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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 https://arca.live/b/dogdrip/21525210

3편 : https://arca.live/b/dogdrip/21534394


저번에 공신 녹훈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끝냈다.


공신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이어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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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 녹훈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선조 35년 7월 23일 임오 1번째 기사를 보자.


비변사 낭청(郎廳)이 대신의 의견으로 아뢰기를,

"전일 공신도감(功臣都監)의 계사(啓辭)에, 청난(淸難)·정왜(征倭) 공신을 주관하여 마련할 원훈(元勳)을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해서 계품하여 시행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윤허를 내리셨습니다. 청난 공신은 전년에 홍가신(洪可臣)에게 주관하여 마련케 했으니, 홍가신을 속히 올라오도록 하유하시어 마감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정왜 공신은 권율(權慄)·이순신(李舜臣) 등이 모두 이미 죽었으니, 이 밖에 주관하여 마련할 사람들로 어떤 사람이 합당할지 신들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회복한 공로는 모두 성상께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시어 중국 조정에서 곡진하게 구제해 준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신하들에게 조금 수고한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또한 직분 내의 일이니 특별히 기록할 만한 공로가 뭐 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호종(扈從)과 정왜를 구별해서는 안 될 듯 싶습니다. 전진(戰陣)에서 뛰어나게 힘을 발휘한 자들에 대해서는 상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실테니 몇 명 정도 뽑아내어 융통성 있게 마련한다면 사체에 합당할 듯 합니다만 오직 상께서 재량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정왜 공신에 참록(參錄)된 자들이 호종한 여러 신하에 비해 지나치게 소략하게 되면 뒷날 장사(將士)들의 마음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이 점 역시 염려가 됩니다. 감히 아울러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이와 같다면 합록(合錄)하는 것도 좋겠다. 다만 이번의 적변(賊變)은 전에 없던 변고로서 이는 변변찮은 나로 말미암은 소치이다. 그런데 중국 조정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몰아내고 강토를 회복했으니 이 또한 옛날에 없던 공적이다. 이것은 호종했던 여러 신하들의 충성스러웠던 덕분이니, 어찌 다른 사람들이 한 일이겠는가. 또 힘껏 싸운 장사(將士)들에 대해서는 그 공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우리나라 장졸에 있어서는 실제로 적을 물리친 공로가 없다. 그 중에서 참작하여 합당하게 마련하되 외람되게 해서는 안 된다. 대개 합록할 것인지의 여부는 원훈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참작해서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저 강조한 부분이 중요한데, 권율과 이순신은 원훈, 그러니까 으뜸가는 공적이 있다고 조정에서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공신의 목록을 만들려면 으뜸가는 공신과 협의해야 하는데, 권율과 이순신이 이미 죽어서 누구와 의논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실제로 권율의 사망은 1599년이고, 이순신의 사망은 1598년이니 1602년의 공신 결정에서 두 사람은 이미 사망한 뒤다.


그리고 한참 언급이 없다가 선조 36년 2월 15일 임인 2번째 기사에서 다시 이순신이 언급된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이회(李薈)가 노모(老母)의 병이 중하다는 이유로 정사(呈辭)하였는데, 이회는 바로 이순신(李舜臣)의 아들이니 순신의 처(妻)가 생존해 있는 것이다. 본도(本道)에서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하게 하라."


이순신의 아내가 살아있으니 그 아내에게 식량을 지급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조선은 종종 유공자 가족에 대해 이렇게 식량 등을 지급하곤 했다.


그리고 공신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 이어진다. 선조 36년 3월 4일 경신 6번째 기사이다.


공신도감(功臣都監)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장사(將士)가 전진(戰陣)의 노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러나게 적을 격파한 자를 찾는다면, 세력이 상대가 안 되어 양을 몰아다가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은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았습니다.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권응수(權應銖) 등 약간인을 제외한 그 나머지 제장(諸將)들은 뛰어난 자가 없습니다. 김응서(金應瑞)·고언백(高彦伯)은 여러 해 동안 전쟁에 임했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우선 취품(取稟)합니다. 신들이 다시 함께 상의한 바 임진년 난리 때 박진(朴晉)이 황산(黃山)을 차단하다가 힘이 부쳐 후퇴한 뒤에도 군병을 수습, 지휘하여 교전(交戰)하게 하였습니다. 권응수가 영천(永川)을 공격한 일 같은 것도 박진이 가려 보낸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 공을 없앨 수 없습니다. 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이수일(李守一)·김태허(金太虛)·김응함(金應緘)·이시언(李時彦)도 모두 힘써 싸운 노고가 있는데 더러 수전(水戰)·육전(陸戰)에 참전한 공도 있습니다. 김응서·고언백 등의 공을 논할 경우에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의논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김시민 등은 아뢴대로 하라. 주사(舟師)의 편비(褊裨)는 모두 기록하여 헤아려 조치하라. 육군(陸軍)의 장수는 별달리 적의 예봉을 꺾은 일이 없는데 같이 기록하면 외람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만약 수고한 바가 있다고 하면 혹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올려 서용해도 되겠지만 훈공(勳功)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를 일이다. 고언백은 왜적을 체포하여 능(陵)을 보호한 공이 있으니, 녹훈(錄勳)하는 것이 마땅할 듯 하다."

하였다.


공적을 낮게 인정하는 와중에도 이순신, 권율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이 둘의 공적은 높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계속 기분나쁘게 원균이 들어가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후에 선조는 이순신을 비난하면서 공적을 깎아내리는 비망기를 내린다. 선조 36년 4월 21일 정미 2번째 기사다.


군공청(軍功廳)의 계목(啓目) 공사(公事)로 정원에 전교하였다. 【비망기(備忘記)였다.】

"군공청의 공사는 내가 지금도 전말을 모르겠으므로 우선 이 계목만 가지고 말하겠다. 이순신(李舜臣)【아래 참조】은 당초에 왜적을 쳐부수었을 적에 통제사의 관직을 제수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이르렀고, 그가 죽은 뒤에는 정승으로 증직(贈職)하였으니, 논공(論功)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18자급(資級)을 대가(代加)하려고 함은 무슨 이유인가? 설사 대가(代加)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왕자(王者)의 상이 어찌 18자급이나 줄 수 있겠으며, 또한 사리에 어긋나 나라의 체모에 손상이 없겠는가? 또, 아무는 수급(首級) 몇을 베고 아무는 적 몇을 죽였다는 것도, 베인 것과 죽인 것을 모두 머리를 바치도록 하여 실지인지를 고찰해 본 것인가? 어디에 근거하여 누가 몇을 베고 누가 몇을 죽였는지를 안 것인가? 사살(射殺)한 것을 상줌에 있어서는 더욱 우스운 일이다. 먼 옛날 헌원(軒轅)이 탁록에서 치우(蚩尤)와 싸운 때부터 만력(萬歷) 시절에 파주(播州)의 적(賊)을 무찌를 때까지 일찍이 오늘날처럼 사살한 것으로 군공(軍功)을 논한 일을 보았는가? 싸움이 한창 어지러울 때 어떻게 누구는 몇을 사살하고 누구는 몇을 쏘아 맞추었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설사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어디에 근거하여 그의 말을 꼭 믿을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사살했다는 수효를 가지고 왜적의 군사를 헤아려 본다면 일본의 군사는 이미 다 없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참으로 왜적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후세에 비난을 남길까 염려된다.

대저 임진년에서 지금까지 12년이 되고 정유년에서 지금까지는 7년이 되는데도 논공과 시상을 아직도 끝내지 못하고 있다. 군공청이라는 것을 둔 것이 태만한 관원과 교활한 하리(下吏)들이 농간하는 곳이 되어 그 동안의 일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국정을 심하게 어지럽히는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도 과감하게 그것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는 마땅히 군공청을 혁파하여 하나라도 쓸데없는 관원을 덜어버려야 할 것이니, 의논하여 아뢰라고 비변사에 이르라."

※ 아래참조 부분에 들어간 글은 【】 안에 넣어서 첨부함.

【임진년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서 전함을 거느리고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과 함게 거제도(巨濟島) 앞바다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쳐부수고 왜적의 배 50여 척을 포획하여 전란(戰亂) 이래 제일의 공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때에 계책을 마련하여 먼저 올라갔던 것은 모두 원균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고, 이순신은 다만 달려와서 구원했을 뿐이었다. 크게 승전한 뒤에 원균이 행조(行朝)에 치보(馳報)하여고 하자, 이순신이 속이기를 ‘공(公)과 협력하여 일을 한다면 왜놈들은 섬멸하고 말고 할 것도 못되는데 이러한 소소한 승전을 어찌 조정에 치계(馳啓)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다른 도(道)에서 급작스럽게 구원하러 왔기에 병기를 갖추지 못했으니, 왜적에게서 노획한 것을 써야 하겠다.’ 하니, 원균이 그대로 따랐다. 그러고는 이순신은 비밀히 사람을 시켜 노획한 병기와 왜적의 배에 실려있던 금병(金屛)·금선(金扇) 등의 물건을 가지고 가 행조에 치계하도록 하여 과시하였으므로 전공(戰功)이 모두 그 자신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 행조는 한창 다급한 때였으므로, 치보를 받고 크게 기뻐하여 이순신을 통제사로 제수하고 원균으로 하여금 이순신의 지휘를 받게 하니, 원균이 이 때문에 크게 화가 나 드디어 서로 협조하지 않았다. 그 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원균이 통제사가 되었는데, 왜적의 기세를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한산도(閑山島)로 물러나 지키고만 있고 싸우지 않으려고 하자 조정에서 매우 급박하게 싸움을 독려하여 원수(元帥)로 하여금 장벌(杖罰)하게 하였다. 이에 원균이 마지 못하여 싸우다가 패전하여 죽었다. 이순신이 다시 이를 대신하여, 제독(提督) 진린(陳璘)을 따라가 순천(順天) 앞바다에서 왜적을 쳐 거의 크게 승전을 거두게 되었을 때 왜적의 탄환을 맞아 배 안에서 죽었다. 이순신은 재질과 기운이 남보다 뛰어나 중국 사람들도 명장이라 일컬었다.】


자급(資級)이라는 건 조선시대 관리의 위계다. 총 30개임. 정1품 상부터 종6품 하까지 24개, 그리고 정7품부터 종9품까지 6개. 그리고 대가(代加)한다는 건 이순신이 죽었으니 대신 그 자리에 자손이나 조카 등이 받게 한다는 이야기이다. 


저 괄호 안에 부분은 선조가 쓴 거라면 씨발놈이고, 선조가 안 쓰고 사관이 덧붙인 거라면 사관도 씨발놈이다.


하여간 정리하면 군공청에서 이순신의 공적을 평가하여 포상할 내용을 올렸더니 선조가 펄펄 날뛰며 군공청은 쓰레기라는 둥 없애버려야 한다는 둥 하면서 글을 내렸다는 소리다. 이 새낀 점점 사람새끼가 아닌 것 같은데


신하들이 쌩깠는지 선조 36년 4월 28일 갑인 2번째 기사에서 신하들이 공신 등급을 정해서 올리는데, 그 전까지의 기사를 전부 봐도 군공청을 없앴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사실 쌩까지 않았다고 해도 쌩까고 싶을 만한게, 저 군공청이 공신도감이라는 공적 정리를 맡은 기관의 하부 기관으로 공적 보고서를 다 정리하는 서류 노예들일 게 뻔한데 저걸 없애서 다 늙은 대신들이 서류랑 씨름하게 만든다고? 미친거지.


공신 도감(功臣都監)이 아뢰기를,

"전후의 왜적을 정벌할 때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의의(擬議)하여 취품(取稟)한 것은, 이원익(李元翼)·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곽재우(郭再祐)·이억기(李億祺)·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이운룡(李雲龍)·우치적(禹致績)·배흥립(裵興立)·박진(朴晉)·고언백(高彦伯)·김응서(金應瑞)·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안위(安衛)·이수일(李守一)·김태허(金太虛)·김응함(金應緘)·이시언(李時言) 등 26인이었습니다. 지금 상의 분부를 받들고서 다시 참작하여 헤아려 보건대, 김시민과 이광악 등을 이미 녹공(錄功)하였으니 이정암이 연안(延安)에서 성을 지켜낸 공도 또한 마땅히 김시민 등의 예에 의해 마련해야겠습니다.

주사(舟師)의 편비(褊裨)에 있어서는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는 권준·이순신(李純信)·배흥립이고 원균의 휘하에는 이운룡·우치적인데, 그 당시의 각 장계(狀啓)를 조사해 보건대, 이순신의 장계에는 권준·이순신의 이름이 일 등의 첫 머리에 있고, 원균의 장계에는 이운룡·우치적의 이름이 등급을 논할 때는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고 또 다른 장계에는 ‘이 두 사람의 공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초에 뽑아 내어 취품한 것은 단지 들은 바 주사(舟師)들의 의논이 그와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는 원균과 이순신의 두 장수가 공을 다투느라 틈이 있는데다가 또한 이운룡·우치적 등의 은상(恩賞)이 복구된 일로 인하여 유감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성명을 먼저 들게 된 것입니다. 나타나 있는 문안(文案)으로 말한다면, 이순신의 장계는 비록 과장한 것인 듯하나 분명히 의거한 데가 있는데 비해 원균의 장계는 당초부터 군공(軍功)의 등급에 있어 분명하지 못하여, 어느 때는 이운룡과 우치적 두 사람을 다른 사람들 밑에다 넣었다가 그 뒤의 장계에는 으뜸 공이라고 했으니 앞뒤의 전도가 심한 편입니다. 공론이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군공은 녹공하기 곤란할 듯합니다.

이순신의 장계에, 이름이 일등에 든 사람은 권준과 이순신(李純信) 두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운(鄭運) 같은 사람에 있어서도 이름이 1 등의 셋째 번에 들었고, 본디 역전(力戰)한 사람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상께서 수효가 지나치게 많다고 경계하셨습니다. 정운이 이미 녹공되지 않았으니 배흥립도 마땅히 삭제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때의 편비 중에 일등에 든 사람들은 우열이 없을 듯한데, 이미 주장(主將)이 없으므로 신들이 들은 것을 참작하여 첫머리에 든 두 사람만 뽑았습니다만 공이 같은데 탈락된 사람들이 반드시 원성이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날마다 머리를 마주대고 의논하여 감정했지만 합당하게 하지 못했으니, 부득이 이대로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억기는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서 이미 해상의 전투에 참여하였으니 녹공에 들어가야 함이 의심할 것 없겠으나 안위는 그 당시 일곱 번의 전투에 한 번도 참여 하지 않았으니 삭제하여야 할 듯합니다. 육장(陸將)들에 있어서는 별로 대단하게 적봉(敵鋒)을 겪었거나 적진을 함락시켰거나 한 공이 없었음은 과연 성상께서 분부하신 것과 같습니다. 고언백(高彦伯)은 비록 왜적을 사로잡고 능(陵)을 수호한 공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공로가 고언백과 비등한 사람이 또한 많은데, 고언백은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모두 들어가지 못한다면 뭇사람들의 마음이 반드시 섭섭하고 원통하게 여길 것입니다. 또 호종(扈從)했던 사람들은 많은 쪽으로 마련하고 왜적을 정벌한 사람들은 이처럼 약소하게 한다면 뒷날에 생길 근심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일에 취품하였던 육장(陸將)들 중에서 다시 참작하여 뽑아내서 공로가 있는 사람은 모두 녹공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그 사람들의 공로는 내가 어떻게 알 수가 없으니, 충분히 헤아려 반드시 공평하고 올바르게 하여 사람들의 비난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속담(俗談)에 ‘친구 덕으로 공신(功臣)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농담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런 일이 혹은 틀림없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일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 다만 그 일을 신중하게 하여 종정(鍾鼎)에 녹훈(錄勳)하는 일을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고 혹시라도 외람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만약 실지로 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논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조의 요구대로 원균이 들어가긴 했다.


그러나 이후에 원균은 1등 공신이 아니라 2등 공신이 되는데, 선조는 이게 불만이었는지 선조 36년 6월 26일 신해 2번째 기사에서 원균이 2등 공신이 된 걸 1등으로 올리라고 요구하고, 신하들도 선조의 땡깡을 받아줘서 1등으로 올려준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원균을 2등에 녹공해 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어서는 원균이 재삼 장계를 올려 부산(釜山) 앞바다에 들어가 토벌할 수 없는 상황을 극력 진달했으나, 비변사가 독촉하고 원수가 윽박지르자 원균은 반드시 패전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진(鎭)을 떠나 왜적을 공격하다가 드디어 전군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순국하고 말았다. 원균은 용기만 삼군에서 으뜸이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도 또한 지극했던 것이다.

당(唐)나라 때 가서한(哥舒翰)이 가슴을 치면서 동관(潼關)을 나섰다가 마침내 적에게 패전하게 되었고, 송(宋)나라 때 양무적(楊無敵)이 반미(潘美)의 위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싸우러 나갔다가 적에게 섬멸된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고금(古今)의 인물들을 성공과 실패만 가지고는 논평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원균이 지혜와 용기를 구비한 사람이라고 여겨 왔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운명이 시기와 어긋나서 공도 이루지 못하고 일도 실패하여 그의 역량이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전번에 영상이 남쪽에 내려갈 때 잠시 원균을 민망하게 여기는 뜻을 가졌었는데, 영상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공로를 논하는 마당에 도리어 2등에 두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정운(鄭運)은 배흥립(裵興立)의 일 때문에 삭제하였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구원하러 가기를 의논할 적에 정운이 극력 찬동했었고, 왜적을 토벌할 때에도 정운의 공이 많았었다. 결국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으니 이는 정운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배흥립이 범람하다는 것 때문에 마땅히 녹공해야할 정운까지 아울러 삭제할 수는 없는 일이니, 정운을 녹공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다.

회복(恢復)하게 된 공로가 오로지 중국군에게 있었으니, 청병(請兵)하러 가서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을 호종하지 않았다 해서 빠뜨릴 수는 없다. 심희수·유몽정이 이미 청병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 사람들은 버려 둘 수 없으니 다시 참작해야 한다.

홍여순(洪汝諄)은 처음부터 호종했었는데도 지금 빠졌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홍여율(洪汝栗)은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부터 직접 영정(影幀)을 지고 고초를 겪으면서도 온전하게 보호했었다. 이러한 그의 공로도 역시 빠뜨릴 수가 없으니, 녹공의 합당 여부를 의논해서 아뢰라.

당초에 4등급으로 구분한 뜻을 알지 못해서 이봉정(李奉貞)을 원종(原從)에 녹공하라는 것으로 전교했었다. 지금에 와서 이 녹공된 사람들을 보건대,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이 아닌데도 역시 다른 공로로 참여된 사람이 있다. 이봉정의 경우는 승전색으로서 처음부터 호종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아비의 상사를 듣고서 고향으로 돌아갔었으니 사사로이 스스로 물러간 것과는 다르다. 그는 본향(本鄕)인 용천(龍川)에서부터 다시 호종하고 의주까지 가느라 고초가 많았고, 주선한 일도 있었으니, 정훈(正勳)에 녹공하지 않을 수 없음이 또한 이러하다.

내가 비록 잘나지는 못했지만 어찌 감히 한 사람의 환시(宦寺) 때문에 경들을 턱없이 속여서 당연히 녹공해서는 안 될 사람을 함부로 여러 훈신들 사이에도 두려 하겠는가. 이봉정은 4등에 녹공해야 한다.

같은 등급 속에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므로 차례를 논할 수 없으면 당연히 직품에 따라서 기록했어야 할 것인데, 많은 사람이 바뀌어 놓여 있으니 좌차(坐次)에 있어서 온당지 못한 듯하다. 또 각 등급에 있어서의 상격(賞格)에 관한 전례를 알고 싶으니 모두 고찰해서 아뢰라.

산하대려(山河帶礪)의 훈공을 종정(鍾鼎)에 기록하는 것은 국가에 더없이 큰 일이니, 반드시 공평 정대하게 하여 공이 있는 사람을 빠뜨려서도 안 되며 공이 없는 사람을 함부로 써서도 안 된다. 우리 나라에는 전부터 친구 덕분에 공신이 되었다는 비난이 있었다. 이 말이 비록 맹랑하기는 하나 이로 인해 경계하기에는 좋은 말이니, 아무쪼록 조용하게 잘 살펴서 처리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이번의 공신은 원수(元數)가 너무 많으니, 전에는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좌명 공신(佐命功臣)과 정국 공신(靖國功臣)은 그 수가 이번보다 적었는데도 4등급으로 마련했었기에 이번에도 또한 이 예에 의해 마련했던 것입니다.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

정운은 수록하겠습니다만, 심희수와 유몽정은 청병하여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삭제하여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여순은 평양까지 호종했다가 북도의 요해지(要害地)를 파수하는 일로 명을 받고서 대가(大駕)를 배사하고 의주로 들어갔었고, 뒤에는 경기의 삭녕(朔寧) 등지에 나가 군사를 모집하다가 9월 초에야 비로소 의주로 들어갔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명이 당초부터 원훈들이 의논하여 결정하는 속에 나오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감히 제기(提起)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홍여율과 이봉정은 또한 마땅히 수록하겠습니다. 상격에 관한 전례는 문서가 없어서 사고(査考)할 여유가 없었으니 곧바로 고찰하여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위 헌공(衛獻公)이 망명했다가 위나라로 돌아올 적에 교외에 이르러 수종했던 사람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준 다음 들어오려 하자 유강(柳莊)이 말하기를 ‘만일에 모두가 사직을 지켰더라면 누가 고삐를 잡고 따라갔을 것이며, 모두가 따라갔더라면 누가 사직을 지켰겠습니까. 임금께서 나라에 돌아와 사정(私情)을 쓰려 하시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나누어 주지 않았었다. 환시는 나라 임금의 가노(家奴)로서 녹훈한 일은 고찰해 볼 데가 없다.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선조의 땡깡을 사관들조차 보기 그랬던 모양인지 대차게 깠다. 이 글 위쪽에 강조한 부분이 바로 그 환시에 관한 글이고, 원균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을 정도다. 애초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자기 무능으로 전력을 말아먹은 장군이 1등인 것에 사관들도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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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원균이 1등 공신이라 그러면 불만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텐데 그걸 우겨서 넣는 선조.


한국사 전공인 임용한 박사께서 말하시길 선조가 이순신을 뭘 질투해, 왕인데. 라고 했는데 열등감이든 뭐든 악감정이 있지 않은 이상은 이럴 수가 있나? 아니면 선조가 사람새끼가 아니라고밖에 안 보이는데... 아니면 박사나 교수급은 되어야 보이는 뭔가가 있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