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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알렉스



최전선에서 인류를 지키던 메이즈 전대의 부전대장은 인류가 비로소 안전해진 지금,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음악과 함께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사실 전투용 클론으로 태어난 자신에게 음악적인 재능이 있음을 알아차린건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재능을 증오했다.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음악을 활용하던 엘리시움 필하모닉이 생각나서,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이 그 빌어먹을 엘리시움에 의해 탄생했기에 더욱.


그랬던 알렉스의 생각은 다시 만나게 된 메이즈 전대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며 점점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사람을 파멸시키기만 했던 음악은 사람을 치유해줬다. 이면세계와의 전쟁이라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이들에게 알렉스의 연주는 순간의 안식처와도 같았다.


괴로운 비명만을 부르짖게 했던 음악은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했다. 어떤 사람도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알렉스의 연주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음악은 새로운 추억들을 가져다주었다. 전대원들과 이면세계 주둔지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웃고 떠들던 일, 연주를 들을 때마다 웃어주던 사람들, 자신의 음악과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난 것.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을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만들어가고 싶어.' 프러포즈 때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알렉스는 지체하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결혼에 골인, 전선에서 전대원들을 지켜왔던 용맹한 전사는 이제 가족을 지키는 자상한 어머니가 되었다.


처음 아이를 가졌을 때, 알렉스는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무가치한 생명으로 태어난 자신이 새로운 생명을 품을 수 있다니. 이런걸 상상이나 해봤을까. 엄마가 됐다는 기쁨에 그녀는 남편을 붙잡고 30분을 내리 울어야 했다.


아이들은 알렉스를 따라서 은하수가 내리는 듯한 은발을 갖고 태어났다. 성격도 엄마를 닮았는지 굉장히 온순했다.


애틋한 눈으로 알렉스는 아이들의 볼에 손을 댔다. 두 아이 모두 뽀얀 볼에 손가락을 대자 엄마의 손길임을 알고 있는 것인지, 손으로 알렉스의 손가락을 살포시 쥐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해 알렉스는 정성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그래. 처음은 노래부터였다.


아이들이 잠에 들때마다 알렉스는 자장가를 계속 불러줬다. 솔솔 부는 봄바람과도 같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아이들을 물 흐르듯 꿈나라로 인도했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된 다음은 기타였다.


수려한 선율과 함께 간드러지는 콧노래는 덤. 아이들은 엄마인 알렉스가 기타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를때면 울던 것도 멈추고 빵싯빵싯 웃어댔다.


아무리 힘들어도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두 아이를 모두 능숙하게 키워내는 그녀의 모습은 엄마를 뛰어넘은 그 무언가와도 같았다.


모성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형상을 갖는다면 알렉스의 존재로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음악과 함께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음악의 효능 덕분인지, 두 아이는 감정표현이 풍부하고 끼가 많은 성향을 갖게 되었다.



"암마! 사아해!"


"까아! 까아!"


"....!!??"



그것이 기타 연주를 하다 말고 알렉스가 처음으로 듣게 된 아이들의 언어였다.


사랑한다고. 아직 미숙한 언어로 어렵사리 표현하는 아이들의 새하얀 마음이 너무나 새하얗게 다가왔다.


목이 메여왔다. 기타를 살포시 내려놓고, 알렉스는 두 아이의 앞에서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는 두 아이를 살포시 품에 끌어안았다.



"암마?"


"까아?"


"응.... 엄마도, 엄마도 정말 사랑해...."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미소를 띄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식 앞에서 버틸 수 있는 부모가 존재할까? 그 자리에서 알렉스는 감동이 목까지 차오른 나머지, 아이들을 끌어안고 남몰래 눈물을 글썽였다.




시간은 빠른 곡조의 노래처럼 지나갔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아이들은 엄마의 악기 연주에 맞춰 함께 노래부르는 것을 즐겼다.


언어 공부를 알렉스와의 노래를 통해 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두 아이는 이 노래를 불러달라, 저 노래를 불러달라며 알렉스를 보채기에 바빴다.



"자~ 얘들아? 다음은 무슨 노래가 듣고싶니?"


"엄마! 페x페x 페로x 노래 쳐주세요!!"


"떴다떴다 썬더볼트 쳐주면 안대요 엄마??"


"후훗. 너무 보채진 마렴. 두개 다 해줄테니까. 어디보자. 일단은...."



이제 음악은 저주가 아니라 알렉스의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과거에는 메이즈 전대원들과 코핀 컴퍼니의 사원들이 연주를 들었고, 전쟁이 끝난 지금은 그녀의 남편과 아들, 딸이 연주를 듣는 관객이었다.


오늘도 그녀의 기타는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사랑을 노래한다.









15. 류드밀라



전쟁이 끝났다. 류드밀라 역시 침식을 온전히 제거할 수 있게 되며 새로운 삶의 빛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기적이었다.


온전한 인간으로 돌아온 그녀가 시작한 일은 의학 공부였다.


류드밀라가 구관리국의 신입 카운터였던 시절, 그녀는 피만 봐도 비명을 지르던 유약한 성격을 가진 탓에 평소에 지망했던 의료지원 병과를 가지 못했다.


그러나 데몬타입 침식체이자 관리자의 에이스 카드로서 너무나 많은 전투를 치뤄온 탓에, 류드밀라 본인도 모르는 사이 피에 대한 공포증은 상당히 마모되어 있었다.


그렇게 류드밀라는 새로 얻은 삶으로 의사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한술 더 떠서, 그녀가 가진 능력이 의사라는 꿈에 날개를 달아줬다.


그녀의 염동력이 자랑하는 정밀성과 출력은 이미 인류 정상 급. 이를 이용해 사람의 손보다 훨씬 정밀한 수술을 집도하는 것이 그녀의 특기였다.


꿈을 향한 열정과 능력이 만나자 폭발적인 시너지가 일어났다. 의사 면허를 취득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류드밀라는 내과 수술 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의사가 되었다.


복사가 되다시피 늘어나는 명성과 재력을 통해 류드밀라는 자신을 여전히 따르고자 하는 메이즈 전대원들을 모아 거대한 종합병원을 차렸다.


그림자 세계에 살던 전대원들의 새 거처는 병원이 되었고, 병원은 순식간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정밀한 염동력을 이용해서 불가능하다는 수술을 몇 번이나 성공시킨, 의학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수술의 신. 신의神醫.


그렇게 온 세계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신의 손이라고 불릴 만큼 최고의 기술을 가진 그녀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그것도 의사로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손기술이, 아이러니하게도 류드밀라의 최대 최악의 약점이었다.






"엄마..... 이게 뭐야....?"


"응? 왜그래, 딸?"



류드밀라의 딸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하고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에는 색종이들과 종이접기의 결과물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종이접기로 만든 것들의 더미에는 하나같이 무엇인지 알아보기조차 힘든 괴이한 형체들로 수북했다.



"아니... 엄마. 이게, 이게 대체... 뭘 만든거야?! 종이학을 접어달라니까 왠 이상한 형체들이 있는데? 이거 학이 맞기는 한거야?"



황당한 눈초리로 딸아이는 류드밀라에게 따져물었다.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지금은 방학이 거의 다 끝나가는 기간이었다. 곧 개학을 앞둔 초등학생인 딸은 류드밀라에게 방학숙제인 종이학 100마리 접기를 같이 도와달라며 부탁했다.


마침 류드밀라도 휴가 기간이겠다. 딸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딸의 방학숙제를 도와주겠다고 선뜻 나선 류드밀라였지만, 어째 이상한 흐름으로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 내가 못살아 진짜!! 나 내일까지 숙제 해가야 되는데 이렇게 접으면 어떡해 엄마!!"



류드밀라의 딸은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을 냈다. 100마리다. 10마리도 아니고 무려 100마리.


그걸 오늘 내내 접어야 했는데, 가장 믿고 있던 엄마의 손재주가 이렇게 궤멸적이리라곤 예상치도 못했다.


류드밀라는 미안해하는 눈초리로 딸에게 어색하게 사과했다.



"미안해 딸... 엄마가 접는다고 접은건데, 이게 생각보다 잘 안되더라. 하하하...."


"안되겠다. 엄마. 나랑 같이 접자. 어떻게 하면 종이학이 저런 괴생물체로 변하는건지 진짜 이해가 안돼. 직접 봐야겠어."


"얘도 참! 엄마는 학을 생각하고 접은건데. 봐봐. 이게 날개고, 이게 부리고..."


"아니, 아니 엄마. 이게 어딜봐서.... 아니다. 일단 한번 보여줄게."



류드밀라는 자신이 접은 정체불명의 괴물체를 종이학이라고 어떻게든 포장하려고 눈물겨운 시도를 했지만, 딸의 매몰찬 판결은 가차없이 항변을 기각하고 말았다.


류드밀라의 딸은 고운 손으로 차분히 종이학을 접어가기 시작했다. 엄마가 따라오지 못할까봐 한 단계, 한 단계를 세심하게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금새 앙증맞은 모양의 종이학이 완성되었다.



"자. 됐지? 이렇게 하는거야."


"음. 이렇게인가?"



이것이 종이학이다! 희망편을 찍고 의기양양해하는 딸에게 류드밀라는 자신이 접은 종이학을 보여주었다.


이렇게나 잘 보여줬으니 엄마도 잘 따라 접었겠지? 그러나 기대감에 차 있던 딸의 표정은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



딸의 머릿속이 물음표로 전부 채워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건 미지와의 조우였다. 인간의 시선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존재와의 대면과도 같았다.


종이학을 접는답시고 접었던 형체는 모습을 알아보기조차 힘든 괴물체로 변해 있었다. 종이가 마치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어떻게 접은거야?? 아니 이게... 분명 알려줬는데 왜 이런 모양이 나오지...?"


"이게 아닌가...?"


"아니 엄마 최고의 의사라면서?? 수술은 그렇게 잘하는데 어떻게 이런 종이접기 하나를 못해???"


"하하하.... 그게 말야, 옛날부터 이랬어. 엄마가 뭔가를 만들면 항상 괴상망측한 뭔가로 변했거든. 기계 고치기나 다친 상처를 치료하는건 괜찮은데 유독 이런 쪽으로만 손재주가 발현이 안되는거 있지. 예를 들면...."



그땐 그랬지. 봉제 솔개인형을 만들겠답시고 열심히 했는데 정작 만들어진건 누더기 곰인형이어서 사람들이 곰인형인데 어딜봐서 솔개인형이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시절이 엊그제같았다.


옛날 이야기를 하다보니 류드밀라는 향수에 젖어갔다.



"솔개 인형을 만들려고 했는데 곰인형이 나와....? 그럴 수가 있는거였어? 엄마 의사 말고 연금술사 해보는건 어때?"


"에이 연금술사라니. 너도 참. 시대가 어느 시댄데."


"....에휴. 엄마가 이렇게나 손재주가 없는줄은 몰랐어. 이래서 방학숙제 언제 다해..... 나 진짜 쌤한테 죽어 이거 안해가면...."


"그러게 미리 좀 해두지 그랬니?"


"윽, 그... 그건...."



정곡을 찔린 나머지 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죙일 노느라 방학숙제를 미리 안하고 마지막 주에 몰아서 한 자신의 과실도 없지 않다는건 딸아이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그래도 류드밀라는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껏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엄마로서 간단한 종이접기마저 못해갖고 딸을 아쉽게 만들다니. 부모 실격, 전대장 실격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생각하다 말고 묘안이 떠오른 류드밀라는 눈을 반짝였다.



"뭐. 어쩔 수 없지. 엄마 친구들이 있는데 그분들한테 부탁해볼까?"


"으응, 됐어. 엄마 친구분들한테 괜히 죄송하잖아. 그냥 오늘 하루 다 써서라도 해야지...."


"아냐. 당장 끌어모을 수 있는 인원만 한 50여명 정도 되는데?"


"뭐??????"



전직 메이즈 전대원들인 병원 직원들에게 연락을 하며 류드밀라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집에 모인 전대원들과 함께 순식간에 100장의 종이학을 접었다는 그런 이야기.


결국 딸아이의 방학숙제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전대원들과 함께 떠들썩한 하루를 보내게 됐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16. 카린



이면세계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졌고, 카린이 살던 세계 역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 사람들은 황폐화된 폐허 속에서 과거의 풍요를 다시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카린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퇴역을 신청하고 군문을 나섰다.


이미 평화로워진 세상 속에 과거의 영웅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삶을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렇다면 사용해줘야지.


예전의 성격대로였다면 군을 전역하고 나서도 방황했을 터지만, 주시영이라는 용병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카린의 성격은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맞았다.


가장 큰 변화라면, 그래.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는 점일까.


힘든 전투 속에서도 시간이 날때마다 항상 펼쳐봤던 순정 만화와 소설들. 카린은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 켠에 품고 살아왔다.


지금의 평화는 꿈을 그릴 기회였고, 세상은 그 꿈을 실현에 옮길 무대였다.


작가로서의 재능이 있었던 건지 다행히도 카린이 쓰는 글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첫 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었지만, 계속해서 차기작을 쓸수록 카린의 인기는 점점 높아져갔다.


카린이 쓴 글은 드라마의 원본이 되기도 했고, 만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세월이 좀 흐르자 학교의 교과서에 등재가 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순정 로맨스 작가답게 그녀 역시 로맨스 소설과도 같은 만남을 통해 운명처럼 결혼에 골인, 현재는 아들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엄마. 이거 엄마가 쓴 글이지?"



아들이 부르는 소리에 카린은 읽던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들이 카린에게 내밀고 있는 것은 문제집이었다. 내가 쓴 글이 문제집에 나올 이유가 있나? 하는 의문을 갖고 내용을 살펴보았다.


문제집에는 자신이 가장 즐겁게 썼던 글 중 하나가 실려 있었다. 



"아 이거? 맞아. 이게 너희 교과서에도 실려있구나?"


"몰랐었어?"


"교과서에 등재된다는건 들었는데, 그걸 우리 아들 다니는 학교가 사용할 줄은 몰랐지. 그래서, 왜?"


"아. 이 소설 쓸 때 무슨 생각 하고 썼나 해서."


"응???"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글을 읽을 때 화자의 의도라던지 상징물이 나타내는 의미라던지. 그런 것들이 시험문제에 나온다는 것이다.


요즘 학교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구나. 카린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학교라는걸 다녀본 적도 없을 뿐더러, 그녀가 아들만한 나이일 시절의 또래들은 내일 하루를 살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 기대어 살 뿐이었다.



"그래서 알려줄 수 있나 해서. 엄마가 이 글 원작자니까 잘 알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는거야. 기억나 혹시?"



중학생인 아들은 기대에 가득 찬 눈을 하고 카린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봤다.


카린은 옆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숨을 고른 후에,



"몰라."



하고 단칼에 아들의 요청을 거절해버렸다.



"엑?!"


"시험공부는 스스로 해야지. 그걸 엄마한테 알려달라고 하면 네가 배우는게 없으니까."



아들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아무리 카린이 평소에 자신에게 엄하게 대했다곤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마저 엄할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공부같은 거라면 충분히 도와줄 법도 한 소재가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당한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카린의 아들은 바짓가랑이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카린에게 다시 청을 올렸다.



"아니 그래도 엄마..."


"안돼."



우는 소리로 애원하는 것. 기각.



"나 시험 망한다니까?"


"엄마가 너 시험 못본다고 혼낸 적은 없잖아?"



시험 결과에 호소하는 것. 기각.



"이번 시험도 망하면 나 재시험 봐야한단 말야! 다른 애들 엄마들은 다 같이 고민해준다던데? 자식이 공부하겠다는데 못도와줘?"


"엄마가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 있는게 없는걸. 화자의 의도? 상징물의 속뜻? 그런걸 일일히 생각하고 쓰는 작가는 없단다. 만화라면 또 모를까."



모자간의 정에 빗대는 것. 역시 기각.


철옹성과도 같은 카린의 철벽에 아들은 두손 두발을 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해...."


"엄마 엄한거 하루이틀 보는거도 아니고. 자. 들어가서 책 마저 더 보렴. 저녁땐 맛있는거 해줄테니까."



그렇게 아들을 방으로 돌려보내고 난지 30분이 흘렀다.


카린은 읽던 책을 슬쩍 내려두고 아들의 방으로 걸어갔다. 씁슬한 후회가 그녀의 표정에 미안함을 감돌게 했다.


아무리 엄하게 키운다곤 해도, 공부를 하겠다는데 아무것도 안알려주는건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매몰찬 처사였다.


카린은 어릴 적부터 델타세븐에서 부모님 없이 홀로 모든것을 해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는 그렇지 않다. 도움을 받을 기회들이 주변에 있고, 또 받을 권리가 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방 문을 슬쩍 열었다. 아들은 문제집을 보면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아들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아이의 표정에 화색이 돌며 입꼬리를 올리지 않기 위해 억지로 참는 것이 보였다.



"엄마????"


"이상한 기대는 하지 마. 잘 하고 있나 해서 보러 온거 뿐이야."


"나, 나도 기대 안하고 있었거든?"



아. 또 실수했다. 자신의 솔직하지 못한 모습이 계속 튀어나오는 것에 카린은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정신 차려. 상대는 내 아들이야. 따뜻하게 가르쳐주진 못할망정 뭘 하고 있는거야? 튕길 이유가 어디에 있는데?


그렇게 되뇌이며 카린은 아들의 곁으로 슬며시 다가갔다. 아들이 보고 있는 글은 자기가 가장 재밌게 계획하고 썼던 글이다. 어떤 생각으로 엔딩까지 연출해냈는지 전부 기억난다. 알려주는 것 정도는 간단했다.



"주인공 성격에 집중해서 바라봐."


"응?"



자세를 낮춰 아들과 같은 위치에 선다. 긴 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기며 카린은 문제집에 나와있는 글에 대해 설명했다.



"엄마는 이 글 주인공을 내부적으로는 되게 수줍은 성격인데도 말하는걸 좋아해서 외향적으로 보이도록 생각하고 썼어. 친구들과 만나면 활발해지지만 새로운 사람이나 좋아하는 이성 앞에만 서면 바로 조용해지도록.


그래서 여기 해설지에는 주인공의 수줍은 성격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이거네, 저거네, 하고 써놓은거야. 사실은 본인들 멋대로 갖다 붙여놓은거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 이런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거야?"


"응. 괜히 말만 복잡하게 해놨을 뿐이지. 누가 이런걸 일일히 생각하며 글을 읽고, 또 글을 쓰겠어?"



아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린의 설명을 열심히 경청했다. 막혀 있던 사고가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그건 그러네.... 그럼, 이 주인공의 심정에 대해서 묻는 문제는 답이 4번인거야?"


"그렇지. 글은 그런 식으로 읽는거야."



엄마의 칭찬에 아들은 기분이 한껏 좋은지 웃음소리를 흘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들의 미소를 보자 카린의 마음 역시 대견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엄마가 무슨 생각 하면서 이거 썼는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으니까 그런 핵심만 기억해. 이런 같잖은 디테일들을 물어보는 문제가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만, 대부분은 풀 수 있을거야."


"헤헤. 그럼. 누구 아들인데. 당연히 할 수 있지."


"그렇지? 후훗."



카린은 내심 이렇게 아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아들의 곁에서 공부를 도와주었다.








17. 주시영



이면세계의 위협이 사라지고, 주시영에게도 꿈에 그리던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왔다. 군은 해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복귀했다.


용병이었던 주시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시영은 델타세븐과의 계약을 종료하고 평범하게 살기로 했다.


평생을 용병 일이나 하며 생사의 줄타기를 해오던 삶 대신 다른 삶을 살게 될 줄이야. 자유분방한 주시영에게는 천국이 펼쳐진 것과도 같았다.


마침 시간도 많겠다. 주시영은 전 세계를 여행하기로 했다. 주시영은 한량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세계의 각 지역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리고 여행길에 같은 그라운드원 출신의 사람을 만났다.


그와 교제한 끝에 결혼에 골인한 지금, 주시영은 아들 하나를 키우는 전업주부가 되어 있었다.


돈 걱정은 없었다. 용병 일을 하며 돈은 산더미같이 벌어놨다. 고용자가 델타세븐이었으니 굶어죽을 걱정은 영영 안해도 될 정도로. 거기에 연금도 나온다.


3명의 가족과 주시영은 단란하고도 꿈에 그리던 생활을 시작했다. 


주시영은 아들을 정말 자유분방하게 키웠다. 아들이 하고 싶다면 뭐든 하게 했고,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같이 가줬다.



"엄마. 나 운동해볼래!"


"그래~ 뭐 시작해보려고?"


"무술 같은거?"


"멋지네~!"



티비 속 캐릭터가 멋있어 보인다며 무술을 배워보겠다는 것도, 



"엄마. 나 요리 배워볼래!"


"좋아~ 엄마랑 아빠 맛있는거 해줄거지?"


"음... 봐서!"



요리를 해보겠다는 것도,



"엄마 엄마! 나 외국으로 여행 나가보고 싶어!"


"그럴까~? 지금 당장 가볼래?"


"엥?"



미국에 가고 싶다는 아들의 부탁을 듣고 델타세븐 수송기를 집으로 불러 미국 여행을 가보기까지.


아들이 하고 싶다고 하는 건 주시영은 항상 싱긋 웃으며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다가 아들이 나쁜 짓은 어떡하냐고? 걱정할 것 없었다. 세계를 구한 델타세븐의 전쟁영웅은 아직 건재했으니.


주시영이 아무리 자유로운 성격이라지만 아들의 잘못도 넘어갈만큼 허술하진 않았다. 잘못에는 항상 엄정한 응보가 뒤따랐다.


분위기를 살벌하게 휘어잡는 주시영 특유의 기백은 그녀의 아들의 혼을 쏙 빼놓았고, 아이는 탈선하는 일 없이 올바르게 성장해갔다.


하루는 주시영의 자유분방한 태도가 걱정됐는지, 그녀의 남편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넌지시 말을 꺼내왔다.



"시영아. 애 하고싶은대로 다 시켜도 되는걸까?"


"뭐 어때요? 애들은 원래 자유롭게 크는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도 그랬고."


"그러다가 질 나쁜 애들이랑 어울리게 될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런 점이 좀 걱정되는데...."


"하하. 당신도 참~ 부모는 아이가 어떤 길을 가건 잠자코 지지해줘야 한다구요? 그게 설령 아이 본인이 다치게 되는 길일지라도, 거기서 스스로 뭔가를 깨닫게 해주는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데."



주시영은 싱긋 웃으며 걱정 말라는 듯 남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들에 관해서는 예스맨으로 일관해왔다지만 주시영은 아들을 포기할 생각 따윈 없었다.



"물론 잘못을 저지른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지만요? 누구의 아이인데 감히 나쁜 짓에 손을 댈 수는 없는거니까."



자유와 방종은 다른거라고. 방향이야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고. 주시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남편은 여전히 할 말이 있어보였다.


침묵 속에 할 말을 계속 고르고 있는 남편의 곁으로 가서 주시영은 살포시 앉았다. 달콤하고 느긋한 목소리가 남편의 귓가를 기었다.



"오빠. 우리 처음 만났던 여행 때. 기억해요?"


"기억나지."


"여행 다니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었죠?"


"응. 물론이야. 시영이 너랑 함께 있는게 꿈만 같은 시간이었는데."


"전 우리 아이 인생도 우리의 여행길처럼 그러길 바래요. 스스로 여러가지를 배워가도록. 우리는 그저 아이가 위험 지대에만 들어가지 않도록 잡아주고, 함께 걸어가줄 뿐."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해주는 건 지나친 방임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야."


"후후. 나 혼자 우리 아들 키우는 것도 아니고, 오빠도 함께 있는건데. 그렇게 크게 걱정할 거 없어요."



남편은 주시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주시영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남편의 얼굴로 서서히 가져갔다.



"음. 정 걱정이 된다면 우리 아들이 뭔가를 함에 있어서 세세한 디테일은 오빠가 안내해주면 어때요? 이건 조심해라, 저건 조심해라. 이렇게."


"괜찮을까...?"


"정말 문제가 생길 거 같으면 그땐 저랑 같이 해결하면 되니까요. 강제로 끌어다가 앉혀놀게요. 설교는 오빠가 도맡아 하는걸로. 말 안들으면 제가 살벌하게 혼내주고. 어때요?"



남편은 주시영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머리 너머로 달빛이 로맨틱하게 땅을 비추었다.


바람과도 같은 자유로운 용병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여전히 바람같은 자유분방함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 내일은 아들이랑 무엇을 하면서 자유롭게 지내볼까. 주시영의 마음이 기대감으로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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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달만에 다시 글 잡아보는건데 정말 너무 어렵다. 이렇게 쓰는게 맞는건가...???? 뭔가 영 이상한데.....


각 캐릭터들 특징 잡아내서 육아에 반영하려고 노력은 해봤는데 뭔가 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