윤을 옭아매었다.



".....억!!, 커억....!!!"



벗어나고자 주시윤은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몸에 아예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렇게나 넘쳐 흐르던 기운이, 마음 속의 평정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뱀의 정신간섭에도 당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허사였다는 생각이 주시윤의 마음 가운데 피어올랐다.


승리를 자신하던 주시윤의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진다.



"넌 실패했다."



뱀의 목소리가 주시윤의 양 귓가에 또렷하게 울려퍼졌다.


귀 뿐만 아니라 머릿속과 마음속, 울리는 심장 박동마저 뱀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었다.



"그저 조금의 진실을 눈에 담았을 뿐인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미쳐버리며 스스로를 포기했지."



뱀의 목소리가 상냥하게 온 몸을 더듬는다.


진실을 봤다고?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단 말인가?


구도자와 조상님들, 부모님께서 알려주신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었다고?


확신과 평온함으로 가득 차 있던 주시윤의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의심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전부 뱀의 권능 탓이었다. 인간인 이상 보다 상위의 존재가 속삭이는 정언명령은 진리로서 기능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가엾고 딱한 아이야. 가장 은혜스러운 사명을 띄고 태어난 나의 자랑스러운 후손아.


영특한 너라면 알고 있지 않느냐?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따위가 제 갈 길을 고를 수는 없는 법이라는 걸.


만들어진 존재인 너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 같은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고통스러웠겠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이, 더는 스승님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판결이."



"......"



됐다. 한없이 평온했던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제아무리 힘을 각성했다 한들 그 근본은 인간, 자신의 피조물, 예정된 육신.


나의 물건이 내 의지를 거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밀어붙인다면 그의 의지를 완전히 꺾을 수 있다.


완전히 꺾지 못하여도 충분히 타격을 준다면,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놈의 힘은 한정되어 있고, 자신의 힘은 무한하니까.


간교한 혀가 사악한 목적을 위해 주시윤을 먹으로 물들여갔다.



"그러니, 그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라. 나의 아이야.


그것이 절망이다!!!!


네가 그 미궁 속에서 수도 없이 겪었던 그것이!!


잡아먹힐 때마다 네 육체와 영혼에 새겨지던 그 고통이!!


네 마음 가운데 남아있는 그 무력함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며 네 스스로 내린 결론이!!!"



뱀의 말이 가시채찍처럼 주시윤의 마음을 마구 내리쳤다. 한마디 한마디가 들려올 때마다 마음에 크나큰 상흔이 남았다.


존재를 겁탈하고, 손상시키며, 파멸로 이끄는 저주가, 한껏 공들여진 끝에 주시윤에게 쇄도해온다.



"약하고 무력한 것. 너희는 나의 지명 없이는 가치가 없는 실패자일 뿐이다.


내가 아니었으면 넌 벌써 죽었을 것이다. 아니, 태어나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난 네 가련한 목숨을 보다 가치 있게 만들어줬다!!


네가 검술에 재능을 갖고 있었던 것도, 네가 용혈이라는 힘을 타고 태어난 것도,


전부 나의 안배에 의한 것이었다!!

넌 내 소유니라!! 내가 만든 최고의 역작이다!! 넌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네 창조주의 의지에 굴복하라!!"



"크, 커윽....!!"



호흡이 억눌리고, 숨이 막혀온다. 무언가가 속에서 근질거리며 몸을 좀먹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그런 것일까? 뱀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절망에 굴복해야만 하는 걸까?


정말 나는, 우리들은, 원래부터 그래왔듯이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 ......"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만 가던 그 때.


온통 거절과 부정을 외치고 있는 마음 속의 채널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채널만이 다른 목소리를 전하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기억하세요.



기억하라니, 무엇을?


난 뱀과 만나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지?


주시윤은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냈다.


구도자와 조상들, 부모님을 만난 것, 모든 진실을 접하고 힘을 전해받은 것.


그리고 절망에 방황할 때, 처음으로 정면을 마주보게 했던 맑은 목소리.


우리의 삶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아요.


10살 남짓해 보였던 그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자,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를 앳되고 부드러운 손이 주시윤의 왼손을 잡아챘다.


손이 맞잡아지자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힘이 왼팔에서 솟아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뱀이 속삭이는 저주의 말과 함께 아이들이 까르륵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은 하나가 아니었다. 오른손이 맞잡아졌다. 등이 떠밀려졌다. 숨을 쉴 수 없었지만 전혀 괴롭지 않았다.


아이들의 손이 몸 구석구석에 닿을 때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힘이 샘솟아났다.


아예 뱀의 저주가 들려오지 않을 만큼, 즐거운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싸우세요.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스러져간, 머나먼 조상인 아이들이 그를 응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뱀의 말이 맞다. 절망이다.


힐데와의 관계를 끊어내고, 뱀을 만나고, 자신의 선택에 좌절하고, 죽음을 겪었던 그 모든 순간이 절망이었다.


하지만 그 절망의 바다를 헤맨 끝에 그는 부모님과 재회했다. 같은 운명에 묶인 조상들을 만났다.


절망 가운데에서도 그의 조상들은 끝까지 각자의 삶을 살아갔다.


꽃잎이 선택지를 갖지 못한다고 해서, 꽃잎이 가진 아름다움이 사라지던가?


아니다.



"아뇨....! 바람에 흩날려, 선택지가 없을지라도... 꽃잎은 여전히 꽃잎입니다."



멸망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갔던 조상들의 뒷모습이 주시윤의 앞에 나타났다.

뒤이어, 누구보다 많은 상처를 안은 채 사명에 의지해 살아가는 가련한 이의 뒷모습 역시 나타났다.

새하얀 백발과 자그마한 체구, 미궁 속에서 끝없는 죽음을 겪으면서도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던 그 모습.


나의 스승님이자 소중한 보호자.


그들의 삶을,


나의 삶을,


부정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만들어진... 존재일지라도, 우리는 기적을 품고 태어나, 이 땅을 딛고... 살아갔던.... 한 명의 사람이니까...!!"



혼자가 아니다. 자신의 곁에서 항상 이끄는 선현들의 발자취가 있다.

질식해서 죽을 것 같은데도, 숨을 크게 들이쉰다.

뼈가 부숴질 것 같은데도, 주시윤은 힘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리고 양 팔을 벌려 몸을 옭아맨 속박들을 종이를 찢어내듯 시원하게 끊어버렸다.


죽음의 냉기가 계속 팔다리를 잡아챘지만, 주시윤은 굴하지 않고 모든 속박을 끊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스승님...!!'



모든 방해를 쳐낸 끝에 주시윤은 눈 앞에서 쓸쓸히 걷고 있는 힐데의 손을 붙잡았다.


힐데가 서 있던 그 자리에 힐데는 없고, 대신 연화가 물려준 붉은 장검이 나타났다.


주시윤은 검을 보자 감겨있던 눈이 뜨인 것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이젠 알 수 있었다. 이것이 환상이라는 것도, 그 속에서 자신이 나아갈 길이 어디인지도.

주시윤은 결연한 의지로 검을 잡았다.


탁한 검은빛으로 물들어있던 세계의 장막이 유리처럼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왼쪽 어깨의 헤일로를 구성하고 있는 신묘한 문자들이 그 배열을 바꿔가며 찬란하게 빛났다.



"각자의 의지를 품고 삶을 살아가는, 자유라는 기적을!!" 



정해진 방식대로가 아닌, 그저 모든 악을 몰아내겠다는 일념 하나만을 갖고,


마음이 가는 대로 기합소리와 함께 검을 휘두른다.


먼 옛날, 열반의 경지에 오른 한 존재는 주변에서 그를 시험하던 악귀들을 단 하나의 손가락만으로 전부 무릎 꿇렸다고 한다.


항마촉지降魔觸地 의 검이, 온전히 깨어난 용혈의 고귀함을 몸에 입고 그 신성한 빛을 삼라만상에 흩뿌린다.


굴복하라. 지옥의 권세여.



아미타 팔상검 阿彌陀 八相劍

수하항마상 樹下降魔相



그림자 미궁이라는 세계가, 찢어진 커튼처럼 시원하게 갈라졌다.


그저 내키는 대로 공간을 베어넘기는 참격일 뿐임에도 모든 악은 그 앞에서 존재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부숴졌다.


사방으로 파편이 휘날리며 주시윤을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갔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순리에 반하는 외도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듯이, 연기처럼.


그림자 미궁은 더 이상 그 존재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원래 주시윤과 뱀이 있었던 무채색의 클리파 차원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힘임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뭐... 라고....?"



뱀의 붉은 눈이 당황함을 머금고 흔들렸다.


자신의 환상을 부순 것이다. 그것도 인간이.


아무리 자신이 사용할 육신으로 예정되어 있었다지만, 피조물이 자신의 권위에 정면으로 저항하여 '깨부쉈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 힘은.... 대체 무엇이냐? 존재를, 영혼을 썩게 만드는 나의 인자에 그런 힘은 존재하지 않을 터...!!"


"말이 좀 틀렸네요. 당신의 인자라뇨. 당신이 용혈을 오염시켜 빚어진 가장 순수한 육신이 이런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당신의 힘이 아니라 변종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아니야!!!! 그저 인자만 갖고 있을 뿐인 피조물이 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어!!"


"이미 당신의 계획은 한참이나 엇나갔습니다. 지나친 순수함은 되려 파멸을 부른다는 말, 들어보셨나 모르겠네요."



다시금 뱀의 대가리에 드리운 광륜이 불길한 빛으로 번뜩였다.


정신을 썩게 만드는 권능이 발해지고, 영혼을 더듬고 물들이는 저주가 들려온다.


보통의 경우라면 듣는 즉시 영혼이 오염되어 미쳐버린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의 저주들이다.


그러나 들려오는 저주들은 귀에서 맴돌 뿐, 정신 너머에서 메아리치는 것 외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어째서-?!"



주시윤은 더이상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용혈을 깨워내고, 수많은 사람들의 업을 전승받아 새로이 태어난 불자佛者였다.


게다가 주시윤은 자신이 구원해낸 조상들이 지금 그와 함께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휘둘리지 않는다.


설령 잠시 흔들릴지라도, 변하지 않는 진실들을 기억한다면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에.



"소용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무저갱 밑바닥에 쳐박아버린 바람에, 거기서 떠돌며 모든 것을 알아버렸거든요.


당신이 뭐라 말한들, 어찌 진실이 흔들리겠습니까?"


"헛소리를! 내 능력 앞에 진실 같은 건 무의미하다!! 너희는 날 받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야.


창조주의 메시지를 피조물 따위가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건방진 피조물에게는 그에 응당한 벌을 내려야 한다. 반드시, 무슨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억겁에 달하는 세월을 돌아봤을 때, 지금처럼 감정이 격양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분노가 한계에 달한 뱀에게 냉철하던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기껏해야 자신들의 오랜 숙적에게 당해 존재가 둘로 나뉘고 말았을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클리포트 인자가 활성화된다. 뱀의 붉은 눈이 더욱 흉물스럽게 빛나고, 검붉은 광륜이 그 타락한 권위를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클리파 차원 전체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그 모습을 바꿔갔다.


고층 빌딩의 도시였다가, 산천초목이 우거진 자연이었다가, 황무지였다가, 세계의 역사를 파노라마로 보면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끝없는 분노가 무한에 가까운 힘을 하마처럼 삼켜댄다. 막대한 에너지가 이 일대를 진동시켰다.


뱀은 인자를 더욱 거칠게 활성화시키며 환상을 덧씌워갔다.


주시윤이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삶을 포기해버릴 만큼 잔혹한 환상을.


인간의 정신으로는 단 하나도 버텨낼 수 없는 환상을.


자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위계가 높은 환상을.


그래. 그 구도자의 정신마저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그 환상의 재림을 위해, 아예 하나의 거짓된 세계를 만들리라고.



- 8i 사마엘

권능해방 Yetsirah

오탁악세 五濁惡世



주시윤은 고개를 들고 자신을 괴물처럼 덮쳐오는 거대한 탁류의 벽을 눈에 담았다.


불길함으로 가득한 그 거대한 벽 앞에서 주시윤은 검을 뽑았다. 환상을 부숴버렸던 방금처럼 이 탁류 역시 갈라보이겠노라고.


그러나 주시윤의 검격은 탁류의 쇄도에 어떤 영향조차 주지 못했다.


추악한 오물의 격류가 그 아가리를 벌리고 주시윤을 집어삼켰다.





........



.............





정신을 차리자 주시윤은 현실에 와 있었다.


현실의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땅에는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피와 살점, 시체덩어리와 내장이 강을 이루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죽음이 가져온 침묵이 온 세계를 감싸고 있었다.



"아.... 아아아....!!!!!"



주시윤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절망감이 그의 몸을 휘어감았다.


역겨운 시체 냄새와 피의 냄새가 오감을 괴롭혔다.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슬픔이 마음을 괴롭혔다.


아 참. 그래. 이 세상은 결국 뱀에게 멸망하고 말았었지.


기억하는 대로라면, 클리파 차원에서 해방되어 몸을 되찾은 주시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뱀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뱀은 압도적인 힘으로 삽시간에 온 세상을 피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정신을 타락시키는 극독의 권능 앞에서 생명체는 저항할 수 없었으니까.


광인들의 웃음이 판을 쳤고, 인간의 자질이 타락했으며,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몇 십억의 인구가 미쳐간 끝에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죽이고, 남을 죽였다.


온 인류가 죽음의 축제를 벌이다가 세계를 죽음으로 물들였다.


그 강력하다는 전 세계 각국의 카운터들도, 델타세븐도, 펜릴소대도, '인간' 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있는 이상 예외없이 미쳐버렸다.


유일하게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존재인 힐데는 지속된 싸움 끝에 자신을 지키려다가 뱀에게 죽고 말았다.


세상은 그렇게 끝났다.



"어째서.... 어째서.....!!"



주시윤은 피와 시체의 강 가운데에 빠진 채 슬픔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뱀을 이길 수 없었던 거지? 뱀이 이렇게나 강한 마왕이었나?


클리포트의 마왕이란 것들은 다 이렇게 강한건가? 세상 하나 쯤은 손가락으로 멸망시킬 정도로?


온갖 의문이 혼자 남겨졌다는 슬픔과 함께 주시윤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왔다.



"결국 그런 결말이니라. 네가 어떤 선택을 한들, 너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 세상은 산산조각난다.


네가 사랑하는 이들은 전부 시체가 되고, 죽음만이 유일한 질서로 군림한다.


그저 가는 길이 살짝 달라질 뿐, 종착지는 바뀌지 않아."



흐느껴 우는 주시윤을 화면 너머로 관찰하듯 바라보며, 뱀은 주시윤의 귓가에 계속해서 속삭여댔다.


여기서 더 재밌는 광경을 연출해볼까.


뱀은 주시윤의 앞으로 선물을 하나 가져다주기로 했다.


피의 강을 타고 주시윤의 앞으로 무언가가 떠내려와 손에 잡혔다.


손을 들자, 손에는 유미나가 항상 하고 다니던 머리끈이 있었다.



".....!!!"



죽은 유미나의 흔적이 눈에 들어오자 주시윤은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늘어져 있던 시체들 중에 아는 얼굴들이 하나씩 보였다.


코핀의 관리부장 김하나, 레나와 클로에, 알트소대원 네 사람, 그 외에도 코핀 컴퍼니에 몸을 담은 적이 있던 이들 전부.


곧 주시윤은 분노와 슬픔이 응어리진 절규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뱀은 주시윤의 마음을 향해 계속 저주를 퍼부었다.



"넌 실패할 것이다. 넌 실패했다. 반드시 실패한다.


네 부모님을 지키지도 못했고, 네 스승인 발키리도, 그 가증스러운 늑대도,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소중한 사람들 그 누구도!!


이 광활한 세계마저도!! 네 자신의 운명도!!


그 어떤 것도 지키지 못한 채 종국에는 나를 향해 귀의할 뿐이다.


구도자가 그러했고, 그의 자식이 그러했고, 그의 피를 이은 이들 모두가 그러했다!!"



뱀은 속으로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거짓된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그것을 정신에 뒤집어 씌워 진실인 양 꾸민다.


절대적인 절망과 슬픔으로 마음을 망가뜨리고, 그 시체의 산 속에서 스스로를 져버리게 한다.


그것이 전쟁, 죽음, 분노, 몰락, 악의의 다섯 가지 오탁을 뭉쳐 권능으로 빚어낸 소세계.


지독할 정도로 많은 환상들을 응축시켜 놓으니, 제아무리 주시윤이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를 뒤덮고 있는 것은 환상을 위한 환상, 하나의 거짓된 세계였다.


 

"우둔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들아. 도대체 얼마나 시도해야 깨닫겠느냐?


얼마나 무의미한 짓을 반복해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겠느냐?


끝에 와서야 자신의 존재가 아무 의미 없음을 느끼게 되는 운명이요,


그 어떤 선택을 해도 바꿀 수 없는 운명임을,


내가 너희를 그렇게 만들었음을.


가련한 너희의 존재를 그 통곡과 한의 늪에 담궈야만 깨닫겠느냐?"



네가 정신을 타락시키는 나의 권능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마.


하지만 세계 하나를 상대로도 맞설 수 있을까?


절대자가 피조물에게 내보이는 불합리한 시험이 주시윤의 마음을 갉아먹어갔다.


세계마저 입맛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뱀에게 인간의 존재란 뜀박질하는 벼룩과도 같았다. 


이 세계는 거짓과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도, 땅도, 대기도, 모든 것이 멸망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단 한명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절망 뿐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거짓이지만, 정신을 오염시키는 권능 앞에서 거짓을 거짓이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거기서 네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뱀은 절망하여 울부짖는 주시윤을 즐겁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괜찮다. 아이는 얼마든지 엇나가면서 성장하는 법이니까.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깨달았다면 됐다.


다시 시작하면 돼.


나의 손을 잡거라.


네 부모와 네 조상들이 해왔던 대로,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는 거다.


네가 본래 누려야 할 평안함을 누리자꾸나."



이정도쯤 하면 주시윤의 정신도 굴복했을 것이란 생각에, 뱀은 마음을 꺾기 위한 마지막 수를 던졌다.


사람의 마음은 깊은 부정의 감정 속에 빠트려두면 너무나도 쉽게 망가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망가지고 나서야 회유의 손을 내밀면, 백이면 백 그 손을 잡게 된다.


마음이 부숴져서 잡거나, 더는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 자발적으로 잡거나.


정신의 독을 다루는 권능을 가진 뱀에게 있어 마음이나 영혼을 다루는건 성인이 아기 손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숱한 죽음을 겪어가며 그림자 미궁으로부터 빠져나왔다지만, 인간이 갖고 있는 원초적인 공포는 이성을 가볍게 능가하기 마련이다.


혼자 남고 싶지 않다는 갈망,


누군가 죽는 것에 대한 원망,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


그 앞에서 인간의 이성이란 휴짓조각과도 같은 것이거늘.




자아.


나의 사랑스런 아이육신야.


대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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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은 장편연재 하지마라 진짜.


뱀이랑 주시윤이랑 싸우는걸 한 편에 마무리지을려고 했는데 그거 2만자 나올거같아서 짜름.


요 근래 겜이 좀 힘들고 챈도 창작이 많이 안보이든데, 별 거 없는 실력이지만 이거라도 보고 가지 않을래??


아직도 이런 똥망상뇌절글을 계속 봐주는 카챈 카붕이놈들 항상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