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눈을 뜨니 나를 버린 스승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나유빈은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스승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다니, 꿈 한번 참 요상했다. 

여전히 이 작은 두 손에 여운이 남은 듯한...


작은 두 손?


나유빈은 자신의 손 크기가 꿈에서 깨기전의 어린 남자아이 손크기 그대로임을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


고통은 여전히 느껴진다.

정수리쪽 부어오른 혹을 매만질때마다 정신을 그대로 놓아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격통이 그의 두개골을 쥐고 흔든다.


꿈에선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하는 절차는 대개 볼을 꼬집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볼을 꼬집어서 아프지 않으면 꿈, 아프면 현실이라는 식으로..


하지만 지금 분명하게 느껴지는 이 묵직한 통증은 그에게 어이없는 상황들을 인정하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예를들면 지금 그가 있는 곳이... 꿈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라던가.


  • 눈을 뜨니 나를 버린 스승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





“..이제야 일어났구나.”


뭐지, 데자뷰?

나유빈은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기시감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저번에도 힐데는 이렇게 그에게 첫 인사를 건넸던 것 같다.


“크흠, 그, 머리는 좀 괜찮으냐.”


아파 죽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책하고 있는 것만 같은 힐데의 축 처진 표정이 나유빈을 주저하게 했다.

이것 또한 나유빈일 적의 그에겐 보여준 적 없는 얼굴이었다.


이게 꿈이 아니고 만약 진짜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경험이라면 그 실눈 후배녀석은 참 복에 겨운 생활을 하고 자랐구나 싶었다.


“괘,괜찮습니다.”

“..괜찮다니 다행이군.”


예나 지금이나, 힐데는 대화라는 것에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소통의 단절탓에 또 다시 찾아온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서 스멀스멀 커져가는 바람에 이젠 누가 먼저 입을 떼는것조차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게 되고 말았다. 


이 모습일때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나유빈이었기에무슨 주제라도 좋으니 일단 말을 이어가 볼까 하던 찰나, 힐데가 그 작은 몸을 일으켰다. 


“따라와라, 주시윤.”

“아.. 네.”


역시 주시윤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고 인지하지 못 하고 있다가 따라오지 않는걸 이상하게 여긴 힐데가 재차 독촉하기 전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으니 말니다. 


익숙하지 않은 짧은 보폭으로 쫄래쫄래 힐데의 뒤를 쫓아간 그는 

힐데가 거처하는 숙소의 마당인 꽤나 널찍한 공터를 볼 수 있었다. 


“헉, 헉..”


그의 스승은 다리도 짧은 주제에 걸음이 퍽 빨라서, 단련하지 않은 어린 소년의 몸으로 뒤따르려다 보니 숨이 차오른 상태였다. 


“받아라.”


힐데는 나유빈을 향해 길다란 목검을 무심하게 던졌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나유빈은 현재 다른 사람의 몸, 따라서 싱크로율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었고, 결국 그는 스승이 던진 목검에 어제 힐데가 만들어준 혹을 제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크악!“

”이,이런!“


당황한 얼굴의 힐데가 허둥지둥 나유빈에게 달려와서 그의 상처를 살폈다. 

살짝 손을 대는 것 만으로도 더럽게 아픈 환부를 던져진 목검으로 얻어맞아 아픈것보다, 이것조차 받지 못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 역력한 힐데의 눈길이 나유빈은 더 아팠다.


”다행히 피는 나지 않는구나. 하지만 이 정도 신체능력이라면, 당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 지 감도 안잡히는군.“

”시,시작이요..?“

”주시윤, 너는 네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 언제까지나 내가 네 곁에 있을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그 말은, 언젠가 이 소년조차 버리고 떠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온 원망은 끝내 세상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것은 나유빈의 몸으로서 해야 할 말이지 주시윤의 몸을 빌려서 할 말이 아니었다. 

어쩐지 지금의 이 상황이, 점점 꿈보다는 현실같다는 생각이 짙게 들기 시작한 나유빈이었다. 


“..일단 검을 들어라. 기뻐해도 좋다. 너에겐 다행스럽게도 나는 꽤 괜찮은 스승이거든.”


힐데의 말을 듣자 나유빈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아직 이 몸에 음모는 나지 않은 것 같긴 하다. 


그의 몸속에 새겨졌던 과거 펜릴 전대시절 힐데로부터의 훈련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엘리트라고 자부했던 그조차 힐데의 무식한 훈련을 받고나서는 2-3일간 앓아 누웠을 정도로 혹독한 과정이 지금 반복되는것이다.


하물며 이 소년의 몸으로..? 

과연 나는 오늘 살아서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


나유빈이 목검을 든채 엉거주춤하게 서있으니 힐데가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서 검을 쥔 자세를 고쳐주었다. 


따스했다. 

억울할 정도로.


“죽어도 검을 쥔 손을 놓지마라. 죽을거라면 검을 쥐고 죽어라. 검을 놓치면 어차피 죽게된다. 하지만 검을 쥐고 어떻게든 살아서 버티면,”


“..그때쯤엔 내가 네 곁에 있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 소년의 부모의 생명을 거뒀다는 주박이 스승을 변하게 만든걸까. 

이 소년의 뭐가 그리도 특별한걸까. 

눈을 좀 가늘게 뜨고 다닐걸 그랬나.


나유빈의 머릿속에 잡념이 들어찼고, 힐데의 목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딱!


“크악!”

“집중해라, 주시윤.”


노렸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힐데의 목검은 정확히 그 혹을 노렸고 나유빈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리고 힐데의 훈련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성장이 끝나지 않은 소년에게 맞춘 커리큘럼 덕분인지 나유빈은 예상보다 적은 데미지를 입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팔다리가 후들거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몸을 엄청나게 움직인 덕에 싱크로율이 오른 것 같은 점은 긍정적인 신호라고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몸에 신세질지 모르는데, 잘 다룰 수 있게되면 좋은거니까.


힐데는 주시윤의 훈련을 봐주는 것만으론 성에 안 찼는지, 개인 훈련을 더해서 땀을 흘리고 있었고 나유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넋을 내놓고 있었다.


군살없이 들어갈데 들어가고 나와야할 곳도 들어간 날렵한 몸매, 신기에 가까운 검술과 그 검술을 가능케하는 신속한 몸놀림, 잡티 없이 투명한 우윳빛깔피부와 호박색 눈동자, 균형잡힌 이목구비는  왜 그녀가 전장의 여신이라고 불렸는지 알게 해주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바람에 휘날리는 백은발 머리칼이 신비로움을 더했다.


나유빈이 체력을 회복하는 약 30분간, 힐데는 점점더 속도를 높여

기어코 나유빈의 눈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속도의 신속으로 움직이고 나서야 땀을 닦으며 탈팍 주저앉아 있는 나유빈의 곁으로 걸어왔다. 


“다 쉬었나?”

“네, 네!”

“첫 날이지만, 고생 많았다. 먼저 씻도록.”


힐데는 수건으로 뺨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으며 말했다.

나유빈은 차례로 힐데의 뺨, 목덜미, 셔츠 속 가슴팍까지 훑고 있는 수건을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바로 어제, 원없이 주물렀다고 생각한 스승의 젖가슴이 눈앞에서 소심하지만 은은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제의 원없이는 원없이가 아니었나보다.


“저, 스승님.”

“무슨 일이지?”


힐데는 몸에 열이 올라 많이 더운지 평소보다 셔츠 단추를 두개나 더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가슴골이 아주 빈약하게, 그것을 골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어서 나유빈은 군침을 꿀꺽삼켰다.


“더워 보이시는데 욕실에 같이 들어가시는게.. 저, 아직 혼자서 씻는것도 못하고..“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그의 외견은 10살도 채 되지 않은 꼬맹이였지만 알맹이는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아저씨였으니까.


하지만 주시윤의 몸을 하고 있는 그를 특별대우 하고 있는 힐데를, 지금껏 본 적 없이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힐데를, 

어린애를 다루는 법에 무지한 힐데를, 

소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힐데를 나유빈은 믿었다.


그는 왠지 그의 스승이 응석을 다 받아줄 것 같다고 느꼈다.

이 몸이 되고, 어제 힐데의 가슴을 주무르면서 알 수 있었다.


인간관계를 맺는데 젬병인 힐데는 몰아붙이는 것에 약하다.

나유빈의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듣고서 곧바로 거절하지 못하고서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지금 모습이 그 증거다.


”스승님이.. 씻겨주셨으면 좋겠어요.. 안 될까요?“


힐데는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붉어진 얼굴에 부채질을 해댔다.


”..알겠다. 먼저 들어가서 욕조에 물을 받아두도록. 곧 들어가마.“


나유빈은 힐데가 볼 수 없게 뒤돌아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소년의 순수한 미소였는지, 아저씨의 섬뜩한 미소였는지 아마 힐데는 평생 알 수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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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간내에 완결못냈다..

진짜 감사한 기회였지만 현생에서 프로젝트 스케일이 이렇게 커질줄 몰랐음ㅋㅋㅋ 대회탭은 떼겠지만 갠적으로 쓰는게 재밌는 소재라 아마 완결까진 쓸것같습니다


주최자분께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