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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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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따윈 어디든 상관 없었다


앞에 적은 저의 고교 시절은 전부 게임 얘기 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으신 분들 중에는 "공부는 하긴 한 거야?"라는 생각이 드신 분도 계시겠죠. 당연하게도 공부는 제대로 하질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한 투극 제1회 대회가 열렸던 건 2003년 3월. 이 대회에 나가려고 하던 당시 저는 18살이었죠. 시기상으로는 대학 입시 직전이었지만, 그때의 전  대학 따위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예전부터 "대학에는 가 줬으면 한다"고 얘기하셨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바람이 아무리 강해도 그게 곧바로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는 없었죠.


고등학교 입시 때, 내부 진학을 하는 편이 대학에 가기 수월하다고 생각한 부모님께서는 제 성적과는 무관하게 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가길 추천하셨습니다. 그 바람대로 저도 기숙 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노력하긴 했지만 좀처럼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공부가 재미없어져서 곧 게임 센터로 향했습니다. 그 결과 점점 더 공부에 손을 놓게 되는 악순환의 연속에 빠지고 말았죠. 결과적으로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는 부모님의 기대와도, 그리고 제 희망과도 다른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입학하고 보니 그 고등학교는 집에서 가까워서 자전거로 통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오쿠보 알파 스테이션과도 가까워서 하교할 때 게임 센터에 들르는 게 일과가 되었죠. 가깝게 지내면서 같이 놀던 것도 학교 친구들보다 게임 센터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었죠.


그런 고교 시절을 보내기는 했지만, 부모님의 "대학에는 들어가라"는 소망은 들어드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은 지정교 추천 입학1)이 가능한 곳으로 정했죠. 이유는 당연하게도 입시 공부를 따로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입시 공부에 쓸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전부 게임에 쏟아서 하나라도 더 많은 대회에 나가고 싶다. 그 시절에는 오직 그 생각 뿐이었죠.


다지만 한 가지 '오산'이 있었습니다. 대학이 치바현에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전차로 통학하는데 한 시간 반이나 걸리게 된 겁니다. 자전거로 금방 다닐 수 있던 고등학교 때와의 차이가 뼈저리게 다가왔죠. 이 때 처음으로 통학이 '고통'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되자, 대학을 자주 땡땡이치게 되는 악순환에 다시금 빠지고 말았습니다. 부모님께는 대학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낮에는 아르바이트, 저녁에는 게임 센터로. 정신이 들고 보니 결국 학점이 모자라 유급을 하고 말았죠. 


물론 부모님은 무척이나 화내셨습니다. "그렇게 학교 다니는 게 힘들면 대학 근처에 살게 해 주마"고 말하셔서, 저는 치바현 카시와시에서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더 이상 유급을 할 수는 없었죠. 이 때부터 비교적 진지하게 대학 생활에 임했지만, 결국은 학점을 따러 다니게 되었을 뿐이었죠. 대학에서 친구를 사귀지도 않고, 생활의 중심은 아르바이트와 게임 센터 뿐인 나날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카시와시로 이사한 걸 계기로 활동범위가 더욱 더 넓어졌습니다. 평일에는 JR카시와역 근처에 있는 '게임 센터 B-1'으로. 주말에는 본가로 돌아가 오쿠보나 신주쿠 주변에 있는 게임 센터에 다니며 게임 대회에 출전하는 대학 생활을 보냈죠.


1) 대학이 지정한 고등학교에서 추천한 학생을 그대로 선발하는 일본의 입시제도. 별도의 시험 없이 면접 등으로만 진행되며,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대부분 합격된다.



친구는 모두 게임 센터에서 만났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서 게임에 절여진 생활을 보냈는가. 첫 번째 이유는 역시 그게 재미있었던데다, 이긴다는 감각을 맛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대회에 계속해서 나가는 것은 저에게 있어선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분함을 맛보았던 '길티기어 이그젝스' 전국 대회와 투극. 그 이후로 대회에 나가는 건 저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 되기도 했고, 출전을 거듭하면서 이기고 싶다는 열망도 강해졌습니다. 활약을 거두어 주목을 받게 되면 "같이 팀 맺자!"는 권유도 받게 되기도 했고요.


그러던 와중에 같이 팀을 짠 사람은 물론이고, 게임 센터에 모이는 비슷한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들과도 연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게임 센터라는 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독특한 장소입니다. 학교와는 완전히 다르죠.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대학도,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건 "그 학교를 지망해서 들어올 만한 학력을 가진 사람" 뿐입니다. 연령도, 어쩌면 가정 환경도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게임 센터는 당연한 말이지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연령도 직업도 다르지만 게임으로 이어져 있는, 그런 사람들과 친해진다는 게 무척이나 재미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으로 지내는 '일상'과는 다른 자신, 즉 '비일상'의 자신이 되어 타인에게 평가를 받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 또한 즐거웠습니다.


게다가 제가 빠져든 것과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며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마치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슷한 실력'이라는 게 실은 꽤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대전 격투 게임은 자신이 상대보다 너무 강해도, 너무 약해도 재미가 없습니다. 실제로 모르는 사람과 대전하고 나면, 제가 너무 강했던 탓에 "너랑 대전하면 재미 없어"란 얘기를 자주 들었죠.


같은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면 아무래도 공략법 같은 얘기가 흔히 화제에 오릅니다. 그 때에도 솔직히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과 얘기하는 게 의견이 잘 어우러지고 자연스럽게 점점 더 활기가 돈다는 점도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죠.


이제 와서 돌아보면, 지금 대전 격투 게임 e스포츠 신에서 활약하는 프로게이머 대부분은 그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동료들입니다. 게임 센터라는 장소, 그러한 의견 교환이 가능한 커뮤니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e스포츠까지 통용되는 최상위층이 형성될 수 있었겠죠.



상황을 한 순간에 바꾼 아버지의 병환


그러나, 그런 속편한 생활은 돌연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던 겁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갑자기 입원과 수술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나도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시급이 싼 게임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빈 시간에는 게임 삼매경. "게임만 할 수 있다면 돼"라며, 아슬아슬한 생활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래서는 위험하다, 생활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 장소를 시급이 높은 파칭코로 옮기고 게임 센터에도 그다지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게임은 이제 더 이상 떼어 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죠. 여전히 실력자이긴 했으니 게임 대회에는 계속 나갔지만, 게임 센터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갈까 말까 하는 상태에서 당연히 대회가 잘 풀릴 리가 없었습니다. 대체로 이기지 못한 채로 대회를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아졌죠.


이 무렵부터 취직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머리에 떠오른 것은 "게임을 좋아한다는 점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물음. 스스로에게 게임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좀 더 돈을 모아서 전문학교에 들어가, 프로그래밍을 배워서 게임 관련 기업에 취직하자"고 대략적으로 정해둔 채로, 이미 사회인으로 일하고 있던 게임 센터 동료인 사토Q씨에게 상담을 해 보았죠. 그러자 "안 그러는 게 좋다"는 단언이 돌아왔습니다.


이유는 게임 개발사의 프로그래머가 되면 "너무 바빠서 게임 따위 할 시간이 없어. 게다가 게임이 일이 되면 게임 자체가 싫어질 수도 있다고? 네모는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하니까 취미로 남겨두는 편이 좋을 거야"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문학교에도 진학하지 않는 게 좋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기업에 들어가면 거기서 기술을 배우게 될테고, 필요하다면 스스로 공부하게 된다. 굳이 돈을 들여서 학교에 가기보다는 기업에 들어가서 돈을 받으며 기술을 익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이유였죠.


"그렇구나" 하며 마음 속 깊이 납득했습니다. "전문학교에 가지 말고 바로 취직을 하자"고 방향을 틀었죠. 문제는 그 시기였습니다. 이미 대학교 4학년 가을. 전문학교에 갈 생각에 취직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이 시기까지 어영부영 보내오고 말았던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생각에 가장 먼저 향한 곳이 대학의 취직과였습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친해진 취직과 담당자께서 꽤나 친절하게 상담을 받아주셨습니다. 게임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 분 나름대로 기업 풍토는 어떤지, 대학 선배가 취직하고 있는 곳인지 등의 정보를 토대로 저에게 맞을 것 같은 회사를 몇 군데 알려주셨기에 15군데나 되는 회사의 입사시험에 응모했습니다. 그 결과, 몇 군데 회사에 내정 받을 수 있었죠.


최종적으로 한 IT기업의 시스템 엔지니어로 취직했습니다. 그곳을 고른 이유는 "복리후생이 가장 좋아서". 앞에서 적었듯 "게임 개발사의 프로그래머가 되면 일이 너무 바빠서 게임을 진지하게 계속할 수 없게 된다"는 얘기와 동시에, "그렇다면 일이 비교적 편한 기업에서 취미로 게임을 계속하는 시간을 만드는 게 좋지 않아?"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복리후생이 좋다는 조건에는 끌릴 수 밖에 없었죠.


결국 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게임을 계속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었던 겁니다. 그렇기에 입사 시험을 본 기업들의 업종도, 직종도 제각각이었죠. IT 관련 기업에 가게 된 것도 "어쩌다보니까"일 뿐이었습니다.


그 후 직장을 옮기고, 나아가 프로게이머로 독립을 하게 된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저에게 있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던 회사원 생활을 거치며 다양한 타입의 상사나 동료와 만나고, 직업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양립할 수 있는 업무 태도나 프로게이머로서 저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방법, 팀으로 업무를 진행할 때 중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