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눈을 뜨니 나를 버린 스승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라는 말을, 누가 처음 입 밖에 내었을까.


실내가 쩌렁쩌렁울릴만큼 악다구니를 쓰는 익성민원인을 앞에 둔

나유빈은 오늘만큼 그 말의 최초발언자가 역했던 적이 없었다. 


별 말같지도 않은 논리를 펼치며 돈과 보상을 요구해대는 흥분한 진상의 타액이 나유빈의 안경 렌즈에 튄 순간에도, 

나유빈 주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안면근육에 경직이 올때까지 가까스로 끌어당긴 입가에 난처하다는 듯 지어보이는 

미소 정도가 전부였다. 


“이 새끼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지금 나 못배웠다고 비웃는거야?“


씩씩거리며 주먹이라도 내지를 기세로 옷 소매를 걷어붙이는 진상. 

나유빈은 차라리 몇 대 얻어 맞고 끝낼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일반인의 주먹따위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을 테지만, 오히려 신경써야 할 부분은 그를 때린 민원인의 주먹이 

부서지지나 않게끔 조심스레 적당한 타격감만 느끼게 해주고 통렬하게 나가 떨어져 줄 연기력일 것이다.


자, 와라.


일촉즉발의 상황, 나유빈은 노인네가 튀긴 침이 흘러내리는 안경을 희생할 각오로 그의 펀치를 기다렸지만, 

애석하게도 나유빈이 기대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영악하기로 소문난 노인은 최후의 일선만은 넘지 않는 대신 상스런 욕설을 씨부리며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과 함께 

등을 돌렸다.


스근하게 땡겨오는 뒷골. 

나유빈은 악취가 올라오는 안경을 벗고 미간을 손으로 쥐며 심호흡으로 분노를 다스렸다.


통칭 커담.

믹스커피와 담배를 입에 달고사는 구취를 풍기는 조그만 체구의  진상 백발 노인네를 나유빈의 동료직원들은 그렇게 불렀다.


조그마한 체구어디서 그런 기차화통 삶아먹은 듯한 고성이 나오는 건지.


최근들어 복지센터에 개근하는 커담에겐 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들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 레저고, 취미였다.


“유빈 씨, 괜찮아?”

“어휴, 저 양반은 진짜..”


커담이 사라지자마자 하나 둘씩 걱정하듯 나유빈에게 다가오는 동료직원들.

은근슬쩍 커담 밀착마크를 나유빈에게 떠넘긴 주제에 걱정하는 척 접근하는 꼴이라니 낯짝도 두껍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또한 대적자인 그가 지켜내야 할 세상의 일부였기에, 나유빈은 환멸대신 안경을 닦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연기해냈다. 


어떤 영웅의 말마따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


“하하, 저는 괜찮습니다. 후.. 조금 지치네요. 바람 좀 쐬고 와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 여유롭게 좀 쉬다와. 그렇다고 너무 오래쉬진 말고. 알잖아, 나 주임 없으면 여기 안 돌아가는거.”


중년의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헷갈려하고 있는 이지수 계장을 흘깃 쳐다보았다.

이지수 본인에겐 들리지 않았을지 모르나, 육익의 수장은 부하를 험담하는 것이 그리 달갑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그럼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나유빈은 센터를 나서며 도수 없는 안경을 셔츠 앞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물밀듯이 밀려오는 피로감이 그를 지치게 했다. 

편의점에서 산 캔커피를 손에 들고 그늘 밑 벤치에 앉아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난 한숨을 내쉬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어쩌면 위장을 위한 신분으로 공무원은 적합하지 못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늘 자신에겐 사무직이 어울린다고 생각해왔었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상세한 전략 전술 없이 적진에 들이박던 

펜릴소대 시절을 그리워하곤 했다. 


일기당천으로 전장을 누비던 말괄량이 여동생같은 이수연도, 

체구는 작았지만 그 뒷모습만 바라봐도 든든했던 그때의 스승도.


힐데의 뒷모습은 여전히 그의 뇌리에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선봉에서 적을 무찌르는 전장의 여신의 뒷모습이 아닌, 눈을 잃고 쓰러진 이수연과 

절망 앞에 무력해진 자신을 버리고 가는 배신자의 뒷모습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달기만 하던 바닐라 라떼 맛이 씁쓸하게 느껴진다.

이래서 그는 펜릴소대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는게 싫었다. 

늘 불쾌한 기억으로 회상을 망치게 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구하겠다 마음 먹었었던, 영민한 청년의 황금기는 

그렇게 피와 연기로 덧칠해져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지독하게 피곤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뻐근하게 느껴졌다. 


잠시만, 한 10분정도만 눈 좀 붙이고 들어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유빈은 휴대폰을 조작해 10분후에 울리는 알람을 맞춰두고 눈을 감은 뒤 가라앉듯이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금 몇시지?


나유빈은 얼마나 깊게 잠들었었는지 알람 소리조차 못 듣고 불안한 마음과 함께 잠에서 번쩍 깨어났다. 


그래도 잠을 잔 게 효과가 있는 듯, 몸도 훨씬 가볍게 느껴졌고 눈, 머리, 허리 어느 하나 아픈 곳이 없었다. 


확실히 요새 너무 무리하긴 했다고 생각하며, 나유빈은 휴대폰을 확인하고자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그의 바지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폰도, 차 키도, 심지어 지갑조차도.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딱딱한 벤치가 아닌 푹신한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게 무슨..“


나유빈은 자신이 말하고도 굉장히 낯선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밖에서 잠든 탓에 목이 잠겼다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라, 평소 그가 듣던 성인 남성의 목소리 대신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일까.

가장 현실적인 추론은 지금 그가 겪고 있는 모든 상황이 전부 꿈이라는 것.


하지만 그러기엔 지금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감각과 모든 풍경,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제 아무리 냉철한 나유빈이라도 당황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한창 사태 파악에 열을 올릴 즈음, 저 멀리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가벼운 발놀림, 하지만 내딛는 한 걸음마다 무서우리만치 단련되었다는 것이 느껴지는 절제된 보법.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문이 열리고 문 틈 새로 보인 얼굴을 알아 본 나유빈은 경악하여 숨을 헉, 하고 삼켰다. 


‘스,스승님?’


지금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걸까?

힐데는 조금 죄스러운 표정과 난감하다는 표정이 뒤섞인 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나유빈은 늘 자신을 벌레 보듯 보던 스승의 낯선 표정에 얼어붙었다. 

그녀를 이렇게 마주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그다. 


”이제야 일어났구나.“


힐데가 그녀답지 않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해서 나유빈은 경악했다.

그리고 이내 그는 힐데가 그를 부르는 호칭에 더 경악하고 말았다. 


”..주시윤.“






- ’눈을 뜨니 나를 버렸던 스승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이번 생에도 부모님 뵙기는 글렀다~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