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counterside cs14 - Luppykiy의 일러스트 - pix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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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너와 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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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라는 존재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나는 마법.


사람들은 그것을 인연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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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끝맺어졌다.


클리포트 인자를 방출하던 드래곤 버스터의 두 날개도 다시 모여들며 원래의 묵직한 파츠를 이루었다. 적막감이 봉인진 내부에 내리깔렸다.


주시윤의 몸은 찢어진 책 페이지처럼 힘없이 스러져갔다. 스러져가던 주시윤의 몸은 검게 변색되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뒤이어, 기적이 일어났다.


잘려나간 몸의 한 부분으로부터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빛은 서서히 더 밝게 타올랐다.


힐데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주시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빛이야말로 자신이 찾아 헤매던, 가장 보고 싶어하던 그 사람임을.


뱀이 허물을 벗고 나오듯이, 흘러나오는 빛의 저 너머로부터 사뭇 다른 복장을 한 주시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윤아....!!"


"스승님...!"



힐데는 빛과 함께 내려오는 주시윤을 없어질 새라 재빠르게 끌어안았다. 다친 부위가 아파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주시윤의 옷자락에 머리를 파묻고 나서 힐데의 어깨가 점점 떨렸다. 히끅, 흑, 하고 힐데의 흐느끼는 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어떤 상황에도 냉정할 것 같았던 스승님이 이렇게 눈물을 보이다니? 도저히 그녀답지 않은 행동에 주시윤은 어안이 벙벙했다.



"미안, 하다.... 끅.... 으흑, 미안해... 내가, 흐윽.... 미안하다... 미안하다...."



주시윤에게 안긴 채 힐데는 닭똥같은 눈물을 흘려댔다. 그녀의 어깨는 이제 겉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세계를 떠안고 버티던 철혈의 여신은 더 이상 없다. 오직 한없이 정 많고, 한없이 여린 소녀가 있을 뿐.


억눌려왔던 감정의 급류가 오랜 시간동안 멎어 있던 마음의 샘을 건드렸고, 그 여파는 둑이 터진 것을 방불케 했다.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힐데는 거의 오열하다시피 주시윤에게 안겨 울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잃어왔던 그 모든 과거들 때문에, 자신이 주시윤에게 입혔던 수많은 상처들 때문에, 후회와 안도감이 동시에 그녀를 짓눌렀다.



"숨겨서, 미안했다.... 상처주고 말아서 미안해.... 좀 더... 더 따뜻하게 대해줘야 했는데... 흐윽, 그래야 했는데... 아무것도 못해줘서, 가장 힘들 때 도움되지 못해서, 정말.... 정말로...."



주시윤은 힐데를 끌어안았다. 자그마한 체구가 품에 쏙 들어왔다. 슬픔으로 흔들리는 어깨가 이 순간만큼은 다르게 보였다.


이렇게 자그마한 소녀의 어깨 위에 얼마나 많은 짐들이 올라가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기에, 이리도 슬피 울까.


계속 고해성사를 하며 우는 힐데를 끌어안은 채로, 주시윤은 담담하게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말들을 털어놓았다.



"전부 들었습니다. 저 너머에서. 저를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당신이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전부요."


"?!"

"괜찮아요."



주시윤은 진심에서 흘러나오는 위로의 말을 전했다. 단 네 글자의 단어가 힐데의 상처투성이인 마음에 내려앉았다.



"스승님. 괜찮아요. 최선을 다하셨던거, 알고 있으니까요."


"아니, 야.... 내가... 한과 연화를 죽였어.... 네가 혼란스러워 할 때, 널 지키겠다는 이유로... 훌쩍.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었고, 그게 네 마음을 엇나가게 만들었어. 그건.... 그건 최선이 아니야.... 시윤아. 난...."



주시윤의 옷자락을 쥔 힐데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간다. 아직도 실감이 안난다는 듯 그토록 보고 싶었던 제자의 몸을 몇 번이고 힘을 주어 손에 담는다.


주시윤의 몸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따뜻했다. 그가 해주는 말은 따스한 태양빛 같아서 너무나 안심됐다. 그러나 오히려 그 따뜻함이 힐데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너처럼 따뜻한 사람도 아니야.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죽이고 버릴만큼 냉혹한 사람이야.


아니, 사람도 아니야. 괴물이야.


그런 나를, 너는 왜-



"스승님. 사실 처음엔.... 당신을 용서할 이유를 찾고자 했어요.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아낸다면 스승님이 왜 그토록 숨기시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고. 그러면 스승님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진실에 집착했어요. 그랬건만, 하하. 스승님은 정말로 절 지키려고 모든 것을 비밀로 하셨더라고요. 누군들 알았겠나요. 여기까지의 국면이 전부 뱀이 짜놓은 판이었을 줄은."



허심탄회하게 주시윤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따지고 보면 힐데의 조치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혈통 전체가 제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미쳐버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스승님께 상처를 안겨드리고 알아낸 진실은 가혹했죠. 부끄럽게도 전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어요. 너무나도 절망적이어서, 죄송해서, 스승님의 얼굴을 도저히 다시 볼 낯이 없어서."



죽음의 미궁 속에서 주시윤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절망을 떠올렸다.


그때는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원망하지 않았던 대상은 오로지 단 한 사람. 힐데만큼은 원망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틀렸으니까.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보호해왔음을 아는 것은 이 세상에 주시윤이라는 단 한 사람 뿐이니까.


그래서 더욱 힐데를 향한 미안함이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 수없는 죽음의 순간 중에도, 스승님께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숨죽여 울고 계셨던 광경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떠올랐어요. 그걸 떠올리니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더라고요."


"윽, 흐윽.... 흑...."


"스승님. 저 어릴 때, 검술 가르쳐 주시면서 항상 하셨던 말. 기억하시나요?"



주시윤은 눈물로 범벅이 된 힐데와 눈을 맞췄다. 떨리는 목소리로 힐데가 입을 연다.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그저 앞으로.""

"네. 그래서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죽음과 절망이 가로막더라도, 신이 세계를 뒤집어 엎을지라도, 그저 스승님을 다시 뵙고 싶어서."

"그래도.... 나는....."

"스승님. 제가 저 너머에서 수많은 조상님들을 만나고 배운게 하나 있어요. 우리의 삶은 오롯이 우리의 것이며,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음을. 


그래서 저 역시 마음이 가는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스승님을 용서하리라고."


"아니야... 난,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 난 네 어린 시절을... 망가뜨린 사람, 이야. 네게서 부모를 뺏어가고, 추억을....앗아가고, 너에게 몹쓸 짓을 했고.... 그런데 어떻게...."


"네. 저 역시, 그 모든 순간들이 무척이나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용서하고 싶은 이유는 그냥...."



주시윤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얼굴에 드리운 한없이 자애로운 불자의 미소가 힐데에게 한 갈래의 빛을 선사했다.



"그냥, 지금 용서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말이에요."


".....!!!"

"그러니, 스승님도 스스로를 용서해주세요. 이젠 과거에서 그만 눈을 돌리실 때에요.


정말 저를 위하신다면, 제 어머니와 아버지께 저를 부탁받으셨다면, 다시 마음을 열어주세요.


어릴 때 제가 동경했던 스승님의 모습처럼요."



힐데는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소 짓는 주시윤에게서 스승님은 여전히 제 영웅이라고 말하는 소년 주시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작디작은 위로가 크나큰 따스함으로 상처받은 영혼을 감싸안는다. 그것만으로도 눈물이 흘러나왔고, 한 많은 숨결이 내뱉어졌다.



"그리고 전 아무리 고민해도 다른 선택은 못하겠던데요? 태어나길 이렇게 착하게 태어나서 그런지. 하하하."


"....훌쩍, 바보 같은 녀석."

"정 못하시겠다면 계속 곁에서 도와드릴게요. 스스로를 용서하실 수 있을 때까지."



힐데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어 주시윤을 바라봤다. 눈에는 절망 대신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 얼굴에 드리운 미소는 분명 구원받았다는 기쁨을 머금고 있었다.


용서해달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가슴에는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서 마음 속을 울렸다.


한아. 연화야.


시윤아.


이런 나라도 정말 괜찮다면-


힘과 용기를 내어 가까스로 힐데가 물었다.



"절대 용서받지 못할 짓이란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












(반복재생)



도쿄 에어리어

제3거주구 센트럴 타워

a.m. 10:42





푸르른 하늘 아래, 높은 건물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언제나처럼의 일상이 흘러갔다.


이면세계의 위협은 아직도 현실을 위협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일터에 나가고, 상점가에 들르고, 누군가를 만난다. 변하는 것은 없어 보이지만 그 속에서 수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금발의 소녀, 루시아 테일러는 도쿄 에어리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센트럴 타워에서 그 풍경들을 하나 둘씩 눈에 담았다. 모든 사건이 일단락되고 얼마만에 갖는 여유여서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치이잉 하고 신비한 느낌의 소리가 들렸다. 루시아의 등 뒤에서 푸른빛 결계가 문을 형성하여 공간의 틈새를 열어젖혔다.



"연락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빠르군. 고맙네."



말쑥한 정장을 빼어입은 관리자가 그 너머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왠일이야? 극한의 방구석파 인간이 밖에 나오길 자처하다니. 결과 보고서는 미리 전송해둬서 안에서도 볼 수 있었을텐데."


"사람이 가끔씩은 바깥 공기도 쐬어줘야 하는 것 아니겠나? 게다가, 자네랑은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뭐래. 바깥 공기와는 누구보다도 연이 없는 백면서생이. 관리자의 말에 루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관리자는 느지막히 걸어와 루시아의 옆에 섰다.



"그래. 이번 임무는 어땠던가?"


"좌충우돌 그 자체였지. 나나하라의 봉인지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어. 봉인지가 있던 지하 대공동이 하늘 뻥 뚫린 공터가 되버릴 정도로 싸웠으니,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할걸?" 



전후처리 논의 중, 치나츠는 봉인이 자리해 있던 곳에 봉인을 새로 짜넣을 것을 제안했다. 뱀의 기운은 사라졌지만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니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의도였다.


착실하기도 하지. 이야기하며 나나하라 자매를 떠올린 루시아의 입가가 올라갔다.



"치나츠와 치후유... 그 아이들은 상상 이상의 성장을 이뤄냈어. 처음에 네게 받았던 정보보다도 훨씬 더 말이야."


"흐음. 그건 예상 이상의 수확이로군."


"그 아이들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 속에서 희망을 불러일으켰어. 그 힘은 계속 커져서 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주겠지. 앞으로도 계속."



넓게 뻗은 하늘 너머를 응시하며 루시아는 어딘가 애잔한 미소를 지었다. 신비한 푸른 색 눈동자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시윤이는 본래의 저주받았던 육신의 윤회를 끊고 새롭게 거듭났어. 조상들에게서 계승받은 힘을 개화시켰고, 뱀을 쓰러트리며 그것의 힘마저 끌어당겼더라.


봉인돼있던 뱀은 지대한 타격을 입었어. 클리파 차원이 소멸한 것은 아니지만, 설령 부활한다 쳐도 변수로 기능할 만큼 강하진 않을거야.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상. 도쿄 에어리어는 이제 안전하고, 네가 원했던 대로 시윤이의 각성은 완료됐어. 원하던 형태일지는 모르겠지만."


"고맙군. 좋은 이야기였지만... 다른 건 없나?"


"응?"


"이번 의뢰를 받고 난 후 자네의 마음 가운데 든 생각이라던가. 그런게 따로 있었을 텐데?"



아하. 그제서야 루시아는 관리자가 왜 직접 얼굴을 보자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은 보고서로 풀어낼 수 없으니까.



"결과적으론 나쁘지 않은 체험이었어. 누구 씨 때문에 마왕 하나 심장부에 봉인하고 나서 만전도 아닌 컨디션으로 갖은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크흠흠...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알면 아카데미에 있는 아이들이나 더 신경써줘. 그게 조건이었잖아?"


"그건 걱정 말게. 카운터 아카데미는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니까."


"뭐, 그래도 때묻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 중간에 그 할망구가 방해만 안했어도 더 편했을텐데 말이야."


"그런가.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니 다행일세."


"착각하진 마. 그저 목적이 같았으니 움직였을 뿐, '인과를 쌓아올리겠다'는 네 방식에는 여전히 동의할 생각 없으니까. 타기리온이나 세라펠 같은 년들처럼 너한테 칼 들이밀지 않는걸 감사해하라고."



눈은 웃고 있는 채로, 서슬퍼런 칼날과도 같이 루시아가 답했다. 관리자는 한 수 접기로 하고 헛기침을 했다.



"하하.... 동의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매몰차게 반응하는건 나로서도 좀 마음이 쓰리군."


"푸훗. 마음에도 없는 소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만큼 냉혹한 양반이 무슨."



마음에는 안들지언정,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주시윤이나 나나하라 가문 사람들을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루시아의 차갑던 말투도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뭐.... 그래도 세상을 지켜내겠다는 네 말. 조금은 기대하고 있어. 카드를 모으겠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구나 싶더라."


"이번 세계는 기대해도 좋네. 난 주어진 여건이 있다면 항상 최선을 다하는 편이니까. 그건 그렇고, 힐데와 시윤 군은 어떤 것 같나?"


"아, 그 둘? 가면서 알려줄게."



푸른빛의 선이 도면처럼 펼쳐져 루시아와 관리자를 감쌌다. 두 사람의 모습이 투명 망토에 씌워진 것처럼 일렁이며 흐릿해져갔다.


고개를 뒤로 하면서 루시아는 힐데와 주시윤이 있을 공항 쪽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힘을 가진 이들이 앞으로도 평화와 안정으로 이 세상을 가꿔나갈 수 있기를 빌며.


이윽고 루시아가 서 있던 자리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




 

힐데는 고개를 들어 공항 천장 너머의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 너머로 그동안 힐데와 인연이 닿았던 이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듯 했다.


그들이 지었던 웃음, 그들이 했던 말, 그들의 마지막 순간, 무엇 하나도 잊혀지지 않은 채 힐데의 안에서 아직 남아 있었다.


힐데는 지갑 주머니 속에서 빛 바랜 사진을 꺼내들었다. 활짝 웃는 주한과 연화와는 달리 사진 속 힐데는 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진을 어루만지며 힐데는 그리움에 찬 미소를 지었다. 주한과 연화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스승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언제 봐도 항상 든든하군요. 하하!

역시 스승님인데요~ 이 정도 일도 거뜬히 해치우시다니.


정말 고생 많았다고, 믿고 있었다고, 사진 속의 주한과 연화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너희에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시윤이만큼은 끝까지 책임지고 내가 지키마. 이번에는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옳은 길을 향해 제대로 이끄마."



사진을 정성스레 어루만지며 힐데는 돌아오지 않을 말을 읊었다.


억겁의 세월 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청명한 하늘이 품고 있는 시간의 흐름은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변해가고, 새로운 인연이 피어나고, 그로 인해 세상은 변해간다.


절대 바뀔 것 같지 않았던 힐데의 목적도 바뀌었다. 사진을 다시 지갑 속으로 집어넣으며 힐데는 마음 속으로 바랬다.


지키기 위해 그저 틀어막는 것만이 아닌, 그 방향을 좋은 쪽으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엇차. 다녀왔습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계시나요 스승님~?"



온화한 표정을 하고 힐데는 주시윤을 바라봤다. 잠시 어딜 좀 다녀오겠다 해놓고 커피를 사러 갔다온 것인지, 한 손에는 커피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



"네 아빠와 엄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하. 그 때 말씀드렸잖아요? 부모님이라면 잘 지내고 계십니다. 만났을 때도 스승님께 안부 부탁드린다고 그러셨고요. 물론, 지금도 저희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건 다 알고 계실겁니다."


"후훗. 그래. 다행이구나."



평소라면 알 것 없다며 숨기기에 급급했던 태도는 온데간데 없었다. 말투도 냉혹했던 것이 살짝 누그러든 듯 했다.


뱀을 물리쳤던 그 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주시윤은 힐데의 변화가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시윤아."


"네?"


"그 때 말했던거, 말이다. 그.... 뭐냐, 그...."



힐데는 뭘 말하려는지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며 말을 더듬었다. 쑥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한 주시윤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때라면.... 아~ 봉인진에서 절 껴안고 대성통고ㄱ-"


"....공항 째로 부숴지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하지 않으련?"


"죄송함다."



주먹을 꺼내들기 전에 알아서 기어라. 조용한 협박에 주시윤은 바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인 모습이 마치 꼬리를 내린 강아지같았다.



"그러니까, 그.... 내가 말했던 거....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자, 잘...부탁한다....? 아니, 고맙다...?"


"푸흡, 아하하하하."


"뭐, 뭘 잘했다고 웃어! 망할 제자놈 같으니!"



놀리는 것 같은 주시윤의 웃음에 힐데는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주시윤은 생각난 것을 말하는 대신 웃음으로 때우기로 했다. 지금의 스승님은 평소랑 다르게 엄청 그 나이대 소녀같단 말이죠, 라는 말을 밖으로 꺼냈다간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을게 분명했다.


주시윤 역시 힐데가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뱀을 사멸시키고 눈물 젖은 눈으로 안긴 채 입에 담은 한 마디.



'네가 원한다면 나 역시 마음가는 대로 하도록 노력하마. 그래도 괜찮겠니?'



용서해달라는 말을 차마 입에 담지는 못하겠으니, 용기를 담고 담아 겨우 표현해낸 한 마디.


그걸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도록 이끄는 것도 재밌겠지만 구태여 그러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착한 제자니까. 



"그건 그렇고, 스승님. 커피 한 잔 드실래요? 스승님 것도 사왔습니다."



주시윤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 캐리어에서 얼음이 들은 플라스틱 잔 중 하나를 힐데에게 내밀었다. 카라멜 마끼아또라고 쓰인 라벨이 잔에 붙어 있었다.



"....카라멜 마끼아또로군."


"어이쿠. 살짝 변화를 줘봤는데. 달달한 건 싫어하시나요?"

 


씁슬한 커피만 마셔버릇했지만 힐데는 구태여 거부하지 않고 커피컵을 받아들었다.


이젠 어떤 변화가 다가오더라도 도망치지 않기로 했으니까.


소중한 이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세상을 지켜온 힘이라는 것을 이제는 아니까.


선택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바로 지금부터.


힐데는 은은하게 미소짓고는 커피컵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었다.



"아니. 맛있어. 달콤한 것도 싫어하진 않는다."

 


머금은 커피의 맛은 정말이지, 최고로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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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시작된 여정이 드디어 끝났다.....


사실 3일에 1번 1주일에 1번씩 쓰던 페이스를 유지했다면 4월 5월 정도에는 끝날 글이었음. 근데 글이라는게 결국 영감을 공급받아서 그걸로 표현해내는 건데, 올해 들어서 시험을 준비하게 되느라 책이나 드라마 애니 이런거를 하나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


그러니 여력이 부족해서 1주일 간격이 2주가 되고, 2주가 1달이 되고 ㅇㅈㄹ이 나버렸네. 4화 5화 쓸적만 해도 끝까지 지켜봐주겠다는 애들이 다 카바하고 챈바하고 그랬는데도 계속 완결을 못냈다는게 참 ㅋㅋㅋㅋㅋㅋㅋㅋ 꼬박 1년 하고도 1달 ㅋㅋㅋㅋㅋㅋㅋ 사람이 어떻게 연재를 1년 1달동안 ㅋㅋㅋㅋㅋ


다행히도 계속 지켜봐주면서 댓글 남겨주는 사람들 덕분에 끝까지 달릴 수 있었던거 같다. 봐주는 사람들 없었으면 나 진짜 이 글 완결 못지었음.


각자 바쁜 인생 사는데 기나긴 글 봐주는 것도 힘든거 알고, 댓글 남겨주는건 훨씬 더 어렵다는거 진짜 잘 알거든. 더욱이 내가 글 쓰는 화법이 부족한 내용과 표현력을 개허세로 포장하는 식이라서 내용은 한없이 길고, 보기 진짜 힘들었을거야. 지금 내가 다시봐도 그래.....


그런데도 매번 진짜 흥미롭다고, 빠져든다고, 계속 잘 보고 있다고, 끝까지 써달라고 달아준 모든 댓글들이 너무 큰 힘이 됐음. 농담 안하고 힘들 때마다 댓글 달렸던거 맨날 보고, 또 보고, 그렇게 올해를 살았다.


1주일에 단 하루 쉬는 날 악으로 깡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서 글 쓸 수 있었던건 너네들의 힘이 진짜 컸어. 어떤 댓글들은 보고 눈물이 나더라.


정말정말 많이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