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하하하..."
그래, 어쩐지. 이러니까 전부 다 꼬이지.
발레리의 존재는 중요하다. 예고르, 알렉스와 함께 클론에 지나지 않는 병사. 그럼에도 일일이 이름이 붙여진 병사.
류드밀라의 그 타고난 선함. 그리고 알렉스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듬직한 방패병.
이름조차 없는 클론병에, 류드밀라의 자애가 이름을 주었다.
같은 폐품인 알렉스가 그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반인 병사.
일반인이니까, 받칠 수 있었던 죽음의 가치. 고결한 희생.
나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걸 향해 뻗는 손.
그런 네가 없었으니까 지금 이 이야기는 제대로 굴러 갈 리가 없다.
너는 누구보다 용맹하게, 앞서서 전투에 나서야 한다.
-어차피 침식되어 가는 몸, 죽음도 두렵지 않다!
라고, 포대를 지키며 전선을 열어 젖혔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있네. 발레리."
뭐가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이러니 그렇게 될 수 밖에.
류드밀라를 도와, 마지막까지 그 인간성을 붙잡게 했어야 한다.
정신마저 오염 되는게 두려웠던 류드밀라의 판막이 되었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손을 모은다. 얼어붙어서 새빨갛게 변해가고 있는 손을 모으고서 고개를 숙인 뒤, 뜯어낸다.
뜯어내서, 수트를... 입는다.
몰려드는 온기. 지이이잉, 하고 기동하는 내부 오퍼레이션 시스템.
익숙한 지아링, 아니 모네카의 목소리.
-구관리국 메이즈 전대원 Val-8 에서 귀하에게로 인증 완료. 생체유지 장치 기동.
주변 침식파 저해를 위해 침식 방호 기능을 활성화 합니다.
이제보니 이 수트는 좀 망가졌네.
침식파는 바깥도 그렇지만, 나도 똑같다. 변형이 일어나고 있는 말기는 아니지만, 이미 정신이 맛이 가기 시작했으니까.
그래도...
몇 번이나, 도움 받았다. 아직도... 떠오른다.
"할머님은 꽤 억센 분이셨지. 마을에 있는 양아치 같은 놈들도 할머님을 보면 마치 병정인형처럼 허리를 굽혔어."
있지도 않은, 자기 것도 아닌 기억을 풀어내며 웃고 있었지.
그건 어쩌면 너에게 있어서 처음 한 대화. 사실, 나도 똑같아. 손목을 긋던 순간부터, 엄마도.. 혹은 다른 누구와도.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거든.
어쩌면 너와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었네.
결국 내가 내 마음대로, 너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었을 뿐.
그래, 내가.... 내가...!
짓밟았고, 원래 가야 할 너의 마음을.... 20년 간 이어져 온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너는...
“그게 내… 원본의 사념이 아닌… 순수한 내…감…”
영원히 이어지는 마음 같은 건 없다.
슬픈게 언젠가 끝이 나는 것처럼, 기쁨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잔뜩 조롱하고, 짓밟고, 침을 뱉은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무 염치가 없다.
아무도 용서 안 해 준다. 나라도 용서 안 해준다.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그보다 더한 걸 니가 보여줬다.
'나는 있지, 사실 너희들이 부러워.'
그러니까...
"발레리... 내가 너네 전대장을 도울 수 있게, 힘을 빌려주라."
다시 한 번 손을 모은다.
합장인지 아니면 기도인지 모른다.
눈밭 위에 얼어붙은 사체를 향해서, 빌고 있다.
영원히 가는 슬픔은 없다. 하지만, 영원히 남는 상처는 있다.
사람의 마음은 소모품이라서 한 번 닳아버리면, 절대로 예전처럼 돌아 갈 수 없다.
내가 만난 그림자 류드밀라는 이제 없다. 내가 죽으면 그 때까지의 사람들은 사라진다. 전부 되돌아간다.
하하, 하하하... 마치, 롤이라도 하는듯이.
좆같던 서폿도, 캐리하던 서폿도. 전부 한 번 스칠 뿐이다.
그런데, 그 한 번으로 얼마든지 생각은 달라 질 수 있다고. 허황된 결심을 지금, 여기 세운다.
그래,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남아. 닳아버린채로 영원히 남아.
거기에서 허우적 대다가 빠져나오지 못하면 쓰레기가 된다. 늪처럼 빠져든다.
하지만 아래에서만 잡아 당기는 것만은 또 아니다. 위에서도 낙인을 찍고 밟아대기 시작하거든.
그래, 뼈가 저린다. 그 정도로 알고 있다. 방구석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혐오만을 토해내고, 불어내는 삶.
아무것도 안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성의한 인생이 지금 나에게 덤벼들고 있다.
아무것도 안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에게 분노하고 있다.
아무것도 안했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스스로가 모든 걸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그렇게 끝나서 안 된다고 생각해.
그 노력이, 그 한줄기로 이어진 사람의 마음은. 결코 무너져선 안 되는 거야.
그게 보답받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그게...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는 세상은 안 된다.
그런 거 용서 못 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것만큼은... 제발... 제발...
빌듯이...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나는... 아아, 나는...
아~ 알렉스----------------------------
그리고 류드밀라, 네 마음이 올바른 결말을 맞이 할 수 있게
지금만은, 단 한번만큼은 아득바득 노력 해볼게.
-19
나는 발레리.
이 이야기를 제대로 굴러 갈 수 있도록.
메이즈 전대원들이 전부, 올바른 결말을 맞이 할 수 있도록.
움직이는 톱니바퀴가 될 거야.
그러니까, 제일 먼저...
방해되는 '나'부터...
해치울거다.
푹, 하고 꺼지는 눈 위를 밟는다.
나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발을 떼자마자 끌어내릴듯이 꺼지기 시작한다.
괜찮아.
사라지지 않는 아픔이 있다면,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마음도 있다는 거니까.
그 바람을, 꺼트리게 둘 순 없으니까.
지금,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