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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그 길의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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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란, 혹시나의 기적을 바라는 대신 스스로에게 기적을 실현할 기회를 주는 것.


선택이란, 공허하게 남은 대의 속에 사명이라는 이름의 피를 가득 채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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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봉인역 입구

p.m.12:50

개전 후, 32분 경과






때 아닌 변화를 알아채자 전장에 있는 모든 이가 놀랐다.



"-어째서...?"



어찌 된 영문인지, 붉은 광기로 불타오르던 양 눈동자 중 한쪽에 푸르른 빛깔이 돌고 있었다.


뱀이 주시윤의 몸을 입고 현실에 강림한 지 두 번째로 맞는 돌발상황이었다.


몸이 멈춰버린 채로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닌가.



"뭐, 뭐냐...? 이 느낌은.... 아니, 아니야!! 틀려! 이건 내가 아니야!!"



주시윤은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당황한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주시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거냐....!! 네, 놈들....이... 나에게 도대체 무, 무엇을....!! 그럴리가, 그럴리ㄱ...."



말도 안 돼. 주시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질적인 감각이 몸의 반신을 멋대로 움직이려 든다. 육체의 지배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육체를 차지하고 나서 분명 주시윤의 영혼은 다른 구도자의 후손들을 처박아둔 영혼의 미로 속에 가둬놓았을 터였다.


무한한 죽음과 출구 없는 미로. 구도자의 그 어떤 혈족들도, 가장 강한 힘을 타고났던 이들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미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 주시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용혈의 계승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용혈조차 깨우지 못한 애송이가 해냈다니. 어디 인정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내 몸에 무, 슨짓을... 한거냐!! 발키리....!!!육체의 제어권이 서서히... 옅어ㅈ.... 안....돼,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이!@럴 순% 없^$어!!! 나의 몸으로 예비^#된 것을 이렇게 잃을 수는 없@!단 말이다아아아아아!!!!!"



광기어린 일갈이 연이어 봉인진을 쩌렁쩌렁 울렸다. 고함으로부터 느껴지는 분노가 공기를 잠식해갔다. 용혈이 붉은색의 거대한 링의 형태로 봉인진 전체를 둘러쌌다. 


노이즈에 절은 포효는 듣는 것만으로도 본능적인 두려움을 이끌어내어, 나나하라의 일원들을 하나둘씩 뒷걸음질 치게 했다.


경배하라, 제물을 바쳐라, 저 너머에서 오실 영광스러운 그 분께 피와 내장을. 멎었던 환청들이 다시 어딘가에서 들려오며 저주를 속삭였다.


두려움에 질리게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다. 뱀이 가진 권능인 정신 지배는 용혈을 촉매 삼아 발화된다. 간단한 힘의 해방뿐만 아니라 목소리나 눈빛에 의지를 심는 것으로도 인간의 정신은 얼마든지 주무를 수 있다.


막지 않는다면 삽시간에 봉인진 내부는 광기와 살육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그 점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치나츠였다. 주시윤의 목소리에 배어있는 광기를 느끼자 치나츠는 긴장의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이미 시조의 힘은 한계에 다다랐다. 발현한다고 한들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 정도에 그칠 터.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가문을, 사람을 지키는 것이 가주의 사명. 여력이 없다고 할지라도, 목숨을 써서라도 막아낸다.


질끈 감은 눈을 부릅뜨며 치나츠는 각오를 다졌다.



"??!"



시조의 힘을 다시 발현시키려던 찰나, 키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이질적인 무언가가 치나츠의 손을 휘감았다. 푸른 빛의 선이었다.


깜짝 놀란 치나츠는 선의 발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상처투성이인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루시아가 있었다.


정보오염으로 대다수의 능력이 잊혀졌지만, 누군가를 지원하는 정도라면.



강화결계 强化結界

축송성가 Kirchenchor



결계가 이어진 손에는 따스함과 차가움이 함께 감돌았다. 뒤이어 뜨거운 것이 치나츠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치나츠는 전에 없던 힘이 흘러 넘치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라면 시조의 힘을 마구 흩뿌려도 전혀 지장이 없을 것만 같았다.


두 소녀의 눈이 맞닿았다. 루시아는 신비한 푸른 빛의 눈으로 치나츠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두 소녀의 마음이 맞닿는다. 선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힘이 무고한 영혼들을 덮치려는 사악한 힘을 향해 그 칼끝을 돌렸다.


하나 된 의지로 기도하노니,


-그녀에게 남을 구할 힘과 능력을.

-하늘이여. 이들을 굽어살피소서.


작은 가주의 마음이 굳건한 요새가 되어 피의 저주를 가로막는다.



코토아마츠카미 天津神

사슴신의 춤 シシ神の舞



시조의 힘이 재점화된다. 치나츠의 머리에 청록빛 사슴뿔이 돋아났다. 그녀를 중심으로 신성한 바람의 기운이 거세게 몰아치며 모든 나나하라 연합원들에게 퍼져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부드럽게 피부를 감쌌다. 당장에라도 광증을 일으킬 것 같았던 이들이 이성을 되찾았다. 용혈로부터 발해진 환청과 저주들은 그 목소리를 잃고 무력하게 부서졌다. 두려움에 떨던 연합원들에게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능력 사용에 한계가 왔을 치나츠가 다시 힘을 발휘하자 힐데의 시선이 치나츠에게로 향했다. 시야 한쪽에 어딘가 익숙한 금발이 보였다.


어쩐지. 그럼 그렇지. 힐데는 반쯤 일어선 루시아를 향해 다가갔다.



"놈의 권능으로 쓰러진 게 아니었나?"


"술자가 흔들리면 독의 효과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까요. 아니면 뭐, 이대로 영원히 침묵하길 바라신 건 아니겠죠? 힐데 '소대장'님?"



반말로 일관하던 아까의 모습은 어디 가고, 루시아는 영문 모를 웃음을 지으며 존댓말로 대꾸했다. 


약아 빠진 녀석 같으니. 은근슬쩍 정체를 숨기는 루시아의 행동에 힐데는 기가 차서 웃었다.


치나츠 일행만 아니었어도 묵사발을 내버리는 건데.



"감사합니다. 루시아 양. 덕분에 모두를 구할 수 있었어요."


"후훗. 별거 아닌걸요."


"그런데 왜 아까 녀석의 움직임이 멎었던 거지?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댄 것도 그렇고."


"시윤 씨의 영혼 너머로 두 존재가 격렬히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육체의 주도권을 두고 싸우는 것 같았어요."


"....!!!"


"추정컨데, 제가 검으로부터 깨웠던 시윤 씨 부모님의 영향으로 시윤 씨가 깨어난 것 같아요. 아직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소대장님."



치나츠의 말이 들려오자 힐데의 얼굴에 화색이 드러났다. 봉인진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보여주는 밝은 얼굴빛이었다.


두 존재가 관측된다는 말은 즉, 뱀에게 잡아먹혔을 주시윤의 영혼이 아직 번듯이 살아 있다는 의미가 된다.


꼼짝없이 죽은 줄만 알고 있었던 제자가 살아 있다니. 심지어 몸을 되찾기 위해 저 너머에서 싸우고 있을 거라곤 힐데도 예상하지 못했다.


절망으로 찌들어 있던 마음이 새롭게 맥동한다. 주시윤을 구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샘솟아올랐다. 당장에라도 가서 저 육신으로부터 주시윤을 해방하고 싶었다.



"여긴 저랑 가주님께 맡기세요. 못다한 말을 마저 해야 할 테니까. 부디,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기를."


"사람들은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소대장님은 시윤 군을 구하러 가주세요."



그런 힐데의 속을 알고 있었다는 듯 루시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치후유도 치나츠의 곁을 지키며 거들었다.



"...고맙다."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힐데는 화답했다. 그 고맙다는 한 마디에는 정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와줬던 가문연합의 모든 이들을 향한 감사,


마왕을 잡겠다는 의지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 치나츠의 결의에 대한 감사,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주시윤의 육신을 잠식한 뱀과 싸우는 용기를 발휘했던 치후유를 향한 감사.


그리고 영 못미덥지만 끝까지 이쪽 편에서 남아줬던 루시아에게도.


연합원들 한명 한명의 얼굴을 전부 둘러본 후, 힐데는 뒤돌아서 주시윤을 향해 무장을 갖추고 걸어갔다. 드래곤 버스터의 두 파츠가 힐데의 등 뒤를 호위병처럼 따랐다.


먼 옛날, 여신은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시간을 멈추었다.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선택하고자 하는 자유, 그 모두를 포기한 채, 스스로를 그저 세계를 지키는 사명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옳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옥죄었다.


뱀을 향해 걸어가는 길 너머로 지금껏 겪어온 회한의 흔적들이 지나쳐갔다. 발걸음이 떼어질 때마다 대의를 위해 부수고 버려왔던 과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힐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눈 앞에 자신이 만들어왔던 과오의 총체가 보인다.



"끝까지... 끝까지 날 가로막겠다는 것이냐! 모조리 산 시체로 만들어도 시원찮을 증오스런 족속 같으니!


제아무리 네년이 뭘 한들, 이 아이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이 아이는 나의 몸이요, 나만의 것이다!!"


"....."



노이즈 섞인 목소리로 주시윤이 저주를 쏟아내는 것이 들려왔다. 뱀이 하는 말임에도 주시윤이 하는 말처럼 들려서, 한마디 한마디가 유릿조각처럼 마음 속에 박혀서 아팠다.


자신이 조금만 더 눈길을 줬다면,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들어줬더라면, 주시윤의 타락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결과일 터.


그의 저런 모습은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빚어진 그릇된 결과물. 여신에게는 그 마무리를 지을 의무가 있었다.



"넌 이미 나와의 싸움에서 한 번 부러졌다. 부러진 검을 갖고 내게 덤빈다니 그만큼 내가 우습게 보이는거냐?


이 육신을 상처입히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겁쟁이 년이, 이제 와서 뭘 하겠다고? 우습구나!!"


"...네놈 말대로다. 널 막을 힘이 있었음에도, 난 시윤이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절어 있었다."



힐데는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표정을 하고 허심탄회하게 고백했다.







수많은 인연을 부숴온 끝에 겨우 단 하나의 인연을 떠맡게 되었다. 자신의 애제자들이 남겼던 '아이를 지켜달라'는 마지막 부탁.


힐데는 자신의 방식대로 주시윤을 지키고자 애썼다. 처음으로 타인의 생계를 책임져왔고, 아이를 키웠다. 얼떨결에 부모로써의 삶을 살았다.


그런 주시윤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힐데에게 있어 세상을 잃는 것과도 같았다. 그것이 두려워서 뱀에 관련된 어떤 지식도 접하지 못하도록 했다. 용혈은 물론이고 주한과 연화의 죽음까지 주시윤이 듣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자신과 달리, 연화와 주한은 그러지 않았다. 치나츠가 그랬던가. 죽어서까지도 주시윤의 곁에 남아 저 너머에서 자식을 돕고 있었다고.


죽음 앞에서도 자식을 지키기 위해 연화와 주한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희생을 선택했다. 선택하기를 포기하고 그저 충실한 보호자로 남고자 했던 자신과는 너무나 대비됐다.


흐르는 한 줄기 눈물 가운데 힐데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진짜 부모에게는 못이기겠구나. 시윤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무작정 격리하기만 해선 안됐던 거였는데.



"하지만 이젠 아냐. 그 아이들이 너와 맞서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스승인 내가 나약하게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숙명을 따르는 일 없이 대의를 지키는 보호자로만 남는 것은 이제 질렸다. 더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멈춰 있던 그녀의 세계가 다시 움직인다. 억겁의 세월만에 움직이는 숙명의 톱니바퀴가 맥동한다.


스승으로서, 연화와 주한의 부탁을 받은 자로서, 힐데는 새로운 숙명을 자신에게 덮어씌운다.


지금이라도, 운명에 잡아먹힌 제자를 스스로 구해주리라는 숙명을 선택한다.


헤일로 한 쌍이 양쪽 어깨에 형성된다. 황금빛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난다. 드래곤 버스터의 기동음이 울려대며 전장에 한 차례 긴장감을 수놓는다.



"전력으로 간다. 맞설 수 있다면 맞서봐라."



그 말과 함께, 힐데의 몸이 한 갈래의 섬광이 되어 주시윤을 향해 날아들었다.


주시윤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땅으로부터 핏빛의 뱀 형상들이 무수히 많이 솟아올랐다. 물어 죽일 기세로 덮쳐오는 뱀의 아가리들이 힐데의 몸과 정면 충돌했다.


충돌하는 순간 힐데의 주변을 푸른 보호막이 둘러쌌다. 드래곤 버스터의 두 조율장치가 클리포트 인자를 정제하여 만들어낸 보호막의 강도는 대충 어림잡아도 인류 최경最硬의 요새. 어지간한 카운터의 힘은 물론이요, 마왕의 공격도 능히 받아낼 수 있다.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채 힐데는 그저 눈 앞의 핏빛 격류를 향해 두 검을 교차시켜 휘둘렀다.



-발퀴레 반응형 집속검



클리포트 인자가 응축된 검이 용혈과 맞닿자 격렬한 폭발음이 귀를 찢을 듯이 울렸다. 피로 이루어진 뱀의 아가리 형상들은 종잇장처럼 난도질당하여 대기 중으로 흩어져갔다.



"검이 없다고 해서 근접전을 못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구속구조차도 해제하지 않은 낯짝으로 감히 어딜 덤비느냐 발칙한 것!!"



주시윤이 들고 있던 단검에 용혈이 깃들며 대검의 형상을 취했다. 단검이 한 차례 휘둘러지고, 힐데는 몸을 우측으로 날려 간단히 피해냈다.


단검의 칼몸 부분에서 개방된 용혈이 땅을 파괴하며 허공을 긋는다. 훑고 지나간 공간은 융단폭격처럼 핏빛 폭발이 일었고, 공간을 통째로 소각시켜버렸다.


그야말로 무식할 정도의 출력. 그냥 용혈을 담아 대충 휘둘렀는데도 저 정도의 출력이다.


애당초 주시윤의 몸은 최대한 많은 용혈을 최고 출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런 육신을 뱀이 점거했으니 그 힘의 한계는 클리파를 개방하지 않았음에도 압도적일 터.


하지만 힐데에게 있어 힘의 논리는 사소한 문제였다.


압도적인 격차가 있다 할지라도, 힘 역시 싸움 방식의 하나.싸움 속에서 힘은 기술의 형태로 발현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기술로 상쇄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단검이 휘둘러지고, 핏빛의 광선이 모든 것을 파괴할 기세로 붉게 피어올랐다.


이번에 힐데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의 검 발뭉을 단검의 칼몸 뿌리 부분에 부딪혔다.


검의 충돌만으로 천지가 뒤흔들리는 소음이 일었다. 클리포트 인자끼리 서로를 잡아먹으며 공간을 칠판으로 긁는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시윤의 단검은 휘둘러지다 말고 힐데의 검에 의해 막혀 있었다. 검을 집은 두 사람의 팔이 서로를 밀어내기 위해 파르르 떨렸다.



"뭣이....?!"



이런 폭발적인 힘을 상대로는 거리를 주지 않고 근접전으로 응수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 수없이 많은 싸움으로 다져진 힐데의 전투 경험은 신속하게 답을 도출해낸다.


힐데는 남은 오른손의 검을 위에서 아래로 세게 휘둘렀다. 주시윤은 재빨리 검을 떨쳐내고 힐데와의 거리를 벌렸다. 대상을 잃은 힐데의 공격에 땅이 뒤흔들리며 파편과 흙먼지를 일으켰다.


단검에 또 다시 용혈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온전히 용혈을 끌어올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힐데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향해 또 검을 내리쳤다.


흙먼지가 아까보다 더욱 짙게 일어나 주시윤의 시야를 가렸다. 이래서야 힐데가 어느 방향에서 돌진해올지 알 수가 없었다.



"잔재주를!!"



시야를 가려봤자다. 어디서 나올지 모른다면 나올만한 모든 장소를 부숴버리면 일. 어차피 거리를 좁혀 공격해야 하는 것은 힐데다. 자신은 힘을 마구 내뿜어 힐데를 분쇄하면 그만이다.


힐데는 오른쪽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드래곤 버스터의 출력이 급격히 강해진다. 출력부가 푸른 불꽃을 일으켰고, 돌진해오던 힐데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직선에서 급격히 방향을 꺾어 공중을 날아오른 힐데는 허공을 박차고 쏜살같이 주시윤을 향해 쇄도했다. 자신의 몸과 검을 화살대로, 클리포트 인자를 화살촉으로 삼아 대지를 찍어누른다.



드래곤 버스터

점화 Ignite

파프닐의 강림



주시윤은 용혈을 최대치까지 모으지 않고 힐데의 돌진을 막기 위해 즉시 단검을 휘둘러 용혈을 방출했다.


핏빛의 광선과 푸른 빛의 진격이 부딪혔다.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거대한 소음이 봉인진을 뒤흔들었다. 클리포트 인자끼리의 충돌로 인한 강렬한 융해반응이 일었다. 대지가 둘로 나뉘고, 여러 토막으로 쪼개졌다.


힘의 우위는 여전히 주시윤 쪽에 있었는지, 힐데는 용혈의 파도를 완전히 상쇄해내지 못했다. 몸을 감싸고 있던 배리어는 빛을 잃고 희미해져 있었다.


방어수단이 사라졌지만, 전쟁의 여신은 멈추지 않는다.


주시윤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서슬퍼런 눈을 하고 힐데는 연이어 검을 휘둘렀다.


그에 대응해 아웃복서처럼 주시윤은 힐데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힐데의 검을 든 오른팔을 주먹으로 쳐낸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힐데를 향해 돌풍 같은 발차기가 가슴팍에 적중했다.



"-컥?!!"



뼈가 부러지는 무서운 소리와 함께 힐데는 봉인진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직후, 키이잉 하는 구동음이 다시 한번 들린다.


나가 떨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힐데는 쳐박힌 곳을 발판삼아 로켓처럼 날아들었다.


구하기 위해 더는 주저하지 않는다.


망설임 없는 마음과 가속도에 힘입은 발차기.


힐데의 돌진은 주시윤의 몸을 교통사고처럼 강하게 들이받아 날려버렸다.



"크아악!!! 이 망#&%할 발키리 년이!!!"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공격을 이어간다. 힐데는 재차 드래곤 버스터를 기동하여 주시윤을 추적했다.


주시윤의 주변에서 핏빛의 검들이 수없이 생성되어 힐데를 향해 기관총처럼 쏘아졌다.


사각 따윈 없다. 능력의 범용성이 불공평할 정도로 차원이 다르다.


힐데가 아무리 싸움의 도사라지만 전방위에서 날아오는 모든 공격을 쳐낼 수는 없었다. 몇 갈래의 핏빛 검은 힐데의 몸 곳곳을 찢어놓았다.


그러나 힐데의 칼끝은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주시윤을 향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속도에 의해 칼이 기괴하게 틀어진다. 펜릴 최속의 암살검이 그 어금니를 드리운다.


기술에는 기술이다. 주시윤 역시 똑같은 검술로 힐데에게 응수했다.



늑대검

잔월 殘月



틀어진 두 검이 노린 것은 서로 다른 곳.


주시윤은 힐데의 심장을, 그리고 찰나의 순간 그것을 읽은 힐데는 각도를 살짝 비틀어 공격을 쳐낸다.


동시에, 노리는 것은 주시윤의 오른쪽 어깨.


주시윤의 어깨를 힐데의 검이 꿰뚫고 베어낸다. 피가 튀었다. 검이 몸에 박히는 둔탁한 감촉이 검을 통해 전해져온다.


반면 주시윤의 핏빛 에너지 검은 힐데의 심장을 꿰뚫지 못하고 빗나가고 말았다.



"네 이년....!!!!"



어째서지? 어째서 이렇게 저항하는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시윤은 힐데를 향해 일갈했다.



"넌 아무도 구할 수 없다! 이 아이도, 저 사람들도, 이 세계조차도!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시작하겠지.


이 승산 없는 게임으로부터 얼마나 더 발버둥 쳐야 자신이 해온 모든 것이 무가치함을 깨닫겠느냐? 얼마나 많은 실패를 더 겪어야 단두대 앞에 선 네 운명을 받아들이겠느냔 말이다!!"



힐데는 오른손에 들린 검을 치켜든 채 결연하게 응답했다.



"과거의 내가 저질러온 모든 과오를, 나의 미래가 청산할 때까지다."


"큭... 큭큭.... 넌 어떤 과오도 청산할 수 없어. 단 한번도 우리와의 싸움에서 이겨본 적 없는 주제에, 네가?


감히 패잔&%병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거들먹!@거리느냐!! 그 오만한 근성을 죽여서 뜯어고쳐 주마!!!"


"죽는건 내가 아니라 너다. 뱀!!"



무색무취했던 여신의 검에 다른 의지가 깃들어 휘둘러진다. 더는 방관하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뱀을 대적한다.


두 사람 다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힐데는 늑골이 부러졌고, 주시윤은 오른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어느 한 쪽도 그 기세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힘든 검무가 펼쳐졌다. 살의로 똘똘 뭉친 강철이 자아내는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


검과 용혈이 충돌할 때마다 공간이 찢어지고 폭발이 인다. 대공동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동굴이 아니라 드넓은 공터가 되어 있었다.


광기에 찬 주시윤의 얼굴을 보자, 애틋한 감정이 힐데의 눈동자에 깃들었다.


검을 맞댈 때마다 힐데가 주시윤과 그동안 보냈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이와 함께 살아왔다.

함께 저녁을 해 먹고, 함께 검을 배우고,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 모든 시간이 너무나도 꿈 같고 눈부셔서 어제 일처럼 눈에 생생했다.


주제넘은 소원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꿈 같은 시간이 앞으로도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그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샌가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계속 말이다.



왼손의 검으로 아무렇게나 휘몰아치는 용혈의 힘을 상쇄해낸다.


시선이 쏠린 틈을 타 남은 오른손의 검을 주시윤의 몸 한복판에 찔러넣었다.



"커, 어억억-?!!"


"나약하군. 시윤이었다면 이깟 공격,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었을 거다."

"이... 이 버러지들!! 죽어 마땅한 쓰레기들이!! 용#!%서못¥@한다아아%#아아아!!!!"



힐데의 도발에 주시윤은 분노어린 고함을 미친 듯이 내질렀다. 대공동 한복판에 붉은 헤일로가 드리워졌다.


그의 주변으로부터 용혈이 태풍처럼 몰아쳤고, 지각이 뒤틀리며 붉은 피를 화염처럼 쏟아내었다.


힐데는 급히 뒤로 도약하여 거리를 벌렸따. 뒤이어 피로 구성된 온갖 형상들이 나타났다.


침식체의 형상, 인간의 형상, 각양각색의 무기의 형상이 저주를 노래하며 대공동을 수놓는다.


온 사방이 핏빛의 군세로 점철되었다. 시조의 힘으로도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질량.


기술의 영역이라 부를 수 조차 없다. 그저 재앙. 압도적인 재앙. 멸망의 징조. 어디를 둘러봐도 죽음 뿐.


그 모든 형상의 힘이 일시에 단 한 명만을 죽이기 위해, 흉악한 이빨을 드러낸 채 맹렬히 덤벼들 준비를 마쳤다.



"아무것도 지킬 수 없으리라 말했을 터!!!!!"



모든 힘을 다 짜내는 한이 있더라도, 눈 앞의 발키리만큼은 반드시 찢어발기리라.


아까 한번 육체의 주도권이 흔들린 상태여서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해지는 건 주시윤 자신이었다.


그 초조함과, 인간들에게 방해받는다는 굴욕감이 주시윤을 계속 자극했다.


이 정도로 급격하게 용혈을 활성화시켰다면 녀석도 승부를 내고자 하는 의도일 터.



"....그래. 바보 같은 제자 녀석. 슬슬 끝내자."



때가 왔음을 직감한 힐데는 소탈하게 웃음을 남겼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것을 쏟아부을 때.


힐데의 드래곤 버스터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해체되기 시작했다.


파츠가 나뉘고 재결합되어가며 두 갈래의 기둥은 그 형체를 점점 날개의 형상으로 바꾸어갔다.


이 날개는 드래곤 버스터의 모든 힘을 일시적으로 개방한 형태. 조율기로서의 성능을 버린 채, 힐데의 클리포트 인자를 날 것 그대로 방출한다.


모든 것은 오직 세계의 적을 섬멸하기 위해.



드래곤 버스터

발퀴레 윙 Valkyrie Wing

레긴Regin / 파프닐Fafnir



힐데의 등 뒤에 한 쌍의 날개가 드리운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농도의 클리포트 인자가 대공동을 가득 메운다. 


드래곤 버스터는 이제 힘을 조율하지 않는다. 그저 바깥을 향해 미친 듯이 방출할 뿐. 그 여파로 대공동 안에 폭풍이 휘몰아친다.


기계 날개를 지닌 백발의 천사가 신벌을 대행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


날개를 펼칠 뿐만 아니라, 한번 더.


발키리로서 그녀가 몸에 품고 있던 족쇄를, 벗어던진다.


힘이 모여든다. CRF든, 클리포트 인자든, 이 일대를 뒤흔들던 힘의 폭풍이 더욱 강렬해지며 동시에 힐데의 중심을 향해 집중되어갔다.


마치 온 세계를 한 아름에 품겠다는 듯 힘을 끌어당기면서도 드래곤 버스터를 통해 힘을 폭주시킨다. 압축과 반발이 이어지며 힐데를 찌그러트릴 것처럼 옥죄었다.


그 여파로 대공동 안에 폭풍이 휘몰아친다. 아니, 이 광경을 폭풍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공간이 울고 있었다. 벌판에 집결한 몇십 만 명의 대군이 부르짖는 함성과도 같이. 우우우, 하고.


공간 전체가, 그녀의 성전에 그 의지를 보태듯 함성을 내지른다. 대공동 안에 있는 모든 존재가 전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득한 옛날부터 세계를 지켜온 무적의 전사.


라그나뢰크대절멸를 정면으로 맞아 싸우기로 예비된 자.

먼 옛날, 그녀는 세계를 위해 대 절멸의 때에 기꺼이 싸우리라고, 세계의 적을 목숨을 바쳐 섬멸하리라고 맹세했다.

세계를 지켜라. 맹약을 이행하라.


스스로에게 한 맹세를 속으로 되뇌이며, 내재되어 있는 힘을 일거에 해방한다.


멸망을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순수한 힘의 화신이 눈을 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숙명을 입은 여신은 이미 빛이 바랬을 맹세에 새로운 피를 흘려 넣는다. 


이제, 새로운 맹세를 하고자 하니.

나의 사랑하는 이를 지키게 하소서.





-에인헤랴르 Einherier
개방.



레긴과 파프닐이 방출하는 클리포트 인자의 힘.


에인헤랴르로 끌어올린 발키리로서의 힘.


두 힘이 공명한다.


세계의 끝을 노래하는 전사에 의해, 세계의 끝이 한순간 재현된다.



"언제까지 날 방해할 셈이냐!!!!! 그 불경함을 죽음으로 갚게 해주마!!!"



주시윤의 핏발 선 고함과 함께 그가 만들어낸 핏빛의 군세가 일거에 힐데를 향해 달려들었다.


병기가, 인간이, 침식체가, 모든 것이 피로 이루어진 세상이 덮쳐온다.


어디를 바라봐도 죽음이, 멸망이 산재해 있다. 분명, 이런 건 세상의 끝에서나 볼 법한 절망적인 광경이겠지.


그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맞선다. 그녀는 세계를 지키는 여신이니까.


몸이 찢어져도, 지쳐도, 어떤 적을 마주해도, 그것이 신일지라도. 그저 앞으로.


세계의 적을 베어 넘기며, 지키기 위해. 그저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간다.


용혈의 총체와 힐데의 몸이 맞부딪혔다.


이미 공터로 변한 대공동의 지각이 다시 한번 뒤틀리고, 섬광과 폭음이 온 천지를 가득 메웠다.


아니, 폭음 따위가 아니다.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소리가 대공동을 무너뜨려갔다.


핏빛의 멸망에 힘의 폭풍이 정면으로 부딪혀 공간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드래곤 버스터를 폭주시켜서 클리포트 인자가 날뛰는 지금, 힐데의 존재는 한 개인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폭풍. 걸어 다니는 자연재해와도 같다.


힐데는 자신을 향해 맞서오는 모든 것들을 분쇄해나갔다.


그것이 검이든, 인간형의 존재든, 뱀의 아가리이든, 용혈로 이루어진 그 어떤 것도, 힐데에게 단 하나의 상처조차 내지 못했다.


악은 무저갱으로 굴러떨어져 이를 갈리라는 신의 말씀과도 같이, 날개를 펼친 여신 앞에서 악은 그 존재를 허락받지조차 못하고 스러져간다.


그저 바람 앞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살충제 앞의 벌레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이 역으로 용혈을 덮쳐 깨부순다.


베어내고, 부수고, 찌르고, 쳐내며, 격멸한다. 최후의 발키리가 최후를 향해 나아간다.


못다한 말을 전하기 위해, 이 모든 사악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아직, 아직이야!! 감히 내ㄱ-"


"사라져라!!!"



승부를 가른 것은, 찰나의 순간.


떠오른 추억은 하나의 힘이 되어 힐데의 등을 떠민다.




저도 스승님처럼 강해지고 싶어요.


만화 속 히어로처럼 강해져서, 스승님도 함께 지켜드리고 싶으니까요.




클리포트 인자를 응축시킨 두 검을 교차시킨다. 강철의 날개를 가진 여신은 새로운 맹세와 숙명을 양 손에 쥐고 황금빛 눈을 떴다.

새벽의 태양빛이 더욱 강하게 타오르며 타락한 세계를 비추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생명의 은혜가 주시윤과 뱀의 몸을 뒤덮어갔다.



힐데의 검이 주시윤의 몸을

주시윤의 검이 의 영혼을





베어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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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새1끼 컷!!!! 여신님 사랑해용~~~


다음 화가 마지막임. 드디어 이 기나긴 여정에 끝이 보인다....


항상 봐주는 사람들 너무 고맙고 너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