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 1890년 5월 18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


좌옹 윤치호(1865-1945)


윤치호는 양반집 자제로 태어나 유길준이나 김옥균등과 서구의 과학, 의학, 종교 사상을 공부한다. 공부를 하면서  유교 사상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개혁을 결심하게 된다. 


급진개화파였던 그는 갑신정변이 실패할 것이라 예상해서 만주로 도망간다. 갑신정변 이후 상하이에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계속하게 되는데 이때 미국의 인종차별 및 실력 양성, 국제 사회의 현실 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귀국 후 민권 사상과 합리주의로 민중을 깨우치겠다고 결심한다.


윤치호가 상하이에서 공부했었던 동오대학(중서서원)


한국으로 돌아온 윤치호는 이후 국민 계몽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독립협회 활동과 만민공동회 강연활동을 통해 민권 사상, 민주주의 사상, 만민평등론을 설파하였다. 


독립협회 활동 모습


그러나 독립협회의 활동에 대해 고종은 그들에게 반역의 의도가 있다고 인식했다. 이로 인해 독립협회가 해체 당하고 민중의 지지도 잃게 된다. 


민권사상과 참정권 외치고 민중에 의한 정치를 부르짖었음에도 민중에게 외면당하고 황제에게 반역자로 낙인찍히자 그는 조선에 대한 발전 의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후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는 쪽으로 가치관이 변한다. 


일제 치하에서 윤치호는 그래도 교육, 계몽 사업에는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YMCA의 설립 및 지원연희전문학교의 교장을 맡는 등의 행동을 하였다. 


연세대학교의 전신 연희전문학교


그러나 독립운동 참여 요청은 모두 거절한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최남선 등 민족 대표 인사들이 찾아가 민족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여를 부탁하였지만 그는 열강이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가지겠느냐거절했다. 그 뒤에 3.1 운동 이후 체포되는 학생들에 대해 민족 대표자들이 방관하는 것을 두고 어린 학생들을 제물로 삼았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독립 운동 과정에서 안창호의 서북파와 여운형의 기호파 간의 다툼이 끊이지 않자 이런 것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며 일갈했다고 한다. 그러는 한편 안창호의 석방을 주도했으나 실패하고, 그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보석금을 내고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하려고 노력했지만 곧 사망하게 되고 이를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1940년대에 이르자 윤치호는 창씨개명을 하고 중추원 참의직을 수락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행적을 보이게 된다. 


일제시대 중추원의 모습



이러한 행적으로 일본이 항복한 후 친일파로 규탄받게 되자 조선의 독립은 독립 운동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독립 운동가들은 한 것도 없으면서 거들먹거리는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1945년 12월  "모든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는 삼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1945년의 윤치호



어록


내 나라에 퍼붓는 경멸에 대해 내가 얼마나 분노하는지, 그런 한편 내 나라가 갱생할 가능성에 대해 내가 얼마나 절망하는지 어느 누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까? 분노와 절망이 일으키는 감정의 불쾌함과 쓰라림을 견딜 수가 없다.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저열하고 무능한 조선의 민족성으로는 자치를 손에 쥐어준다고 해도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찾아왔다. 서한을 내밀며 조선 독립을 위해 자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신변이 위험해질 수 있어 줄 수 없겠다며 아울러 독립운동가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조선에 잠입하지도 못하면서, 내게는 생명을 담보로 자기들에게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게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조선인의 특징은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는 하지 않고 다 함께 달려들어 무조건 몰매를 때리고 본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고집부리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야만이 자신의 체면, 자존심이 선다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조선인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살아간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 못하는 자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수치스러운 조선 역사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현 정부 하에서는 개혁의 희망이 없음을 확신케 된다. 정부는 500여 년간 국가의 향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애국가를 내가 작사 했다고 말 하지 마시오. 내가 지은줄 알면 나를 친일파로 모는 저 사람들이 부르지 않겠다고 할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