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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죽어 움직이지 못하는 자의 부탁이 얼마나 헛된지 안다. 죽어 이룬 소망이란 아무것도 되지 못하며, 유언이란 살아있는 이에게 떠맡기는 짐일 뿐이다. 허나 이 모든 앎을 뒤로 하고 너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내가 이기적인 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다. 네 친절과 인품에 기대 일방적인 부탁을 하는 나를 용서하길 바란다. 아니다. 방금 말은 취소하겠다.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죽은 자를 용서해도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길 바란다. 다만 원하는 것은,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는 것뿐이다……(후략)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은발의 소녀와 마주 앉은 나는 형의 유언장이라 일컬은 글의 첫머리를 반복해서 읽었다. 형의 부고와 함께 유언장을 전한 소녀는 내가 형의 유언장을 실감이 날 때까지 계속해서 읽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동요는 적었다. 어쩌면 내가 형의 생사에 대해 체념에 가까운 감정으로 대하고 있던 까닭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내 첫 질문은 덤덤한 어조였다. 이 유서가 진실이라는 증거가 있느냐. 소녀는 어딘가 낯익은 시계를 하나 꺼냈다. 이게 무어냐? 되묻자 대답하길, 형이 찼던 시계란다.

 

그 시계를 왜 그쪽이?”

 

형의 유언장에는 시계에 대한 글은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밑도 끝도 없이 소녀의 소원을 이뤄주길 바란다는 말뿐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유언장에 쓰인 것 외에는 대답해드릴 수 없어요.”

 

침묵 속에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가 이어진다. 캐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눈앞의 홀딱 젖은, 무미건조한 인상의 소녀가 대답해줄 리가 만무했다. 당초에 부탁하는 자세조차 아니었다.

 

형의 말마따나, 이미 죽어 움직이지 못하는 자의 부탁은 얼마나 헛된가. 심지어는 그 부탁이 이따위여서야. 하지만 나는 이 얼토당토않은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형의 부탁이지 않은가. 나는 이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으나, 이뤄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 대답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연락처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울비가 내리는 거리는 회색 조로 물들어 있었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으나 하늘은 온통 회색빛 구름뿐이었다. 하여 눈에 들어온 세상은 흑백사진과 같았다. 유일하게 색을 가진 것은 빗발 사이의 정경을 지켜보는 소녀와 드물게 보이는 행인들이 든 둥근 우산뿐이었다.

 

소녀는 우산이 없었다. 나는 예의상 우산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소녀는 내 제안을 거절하고 걸어 나갔다. 겨울비를 맞으며 걷던 소녀는 어느샌가 회색 거리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거리 너머로 사라진 것인지 회색으로 물들어 분간이 불가능해진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나는 잠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사람마냥 비가 내리는 거리 가운데 서 있었다.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비도 그치겠지. 그때가 되면 나 자신은 어디엔가 알 수 없는 곳에 던져지게 될 터였다. 시계를 얻은 직후 운명을 직감했다는 형과 같이. 다만 나의 선택은 아닌.

 

 

1

 

 

저를 바다로 데려다주세요. 별이 잘 보이는.”

 

소녀의 첫마디였다. 나는 먼저 물었다. 이곳에서 바다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아느냐. 소녀는 알고 있다 말했다.

 

차를 타고도 하루 남짓이다. 남은 휴가가 없으니 적절한 사유가 없다면 직장을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곧 다가올 휴일에 출발하자. 그래도 괜찮겠느냐. 소녀는 단호했다.

 

그건 제 사정이 아니에요.”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것은 오롯이 나의 일이었다. 나는 그녀가 가지고 있을 거라 믿었던 일말의 동정심에 기대는 것을 그만뒀다.

 

위험할지도 몰라. 혹 가는 길에 침식체라도 만난다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쯤 되면 퉁명스러운 게 아니라 소갈머리가 글러 먹은 게 아닌지. 나는 그녀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저 나이대의 인간이란 으레 그런 법이었다.

 

그래, 간다 치자, 바다로. 이유는? 도대체 왜 그 망할 바다로 가고 싶어 하는 거야?”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유언장에 쓰인 것 외에는 대답해드릴 수 없어요.”

 

나는 마침내 말문이 완전히 막히고 말았다. 당신 사정은 알 바가 아니요, 위험한 것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 이유 또한 말해줄 수 없다. 그녀는 어디선가 만들어진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이 이런단 말인가. 나는 확인차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부모님은 정정하시냐. 글쎄요. 저도 잘……

 

어쩐지.”

예?”

아무것도 아니다.”

 

소녀는 집요했다. 뭐가 아무것도 아닌가요.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거로 알아라. 제 부모님의 생사가 불분명한 게 그리 신나는 일인가요. 그런 거 아니다. 그럼 뭔가요. 그런 게 있다. 그것보다 우리 통성명도 안 하지 않았느냐.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소녀는 결국 질려버린 눈치였다.

 

당신네 형은 저를 백삼이라 불렀어요.”

뭐? 백삼?”

오해하지 마세요. 제 이름이 백삼이라는 게 아니라, 당신 형이 저를 그렇게 불렀다고요.”

그래서?”

호칭은 그거면 되지 않겠어요?”

 

그런가. 백삼이면 되는가. 어쩌면 머리가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내 사정이 아닌, 백삼 본인의 일 아니겠는가. 나는 의미 없는 문답을 끝내고자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내일 출발하자. 백삼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당장?”

 

나는 믿기 힘든 말을 들었다는 투로 되물었다. 백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설득하고자 말했다.

 

여기서 바다까지 가기 위해선 횡단 철도를 타야 한다. 또한 횡단 철도를 타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야 한다. 하지만 이미 해가 넘어가지 않았느냐. 날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지하철을 갈아탄다고 해도 차편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노자는 물론이거니와 옷이나 짐 따위를 챙겨야 하지 않겠느냐. 백삼은 고개를 저었다.

 

돈은 충분히 있어요. 옷이나 짐은 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사면 그만이구요.”

차편은? 고속버스를 타야 하는데, 어떻게 하려고? 지금 출발해도 늦었어. 어떻게 역까지 갈 작정이냐고.”

그쪽 차를 타고 가면 될 일 아닌가요?”

내 차? 지금 내 차를 횡단 철도 역에 대놓으라는 말이야? 그 노숙자들의 천국에? 장담하건대 열차표를 끊고 돌아오기도 전에 도둑맞을걸.”

아니요. 당신 차를 타고 역으로 가자는 말이 아니에요. 바다까지 가자는 말이었죠.”

뭐? 아니, 그럼 이렇게 하자. 얼토당토않은 얘기는 집어치우고, 그리 급하다면 지금 택시를 잡고 역까지 가는 거야.”

 

백삼은 잠깐 고민하는 눈치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짐을 챙길 테니 먼저 나가서 택시를 잡아놓으란 말과 함께 그녀를 방에서 내쫓았다. 백삼이 방에서 나가자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항상 조급한 기색이었다. 마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마냥. 의구심은 갈수록 커졌으나, 그 빌어먹을 문장 때문에 물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분명 이렇게 말하겠지. ‘유언장에 쓰인 것 외에는 대답해드릴 수 없어요.’

 

그래, 그 유언장. 결국 모든 문제는 유언장에서 시작된다. 더듬어 올라가 보면, 그 출발점은 형이었다. 어느 순간 군대로 사라져버린 형. 나는 흐릿한 형의 그림자를 더듬기 시작했다. 형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왜 유언장에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저 백삼의 부탁을 들어달라는 말 하나뿐이었는가.

 

 

2

 

 

 갑자기 문자를 보내 미안하다 의도와는 무관하게 시계를 차고 말았다어찌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군대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때문에 급전이 필요하다염치 불고하고 부탁하겠다.

 

그해 겨울 형이 보낸 문자의 첫머리였다황망한 정신에 전화를 걸자 번의 통신음 후에 마뜩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정확한 입대 날짜를 묻자 대답하길다음 수요일이란다입대까지 겨우 엿새뿐이 남지 않았는데 어머니라도 뵙고 가지 그러느냐고 묻자 대답이 돌아왔다.

 

어머니께는 외국의 공장에 들어가기로 결정 났다고 말해놨다혹여나 물어본다면 대답 잘해주라.”

 

나는 형의 입대를 말려볼 심산으로만나서 얘기하자며내가 찾아가겠다고 말했다형은 만나서 얘기해야겠냐고 물었고만나지 않는다면 돈도 주지 않겠다고 하자 한참 뒤에 대답했다바쁘지 않냐내가 찾아가겠다평소 형의 성격을 알고 있던 터라 내가 찾아가야겠다며 억지를 부렸다실랑이 끝에 형은 한참은 늙어버린 목소리로 방문을 허락했다.

 

하여 그날 밤의 행선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는 근무가 끝나는 대로 외곽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퇴근길 지하철은 차려입은 이들로 만석이었다조금 더러운 차창 밖으로 풍경이랄 것도 없는 모습이 지나간다둥글게 쌓인 콘크리트 회벽다음 역을 알리는 표지판조금씩 달라지는 부분은 있으나 모습은 거의 같다새삼스러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열차를 가득 채운 인파 속에서 빠져나온 것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역에서 빠져나오고 보니 막막하기 그지없었다설득하겠다고 했으나 믿는 구석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해는 넘어간 오래였으나 온갖 불빛으로 대로변은 환하다.

 

창백하기도 하고 주홍빛이 돌기도 하는 길거리는 걸음을 옮길수록 어두워진다좁고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길을 비추는 것이라곤 이제 가로등뿐이다형이 사는 원룸은 색바랜 적벽돌로 외벽을 쌓은 4층짜리 건물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오랜만에 보는 형의 모습이었다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바짝 깎은 머리 탓인지 낯설기만 했다 살펴보니 왼손에 처음 보는 시계를 하나 차고 있다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타박이 들어왔다.

 

시계 처음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들어와찬바람 들어온다.”

 

사람 명이나 겨우 누울 법한 단칸방은 살풍경했다가운데 자리한 앉은뱅이책상과 이부자리가 거의 전부였다형과 마주 앉은 나는 불쑥 말을 꺼냈다.

 

왼손에 시계…… 그게 그거야?”

 

그게 그거라니무슨 수갑이라도 된다는 마냥 말하네그거 맞다.”

 

어쩌다가?”

 

앞뒤를 썩둑 잘라먹은 말이었지만형은 대강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냥 갑자기 어느 ……. 다들 그렇게 되지 않냐나라고 다를까.”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잠시 침묵이 흐른다대화의 물꼬를 것은 이번에도 나였다군대는잠깐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대답한다시계를 찼으니 별수 있겠냐너무 걱정하지 마라요즘 군대는 좋다더라차라리 됐다 싶기도 하다돈도 벌고 좋은 경험도 하고 나라도 지키고…… 전역하면 취업도 도와준다더라어물쩍 넘어가려는 기색이었다얼버무리듯 내뱉은 말은 가볍기만 하다나는 버럭 화를 냈다.

 

군대가 장난이야시계라도 없으면 몰라손목에 떡하니 시계 하나 놓고는…… 형도 알잖아 성히 나올 리가 없다는 .”

 

형은 잠깐 말이 없었다멋대로 뱉은 성난 말에 화를 법도 했지만형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침묵 사이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파고든다.

 

그렇다고 숨길 수는 없지 않냐들통나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얼마나 대단한 시계라고 그래숨기고 살면 되잖아모두 그렇게 사는 모른다고 셈이야 많은 군인 사이에 고작 하나 들어간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그래애국심이라곤 쥐뿔도 없는 양반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는…….”

 

나라고 죽고 싶겠어단지 확실히 하고 싶어서 그래.”

 

무얼 확실히 하고 싶단 말인가꼬여버린 인생을 손으로 끝장내고 싶어 저러나 싶었다목구멍까지 치달은 말이 아우성이었다 기색을 살피던 형이 불쑥 물었다.

 

밥은 먹었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같이 먹겠느냐는 형의 말에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눌러 담은 욕설이 튀어나올까 입을 없었다.

 

그럼 다음에 얘기하자신발장에서 우산 하나 챙겨가고.”

 

뒤로는 아무 말도 없었다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오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돌아보니 창문 너머 형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바지 밑단이 젖어 든다집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갈아타야 했다.

 

 

 

나는 열차표를 끊고 백삼에게 물었다. 군대에서 형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백삼은 잠시 말이 없었다. 금세라도 고개를 저으며 유언장에 적힌 말로 시작하는 문장을 뱉을 기색이었는데, 의외로 그녀가 처음으로 한 말은 정말로 모르느냐는 질문이었다.

 

내가 같은 부대에 있던 것도 아닌데 어찌 알아.”

글쎄요, 그러면 저도 잘 모르겠네요.”

 

미묘한 어조였다. 마치 내가 당연히 알 것으로 생각한 듯한 느낌이 강했다. 나는 백삼을 추궁하고자 했으나, 드물게도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보다 더 궁금한 건 없나요?”            

물어보면 대답이나 해주려고?”

질문에 따라 다르죠. 그러니까, 형이 어떻게 죽었느냐 같은…….”

시계 찬 군인이 죽었다면 사인이야 뻔하지. 특별히 다른 이유라도 있겠어?”

예를 들자면요?”

예를 들 것까지야. 백이면 백 싸우다 죽었겠지. 시계만 찼다 하면 다들 그리 죽더라.”

“…….”

말하기 싫은가 보네. 질문을 바꾸지. 형이 입대를 결심한 이유에 대해 들은 적 있어? 죽을 걸 뻔히 알면서 왜 자진하여 입대한 건지. 분명 그 이유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억나질 않아.”

곧 열차가 들어온다네요. 빨리 가지 않으면 놓칠지도 몰라요.”

 

그것은 대답도 아니었고, 그녀가 으레 하던 유언장으로 시작하는 문장도 아니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대답을 피하고 있었다. 이유를 대자면 많겠지만, 만난 지 하루 된 사람의 속을 어찌 알겠는가.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승강장으로 향했다.

 

어둠과 눈발 사이로 횡단 열차가 돌연 그 모습을 드러낸다. 깊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타고 내리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개중에는 군복 차림의 사람이 몇 섞여 있었다. 인파 사이로 언뜻 보여 확실치 않았으나, 팔에 찬 완장으로 미루어 헌병쯤 되지 않았을까.

 

좌석에 앉아 백삼에게 방금 본 사실을 이르자 안색이 어두워진다. 왜 그러느냐 묻자 말하길, 아무것도 아니란다.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무것도 아니냐. 헌병 소리를 듣자마자 똥 씹은 표정으로 변하는 걸 내 똑똑히 봤다. 헌병과 얽혀 좋은 꼴 본 적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바른대로 말해라.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줄 아세요.”

 

백삼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백삼이 더 멀어지기 전에 급히 불렀으나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가, 한 시간은 족히 지나지 않았나. 백삼은 아직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인기척이 뒤쪽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탑승할 적 보였던 헌병들이었다. 헌병은 뒤쪽에서부터 무언가를 확인하며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백삼이 보였던 미적지근한 태도 하며, 사라진 후 여태까지 보이지 않는 모습까지. 하여 헌병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헌병은 먼저 나와 백삼의 표를 확인했다. 잠깐 번호를 비교하던 그들은 인상착의가 그려진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내게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종이에 그려진 이는 분명 백삼이었다. 군복을 차려입고 목뒤로 머리를 질끈 묶긴 했으나, 그 얼굴은 백삼임이 분명했다.

 

당시 열차에 타고 내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잘 모르겠습니다. 옆자리는 동행입니까? 예. 잠깐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웠습니다. 언제 온답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내 앞에서 잠깐 수군대던 둘은 이내 협조에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앞 좌석으로 넘어갔다. 나는 헌병이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백삼이 돌아오지 않은 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나는 백삼에게 문자를 한 통 남겼다.

 

방금 헌병이 너를 찾더라. 무슨 일인지 설명해달라. 답장은 곧 돌아왔다. 짐 챙겨서 화장실 앞으로 오세요. 그 한 줄의 문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말이다.

 

나는 헌병이 다음 칸으로 건너가길 기다렸다가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삼의 짐은 자리에 없었으므로, 내 여행 가방 하나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 노력하며 뒤 칸에 자리한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앞은 아무도 없었다. 밤이 깊었으므로 대부분의 승객은 눈을 붙이고 있어 열차는 조용했다. 나는 문자로 백삼을 불렀다. 화장실 앞이다. 어디냐. 직후 여자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백삼이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말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당장 열차에서 내려야 해요.”

뭐라고? 아니, 그래. 백번 양보해 당장 내려야 한다 치자. 어떻게 내리려고?”

뛰어내려야죠.”

미친년. 죽고 싶거든 혼자 뛰어내려. 아니면, 네 소망이 동반 자살할 사람을 찾는 거였나?”

시계가 있잖아요.”

 

할 말이 산더미였다. 그깟 시계 하나 믿고 눈밭을 내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자는 말이냐. 몸 성히 내린다고 해도 어떻게 바다까지 갈 생각이냐. 다음 도시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느냐.

 

백삼은 내가 질문하기도 전 답답하다는 듯 나를 승강구까지 잡아끌었다. 무슨 놈의 힘이 그리도 세던지. 정말로 시계를 차긴 했나 보다.

 

여기서 뛰어내리나 헌병에 붙잡히나 위험하긴 매한가지 아닌가요? 절 믿고 뛰어내리는 편이 차라리 안전할지도 몰라요.”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승강구 문이 억지로 열린다. 밖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승강구 안쪽으로 눈발이 짓쳐 든다. 백삼은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차가 내는 굉음과 바람 소리 때문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안 들려!”

 

백삼은 행동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내 여행 가방을 빼앗아 문밖으로 던져버리더니, 곧이어 나를 꽉 껴안았다. 나는 그녀의 다음 행동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잠시간의 부유감, 온몸을 내달리는 충격. 직후 나는 눈밭에서 구르고 있었다. 온몸이 눈투성이였다. 백삼은 옷에 붙은 눈을 털고 있었다. 나는 잠깐 눈밭에 몸을 뉘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한참 내달리던 열차에서 뛰어내린 것 치고는 몸이 멀쩡했다. 그녀가 찬 시계 덕분이었을까. 그것만은 잘 모르겠다.

 

잘됐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맨몸으로 내리다니. 아주 잘 됐어. 다음은 뭐지? 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이라도 할 작정인가?”

그것도 괜찮겠네요.”

 

당장 얼어 죽을 것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백삼은 담담하기만 했다. 나는 그녀 앞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고개 아래로 백삼의 무표정한 얼굴이 들어온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참아왔던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형의 유언장 하나만을 보고 너의 소원을 이뤄주고자 했다. 하지만 더는 안 되겠다. 애초에 너는 누구냐. 네가 유언장의 당사자가 맞기는 하냐. 형을 알기는 하냐. 꼴을 보아하니 탈영한 것 같은데, 호구 하나 잡아서 망명을 떠나려는 게 아니냐.

 

정말 알고 싶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삼은 재차 물었다.

 

제 얘기를 듣고도 저를 도와주실 건가요?”

네가 형의 유언장에 쓰인 당사자가 맞다면.”

 

백삼은 잠깐 말이 없었다. 눈발이 거세진다. 달빛도, 별빛도 없는 눈 내리는 밤은 유난히 어두웠다.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며 운을 뗀 백삼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그래요, 이름부터 시작하죠. 사실 백삼은 제 이름이 아니에요. 당신 형이 부르던 이름은 더더욱 아니구요. 당신의 형은 저를 클로에라 불렀어요…….”

 

 

 

3

 

 

 

호명되는 이들은 앞으로 나오도록. 13-C-056, 13-C-085, 13-C-103……

 

싸라기눈이 날리는 날이었다. 13-C-103을 포함하여 열댓 명 정도 되는 고아들만이 단상 앞에 나갔고, C동의 나머지 고아들은 저마다 번호순으로 줄을 선 채 연설을 들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헌신과 같은 미사여구로 치장되었지만, 간단히 줄이자면 이러했다.

 

C동의 고아들은 모두 입대키로 결정되었다. 그중 단상 앞 열댓 명만이 군인이 될 것이고, 나머지는 총알받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동기생이 물었다.

 

야, 백삼아. 너는 억울하지두 않냐?

뭐가?

부모 없이 태어난 것두 억울해 죽겠는데 하필 이딴 곳에 끌려와서 군인이 됐잖아.

 

그 말이 맞았다. 백삼은 자신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마땅한 이유 또한 없이 C동 출신의 고아가 되었다. 단지 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C동 출신이 되었지만, 백삼은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따지고 들어가자면 이딴 나라에 태어난 것부터가 불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기뻐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었다.

 

나는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너도 어른들이 하는 말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셈이니 보람찬 일이라 생각하는 거야?

 

고아원의 어른들은 모두 국가와 민족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백삼은 그 말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필연이라 믿었지만 백삼은 이 모든 것이 우연에 불과함을 알았다.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된 것은 단지 제비뽑기에서 꽝을 뽑은 탓이라고. 하여 국가나 민족은 사주팔자나 손금에 그려진 불행이나 마찬가지라고. 이미 일어난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때문에 백삼은 총알받이가 아닌 군인이 됐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고, 자살 특공에 가까운 임무를 띤 부대에 배속됐을 때도 절망하지 않았다.

 

눈이 멎는다. 백삼은 그날 밤 고아원에서 군부대가 있는 곳까지 새벽 내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부대에 도착한 것은 해가 뜨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백삼이 속한 분대는 시계를 찬 분대장 한 명과 고아원 출신 군인 셋, 총알받이 넷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해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옹기종기 모인 면면을 확인하기엔 충분히 밝았다. 구름 걷힌 달빛에 발목까지 쌓인 눈이 새하얗게 빛난다. 분대장은 웃고 있는 것인지, 울고 있는 것인지 모를 표정이었다.

 

분대장이 물었다. 13-C-103? 이게 정말 네 이름이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사람 이름이 이렇게 씹창이 날 수가 있냐?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군 생활 끝나냐? 아닙니다. 부르기 불편하니, 내 마음대로 부르겠다. 알겠습니다. 13은 떼고, C-103이니 클로에라 부르겠다. 알겠습니다.

 

하여 그날부터 13-C-103은 클로에가 되었다. 허나 기이하게도, 분대장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결코 클로에를 클로에라 부르지 않았다. 작전 중 클로에는 항상 13-C-103이었다. 클로에는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으나, 깊이 고민하기를 그만뒀다. 분대장은 항상 그런 식이었으니까.

 

네 이야기는 잘 들었다. 그렇다면, 너는 13-C-103인가? 클로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백삼인가? 나는 너를 무어라 부르면 되겠는가?”

 

남자의 질문이었다.

 

글쎄요, 편한 대로 부르시죠.”

 

 

 

4

 

 

 

별도 달도 없는 눈 내리는 밤은 어둡기만 하다. 나와 백삼은 철로를 이정표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주변은 황량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철로 외엔 무엇도 없었다. 보이는 것은 언제까지고 나아갈 것만 같은 철로 두 줄과 헐벗은 자작나무뿐이었다. 돌아보면 눈 위로 길게 남은 흔적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나 온 지, 또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길이었다.

 

백삼과 나는 서로에게 기대어 나아가고 있었으나 실지로는 내가 백삼에 기대어 가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두 발의 감각이 거의 사라져갈 무렵, 백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세웠다.

 

저쪽에서 움막 하나를 봤어요. 날이 밝을 때까지만 쉬었다 가죠.”

움막이라니?”

꽤 멀리 있어요. 당신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걸요.”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백삼은 곧이어 말했다.

 

먼저 가며 불쏘시개 따위를 주워갈 테니 따라오세요.”

 

하얗게 내려앉은 들판 위로 인영이 휘적휘적 멀어져 간다. 그 속도가 워낙 빨라 나는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백삼의 어렴풋한 그림자는 곧 눈발 속으로 사라졌다. 한참을 걸었지만, 움막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이정표는 백삼이 남긴 눈 자국뿐이었다. 눈발이 거세진다. 백삼이 남긴 흔적이 눈에 덮여간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백삼이 먼저 헤쳐 나간 길이라곤 하나, 눈길을 달리는 것은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양말은 이미 젖어 발등까지 아려왔다. 배어 나온 땀이 체온을 앗아간다. 나는 온 힘을 짜내 속도를 더했다. 눈 위의 흔적이 아득했다. 나는 잠깐 옆길로 빠지기도 하고 휘청이기도 하며 옅어지는 흔적을 쫓았다. 발자국은 멀어지고 있다. 발목까지 빠지던 눈이 종아리까지 빠진다.

 

어쩌면 백삼이 날 속인 게 아닐까. 13-C-103도, 클로에도 모두 거짓이 아닐까. 당초에 형이 죽은 것부터가 거짓일지도 모른다. 어지럼증이 몰려온다. 터무니없는 억측이었으나 당시에는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진실과도 같았다.

 

걸음이 느려진다. 이제 흔적은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두어 걸음을 더 나아가다 발을 멈췄다. 돌아보니 오직 눈 덮인 들판과 헐벗은 자작나무뿐이었다. 내가 남긴 흔적조차 내 뒤로 열 걸음이 고작이다.

 

이제 믿을 것은 백삼 외엔 없었다. 아니면 클로에라 해야 할까. 그것만은 잘 모르겠다. 그렇게 눈 바다에서 얼마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갑자기 백삼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들리나요? 만약 들린다면 이쪽으로 오세요.”

 

내가 가던 길을 기준으로 왼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얼어붙은 발을 재촉하여 걸음을 옮겼다. 조금 걷자 가물거리는 모닥불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허름한 움막과 나를 향해 손짓하는 백삼이 보였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달려갔다. 곧 백삼이 날 눈치채고 부축해왔다.

 

모닥불을 피우고도 한참을 보이지 않아 찾으러 갈까 고민했어요. 미안해요. 걸음이 너무 멀어졌나 봐요.”

 

나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모닥불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조심하세요. 불이 너무 가까워요.”

 

백삼이 나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나는 말없이 모닥불의 열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백삼은 주의를 주는 대신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몇 개 더 넣었다. 내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한 아름 쌓여 있던 장작이 조금 줄어든 후였다. 나를 묵묵히 바라보던 백삼이 먼저 말했다.

 

정신이 드시나요.”

덕분에.”

잘됐네요. 잠깐 들어보세요. 여기서 밤을 보내고…… 글쎄요, 히치하이킹이라도 할까요. 아니면 열차를 타러 갈까요. 그것만은 모르겠네요.”

 

말을 마친 백삼은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보라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조금은 엉뚱한 질문을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왜 바다에 가려는 거지?”

“…….”

 

대답은 없었다. 기실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내 질문은 이어졌다.

 

네 이름은 뭐지? 13-C-103인가? 클로에인가? 그도 아니라면 백삼인가? 너는 좋을 대로 부르라 했지만, 그게 대답이 될 순 없어. 너도 알지 않나?”

“…….”

왜 형은 너를 클로에라 부른 거지?”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어물거리던 백삼이 뱉은 대답이었다. 대화는 그곳에서 끝났다. 하늘도 구름도 백삼도 흐릿한데 모닥불만이 일렁인다.

 

백삼이 내게 묻는다.

 

물어보셨죠. 군대에서 형은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말하길, 분대장은 사회에 있을 적 얘기를 해준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잘 생각해보면 거의가 아니라 전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렇게 하자.

 

어떤가요. 저는 사회에 있을 적 분대장의 이야기를 듣고, 당신은 군대에 있을 적 형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는 대답을 미뤘다. 기실 궁금했던 것이란 군대에서 형의 모습 따위가 아니었다. 다만 입대를 결심한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모닥불은 타오르고, 함박눈은 아직도 나리고 있다. 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5

 

 

 

그래돈을 생각은 들었냐?”

 

이튿날 얼굴을 보고 형이 불쑥 꺼낸 말이었다나는 잠깐 망설였다당연히 거절해야 했다하지만 형이 쉽게 단념하고 다른 이에게 손을 벌릴까 싶어 불안했다나는 잠시 말을 돌렸다.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꺼내는 얘기라니섭섭하다그러지 말고 얘기나 하자나라고 덜컥 돈을 수는 없잖아.”

가족인데 쉽게 수도 있지.”

가족이니까 더욱 소리지군대에 간다는데이유도 모른 보낼 가족이 어딨어?”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하고 싶은 질문이야 산더미였다하지만 나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때문에 한참이 지난 입에서 나온 것은 조금은 엉뚱한 질문이었다.

 

대체 돈은 달라는 거야?”

?”

그렇잖아입대하는 무슨 대단한 돈이 든다고오히려 돈을 받으면 받았지나갈 곳이 어디 있다고 그래?”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서류에서 장구류까지 전부 돈이라고.”

서류는 그렇다고 장비는 국가에서 주잖아.”

말은믿을 만한 장비 말이야이게 목숨값이라니까?”

 

그대로 궁색한 변명이었다목숨이 아까워 돈까지 빌리는 사람이 군대에 들어간단 말인가핑계도 저런 핑계가 없었다이를 지적하자 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싫으면 관둬라 벌릴 곳이야 많으니까.”

대출이라도 받으려고?”

필요하다면야.”

 

형의 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형이 빌려 달라 금액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형은 마땅히 나갈 구석도 없는 몸이었다담배는 입에 적도 없으며술자리를 같이할 친구 또한 마땅치 않았다도박 따위의 돈을 잃기 쉬운 취미 또한 없었다따지고 보면 자취를 시작한 벌써 년째인가착실히 돈을 모아왔다면 나에게 아쉬운 말을 리도 없지 않은가.

 

이를 넌지시 얘기하자 형은 그냥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며 넘어가려 했다조금 짜증이 섞인 어조였다나는 이상 파고들 없음을 직감했다.

 

알았어빌려줄게그냥 빌려줄 테니까이유라도 알려줘.”

 

형은 말이 없었다 음울한 표정이란나는 금세 질문을 후회하고 말았다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며 운을 형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돌아보면 과연 굴곡 없이 평탄한 인생이었다 실패도 없었고눈에 띄는 성공도 없었다다만 좌에서 우로뒤돌음 없이 달려 나가는 인생이라는 곡선이 조금씩 주저앉고 있을 뿐이었다언제부터라는 질문은 소용이 없었다알아챈다 한들 어찌할 것인가이미 시간은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둘러보면 동기들은 저만치 달려 나가 아득한데 자신은 대학 시절 머무르던 좁다란 단칸방에 여전할 뿐이었다흔히들 말하는 평균치의 삶을 살기엔 조금 늦어버린 시기였다형은 선언했다지금까지 삶은 실패했노라고.

 

조금은 성급한 선언일지도 모른다살아낸 세월보다 살아갈 세월이 많은 나이였으니까허나 나는 소모적인 언쟁으로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 다른 의문을 던졌다.

 

형이 실패를 선언한 것은 전이었다그렇다면 지금인가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입대를 결심했는가형은 대답하지 않고 어물거렸다.

 

짐작건데미련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해가 저물어도 땅을 데우던 열은 남아 어른거릴지인데하물며 꿈은 어떻겠는가허나 이것만은 추측에 불과했다본인의 입에서는 대답을 들을 없었기에.

 

주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시계를 향했다말하길시계를 얻은 것은 선언이 있던 바로 다음 주였다고아니다형은 정정했다나는 시계를 샀다.

 

시계를?”

 

형은 잠깐 얼굴을 바라보다 덧붙였다오해하지 마라시계를 순간 저건 것이라 느낀 탓이었으니까참으로 공교로운 시기가 아닌가하여자신은 그곳에서 운명을 느꼈다고무슨 운명인고 하니이것을 계기로 인생을 통째로 뒤집을그런 종류의 운명이란다.

 

나는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을 어디엔가 없는 곳에 던져볼 작정이었으니까다만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그리 어려워 년간 방황했을 뿐이라고.

 

그러니 알아두라.

 

나는 입대하면 이름부터 갈아치울 작정이다아무도 사회에 있을 적의 나를 모르게.”

 

그것은 수치심의 발로인가새로운 출발을 위한 선언인가혹은 꿈에 남은 미련을 버리고자 함인가형의 표정은 음울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여 침잠한 눈동자에서 읽을 있는 감정이란 무엇도 확실치가 않았다.

 

 

 

6

 

 

 

사방은 아직 어두웠다다만 모닥불만이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모닥불을 뒤적이던 백삼의 눈이 나를 향한다.

 

들었어요.”

 

그녀의 표정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기에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있으리라 짐작만 뿐이었다백삼은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이어 말했다.

 

제가 그동안 이야기를 꺼렸던 까닭은당신이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까 걱정 돼서였어요.”

 

“…….”

 

하지만 이제 좋으나 싫으나 당신은 저와 엮인 신세죠어쩌면 군인의 눈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환영받지 못할 신세일지도 몰라요.”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당신을 믿고 싶어졌다는 말이에요.”

 

말하길본인은 사람을 분석하는 것에 있어 재능이 없으니다만 있던 일을 말할 뿐이라고하여 판단은 당신의 몫이라고.

 

말했던가요제가 배속된 곳은 자살 특공에 가까운 임무를 부대였어요하여 전역할 방법이란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하나였죠심지어 분대장은 시계까지 찼으니결국 죽을 운명이었죠어쩌면 거기까지는 얘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런 부대라 해서 특기할 만한 것이 있느냐 묻는다면없다고 단언할 있겠다알고자 한다면 다른 이에게 물어도 괜찮을 것이다아마 내게서 얻을 있는 답과 다르지 않은 얘기를 들을 있으리라.

 

모든 군인이 그렇다나뿐만 아니라 부대에 속한 모든 이가 같은 삶을 살았다하지만 오해하지 마라나는 이에 불평하고자 하는 아니다.

 

언젠가 분대장이 내게 물은 적이 있었다너는 그대로 만족하느냐고.

 

나는 물끄러미 분대장의 얼굴을 바라봤다 대답은 조금 애매했다저는 만족하지도 불평하지도 않고그저 그렇게 뿐입니다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붙잡고 수차례 질문을 던지길정말 이런 삶에 만족하냐고.

 

나는 되물었다마치 내가 불평하길 원하는 같다고대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지고 있는 아니느냐고질문이 멈췄다나는 무엇보다 분대장이 입을 다물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일상과도 같은 작전이 지나고몇은 죽고 몇은 전역하고 몇은 살고한참을 자고 일어났을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었던가나는 잠깐 분대장의 질문을 재고했다.

 

분대장은 깨어 있었다나는 조금 지친 기색의 분대장에게 물었다이런 삶에 만족하느냐.

 

분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그러면 입대하셨습니까분대장은 되물었다너는나는 망설이지 않았다위에서 명령했기 때문입니다분대장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나를 잊고 싶어 그랬다.

 

허나그것이 과연 잘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고.

 

여기서부터는 오롯이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다어쩌면 바다로 향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질문이 있던 바로 다음날이었다아침 해가 밝아오고나와 분대장과 살아남은 분대원 명은 곧장 다른 임무를 맡았다낯선 얼굴이 함께했고 그중 몇이나 남을지 모를 일이었다분대장은 그들 모두에게 이름을 붙여줬다번호로 불리던 그들 몇은 불퉁했고 몇은 비웃었다이름을 받아들인 이는 거의 없었다아마 명뿐이지 않았던가.

 

 

백삼아아니지클로에였나헷갈리려구 그런다네가 정하지 그러냐?

뭐를요?

이름 말이야.

좋을 대로 부르시죠.

이놈 부끄러워한다그럼 클로에라구 한다?

 

……

 

그리 이름에 집착하나요그쪽도 팔십오인 주제에.”

팔십오라 부르지 마라 이름 들으니 닭살이 돋는다분대장님이 붙여준 좋은 이름 있잖아.”

?”

그래칼만 덩그러니 있으면 조금 그러니까.”

 

하프너.

 

하프너하프너는 어디서 거예요?”

내가 붙였지.”

요새 고민이 있나 싶더니 겨우 그거였어요 대단한 고민하셨네요.”

그럼이름은 중요하지 않겠어?”

 

하프너는 물었다전역하면 뭐라도 하고 싶은 있느냐고덧붙이길언젠간 일어날 일이 아니느냐고.

 

언젠간 일어날 일이라고하긴팔다리 하나쯤 날아가면 전역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답에 칼은 조금 질린 기색으로 재촉했다.

 

재수 없는 소리 말고빨리 대답이나 .”

글쎄요.”

글쎄요하기사너한테는 어려운 질문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어려울 것까지 있나요다만 평소에 생각할 겨를이 없을 뿐이었죠그러는 그쪽은 무슨 대단한 계획이 있으시길래?”

나는…… 천문학자가 작정이야.”

 

하프너는 우선 도심을 떠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것이라 말했다사람이 많은 곳에선 별이 보이지 않으므로.

 

사실 별만 있으면 천문학자든 뭐든 상관없다고도 말했다굳이 천문학자인 이유는 별도 보고 돈도 있기 때문이라고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생활도 나쁘진 않아여기서두 별은 뜨잖아.”

그러면 그냥 계속 군대에 있지 그래요돈도 벌고별도 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은 사양이다.”

 

하프너는 그런 의미에서죽기 전에 별이 보이는 밤바다에 가고 싶다 말했다가본 없어 모르겠지만하늘도 땅도 모두 별로 가득이라고 광경이 보고 싶었다고.

 

나는 결국 하프너가 죽을 때까지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꿈이 무언지별이 무언지그게 뭐라고 그리도 간절히 원했는지.

 

그러니까네가 바다로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호기심이 동했다고 하면 될까요.”

“…….”

그뿐이에요정말로 그뿐이에요다른 이유는 없어요…….”

 

남자는 잠깐 말이 없었다눈이 멎는다사방은 고요했다다만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와 옅은 바람에 자작나무가 가지를 비비는 소리뿐이었다.

 

별을 보고 나서 작정이지?”

 

남자의 질문이었다나는 금방 이해가 가질 않아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너는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바다로 향한다 말했지그럼다음은 후엔 뭐가 있지?”

아무것도.”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대답이었다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아무것도?

 

나는 잠깐 대답을 곱씹다 멍하니 중얼거렸다그래요아무것도별을 보고 나면 자신은 어디엔가 없는 곳에 던져지게 테죠불구가 되어 강제로 전역하게 동료들과 같이다만 나의 선택은 아닌.

 

모닥불이 비춘 남자의 표정은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유서에는 소원을 이뤄달라 적혀 있었지.”

“……”

별도바다도 의지가 아니고 후의 일조차 모르겠다면그걸 과연 소원이라 말할 있을까.”

 

나는 잠깐 분대장의 음울한 그림자가 보인듯 싶어 아무 말도 없었다.

 

 

 

7

 

 

 

해가 뜬다. 사방은 온통 푸르스름한 안개로 가득했다. 잠깐 시간을 가늠한 나는 백삼을 흔들어 깨웠다. 모포를 두르고 웅크려 자던 백삼의 눈이 금세 뜨인다.

 

네 계획이 뭔지 몰라도, 오늘 밤 안으로 바다에 도착하려면 지금 출발해야 해.”

 

기지개를 켠 백삼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닥불이 있던 자리를 눈으로 덮었다.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리던 모닥불이 자취를 감춘다.

 

제 뒤로 따라오세요. 그편이 체력을 온존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전날 밤과 달리 무감각한 목소리로 돌아간 백삼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눈은 멎은 지 오래였다. 전날에 비해 날이 제법 푸근했다. 때아닌 안개가 자욱한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안개 속 흐릿한 인영을 쫓았다. 눈은 여전히 종아리까지 쌓여 있었다. 백삼이 앞서간 길이 아니었더라면 포기했을지도 모를 길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안개 속에서 돌연 전신주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선로와 연결된 것임이 분명했다. 백삼은 선로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지나가는 차를 잡아볼 셈이에요.”

그래.”

혹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열차에 올라타야겠죠.”

“…….”

어떻게 열차에 탈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또 터무니없는 짓이나 하겠지.”

당신을 들고 열차를 따라 뛰다가 올라탈 생각이에요.”

대단하군.”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이번엔 올라탈 작정이란다. 나는 그녀에게 내리는 것과 타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말로는 올라탄다 했지만 실지로는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지는 것과 다름없다고. 아무리 빠르고 튼튼하다 해도 고깃덩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백삼은 고개를 저었다.

 

시계가 있잖아요.”

나는?”

제가 있잖아요.”

말을 말자.”

 

우리는 다시 선로를 따라 걸었다. 백삼은 덧붙였다. 잘 생각해 보니 그냥 열차에 올라타는 게 낫겠어요. 그편이 시간을 아끼는 길이겠죠. 나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시간 아까운 줄은 알고 목숨 아까운 줄은 모르는 모양이군. 백삼은 흘겨보기만 할 뿐 대답은 없었다.

 

앞서가던 백삼이 걸음을 멈춘다잠깐 주위를 둘러보던 백삼은 어느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에 도로가 있어요차를 얻어 탈지열차에 올라탈지 정하시죠.”

 

나는 곧장 도로로 가자고 말했다백삼은 아쉬워하는 기색으로 철로 너머를 돌아봤다나는 그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급히 말했다.

 

적어도 정오는 돼야 다음 열차가 시간을 기다리느니 차를 얻어 타는 훨씬 빠를 거야.”

 

백삼의 걸음이 방향을 바꾼다선로는 멀어지고안개가 옅어진다. 사방은 하얗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높기만 하다. 헐벗은 들판 위로 선로 두 줄과 앙상한 나무만이 보인다. 도로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걷기만 하는 것도 지루하니, 얘기라도 들어보죠.”

무슨 얘기?”

당신네 형 말이에요.”

 

무슨 얘기를 원하느냐, 형의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 생각했는데. 특별할 것도 없는 인간이, 그저 그런 이유로 입대한 것으로……. 알는지 모르겠다. 심각한 듯 이야기했지만 이런 일은 흔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까, 인생의 끝자락에 선 이들에게는 말이다.

 

백삼은 고개를 저었다.

 

분대장이 이름을 지어준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에요.”

 

사실, 무슨 근사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지만. 덧붙인 말이었다.

 

왜 내가 알 것으로 생각하지?”

제 이름을 물었잖아요. 그것도 몇 번씩이나…….”

 

짐작 가는 이유야 있지만, 짐작일 뿐이다. 본인이 아니고서야 그 이유를 알 턱이 없지 않은가. 그래도 괜찮은가. 백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던가. 아마 입대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형을 만났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입대하면 이름부터 갈아치울 작정이다아무도 사회에 있을 적의 나를 모르게.

 

형의 선언을 끝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문자나 전화는 자주 오갔지만만나자는 말만큼은 한사코 무시하는 아닌가입대까지 고작해야 사흘밖에 남지 않은 때였다 무렵 나는 형의 입대를 말릴 생각을 완전히 그만두고 말았다부탁한 돈은 입금한 오래였다나는 사실을 조금 후회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안개가 짙은 날이었다언제나 내가 먼저 연락하는 입장이었는데그날만은 형이 먼저 문자를 보냈다.

 

시작하는 문장만은 똑똑히 기억한다조금 뜬금없게 느껴지는 내용이었으니까.

 

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기억하느냐안개가 짙은 날이었다.

 

넓은 수면으로부터 피어오른 물안개와 끝을 모르고 펼쳐진 갈대밭안개와 사이의 흐릿한 경계쯤에서 고개를 세운 물새들이 웅성이는 모습나는 하구라면 응당 그러한 풍경을 가질 것으로 생각한다따라서 하구에서만큼은 안개가 짙다는 것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하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안개가 짙은 날로 기억한다.

 

너는 아느냐할아버지가 한평생 가명으로 살아오신 것을내가 할아버지의 본명을 것은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다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할아버지의 이름은 가명에 불과했고할아버지는 이름을 가족에게까지 숨기며 살아왔다는 뜻이니까.

 

내가 이를 모르고 살아온 것은 식구들이 뜻을 존중해 줬기 때문이었다다만 장례식에서까지 가명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명패에 본명을 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유가 궁금해 할머니에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그때 할머니는 버럭 화를 내며별게 궁금하다고 뜻이 있어 그런 아니겠냐고 일축하셨다알고 보니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범죄자였다죄목이 무엇인지는 없으나가벼운 죄는 아니었을 것이다무기나 사형이 아니고서야 탈옥을 감행할 리가 없으니까할아버지가 탈옥에 성공한 것은 천운에 가까운 일이었다이후 할아버지는 이름을 숨기고 전국을 유랑하셨다고 한다.

 

유랑 끝에 할아버지가 정착한 곳이 하구였다당시 어수선한 국내 정세 때문이었는지항구가 가깝고 몸을 숨기기 쉬운 하구에는 이곳저곳에서 흘러든 사람이 많았다범죄자나 밀입국자심지어는 밀수꾼들까지 있었다고그때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가명이 지금껏 우리가 본명으로 알아 이름이다.

 

너는 할아버지가 가명으로 살아온 이유를 아느냐.

 

이르기를새로운 삶을 꿈꾸던 할아버지에게 본명이란 무거운 짐이었다고재판 죽음만을 기다리던 할아버지에게 본명은 공포와 다름없었다고때문에 하구에 정착한 할아버지는 자신의 과거가 깡그리 지워지기를 바라셨다본명에 얽힌 모든 이야기가 없던 일이 되길 바랐다그러니 할아버지에게 본명이란 없는 것이고하구에 정착하기 전의 삶이란 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것으로 대답을 갈음하겠다.

 

나는 시계를 차게 것이 별로 억울하다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삶을 어디엔가 걸어볼 좋은 기회라 여긴다너는 죽음만을 얘기했지만살아남을지도 모르지 않은가살아남는다면 할아버지처럼 삶을 이어볼 작정이다과거는 깡그리 잊고나무우듬지에 걸린 꿈마저 잊어버리고.

 

 

형이 입대를 결심한 것은 처한 현실이 견디기 어려운 까닭이겠지 모든 것이 순전히 탓이라는 더욱 견디기 힘들었을 테고.”

 

도로에는 진즉 도착했지만 백삼은 말이 없었다지나다니는 차는 없다도로 한가운데 주저앉은 백삼은 잠깐 생각에 빠진 듯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다만 정답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죠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네요자기가 뭐라고 남의 인생에……”

 

제가 이런 말을 자격은 없겠죠한숨을 삼킨 백삼은 얼버무리듯 말을 끝냈다 도로 너머를 가리키며 말하길차가 오고 있다고백삼이 자리에서 일어선다그녀는 길가로 가지 않고 도로 한가운데에서 차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낡은 픽업트럭이 다가온다차를 마주 백삼은 양팔을 넓게 벌리고 도로 위에 섰다요란한 경적과 함께 픽업트럭의 속도가 줄어든다.

 

차가 멈춘다백삼은 걸음을 옮겨 정면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얄팍한 인상의 사내가 걸쭉한 욕지거리를 뱉으며 걸어 나왔다.

 

백삼은 사내 앞에 시계를 들이밀었다 빌리죠사내는 당황한 기색이었다잠깐 말을 더듬던 사내가 외친다.

 

협박이라도 하는 거냐어디 그딴 가짜 시계 하나 가지고 강도질을 하려 드느냐백삼이 고개를 젓는다작은 손바닥이 사내의 가슴팍을 밀치더니 주먹질을 해댄다욕지거리는 비명으로 변한다.

 

제발 살려 주십쇼차고 돈이고 드릴 테니 목숨만은 살려 주십쇼.

 

백삼은 만족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말하길이것이 히치하이킹의 정석이라고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고 운전석에 앉았다.

 

바다로 가기 전에…… 잠깐 들렀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조수석에 올라탄 백삼이 어느 시골의 주소를 읊었다낡은 자동차가 꿀렁거리다 털털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로 위를 나아간다.

 

 

 

8

 

 

 

우리가 시골 마을의 여인숙에 도착한 것은 해가 거의 저물 무렵이었다골목 후미진 곳에 나앉은 건물은 보수공사를 하지 않았는지 페인트칠이 벗겨져 콘크리트 속을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었다눈이 허옇게 내려앉은 너머로 백열등 빛이 어른거린다나는 녹슨 철제 현관을 앞에 두고 어물쩍거리고 있었다백삼은 나를 지나쳐 문을 두드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술기운이 불콰한 중늙은이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뭐요?”

 

신경질적인 목소리 너머로 알코올 냄새가 올라온다나는 간단히 소개하며 누군가를 찾으러 왔다는 의사를 밝혔다반쯤 벗겨진 머리를 긁적이던 늙은이는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우리는 여인숙 앞을 서성이며 소식을 기다렸다.

 

여인숙 안에서 실랑이가 들리다이내 발걸음 하나가 너머로 다가왔다문을 열고 나온 것은 짝이 없는 젊은 여성이었다못마땅한 표정으로 차림새를 훑던 여자는 백삼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백삼내가 아는 백삼이 맞나얼굴은 확실한데…….”

그러는 그쪽은 오십사가 확실하네요여전히 못생긴 보기 좋아요.”

자식 주둥이 놀리는 꼴을 보니 백삼이 맞네.”

 

오십사라 불린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백삼은드물게도 조금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었다오십사는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저거 뭐냐 이거라도 되냐하며 새끼손가락을 치켜드는데백삼의 표정이 옅은 경멸을 띄며 구겨졌다.

 

분대장 동생이에요.”

양반가족이라곤 없는 작자인 마냥 굴어대더니……  정신 봐라여기서 이러지 말고 가서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하자내가 테니.”

 

하며 오십사는 급히 여인숙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앞서 전역한 전우예요백삼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이어 덧붙이길 하나뿐이 잃지 않았으니 운이 좋은 편이라고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겉옷을 대강 걸친 오십사가 뛰쳐나왔다.

 

백삼아아니지뭐였더라있잖아분대장이 붙여준 이름.”

클로에?”

그래그거전역했으니 묻는 건데뭐라 불러주랴?”

좋을 대로 부르시죠.”

 

백삼의 대답에 앞장서던 오십사가 웃음을 터트린다그녀는 백삼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나는 백삼이 편하다분대장이 붙인 이름 말이야뭔가 얼굴이 근질거린다 해야 할까너도 그렇지?”

글쎄요.”

그래분대장 얘기가 나와서 묻는 건데 양반 지금은 어떠냐전역은 했고?”

죽었어요.”

?”

죽었다구요분대장.”

 

오십사는 이상한 얘기를 들었다는 백삼을 돌아봤다백삼은 대답 없이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오십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한참은 느려진 걸음이 두어 발짝을 옮기고오십사는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분대장이 죽었단 말이지분대장이……”

 

짧은 한탄을 뱉더니 오십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해가 자취를 감추고길가에 드문드문 자리한 가로등이 불을 밝힌다눈이 내리기 시작한다길가에 소복하게 쌓인 눈이 덩치를 키운다.

 

백삼이 묻는다오십사그러니까분대장이 붙인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하나만 물을게요당신은 분대장이 이름을 붙이고 다녔는지 아시나요.

 

오십사가 걸음을 멈춘다음산한 거리 가운데 오롯한 가로등이 그녀의 머리 위를 비춘다짙게 드리운 그림자 탓에 나는 그녀의 표정을 없었다.

 

내가 분대장 가슴에 들어가 것도 아닌데어찌 알아정신병이나 걸려서 그랬겠지.”

 

당신도 이름을 받았잖아요.”

 

그래받기야 했지기억조차 나지 않지만적선하듯 던진 이름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겠다고심지어 분대장은 이미 죽었는데죽은 분대장을 깨워 이유를 묻는 아니고서야 이런 추측들이 무슨 소용인지.”

 

말을 끝으로오십사는 배에 기름칠이나 하고 얘기하자며고깃집의 손때 묻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이후 그녀는 고기와 술이 탁자 위에 놓일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기가 불판 위에 놓이기도 오십사는 반병을 단숨에 비워내고 입을 열었다.

 

다른 놈들은?”

마찬가지죠.”

 

오십사는 나와 백삼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채웠다백삼은 잔을 들지 않았고나는 예의상 잔을 같이 비워냈다.

 

죽었단 말이지칼도분대장도남은 너랑 나뿐이라 말이지?”

 

심지어 년은 없는 병신 신세가 아닌가낮게 깔린 웃음에 물기가 어린다다시 술잔을 연거푸 비운 오십사는 한탄하듯 말했다.

 

그거 아냐 지금두 군대가 그리워.”

그게 무슨 소름 돋는 소린가요.”

네가 몰라서 그래정말로나는 요즘두 차라리 부대에서 죽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술이 들어간 오십사의 얼굴은 정말로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백삼은 물었다 그리 군대에 집착하느냐오십사는 벌게진 눈을 반쯤 말했다.

 

나는 태어나길 부모 없이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랐다그거 아냐우리는 군인이 되기 위해 길러졌다우리가 군인이 이유는 별것 아니라그저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이다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나는 팔을 잃을 때만 해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조차 있었다하지만 전역증을 받고 나오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그렇게도 바라마지않던 전역증을 받았지만나와보니 막막하기만 하다전역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고 있다.

 

언젠가 분대장이 물은 적이 있다 싸우느냐고이런 삶에 만족하느냐고그때 나는 위에서 시키기 때문에 싸운다 답했다이제 생각해 보면 그건 사실이 아니다내가 싸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봐라 싸우지 못한다그다음은다음은 뭐가 있지?

 

아무것도…….”

 

그래아무것도.

 

오십사는 숨죽여 흐느꼈다

 

 

 

9

 

 

 

나는 이렇게 살아간다하지만 동정은 삼가달라각자 사는 방식이 다를 아니냐사회가 나에게 맞출 없는 노릇이니 내가 적응해야지…….

 

오십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뒤로 오십사는 술을 먹는 마는 하더니 휘적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황급히 뒤를 따라가니 어둑한 골목 가로등 아래 오십사가 멀어지고 있었다백삼은 오십사를 길게 부르며 멈춰 세웠다.

 

분대장이 이름을 붙이고 다닌 이유말씀드릴게요.”

 

골목 가운데 우뚝 오십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을 가지고 무슨 의미를 붙이겠다는 거야듣기 싫다너나 실컷 알고 있어라.”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이름을 정하지 못한 너도 매한가지 아니야선택하지 못한 일을 남에게 떠넘기다니너무 이기적이지 않아?”

 

밖은 어둡다별도 달도 없는 밤하늘은 검기만 하다창문마다 밝힌 불빛과 드물게 놓인 가로등이 보이는 전부였다백삼이 묻는다.

 

앞으로 어떻게 생각인가요.”

무얼?”

그러니까당신 인생이라든지.”

 

인생오십사는 우스운 것을 들었다는 되물었다백삼이 고개를 끄덕인다오십사는 미리 생각해 것이 있었다는 금세 대답했다.

 

나는 말이야 서른 살까지만 살아보려고.”

서른이요?”

 

서른인가요묻기에 대답하길,

 

젊은 시절은 이십 대까지라고 말하곤 하잖아꽃다운 시절이라든지열정 넘치는 나이라든지나는 군대에서 보냈으니 것도 없지만……. 그래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서른이 되면 무언가 달라지겠거니 싶더라고그래서 서른.”

서른이 되고 다음은?”

글쎄.”

 

서른이 내가 정하지 않을까어쩌면 이럭저럭 살아가던 내가 삶을 받아들일지도혹은 술잔을 내동댕이칠지도지금은 모르겠다아무것도.

 

그때가 되면 찾아와라 사줄 테니.”

 

대답은 없었다오십사는 백삼의 어깨를 두드리고 어디론가 걸어갔다아마 머물던 여인숙으로나 가지 않았을지백삼은 작별을 고하지도 않고 멀거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다어둑한 골목 속으로 오십사가 사라진다.

 

저희도 출발하죠.”

 

잠깐 머뭇거리던 백삼이 덧붙인다바다로.

 

낡은 차에 사람이 들어간다 털털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가 시골 마을에서 멀어진다.

 

조수석에 앉은 백삼은 눈을 감았다어쩐지 피곤하다답답하기도 하다손목에 얽힌 시계가 무엇 보다 거슬렸다.

 

며칠 간의 여행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백삼은 종막이 다가옴을 어렴풋이 느낄 있었다.

 

그대로 들으세요아무것도 묻지 말고대답도 말고.”

 

백삼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천천히 말했다.

 

당신의 분대장이 죽은 이유는 때문은 아니에요.”

 

어쩌면 그리 믿고 싶을 뿐일지도 모르지만덧붙인 백삼은 처음으로 묻지도 않은 얘기를 시작했다.

 

낮은 아니되밤도 아니었으니 해가 걸려 지기 직전의 시간이었다사방은 노을빛으로 물들고 쌓인 눈으로 하늘과 땅의 경계가 모호했다구름 없는 하늘은 금방이라도 별이 수놓을 것만 같았다어쩌면 멀리 샛별이 떴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분대는 공터에 모여 있었다직전 있던 무리한 작전으로 셋뿐이 없는 분대였지만그래도 분대 아니겠는가.

 

분대장이 말하길이제 다음 작전이면 우리는 죽을지도 모르겠다모르겠다고 끝마치기는 했지만확실히 끝장날 것이다그러니 이쯤에서 제안하겠다.

 

무슨 제안인고 하니뽑기나 하자무얼 걸고당첨을 뽑으면시계를 차고 탈영하는 거다 명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

 

가장 먼저 백삼이 보인 반응은 비웃음이었다겁쟁이 같으니이제 와서 위선이라도 작정인가요집어치우세요저는 관심도 없어요.

 

그러지 말고분대장도 힘들게 결심했을 텐데뽑기 하는 그리 어렵다고 그래.”

 

하프너가 나서서 백삼을 달랬다백삼은 여전히 불퉁한 기색이었다분대장은 아랑곳 않고 종잇조각 개를 내밀었다칼이 먼저 집어 가고마지못한 기색으로 백삼이 하나마지막 남은 것은 분대장이 가져간다.

 

백삼이 종이를 펼친다백삼은 눈을 감았다분대장이 이건 사기라며 투덜거린다백삼이 말하길나는 사는 것에 미련이 없으니 둘이 알아서 잘해 봐라.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손목에 시계 차고…….”

 

하프너가 백삼의 손목에 억지로 시계를 채운다그녀는 웃으며 어울린다고 말했다.

 

이제 빨리아쉬움이 남기 전에.”

 

분대장은 유언장이라며 봉투 하나를 맡기고 하프너는 재촉한다백삼은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면 부탁 하나만 하자.”

 

등을 떠밀며 말하길별이 잔뜩 바다로 가달라고나중에 소감이나 말해달라고.

 

백삼은 그날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시계 덕택인가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백삼은 새삼 세상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괜스레 앞섬을 여민다.

 

얼마나 걸었을까눈발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백삼은 불빛을 이정표 삼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눈길에 휘청이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백삼은 코앞까지 다가온 불빛을 올려다봤다기차역이었다.

 

역에는 아무도 없었다다만 대합실에 모로 누운 그림자가 보일 뿐이었다백삼은 잠깐 광경을 지켜보다 벽에 기대앉았다.

 

그날 새벽 백삼은 처음으로 들어오는 열차에 무임 승차해 정처 없는 길을 떠났다목적지는 유언장에 적힌 주소였다.

 

역은 온갖 사람으로 북적였다방금 내린 열차에서 사람들이 계단을 메우고 올라가고 있었다인파에 휩쓸려 밖으로 향한 백삼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깐 있었다단지 유언장을 전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도시에 왔을 뿐이었다.

 

도착한 당일은 아니었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유언장의 주인을 만날 있었다창백한 안색의 중년이었다그에게 다가가 말하되당신 앞으로 유언장이 있어요내민 봉투를 살핀 남자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그는 근처 건물에서 이야기하자며 자리를 옮겼다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었다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유언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머리카락 끝에서 빗물이 떨어진다내가 앉은 자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젖어갔다커피를 내온 종업원은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유서를 반복해서 읽던 남자가 덤덤한 어조로 묻는다 유서가 진실이라는 증거가 있느냐나는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냈다이게 무어냐유서를 적은 분이 찼던 시계예요형이 찼던 시계?

 

시계를 그쪽이?”

 

나는 잠깐 진실을 말할까 고민했다당신의 형은 당첨을 뽑지 못했기 때문에 죽었어요어찌 보면 탓이라고도 있겠죠하지만 말은 단어가 되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머무른다.

 

유언장에 쓰인 외에는 대답해 드릴 없어요.”

 

침묵 속에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가 이어진다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으나이뤄지리라는 보장은 없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는 연락처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당신이 분대장의 동생이었는지도 몰랐어요유언장은 읽지도 않았거든요다만 분대장이 말하길당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면 하나는 들어주리라는 말뿐이었죠글쎄요속여서 미안하다 말할까요.

 

속이긴 했지만당신이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어요거부하면 거부하는 대로 혼자 어떻게든 바다로 향할 생각이었죠분대장의 부탁은 유언장을 전해달라는 것뿐이었으니까.

 

이야기는 끝이에요이제 떠나고 싶다면 떠나도 좋아요.

 

 

 

10

 

 

 

해가 뜬다어슴푸레한 새벽녘이 들판을 채운다.

 

얼마나 남았죠?”

삼십 정도.”

 

남자의 목소리에서 짙은 피로가 묻어나온다중간중간 쪽잠을 자긴 했으나 밤새워 운전했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백삼은 잠깐 차를 세워달라 말했다남자는 되묻지 않고 차를 길가에 세웠다둘은 한참이고 말이 없었다.

 

여기서부터 바다까지걸어가면 얼마나 걸릴까요?”

아무리 빨라도 무렵에나 도착하지 않을까.”

별은 있다는 소리군요.”

 

남자는 묻지 않고 백삼을 바라봤다백삼의 눈은 남자를 마주하지 못하고 창밖의 풍경에 머무를 뿐이었다.

 

이제부터 혼자 갈게요그동안 고마웠어요.“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행동도 없었다백삼은 답답한 마음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낡은 픽업트럭 안으로 찬바람이 부닥친다백삼은 트럭을 돌아 운전석 창으로 향했다남자의 시선이 백삼을 따라 굴러간다.

 

백삼이 창을 두드린다창을 내리자 불쑥 시계를 내민다남자가 빤히 쳐다보자 말하길받아 가라고.

 

?”

당신 형이 남긴 유품이잖아요가족 손에 돌아가는 맞지 않을까요.”

 

하지만형이 네게 주기로 마음먹지 않았느냐남자의 대답이었다백삼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딴 무슨 소용인가요이제 분대장도당신도 지긋지긋해요당장 인생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에요 시계가 부담스럽다면어디 부대에 던져주면서 제가 죽었다고나 말해주세요 바다에서 얼어 죽었다고…….”

 

남자의 손에 시계가 떨어진다백삼이 뒷걸음질 친다남자는 백삼을 멈춰 세웠다눈동자가 굴러 남자를 향한다남자가 내민 것은두툼한 웃옷과 유언장이었다.

 

시계도 없이 차림으로 걸어가면 얼어 죽는다.”

유언장은?”

읽어보라고.”

 

백삼은 꾸깃하게 접힌 유언장과 웃옷을 받아들었다차창이 올라간다남자는 우두커니 백삼을 바라보다 운전대를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차가 멀어진다찬바람이 옷을 파고든다낯선 냉기에 백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시계를 차고 있을 적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느껴졌다백삼은 앞섬을 여몄다.

 

백삼은 유언장을 바다를 향했다 하프너이제 너만이 남았다.

 

주변은 황량하다도로 줄만이 사람의 흔적으로 오롯했다백삼은 종아리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맞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얼굴이 아려왔다.

 

해가 높이를 더하고 바다가 밝기를 더한다숨을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흩어진다신발 밑창은 녹은 물로 질척거렸다발가락은 아리다 못해 감각이 사라질 지경이었다돌아보니 걸어온 흔적이 눈길 위로 희미하게 보였다.

 

걸음 내딛자 몸이 휘청인다길이 유난히 미끄럽다휘청거리며 걷던 백삼은 이내 크게 미끄러지고 말았다눈길에 엉망으로 뒹군 몸이 욱신거렸다.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난 백삼은 바다 쪽을 우두커니 바라봤다해가 때까지 얼마나 남았을까얼어 죽기 바다에 있을까모를 일이었다코끝이 시큰거린다.

 

문득 유언장에 생각이 닿은 백삼은 손으로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구깃구깃하게 접힌 유언장이 천천히 펴진다손끝의 감각이 둔하기도 하고떨리기도 하여 시간은 더디게만 느껴졌다.

 

나는 이미 죽어 움직이지 못하는 자의 부탁이 얼마나 헛된지 안다. 죽어 이룬 소망이란 아무것도 되지 못하며, 유언이란 살아있는 이에게 떠맡기는 짐일 뿐이다.’

 

유언장의 첫머리를 읽은 백삼은 눈을 질끈 감았다무슨 소리인지지금 자신의 행동을 가리켜 비난하는 것인지심호흡을 백삼은 천천히 유언장을 읽기 시작했다.

 

동생에게 부탁하는 글귀가 지난다유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분대장이 말하길그녀가 무슨 이름을 대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다만 이름이 클로에이길 바랄 뿐이라고.

 

백삼의 손에서 유언장이 떨어진다백삼은 바다 위에 놓인 유언장을 번이고 밟았다 속에 파묻힌 종이가 보이지 않게 즈음하얀 숨을 내뱉던 백삼은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11

 

 

 

바다를 향한 길은 종막이 가까워져 온다.

 

백삼이 바닷가에 도착한 것은 서산 허리춤에 걸린 해가 마지막 빛을 내뿜을 무렵이었다눈은 내리지 않았고하늘은 맑았다백삼은 멀리 어스름 너머로 보이는 도시를 바라봤다얼굴은 화끈거렸고 발은 감각이 없었다백삼은 도시를 등지고 걸었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사방은 고요해졌다포장도로를 떠난 길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쌓인 눈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리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신발과 바지 밑동은 젖은 오래였다도시의 불빛이 멀어질수록 하늘에 별빛이 떠오른다하루 종일 걸어 제대로 쉬지 못한 몸은 한없이 무거웠다하늘에 떠오른 별빛의 수가 제법 많았다.

 

산도 들도 없고 흔한 가로등도 없는 곳에 백삼은 섰다하늘은 맑았다해도 달도 없이 오직 별뿐이었다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물보라가 하얗게 피어오르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올려다보면 별바다였고내려다보면 물결에 하얗게 부서진 무리였다하여 세상은 우주 속에 덩그러니 놓인 것만 같았다백삼은 바닷가에 말없이 오랫동안 있었다.

 

뒤로 인기척이 느껴진다분대장인가아니면 그것도 아니라면 오십사혹은 먼저 떠난 남자인가문득 생각해 보니이름도 듣지 못했다백삼은 돌아보지 않았다.

 

발등에 파도가 닿는다.

 

“저는 당신의 형이 제게 클로에라는 이름을 주었는지 이해해요단순한 오지랖인지시계를 이가 베푼 친절인지무언지동기는 없지만이유는 확실했죠.”

 

백삼의 목소리는 기이한 어조로 떨리고 있었다.

 

“때때로 인생은 벅차게 느껴지곤 해요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바랄 때는 수도 없을 지경이죠허나 현실은 결코 꿈이 없어요분대장이 제게 내민 것은 일종의 도피처였어요. 13-C-103이라는백삼이라는 이름을 버리고클로에라는 이름으로 도망치라고하여 본명에 얽힌 모든 이야기가 없던 일이 되길전의 삶을 꿈이라 생각하고 삶을 살아가길.”

 

하지만 이름은 쉬이 선택할 있는 것이 아니었다선택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오직 백삼만이 뿐이었다백삼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제가 살아낸 세월을 삶이라 칭할 있을는지요어쩌면 거품과도 같은 환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죠다만 제가 환각 속에서 버틸 있었던 것은그저 그리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요단순한 삶이 주는 단순한 행복에 만족했기 때문이 아닐까요밀면 미는 대로당기면 당기는 대로…….”

 

클로에라는 이름을 선택한다는 것은겪어온바 모두를 내려놓음을 뜻했다이제 삶은 멋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제가 당신을 찾아간 이유를 아시나요어쩌면 결단을 미루기 위한 핑계였을지도 모르죠그러니 하나도움을 청하건대홀로 내리지 못한 결단을 내리길 도와주세요.”

 

아니다네가 착각하고 있는 하나 있다 자신이 구하지 못한다면 누구도 너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말은 진절머리가 나요저는 단지 대답을 바랄 뿐이에요.”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아니당초에 말을 했던가그저 자리에 우두커니 있던 아닌가도무지 없었다백삼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분대장도 하프너도 모두 죽었어요남은 저뿐이에요하지만 저죠 하필 저인가요차라리 분대장이하다못해 하프너가…….”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백삼은 고개를 들었다하늘은하얗게 맞닿아 있다일렁이는 물결에 부서진 별빛이 손짓하는 같았다.

 

파도가 종아리를 스친다.

 

별이 백삼을 부른 것인가백삼이 별을 바란 것인가남자도바닷가도 보이지 않았다세상은 온통 별바다뿐이었다하여자신은 얼마나 초라한가.

 

파도가 무릎까지 올라온다.

 

나는 우연히 세상에 던져져 우연한 삶을 살아왔다혹자는 필연이라 믿었으나 나는 우연에 불과함을 알았다그러니 세상은 기쁠 것도슬플 것도 없다.

 

아니라면앎이 아닌 그저 그리 믿을 뿐이었나허면 네게 묻겠다내가 너를 찾아옴은 우연한 일인가그렇지 않다면 네가 나를 불렀는가대답해라대답해.

 

그러나 별은 대답 없이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쥐면 잡힐 같은 무리가 아른거린다손을 뻗는다.

 

파도가 가슴팍을 때린다.

 

나는 모든 것이 우연함을 믿었다그렇다면죽음조차 우연한지.

 

아마도모든 번호가 그러하듯이내가 또한 우연 아니겠는가다만 하프너도분대장도 그저 운이 좋지 않을 뿐이었다어쩌면 또한그러니 묻지 말라.

 

모든 물음을 저변에 던져버리고 눈을 감는다망막 아래서 별바다가 떠오른다거센 파도가 가슴을 후려친다 .

 

바다 위에서 빛나던 은발 하나가 수면 아래로 사라진다물결이 위를 덮는다.

 

시간이 흐른다물결이 거세진다백삼은 수면 아래로 영영 사라진 것만 같았다물결이 백삼이 있던 자리를 덮는다.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 하나가 떠오른다그녀는 바닷가를 향해 헤엄쳤다하여 남자가 그녀를 맞이했을 때는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흠뻑 젖은 채였다.

 

그녀는 울었다한참을 울었다.

 

울지?”

 

“……제가 우연한 존재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말했다.

 

저는 죽음조차 우연으로 받아들일 작정으로 바다로 나아갔어요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겁쟁이처럼모든 것을 내던졌죠하지만 보세요막상 순간이 닥치자저는 죽음에서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쳤어요삶을 갈구하는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저는 의지 없이 살아왔다 믿었지만모든 것은 선택이었죠…….”

 

“……”

 

당신 말이 맞아요 자신이 구하지 못한다면 누가 저를 구한단 말인가요 삶의 선택자는 오직 저뿐이에요정말로 그뿐이죠얼마나 잔인한지.”

 

남자는 물었다.

 

나는 너를 뭐라 부르면 좋을까.”

 

발치가 젖어 든다얼굴에 흐르는 물이 별빛에 반짝인다.

 

때때로 인생은 벅차게 느껴지곤 한다하여 차라리 꿈이라 생각하는 나을지도 모른다그러나 현실이 결코 꿈이 수는 없는 법이다그렇다면인생이라는 쓴잔을 마실 것이냐혹은 던져버릴 것이냐.

 

삶이 우연이 아니라면그것이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라면결국 삶은 자신의 손으로 채워가야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나는 누구인가.

 

저는.”

 

이제 내려야 한다한평생 미뤄왔던 질문에 대한 답을.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한다별빛에 흐릿한 얼굴은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클로에.”

 

클로에가 말한다하지만 클로에만 덩그러니 있으면 조금 그러니까.

 

클로에. 스타시커.”











옜날에 썼던건대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이전거는 지웟엇음,,, 그래서 다시 올림,,,정말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