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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선조가 정치적 이유(혹은 다른 이유)로 원균을 1등으로 넣고, 이순신을 낮춰 평가한 걸 보았다. 화를 낸 사람이 많았을지도 모르겠음. 심하면 선조가 이순신의 공적을 지우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있을 수 있을거임. 하지만 조선 정부는 그렇게 바보는 아니다. 선조가 이순신을 깔아뭉개고 싶어도 이순신이 1등 공신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음.


선조 36년 8월 17일 경자 5번째 기사에서 선조는 공신 리스트를 재조정하라고 명령한다.


비망기로 일렀다.

"전일 함께 면대하여 의논해서 감정하려다가 미처 못하였는데 언관(言官)이 논하였으므로 바야흐로 논하려던 일을 곧바로 의논할 수 없다. 이제 번거로이 논하길 마지 않아 이미 윤허하였으므로 별로 면대하여 의논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면대하지 않은 것이니 이 뜻을 알라. 또 왕자(王子)가 호종하였지만 어찌 여기에 녹공되려 하겠는가. 먼저 삭제하라. 그 나머지 사람 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자와 군사를 청하러 간 자 이외는 다 삭제하라. 신잡(申雜)·안황(安滉)·구성(具宬)은 처음부터 호종한 사람이므로 다른 사람과 나란히 세울 수 없으니 3등에 두라. 김응수(金應壽) 같은 자들은 매우 온당치 못하니, 제신(諸臣)과 마찬가지로 마련해야 마땅하다. 정왜(征倭)에 있어서는 이순신·원균·권율(權慄)이 1등이 되어야 마땅하고, 이 밖에는 다 삭제하라. 고언백(高彦伯)은 적을 토벌하고 능(陵)을 수호하였으니, 공이 있을 뿐이 아닌데 신하로써 어찌 감히 삭제하자고 말하겠는가. 그대로 두어야 하니, 이를 도감(都監)에 말하라."


일단 왕자는 당연히 아버지를 따르는 거라고 여겨서인지 우선 삭제할 것을 명하고, 정왜공신, 그러니까 직접 싸운 사람들은 이순신과 권율, 원균을 1등으로 하고 나머지는 별 공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부분은 중국에게 공을 돌리는 외교적인 배려도 있었을 거라 여겨진다.) 이걸 보면 선조는 원균을 밀어주고 이순신을 깎아내린 건 맞지만, 1등이라는 공 자체는 인정했음.


선조의 이 명령을 받은 공신도감은 다시 논의를 시작해서 이듬해 무장을 다 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보고한다. 이순신 이야기가 없어서 뺐는데, 선조 37년 6월 19일 무술 5번째 기사 참조.


그렇게 다시 논의를 거쳐서 공신을 결정한다. 선조 37년 6월 25일 갑진 7번째 기사다.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호성 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崐壽)인데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力扈聖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정원군(定遠君) 이부(李桴)·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이호민(李好閔)·윤근수(尹根壽)·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이산보(李山甫)·유근(柳根)·이충원(李忠元)·홍진(洪進)·이괵(李𥕏)·유영경(柳永慶)·이유징(李幼澄)·박동량(朴東亮)·심대(沈岱)·박숭원(朴崇元)·정희번(鄭姬藩)·이광정(李光庭)·최흥원(崔興源)·심충겸(沈忠謙)·윤자신(尹自新)·한연(韓淵)·해풍군(海豊君) 이기(李耆)·순의군(順義君) 이경온(李景溫)·순령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신잡(申磼)·안황(安滉)·구성(具宬)인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임발영(任發英)·기효복(奇孝福)·최응숙(崔應淑)·최빈(崔賓)·오정방(吳定邦)·이응순(李應順)·신수곤(愼壽崑)·송강(宋康)·고희(高曦)·강곤(姜綑)·내시(內侍) 김기문(金起文)·내시 최언준(崔彦俊)·내시 민희건(閔希蹇)·의관(醫官) 허준(許浚)·이연록(李延祿)·이마(理馬) 김응수(金應壽)·이마 오치운(吳致雲)·내시 김봉(金鳳)·내시 김양보(金良輔)·내시 안언봉(安彦鳳)·내시 박충경(朴忠敬)·내시 임우(林祐)·내시 김응창(金應昌)·내시 정한기(鄭漢璣)·내시 박춘성(朴春成)·내시 김예정(金禮楨)·내시 김수원(金秀源)·내시 신응서(申應瑞)·내시 신대용(辛大容)·내시 김새신(金璽信)·내시 조구수(趙龜壽)·의관(醫官) 이공기(李公沂)·내시 양자검(梁子儉)·내시 백응범(白應範)·내시 최윤영(崔潤榮)·내시 김준영(金俊榮)·내시 정대길(鄭大吉)·내시 김계한(金繼韓)·내시 박몽주(朴夢周)·이사공(李士恭)·유조생(柳肇生)·양순민(楊舜民)·경종지(慶宗智)·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 최세준(崔世俊)·사알(司謁) 홍택(洪澤)·이마 전용(全龍)·이마 이춘국(李春國)·이마 오연(吳連)·이마 이희령(李希齡)인데 충근정량호성 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이라 하여, 각각 작위(爵位)를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다. 모두 86인인데 내시(內侍)가 24명,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이고, 별좌(別坐)와 사알(司謁)이 또 2명이다.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

청난 공신(淸難功臣) 1등은 홍가신(洪可臣)인데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2등은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인데 분충출기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3등은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인데 분충출기청난 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으로 봉했는데 모두 5인이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으며 원릉(園陵)이 화를 입었고 생령들이 해독을 받았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한 일이다. 다행히 황은(皇恩)이 멀리 미침을 힘입어 팔도(八道)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특전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호종신(扈從臣)을 80여 명이나 녹훈(錄勳)하였고 그 가운데 중관(中官)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들이 또 20여 명이나 되였으니, 또한 외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이르러서는 주군(州郡)에서 불러 모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토평한 것이 어찌 공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만든 것이 당초 어찌 이처럼 구차한 데에 쓰려고 한 것이겠는가. 아, 김응남(金應南)은 신묘년에 부경(赴京)하였을 적에 정신(廷臣)들의 의논을 극력 변론하여 실제 상황을 들어 주문(奏聞)함으로써 마침내 황상(皇上)이 감림(監臨)하게 하였으니, 그의 공이 진실로 크다. 그리고 신점(申點)은 중국에 있다가 국가가 병화(兵火)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서 7일 동안이나 먹지도 않고 울면서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주청했으니, 중국군이 나오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공이겠는가. 정곤수(鄭崐壽)는 구원병을 주청하고 군량을 주청한 공로가 있고, 이호민(李好閔)은 사명(辭命)을 전담한 공로가 있고, 이순신·원균·권율은 혈전(血戰)한 공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삼공(三公)은 조금이나마 대책을 결단한 일이 있었으니 부득이하다면 이들 몇 사람만 녹훈했어야 했다.


사관은 이 공훈 리스트에 대해 별별 잡놈들이 다 공신을 달았다고 비판한다. 어가를 따라간 사람을 80명이나 공신이라고 하고, 내시와 노비들까지 공신을 주는 건 안 된다는 소리다. (사실 조선시대의 관점에서 노비와 내시는 주인/국왕을 따라간 걸 애초에 공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따라갔다는 이유만으로 신하에게 공신을 주는 것도 과도하다는 평가다. 그리고 원균은 국왕이 직접 녹훈하라고 한 것이니 사관 입장에서는 왕이 혈전한 공이 있다는데 그걸 직접 비판하기도 뭐하다.


하여간 이렇게 우리가 아는 이순신의 공신칭호인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 붙는다.


그리고 이걸 조금 다듬어서 교서와 같이 반포한다. 선조 37년 10월 29일 을해 6번째 기사.


선무공신(宣武功臣)의 교서를 반급할 적에 선독(宣讀)한 별교서(別敎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하로서 귀중한 것은 국가가 위급할 때 적을 방어하는 충성을 바치는 것인데 선왕(先王)께서도 국가를 안정시킨 공을 포장하였으니 어떻게 상을 주어 면려시키는 법전을 거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이장(彛章)에 따라 빛나는 은전을 내리는 바이다.

지난번 운뢰(雲雷)의 비색한 운수 때문에 국가에 어려움이 많았었다. 사나운 고래가 갑자기 달려오니 그 형세가 그물로 제어하기는 어려웠고, 무서운 짐승이 갑자기 날뛰니 누가 소굴로 밀어넣어 막을 수 있었겠는가. 애타게도 1백 년의 종사(宗社)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는 참혹함을 당하였다. 다행히도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의 도움을 받고 또 제신(諸臣)의 힘을 의지하여 칼을 울리고 손바닥을 치면서 다투어 원수 갚기에 분발하였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다함께 국가의 일에 정성을 끝까지 바쳤다.

이에 생기(生氣)가 조금 살아났고 꺼진 재가 다시 타오르게 되었다. 형세를 합쳐 밀고 나아가니 배 타고 몰려온 왜적을 쓸어낼 수 있었고 성을 등지고 생사의 일전을 벌이니 백만의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사방을 전제(專制)하면서 7년간 열심히 근로(勤勞)하였다. 기타 급할 적에 달려가 구하고 적을 쳐부신 과감하고도 굳센 공로가 어찌 한때에 도움이 적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역시 전일에 비추어 훌륭하기 그지없다. 만약 경(卿)들이 흥기하여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어려웠던 일들이 풀려 오늘을 보존할 수가 있었겠는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여 사생(死生)이 같지는 않지만 이들을 높이 받드는 포숭(褒崇)의 법전이야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이에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을 책훈(策勳)하여 1등(一等)에 봉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세 자급(資級) 초천(超遷)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세 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甥姪)과 여서(女壻)를 두 자급 초천하고 적장(嫡長)은 세습(世襲)케 하여 그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영원히 사유(赦宥)의 은전을 받게 하라. 반당(伴倘) 10인, 노비(奴婢) 13구, 구사(丘史) 7명, 전지 1백 50결, 은자(銀子) 10냥,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한다.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를 2등에 봉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두 자급 초천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두 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한 자급 초천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그 녹봉을 잃지 말게 할 것이며, 영원히 사유의 은전을 받게 하라. 반당 6인, 노비 9구, 구사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 조경(趙儆)·권준(權俊) 이순신(李純信) 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을 3등(三等)에 봉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한 자급 초천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그 녹봉을 잃지 말게 할 것이며, 영원히 사유의 은전을 받게 하라.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아, 이 삼물(三物)을 내어 이미 다 같이 산하대려(山河帶礪)의 맹세를 이루었으니 백대(百代)에 전하여 가서 영원토록 자손과 후손들이 복록을 누리게 되길 바란다. 때문에 교시(敎示)하노니 잘 알 것으로 여긴다."


1등 공신에게 주어진 혜택을 좀 정리해보자.


일단 관작과 품계를 세 자급 초천한다는 건 특진을 시킨다는 소리다. 부모와 처자에게도 주는 혜택이니 엄청나다. 만약 자식이 없으면 조카와 사위를 특진시킴. 그리고 적장(그러니까 정실에게 난 장손)은 이 혜택을 대대로 세습을 받을 수 있고, 영원히 사유의 은전을 받는다는 건 범죄를 저질러도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누구누구의 자손이니 용서해줘라"라는 이야기. 반역 같은 범죄가 아닌 이상은 처벌이 약해지거나, 그냥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


재물 부분도 중요한데, 조선은 재물을 많이 안 준다. 그리고 반당이라는 건 관아에서 그 집에 붙여주는 병사임. 고려시대부터 왕자의 난까지 있던 사병이 맡던 호위 역할을 사병 철폐 이후에는 관아에서 특별히 붙이라고 명한 집에 호위를 붙이는거다. 지금으로 치면 전직 대통령 경호팀 같은 느낌. 노비는 다 아니 넘어가고, 구사는 하인이다. 노비랑 다르게 재산은 아니고, 비서 같은 걸 붙여준다고 생각하면 됨. 결이라는 건 조선시대의 토지 단위인데, 산출량 기준으로 1결을 정했기 때문에 넓이는 정해진 게 없음. 이 당시 1등전(제일 소득이 쉬운 토지) 1결이 9859.7m²(약 3000평)인데 이걸 1백 50결을 준다는 소리임. 어마어마하지? 은자는 당연히 우리가 아는 귀금속 은이고, 내구마는 왕실에서 관리하는 특급 말이다. 진짜 엄청난 재물임.


그리고 이순신 전사에 관한 내용은 선조수정실록에 있어서 갖고왔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 11월 1일 임오 2번째 기사임.


유정(劉綎)이 순천(順天)의 적영(賊營)을 다시 공격하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그들의 구원병을 크게 패퇴시켰는데 순신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때에 행장(行將)이 순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굳게 지키면서 물러가지 않자 유정이 다시 진공하고, 순신은 진린(陳璘)과 해구(海口)를 막고 압박하였다. 행장이 사천(泗川)의 적 심안돈오(沈安頓吾)에게 후원을 요청하니, 돈오가 바닷길로 와서 구원하므로 순신이 진격하여 대파하였는데, 적선(賊船) 2백여 척을 불태웠고 죽이고 노획한 것이 무수하였다. 남해(南海) 경계까지 추격해 순신이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날아온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左右)가 부축하여 장막 속으로 들어가니,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였다. 순신의 형의 아들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완은 그의 군사를 지휘해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 갔다. 진린이 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 준 것을 사례(謝禮)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고,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이 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兵營)마다 통곡하였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고, 바닷가 사람들이 자진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충민사(忠愍祠)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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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선조 시기의 이순신에 대한 대접은 여기까지.


다음 시간부터는 광해군 시기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순신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