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게시판

1편 : https://arca.live/b/dogdrip/21498011

2편 : https://arca.live/b/dogdrip/21525210


밥이 다 안되서 한 편 정도 더 쓰고 밥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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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2년 1월 9일 경인 1번째 기사부터 이어서 시작하자. 여기서 선조는 명 구원군의 정왜대장 마귀(이름이 왜 하필)를 맞이한다.


상이 강상(江上)으로 나아가 마 제독(麻提督)을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제독의 접반사 이광정(李光庭)이 먼저 와서 서계하기를,

"제독이 가만히 신에게 말하기를, '서 급사(徐給事)와 정 주사(丁主事)가 모두 탄핵을 받았는데, 서는 정에게 아첨하였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제독이 이르러 사례하니, 상이 말하기를,

"흉적이 달아났으니 황은이 망극하여 대인의 은덕 또한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하고,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해를 이어 수고한 정황에 대해 치사(致謝)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큰 복입니다. 제가 한 일은 배신이 보았고 현왕(賢王)께서 익히 들으신 바이니 번거롭게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행군할 때 남도의 부로(父老)들이 고기와 술을 가지고 와서 맞이했으니, 군사(軍事)에 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은 예의(禮義)의 나라로서 참혹하게 병화를 입었다가 지금 재조(再造)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제반 앞날을 위한 계책은 오직 예단(譽斷)에 달려 있습니다. 역전(力戰)의 장사로서 권응수(權應銖)·김응서(金應瑞)·성윤문(成允文) 같은 자들은 모두 양장(良將)이니 동방에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여러 대인들이 우리나라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만, 대인은 가장 먼저 본국에 왔고 지난해 울산(蔚山)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므로 금년에 재차 진격한다면 적은 스스로 도망칠 것입니다."

하니, 제독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이순신(李舜臣)이 혈전을 벌이다가 죽었는데, 저는 그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하였으나 탄복할 만합니다. 그의 자손에게 포상하여 그 충렬을 정표(旌表)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이미 추장(追奬)의 은전을 존교(尊敎)대로 하였습니다. 등 총병(鄧摠兵)이 우리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었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성 안에 들어가 처리할 일이 많아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교외에 사람이 너무 많으니 번거로울 듯 싶습니다."

하고, 일어나 나갔다. 상이 뒤따라 그의 아문에 도착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멀리 강가에까지 나와 위로해주시고 또 왕가(枉駕)하시니 미안합니다."

하였다. 상이 사례하고, 이어서 묻기를,

"대인이 몸소 부산(釜山)·도산(島山) 및 연해의 적채(賊寨)까지 가셨었는데, 형세가 어떠했습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이번에 왜적이 물러간 것은 관백(觀白)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듯 합니다. 조만간 다시 쳐들어 올 것인데 그 해독은 반드시 더욱 심할 것입니다. 그러니 방수(防守)하는 데에 십분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적채의 배치와 형세의 험난하고 평이함은 배신이 직접 보았으니 제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염려하여 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다만 극도로 잔파(殘破)되었으므로 자존(自存)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참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으나 그 잔파된 가운데에서 진기시킬 방법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천병(天兵)과 협력하여 요해처를 나누어 지키면 어찌 저 적들을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이미 천병의 힘을 빌어 왜적을 물리쳤는데 다시 천병에게 유방(留防)해 주기를 요청하는 것은 우리나라로서는 감히 꺼낼 수 없는 일입니다만, 우리의 힘으로서는 자진(自振)할 방법이 만무하므로 할 수 없이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유병(留兵)시킬 생각이십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3로의 총병(摠兵)이 모두 돌아와야 의정(議定)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예물을 주고 나왔다.


실제로 왜란 이후에 조선은 일본이 다시 침공할 거라는 공포에 시달린다. 선조도, 명 관리들도 일본이 다시 침공해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 그래서 선조는 명 병력이 조선에 주둔해서 보호해주길 바란 것.


이러고 다시 저녁에 방문해서 대화하는데, 마귀 제독은 이순신의 고향을 묻고 다시 한 번 애석함을 표했다. 그러나 주요 내용이 없어서 여기서는 생략함. 관심있는 사람은 선조 32년 1월 9일 경인 5번째 기사 참고.


또, 서관란이라는 명 관리가 돌아가면서 이순신을 특별히 언급해 자손을 녹용하고 봄 가을로 치제하는 일을 언급한다. 이것도 인삿말로 한 내용이라 생략함. 관심있는 사람은 선조 32년 1월 21일 임인 2번째 기사 참고.


다시 며칠 뒤에 명 장수인 유정을 맞이한다. 여기서도 이순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하는데, 역시 언급하진 않겠음. 위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관심있는 사람은 선조 32년 1월 29일 경술 2번째 기사 참고.


이후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4월이다. 선조 32년 4월 14일 계해 5번째 기사임.


홍문관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의 사당을 건립하는 일에 있어서, 관청에서 했는지 백성들이 하였는지 전대의 일들을 상고해 보라고 전교하셨습니다. 한(漢)나라 때 한천추(韓千秋)가 여가(呂嘉)를 토벌하다가 죽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고, 송(宋)나라 때 요흥(姚興)이 금(金)나라 사람들과 위자교(尉子橋)에서 싸울 때 직접 수백 명을 죽이고 전사하자 사당을 세워 사액(賜額)하고 그 충성을 정표하였으며, 황조(皇朝)의 하흥륭(賀興隆)은 호광(湖廣)을 맡아 주문귀(周文貴)와 싸우다가 전사하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습니다. 백성들이 사당을 건립한 경우는 당(唐)나라 장근(張謹)이 복건초토사(福建招討使)로 있을 적에 황소(黃巢)가 관중(關中)을 침범하자 장근은 장교(將校)들을 거느리고 적중에 뛰어들어 적과 함께 싸우다가 죽으니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고, 당나라 전거태(田居邰)가 왕명을 받들고 적을 토벌하여 힘껏 싸우다 죽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적에 있어서는 《삼국사(三國史)》나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해 보았지만 서로 흡사한 예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지승람(與地勝覽)》에 혹 상고할 곳이 있다고 하나 문적(文籍)이 산실되어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례를 다시 고찰하여 아뢰라."

하였다.


원래 이런 내용은 조선에서는 항상 전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순신의 사당을 건립하는 것도 전례에 따라 해야되는데, 전례를 고찰하다가 우리나라 내용이 없는데요? 하니까 선조가 다시 찾아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홍문관에서는 전례를 다시 찾아서 보고하는데, 선조 32년 4월 25일 갑술 4번째 기사이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관하여 전례를 고찰한 다음 아뢸 것을 전교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전사(前史)에, 신라(新羅)의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의 사당은 강릉부(江陵府) 화부산(花浮山)에 있는데 이는 관청에서 세운 것인지 백성들이 건립한 것인지 고증할 수가 없으며, 고려의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의 사당은 진주(晉州) 부중에 있는데 천희(天禧) 중에 거란병(契丹兵)과의 전투에서 공이 있자 고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고려 문하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의 사당은 선산부(善山府) 금오산(金烏山) 아래 있고, 감사가 현재 건립하고 있는 포충사(褒忠祠)와 표절사(表節祠)는 평양부(平壤府)에 있습니다. 고려 고종조(高宗朝)에 필현보(畢玄甫)가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군 정의(鄭顗)를 파견하여 현보를 효유하게 했었는데 오히려 현보가 그를 주장으로 삼으려 하여 유혹도 하고 협박도 하였지만 굴복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장서기(掌書記) 오선각(吳先覺)은 묘청(妙淸)의 난리 때 어리석은 체하며 참여하지 않았고 대장군 조린(趙璘)은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꾀하다가 그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력(萬歷) 기축년에 감사 윤두수(尹斗壽)가 이들을 모두 정표(旌表)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권징(權徵)이 잇따라 부임하여 위에 알려서 사액(賜額)을 받았습니다. 고려의 안종원(安宗源), 본조의 조운흘(趙云仡)·신유천(辛有天)·류양(柳亮)은 모두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지냈는데, 백성들이 덕정(德政)에 감화되어 모두 생사당을 건립했고, 녹도만호(鹿島萬戶) 이대원(李大源)은 손죽도(損竹島)에서 전사하였는데 조정에서 포상(褒賞)과 벼슬을 더해주었으며 감사 윤두수가 본진(本鎭) 수군(水軍)들의 소원에 따라 사당을 세워 그가 죽은 날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이 밖에는 상고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렇게 된 이후에 다음해까지 이순신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좌의정 겸 도원수 이항복과 영의정 이산해와 만난 자리에서 선조는 이순신의 사당 건립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선조는 민간에서 세운 것은 많은데 나라에서 세운 것이 없으니 잘 따져서 하라고 당부한다. 직접 보고 싶은 사람은 선조 33년 1월 29일 갑술 1번째 기사 참고.


그리고 선조 34년 3월이 되면 선조는 임진왜란과 이몽학의 난 당시의 공훈에 대해 녹훈할 것을 전교한다. 그런데 선조 34년 3월 14일 임자 8번째 기사에서 선조의 행동이 이상하다. 직접 보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호종했던 신하들이 오늘 함께 모였는데 큰 절목(節目)은 전일에 이미 상의하여 취품(取稟)하였습니다.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 공이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홍가신(洪可臣)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만나서 의논하여 마감해야 할 것인데, 듣건대 홍가신이 지금 외방에 있다고 하니 급속히 하유하여 역말을 타고 올라오도록 하소서.

그리고 전일의 계사에, 적을 초멸한 신하에 대해서는 아직 원훈(元勳)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상의 결단을 감히 취품하여 먼저 원훈을 결정하려 하였는데, 삼가 대신이 헤아려서 하라는 전교를 받들었습니다. 대체로 녹훈을 마감하는 일은 반드시 원훈이 있는 것입니다. 경중을 헤아려 참고하는 것은 대신에게 의논하는 것이니, 그것은 신이 원훈의 신하와 상의하여 하겠습니다. 그러나 원훈에 있어서는 신들도 감히 경솔하게 단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우선 전고(前古)의 사례를 들어 말하자면, 한 고조(漢高祖)가 원공(元功) 18위(位)의 순서를 조칙으로 정하고 그 나머지를 논공행상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원훈을 정하는 것은 반드시 성상께서 결단하여야 합니다. 당시의 여러 문무신(文武臣) 중에서 역전(力戰)하여 공을 세운 자를 분명히 알 수 있으니, 성감(聖監)께서는 이미 통촉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결단을 내리소서.

그리고 전일 전교에 호종인을 녹훈하되 공이 있는 장사(將士)도 아울러 녹훈하도록 이미 명을 내리셨으니, 호종한 신하와 역전한 장사를 합해서 한 권(券)을 만들어야 할 듯 한데, 오늘 호종한 여러 재신(宰臣)들과 반복해서 상의해 보니, 모두가 호종한 것과 역전한 것이 비록 같은 때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 명분과 사실이 서로 가깝지 않으므로 고하의 차등을 참작하여 정하는 것이 형세상 매우 곤란하고, 명호(名號)를 의정(議定)할 때에는 반드시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도록 해야 하는데 이번의 두 가지 일은 포함하여 하나의 명호로 정하기는 문세(文勢)로 보나 어의(語意)로 보나 서로 맞지 않습니다. 하나하나의 곡절이 이와 같이 서로 구애되므로 별도로 하나의 훈록을 하는 것이 부득이하다고 여깁니다. 감히 취품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사(將士)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은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權栗)은 행주(幸州)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

그리고 중국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모두가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별도로 훈명(勳名)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생각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종한 사람을 녹훈할 적에 아울러 녹훈하도록 말했었다. 그러나 이는 대신들이 의논하여 처리하는 데 달렸다."

하였다.


이제 이 글을 쓰는 나도 선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헷갈린다. 어쩌라는거야?


그래서 선조 34년 4월 30일 정유 4번째 기사에 공훈 논의가 다시 이어진다.


비변사가 대신의 뜻으로 아뢰기를,

"상께서 ‘여러 장수들을 별도로 녹훈(錄勳)하는 일에 대하여 여러 의논이 저러하니 여러 의논대로 하되 공의 고하(高下)에 대해서는 시안(試案)을 만들어 의정(議定)해서 아뢰면 발락(發落)하겠다. 유홍(兪泓)은 【평생을 탐오(貪汚)하게 지냈는데, 난리 이후로 더욱 심하였다. 말을 하자면 말하는 것 자체가 욕되는 일이다. 뼈는 이미 썩었지만 이름이 아직 남아 있기에 이를 기록하는 것이다. 】 박천(博川)에 이르러서 스스로 뒤떨어져 세자에게로 돌아갔다. 이와 같은 사람의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그 근고(勤苦)함은 지극하다 하겠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扈從)한 기준에는 들지 못한다. 아울러 녹훈에 넣는 것은 부당할 듯하다. 이몽원(李夢元)·이엽(李燁)·박승종(朴承宗) 등의 일도 이러하니, 의당 삭제해야 한다. 대개 다시 사실대로 자세히 조사하여 허위로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전일 기록하여 입계한 단자(單子)를 내가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제 내려준다. 인원의 수효가 이번의 서계(書啓)와 상당히 다른데, 제궁(諸宮)의 배행(陪行)한 사람은 이번의 서계에서는 모두 삭제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 혹 그대로 둔 자도 있는데, 공이 같은 사람을 누구는 삭제하고, 누구는 그대로 두었으니 그 뜻을 모르겠다. 설사 의당 삭제해야 할 이름이라도 이미 전일 유사(有司)가 서계한 안에 있었으니, 당연히 품의하여 정해서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중국에 청병하러 가고, 청병을 성사한 사신도 그 공을 같이 녹훈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참작해서 시행하라. 단자 2통과 반은기(頒銀記) 4통을 안에서 내린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이에 다시 이조와 병조에서 소장하고 있는 영유(永柔)에 있을 때의 서계 단자(書啓單子) 초고와 호조의 호종 급료 문서(扈從給料文書)를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전에 호조에서 취품한 공사(公事)로 인하여, 위에서 전교하신 내용에 ‘대체로 제궁의 하인(下人)은 하지 말라. 단 이 사람들은 거기에서 뒤떨어졌었는데도 지금은 「호종하였다. 」 「호종하였다. 」고들 하니 허위의 일이 없지 않다. 자세히 살펴서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신들은 제궁의 하인들은 각기 제궁을 따라 갔고, 전적으로 호종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그냥 따라온 군신(群臣)과 다름이 없으므로 이런 전교를 내리신 것이라고 잘못 인식하고서 감히 서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하교를 받드니 매우 황공스럽습니다. 다시 제궁의 하인 단자를 상고해서 별도로 기록하여 아룁니다.

그런데 그 중에 김득지(金得祉)·변희량(邊希良)·한덕량(韓德良) 등은 처음 서울을 출발할 때에는 모두 제궁의 배행(陪行)하는 인원으로 따라갔는데, 영유(永柔)에 도착하여서 호종인(扈從人)을 서계할 때에는 이들이 이미 내수사의 관원이 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해조에서는 제궁의 하인류(下人類)에다 넣지 않고 다른 하인류에다가 섞어서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서계할 때에 신들은 영유에 있을 때 해조에서 서계한 단자만을 근거로 하여 분류해서 등서하였을 뿐으로, 위와 같은 곡절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가 이번 하교를 받들고 나서야 비로소 보고 듣게 되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신들이 보고 듣지 못한 자가 혹 없지 않을 것이니 이 역시 추후 자세히 조사해서 아뢰겠습니다.

유홍의 일은 상의 하교가 과연 윤당하십니다. 그의 아들 유대건(柳大建)도 유홍을 따라갔는데 유홍이 녹훈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유대건도 참여하기 어렵습니다. 이몽원(李夢元)·이엽(李燁)·박승종(朴承宗)은 신들의 계사로 인하여 삭제하라는 하교가 계셨기 때문에 유홍 이하를 아울러 부표(付標)하여 들입니다. 이상의 몇 사람에 대해서는 우선 중론(衆論)에 따라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겠습니다.

진효남(秦孝男)은 당초 서울에서부터 의주(義州)까지 호종한 것으로 녹계(錄啓)하였었는데, 지금은 진효남이 대가(大駕)가 도성을 출발한 뒤에 황해도의 산길을 따라와 평양에 뒤미처 도착하였다고도 하고, 혹은 분명히 서울에서부터 호종하여 갔다고도 합니다. 대체로 이 사람은 제궁의 사람에 관계되어 외부 사람의 종적과는 다름이 있으므로 신들로서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상께서는 필시 통촉하시고 계실 것이기에 그가 시종 호종하였는지에 대하여 감히 여쭙니다.

그리고 최흥원(崔興源)은 황해도 도순찰사가 되어 종사관(從事官) 유영경(柳永慶)과 같이 일로(一路)의 여러 일을 조치하기 위하여 대가보다 먼저 본도(本道)로 갔는데, 최홍원은 낙점(落點)을 받아 왕세자를 배행(陪行)하였고, 유영경은 대가를 호종하여 모두 시종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원익(李元翼)은 평안도 순찰사로 최흥원 등과 같은 때에 명을 받고 먼저 서로(西路)로 갔는데, 또 낙점을 받아 평양에 남아 지키다가 평양이 함락된 뒤에 의주(義州)로 입조(入朝)하였고, 또다시 본도 관찰사로서 순안(順安)으로 나가 주둔하였었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행조(行朝)에 출입한 것은 모두가 공무로 인하여 왕래한 것입니다.

이병(李覮)은 【본성이 거칠고 교활하여 행검(行檢)을 무시하고 공명(功名)을 붙좇는 것으로 일삼았다. 】 당초 왕세자 배시 단자(王世子陪侍單子)에 참록(參錄)되었었는데, 이번의 회의에서 혹은 일로 인하여 나갔기 때문에 그대로 배행하지 못했었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그러하다면 서울에서부터 정주(定州)까지 계속 호종한 자와는 다름이 있으므로 참록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자세히 상고하고 보고 들은 사람의 말을 참고해 보니, 이병은 임진년 12월에 왕세자를 배행하고 용강(龍岡)에 도착하였을 때, 대조(大朝)로부터 어천 찰방(魚川察訪)에 제수되었고, 또다시 대동 찰방(大同察訪)에 제수되었다가 병으로 인하여 체직되었었는데, 당시 왕세자가 영변(寧邊)에 있었으므로 다시 영변으로 가서 그대로 배시(陪侍)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비록 왕래한 사실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공사로 인하여 출입했던 것이고, 스스로 뒤떨어진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군의(群議)가 모두 함께 참록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중국에 청병 사신(請兵使臣)으로 갔던 정곤수(鄭崑壽)와 서장관 심우승(沈友勝)은 이미 호종 단자에 들어 있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밖에 지중추부사 신점(申點) 【탐비(貪鄙)한 성품이 늙어가면서 더욱 심하였다. 】 과 서장관 정기원(鄭期遠)은 중국에 있을 때에 변란의 소식을 듣고 즉시 호소하여 중국군이 출정하는 바탕이 되었으니, 이제 전교하신 뜻으로 보건대, 정곤수 등 외에 신점 등의 공도 아울러 참록해야 할 듯합니다. 감히 아울러 품의합니다. 또 전교하신 중에 제장(諸將)들의 공의 고하(高下)에 대하여서는 전일에 하교하신 이순신(李舜臣) 등은 모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생존한 원훈(元勳)으로 주관해서 마련할 만한 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호종한 자의 등급을 매기는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원훈이 결정되어야만 비로소 마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일에도 성명(聖明)께서 결정해 내려주실 것을 청하였으나 위에서 아직까지 지명하여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삼가 결정하여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망기로 전교하기를,

"전에 내려준 하인(下人)의 치부(置簿)와 반은기(頒銀記)는 마침 안에서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밖에 내려서 알도록 했을 뿐으로, 이에 의거해서 논공(論功)하여 외람스러운 폐단이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중에 혹시라도 다행히 논공해야할 사람이 있으면 뒤에 다시 조사하여 내리겠으며 이 단자는 우선 안에다 보관하겠다. 최흥원 등에 관한 일은 참으로 그러하니 아뢴 대로 하도록 하라. 다만 유영경은 이 계사에 ‘대가를 호종하여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일찍이 해조에서 서계한 단자에는 왜 이름이 없었으며, 최흥원은 종사관까지 아울러 아뢰면서 이원익은 어찌하여 종사관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았는가?

이병은 ‘임진년 12월에 세자를 배행하여 용강에 도착했었다.’고 하였는데, 그 전까지는 떠나지 않고 계속 배행하였는가? 신점에 관한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나라가 회복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에 의해서인데, 중국군이 이곳에 나오게 된 것은 의주(義州)로 갔었기 때문이다. 의주의 수신(守臣)과 그곳의 백성들이 베풀어준 충근(忠勤)한 수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또 평양에 있을 때 황망하여 열성(列聖)의 어보(御寶)를 모두 감사에게 주었었는데, 그 당시 감사가 받아서 보관하였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 국가에 전해오는 대보(大寶)를 손상됨이 없이 바쳐서 옛물건을 잃지 않도록 하였으니, 이러한 사람들도 모두 논공하여야 한다.

대체로 자세하게 조사해서 공이 있는 사람은 모두 녹훈되도록 하여 누락된 자가 없도록 하고, 공이 없는 자가 외람하게 끼어들지 않도록 한결같이 지공(至公)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시종 호종하였던 자는 모두가 나와 환란을 함께 한 사람들이다. 만일 호종하고서도 누락이 된다면 개자추(介子推)의 원통함이 전대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영상은 도승지로서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또 병관(兵判)이 되어서 어려움을 당하여 있는 힘을 다 바쳤으며, 정곤수는 중국군을 얻어서 돌아왔으니, 나의 생각으로는 경들 2인이 당연히 원훈이 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요즈음 정신이 더욱 혼미하니 경들이 다시 더욱 자세히 살펴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아니, 자기를 따른 사람의 공이 높다는거야 뭐야....

이 정도 되면 선조를 쉴드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데.


그리고 이후에 선조 35년 4월 20일 신해 1번째 기사에서까지도 이 공훈 문제가 해결이 제대로 안 된다.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가 【사람됨이 박식하고 단아하였으며 성보(姓譜)에 능했다. 임진 왜란 때 이항복 등과 함께 호종하였고 고급사(告急使)로 경상(京師)에 가 대병을 청해 평양의 왜적을 토벌하였으므로 이항복과 함께 원훈(元勳)이 되었다. 】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잘못된 은총을 입어 원훈(元勳)에 끼게 되었는데 명분과 실제가 어긋났으므로 성명(成命)을 거두시기를 바라며 신에게 아무 공로도 없다는 것을 또한 우러러 아뢰었으나 정성이 위에 통하지 못해 윤허를 받지 못했으니 여러모로 부끄러움만 더할 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듣건대 어제 녹공(錄功)을 속히 거행하라는 일로 승전(承傳)을 받들었다 합니다. 따라서 신은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과 【해학을 잘할 뿐 건백(建白)하지 않았으므로 사림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신축년에 상이 여러 신하들의 노고를 생각하여 호종 공신의 책봉을 명했는데 항복을 수훈(首勳)으로 삼았다. 그러나 송언신(宋言愼)·박이장(朴而章) 등이 상의 앞에서 간당으로 지목하며 심히 배척하자 항복이 감히 나오지 못했다. 】 함께 의논하여 녹공될 여러 신하를 자세히 정하여 기록해야 할텐데 이항복이 병을 이유로 숙배(肅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출사를 명하여 동참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삼가 살피건대 오늘날 녹공해야 할 공신의 종류는 셋이니 호종(扈從)·토역(討逆)·평왜(平倭)가 그것이다. 이 세 가시 공훈에 대해서는 진실로 보답하지 않을 수 없는 국가의 중대사이다. 그러나 호종과 토역은 본디 그러한 사람이 있으니, 등급이 혹 공평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심한 과오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평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 조정의 덕택이었으니 우리 나라 장사(將士)는 진실로 평왜에 해당시키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중 힘을 쏟은 이에 대해서는 녹공하지 않을 수 없는데 권율(權慄)·이정암(李廷馣)·이순신(李舜臣)·원균(元均)같은 이들은 또한 표표하게 공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미 죽었으니 누구를 원훈으로 삼아 참된 공로를 논의하여 정할 것인가. 그 나머지는 지혜나 공력들인 것이 비슷하고 공도 서로 같은 이가 수없이 많은데, 취사(取舍)하고 여탈(與奪)할 때에 혹 공정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마다 원망을 품고는 반드시 불평하는 기색이 있을 것이다. 이는 진실로 쉽사리 논의하여 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유식한 이들이 걱정하는 바였다.


대체 이건 무슨 평인지 심히 의문스러운 평이다. 원균이 공로가 있다니. 


점점 선조 시기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혼란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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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길어지니 이만. 밥 먹고 좀 쉬어야겠다.


다음 번에도 이어서 계속 쓰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