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 함선 내부로 파고드는 계획은 어떻게 됐어?"


함선 내부라고?

헬멧의 9마크가 금속끼리 일어난 폭발. 철판이 녹으며 발생하는 열기로 반들거린다.

불꽃으로 번들번들 계속해서 빛을 바꿔가고 있다.


"니가 말한대로 하면 원본을 그 병신 전대장이나 부전대장보다 빨리 먹을 수 있다며?!"


도붕이가 꼬셔낸 건가.


도플갱어 메이즈 전대의 제 1 목표는 그림자 류드밀라를 쓰러트리는게 아니다.

그건 과정이다. 그 안에 있는 원본을 먹어치우는 것.

그러는 걸로 드디어 시간 제한이 걸린 현상에서 겨우 생명이 된다.


이 세상에 계속해서 살아나갈 수 있는 생명이 된다.

그게 침식체이든 뭐든 중요하지 않다.

결국 아무리 애써봐야 도플갱어는 침식 된 원본의 침식체. 그 현상.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도플갱어 류드밀라를 제외한 메이즈 전대는 함선 내부로 파고 들 수 있다면 그걸 더 우선하겠지.

그걸 이용한 건 나도, 도붕이도 마찬가지다.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9문자가 살짝 기운다.



"아, 아아아아아 맞아맞아. 그 씨발년들 한 방에 먹어치울 방법을 알려준댔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도붕이 흉내를 내며, 팔을 흔들고 있다.

젠장.


"그래그래,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혼자 뛰쳐나가길래 뭐라도 있는가 싶었는데."



류드밀라를 제외 한 나머지를 흡수하지 못한 채로, 현상인채로 20년이 지났다.

도플갱어는 원본의 현상. 고준위 침식지대가 만들어 낸 침식반응의 현상.

하지만 시간이 너무 흘렀다. 


보통이라면 이미 진작에 존재의 힘을 소모하고 사라졌을거다. 

카운터라서 애초에 그 존재 자체가 강한 걸 제외한다면 더더욱.


메이즈 전대원의 대부분이 일반인이다. 카운터가 아니다.

그 말인즉슨 지금 눈 앞에있는 도플갱어는...



"뭐야, 왜 그렇게 머뭇거려?"



이미 다량의 인간을 먹었다.

그리고 그 외의, 살아남기 위해서 도플갱어들. 그러니까 존재들을 먹어 치웠다. 그러지 않으면 여기에

지금 여기에, 존재 할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먹어치운거야.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동료들을 잡아 먹은거야.

그리고, 지금 도붕이에게 속아서...


자신을 다닐이라고 소개한 도플갱어는 분탕을 치려고 여기에 온 거겠지.


근데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도렉스도 그랬고, 방금까지 같이 있던 도렉스도 그랬다.

이들은 살기 위해 동료까지 뜯어먹으며 버티고 있다.




"...아니, 미안. 잘 안 됐어."


전말은 대충 상상이 간다.

여태껏 그 자식이 나보다 한 발 빨리 분탕을 칠 수 있었던 이유.

나보다 느리게 기억이 루프하는 주제에 항상 내 허를 찌르는 행동을 해 온 이유.


이런 식으로 같은 도플갱어들을 선동했겠지.


도플갱어 메이즈 전대에게 있어서는 메이즈 전대 그 자체보다 자신의 원본이 더 우선이다.

그 점을 이용해서 방금도 먼저 방주를 열어버릴 생각이었겠지. 일단 열어버리면 메이즈 전대의 침식은 가속 된다.

동시에 솔라레미파시도도 눈을 뜰 테고.


그렇다고 혼자 종횡무진 단독행동을 하기에는 어려우니


"뭐? 야! 장난 해? 니가 더이상 그 짜증나는 년들한테 휘둘릴 필요 없다고 해서 

 불까지 질렀다고!"


도플갱어 부대에 거하게 분탕을 쳐놨겠지.

다닐은 아이씨하며, 헬멧의 9 마크를 점등하며 철판을 걷어찬다.

에스타크도 폭발 시켰는데 아 이거 좆됐네. 하고 나를 노려본다.


"..."


"야, 발레리. 뭔 방법 없냐?"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생각하는 내 자신이 웃기다.

어차피 뭘 하든 달라지는 건 없지 않나?


어차피 내가 뭘 하든 이제 벗어날 수 없고,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리가 없지.

하하, 왜 생각해. 



"야! 이 개자식아! 어? 너 때문에 나 이제 죽게...!"


다닐이 달려와 내 멱살을 잡고 끌어올린다.

아깐 형제라며.

하긴 뭐, 도플갱어니까. 



"...잠깐만."


"뭐, 뭔데...? 뭔가 방법이라도 생각 났어?!"


분명히 다닐이 도플갱어 메이즈 전대에 불을 질렀고, 둘은 함선으로 향했다.

그 능선, 그래. 여기는 그 때 도렉스와 이야기를 나눴던 그 건물 잔해잖아.

도중에 날 발견한 도붕이는 날 쫓아왔고, 도플갱어 다닐은 이대로 생매장 될 뻔했다.

아니, 어쩌면 도붕이가 의도적으로 버리고 갔나?


"야 이 자식아!!!"


난 도붕이한테 쫓기고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지?


"야!!!"


해봤자 하루가 넘지 않았을거야.

도렉스가 비밀기지로 왔으니까. 그리고 곧장 내가 추락했다.

도렉스가 이제서야 무전을 확인했다면...



난 실제로 그렇게 오래 기절해있지 않았어.





도붕이는 아직 함선을 열지 못 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건...



잊고 있었던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이미 진작에 내던져버린 추한 마음도 하나.




=="발레리... 내가 너네 전대장을 도울 수 있게, 힘을 빌려주라."


==다시 한 번 손을 모은다.

==합장인지 아니면 기도인지 모른다.

==눈밭 위에 얼어붙은 사체를 향해서, 빌고 있다.




도붕이를 막고, 메이즈 전대에게 올바른 결말을.

그런다고 해서 내가 이 루프를 끝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야!!! 무시하냐? 어? 잡아 먹어버린다?!"


째깍째깍.

나는 오른손으로 내 얼굴을 만진다.


유사 카운터. 멘탈 프린팅. 도플갱어. 




"방법 있어... 생각해보니까"


"진짜? 오 씨발. 신이시여. 역시 내 형제라니까. 믿고 있었다고 발레리!"




다닐은 내 멱살을 쥔 채로 하늘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끄덕.

나는 조용히 내 계획을 입에 담는다.






아~ 알렉스 젖통 쥐고 아득바득 질싸하고 싶다~ 

-41













유사라고 해도 카운터다. 특이능력은 이미 옛적에 날아갔지만, 온통 침식파가 깔린 이 설원 위에서 헬멧 없이도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다. 루프를 하면 팔이 잘리거나 사지가 날아가도 '원래대로' 돌아왔는데 이 얼굴만은

그대로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한 번 카운터가 되면, 그것 자체는 없었던 걸로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자식은 나의 도플갱어다.


그 전에는 내가 카운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없었던 가능성.

아, 아깝다. 그 때, 도렉스한테 힘을 받았던 그 때. 내가 확실하게 해치워버렸으면 됐었는데. 하지만 이미 지난 일.

알아챈 것만으로도 가능성이 피어오른다.




여기는 메이즈 이벤트. 그래. 그랬어.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데몬타입 침식체.





원본이 역으로 도플갱어를 흡수해서 만들어지는 침식체. 메이즈 이벤트 마지막에 그림자 류드밀라가 도달한 존재.



그래, 지금이라면 완전히 도붕이를 이 루프 자체에서 없애버릴 수 있다.

역으로 내가 흡수해서 완전히 먹어치우면 된다. 내가. 맞아. 그래. 내가 카운터가 되었다는 건 그런 거였어.


그렇게 하면 얼마든지 가능성은 있어.

그래, 도붕이만 없어지면 솔라미파레도가 나올 일도 없고. 무사히 이수연과 관남충이 도착할 거야.

그 과정 중에서 분탕치는 사람도 없을거고.


류드밀라를... 그림자 류드밀라도, 메이즈 전대도 구원 받을 수 있어.




"..."





빛이 보인다. 동시에 가슴 한 쪽에 캥기는 것들.

그런 건 이미. 한 번 했다가 실패했잖아. 그런다고 루프가 끝나는 것도 아니잖아.




"...근데... 이게 잘 될 거 같냐? 진짜 맞아?"




걷는다. 다닐이 들고 나온 핸드건으로 자신의 헬멧을 툭툭친다.

능선 아래, 산맥을 통과하는 동굴. 이 길은 처음이다.



"어, 잘 될 거야. 나만 믿어."



애초에 잘 안 되면 곤란해.



그나저나, 이거구나. 도붕이 자식의 미친 기동력의 원인은. 도렉스도 몰랐던 길.

이 설원은 코핀 함을 중심으로 남쪽을 제외하고는 설산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오른쪽편의 긴 능선이 이어지고, 그 아래는 숲. 

코핀 함선 앞에는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 그림자 류드밀라, 그러니까 쉐밀라가 나를 간호했던 곳.

그 걸 둘러싸듯이 만들어진 포대. 그리고 동쪽의 산을 하나 넘으면 도플갱어 메이즈 전대가 모여있는 진영.


설마 능선 뒷편에 이렇게 이어지는 길이 있다니.


생긴 걸 봐서는 아마,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닐이 만든건가.



"야, 근데. 그거 불 지르고 탱크 태운 거 나인 거 바로 알 텐데?"


"괜찮아. 어차피 기갑전력은 처음부터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거 개네들도 잘 알거야."


20년간 그림자 류드밀라를 공략 못해서 결국 우회루트를 찾기로 한 게 도플갱어 메이즈 전대다.

그런가? 하긴, 그러니까 니콜라이나 알렉세이 같은 놈들부터 죽었지 참. 하고 앞장 서서 걸어가는 다닐.



"근데 있잖아 형제?"


"어?"


"함선 내부로 가는 건 왜 실패한 거야?"



나를 향해 돌아보는 헬멧. 중앙의 9마크가 이 좁은 굴 속에서 라이트처럼 주변을 비춘다.


그러게.

이걸 솔직하게 이야기 할 수도 없고.

뭐라고 말해주지.


아.



"그거 있잖아. 그거. 거기다가 숨겨뒀더라고 부전대장이."


"아... 그거...? 와 잠깐만. 그러면 너 부전대장한테 들킨거야?!"


"아니아니, 능선 너머로 뭐가 보이길래 뛰어갔더니 아지트 같은 게 있더라고.

 갑자기 부전대장이 나오길래 나도 너한테 온 거야. 그런 거야."


"아하, 그렇구만."


통, 하고 다닐은 납득했는지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금새 멈춘다.



"어? 그러면 지금 함선으로 가면 부전대장도 없으니 오히려 좋은 거 아닌?"


다닐 이 자식 왜 이렇게 예리해?

뭐, 뭔가 더 이유를 그럴 듯한 이유를...!


"거, 거기다가 그 벌레 있잖아! 바퀴벌레가 날아오는 게 보이더라고!"


"뭐?"


그림자 류드밀라를 꺼내니 다닐이 흠칫한다.


"어라 그거 나 때문인가? 탱크까지 터트려서? 그래서 그 바퀴벌레가 튀어나온건가?"


"..."



그런 걸로 하자.

뭐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긴 해.

내가 처음에 류드밀라를 꾀어낸 것도 멋대로 포탑을 이용해서 어그로를 끈 거니까.


거짓말이라는 문제지.



"됐으니까 빨리 좀 가."


"알았어 알았어. 아, 발 조심해라? 여기 지반이 좀 무르더라고."





계획은 심플하다.

도플갱어 메이즈 전대에 이번엔 내가 들어간다. 도렉스도 있다면 금상첨화다.

분란을 일으킨다. 도붕이를 역으로 도플갱어들의 무리에서 쫓아내는 거다.


도붕이는 어디까지나 도플갱어 발레리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

그러면 나랑 조건은 똑같다. 함선을 아직 열지 못했다면 음성 네트워크의 비밀번호로 도렉스를 설득할 수 있다.


그리고 느낌상 도붕이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건 나뿐만이 아닐거야.

도플갱어 예고르도 그러니까 지난 번 루프 때, 역으로 도붕이를 공격한 거겠지.


근데 같은 도플갱어를 그렇게 챙기나 보통?

도렉스, 그리고 지금의 도렉스도 같은 메이즈 전대 도플갱어라고 챙긴다고 하기 보다는

자기 존재에 대한 갈망이 더 컸던 것 같은데.



뭐든 상관없다.

도붕이 그 자식을 여기서 완전히 없애면 되니까.




굴을 걸어간다. 칙칙하고, 어딘가 습기마저 느껴지는 공간이 곧 끝나는지 조금씩 건너편의 빛이 새어들어온다.

앞을 걷고 있는 다닐의 윤곽선이 하얗게 번지고, 익숙한 목소리.



"엇...!"


"다닐게이게이게이야? 그럼 못 쓰지. 귀중한 기갑전력을 막 터트리고 다니면 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말에 다닐이 자연스레 양 팔을 위로 올린다.



"바, 발레리...?!"


"어? 발레리는 이쪽... 아니... 뭐야...?!"



도붕이가, 소총병들과 함께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겨눠진 소총. 다닐과 나를 노리는 새빨간 레이저.



젠장, 한 발 늦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