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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보잉은 왜 엔지니어와 이별했나에 이어나가는 글이 되겠는데요. 지난 글의 구상 목적은 보잉의 엔지니어 인력풀의 구조조정 과정과 원인을 경영의 관점에서 가볍게 다루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읽는 사람에게는 탐욕 스러운 경영인과 방만한 회사 경영을 꼬집는 뉘앙스로 받아들여 진 것 같아 이 부분에 대해 전후과정을 좀 세부적으로 다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의도와는 달라도 아무래도 읽는 쪽이 평가하고 수용하는 의도가 더 정확하니까요.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의 시간부터 시작해 미국 항공 산업의 대략적인 발전과정 당시 경영진이 어떤 어려움을 짊어지고 있었는지를 같이 생각해보는 글로 준비했습니다. 완성하니 너무 길어서 2부로 나누고 지루한 글이 된 것 같은데... 원래 아무도 찾지 않는 망상용블로그에 올려볼까 시작한 것이라 읽기 편하지 않더라도 넓은 양해 바랍니다.


읽으시는 이 글의 내용과 사실관계가, 여러분 생각하시기에 오류가 있다면 여러분이 맞다는 말씀 미리 드리고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양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월남전, 냉전을 거쳐오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미국의 항공기 개발, 제작사들은 매 순간마다 재정적으로 많은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대부분의 항공관련 특허와 신기술이 탄생했다는건 그만큼 기술적 미지의 영역을 향한 숱한 도전이 있었다는 의미이며, 이런 하이테크 분야가 다 그렇듯이 이룩한 성공보다 더 많은 실패, 불확실함을 감수하며 앞으로 한 발 내딛는데만 천문학적인 금액이 증발해버리곤 하죠. 그러니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연구 개발비 지원, 대규모 정부 조달 계약에도 불구하고 개발,제작사의 경영진은 한, 두번의 삐끗함으로 수 십년간 공들인 회사가 무너져버릴 수 있는 만성적인 재정 리스크의 공포에 늘상 시달리고 있었던거지요. 그리고 그나마 누리고 있던 이 '전쟁 특수'도 언젠가 끝이 올 것임을 모두 알고 있었고, 냉전의 종식은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급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양차 대전과 냉전기의 군수산업을 통해 전시 경제가 전체 항공 산업에 미친 영향을 먼저 파악해보겠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1914년 당시 참전 주요국의 군 항공기 보유량은 영국 52대, 독일 46대, 프랑스 260대, 미국은 겨우 6대의 항공기만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 아시다시피 미 공군이 창설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도 참전을 결정한 이후의 일로 미국이 1917년 4월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뛰어들었을 당시에도 겨우 200여대 규모의 소수 통신 항공대가 '응애, 나 미 육군 항공 통신, 정찰부대' 하고 있었던거지요. 프랑스군이 그 4월 한 달 동안에만 손실한 항공기가 400여대였다는걸 비교하면 얼마나 후진.... 아니 미개한 항공 전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엔 후술하겠지만 미국 산업의 체질과 특허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미군이 참전한 직후, 1917년 5월부터 프랑스는 곧바로 미군의 항공전력 증대를 위해 많은 공을 들입니다. 이 시기에 미국이 항공기 제작회사라고 내놓을 규모의 회사로는 커티스 외에 Standard Aircraft Corporation 정도가 있었고, 이 회사는 1차 세계대전 전간기, 미국 정부가 전투기를 포함한 항공기 생산에 방향성과 표준을 제공하기 위한 항공기 생산 이사회(현재의 항공기 이사회)를 통해 유일하게 직접 경영에 개입한 항공기 제작회사입니다. 모태는 토머스 에디슨의 사위인 존 에어 슬론 (John Eyre Sloane)이 설립한 Sloane Manufacturing Co.라는 회사인데, 이 회사가 미 육군에 Sloane H라는 관측기를 납품한 이력이 있거든요. 미국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군용 목적에 맞는 항공기를 설계 제작한 셈이라 여기에 S-J1(Standard J-1형)이라는 관측기 겸 전투기 생산을 맡기려고 한 것이죠.







<S-J1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인비행학교에서 훈련용으로 쓰였기에 한국과도 인연이 있습니다. 국립항공박물관. 직접촬영>


너무나 완벽한 상태의 S-J1 실기가 현재 김포공항 옆 국립항공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니 군붕이들이라면 놓쳐선 안되겠죠?!


(퍼온이 주 - 해당 S-j1은 실기로 입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1 레플리카로 제작된 것)


상황이 이러니 프랑스는 유럽에 파병되는 미군에게 자국의 전투기는 물론, 미 본토에는 주요 부품과 영국에 제공했던 전투기 설계도도 함께 제공하는 등의 집중 지원을 통해 미 육군의 항공전력을 최대 4.500대 규모로 늘리면서 동시에 부족한 연합군의 항공기 수요를 보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미 정부와 조달 협상에 성공합니다. 그러니까 프랑스는 전쟁에 한창인데도 당장 미군에게 제공할 항공기와 예비용 주요 부품의 여유도 있고 설계도까지 (엔진 설계 제외, 대신 메르세데스 D3형 6기통 인라인 수랭 엔진 실물을 역설계용으로 제공했습니다.) 통크게 제공할 수 있는 동력 항공기 제작 산업 기반이 있었다는 이야기죠. 왜 이렇게 차이가 났을까요?






<종전하던 해 항공기 주간지 Aerial Age에 실렸던 Standard Aircraft Corporation 광고>


물론 항공기라고 하는 물건은 지금도 그렇지만 글라이더 같은 무동력 '날틀' 시절부터 부자들의 고급 취미생활에 가까운 물건이었습니다. 사진기, 4륜차, 2륜차 모두 처음에는 그랬지만 항공기는 돈 많은 귀족이나 부자들의 전유물로 훨씬 오래 존속했는데 유산계급일수록 '속도'에 미친듯이 빠져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이 자동차에 열광하는 동안 유럽에선 이미 동력 항공기로 속도를 즐기는 파워 돈지랄이 대유행이었죠.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작 붉은 돼지에서도 지중해의 비행선 문화를 조금 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쟈크 슈나이더 (Jacques Schneider) 라는 프랑스 사업가가 만든 파워 돈지랄 항공기 레이스 슈나이더 트로피 (Schneider Trophy, 통칭 슈나이더 컵)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이미 유명했고요. 하지만 유럽의 민간 항공산업이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이야기로 이때는 조금 이른 이야기였어요. 그만큼 동력 항공기 저변이 이미 넓었다는 것이지요.


미국이 기술적으로 그저 도태되어 항공기 산업 기반이 없다시피 했나? 역시 인류 기술의 진짜배기는 유럽에서 나왔나? 요요 미개한 양키새끼들 보소! 하면 그건 아닙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미국에는 현대의 '동력 항공기'를 탄생시킨 윌버, 오빌 라이트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세계 최초의 상업용 수상기 커티스 시리즈를 만든 글렌 커티스도 있었으니까요. 다만 대략 알다시피 모국에서 홀대받던 라이트 형제의 굴곡진 인생과 글렌 커티스와의 열불 터지는 특허분쟁으로 미국 내에서 건전하고 건설적인 항공 산업이 성장할 분위기가 조성되는데 무척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거예요.





<자사의 V8엔진을 탑재한 경주용 모터 사이클에 탑승한 글렌 해먼드 커티스>


이 아조씨도 단순하게 속도가 좋아 모터 사이클 회사인 커티스 모터스를 차리고, 여기서 생산한 V8엔진 탑재 모터 사이클로 경주를 즐기던 덕업일치 속도광이었습니다. V8엔진은 기록 인정이 안되는 당시 모터 사이클 규정 때문에 빡쳐서 자사 V8엔진을 항공기로 옮긴 스피드 덕질로 끝내 성공해버린 행동하는 덕후.


라이트 형제의 굴곡진 인생사와 글렌 커티스 사이의 분쟁은 꺼라위키에도 잘 서술되어 있으니 꺼라위키를 참고해 주세요.



또한 미국의 교통, 운송 산업이 자동차 산업과 그에 관련된 인프라 구축산업에 무척 편향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엔 자본가 입장에서도, 소비하는 미국인 입장에서도 항공기의 필요성을 크게 자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군에서도 항공기의 중요성을 등한시하고 있던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계대전 참전 이전에 유럽으로 미리 보냈던 미 육군의 옵서버들이 '유럽 애들은 항공기로 전쟁을 하는데요?!' 라는 보고서를 엄청 올려놨기 때문에 군 항공대를 늘려야겠다는 결정은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이는 참전이 결정된 4월 전에 이미 육군 항공기 조달 프로그램 예산 '6억 5천만 달러'에 대한 심의를 의회에 올린 것과 5월에 곧바로 통과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통과된 6억 5천만달러는 지금 달러 가치로도 엄청난 돈입니다만 미군의 조달 역사를 통 틀어서도 실로 최대규모의 조달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미국이 절대 돈이 없어서 군의 항공기 도입을 미뤘던 것은 아니었어요.





<멕시코 육군 국경 수비대 소속 커티스 D형 통신 관측기. 판초 비야군 상대로 폭격기로 써먹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1913년까지 미 육군의 항공 정찰, 통신부대에 할당되는 예산은 멕시코 육군의 항공 정찰, 통신부대 예산의 절반도 되지 않는 연 40만달러였습니다.


그런데 돈이 있다고 항공기가 쏟아져 나오는가? 그렇지는 않죠. 스타에서 쇼미더머니를 쳐서 자원만 불려놓는다고 배틀 크루져가 막 쏟아져 나오지는 않잖습니까. 항공기 대량생산에 적합한 산업을 새로 만들던가, 기존 항공기 산업을 키우던가, 아니면 다른 대량생산 산업 일부를 항공기 제작에 맞는 산업으로 바꾸는 체질개선이 필요한거죠. 이게 당장 셋 다 여의치 않으니 유럽 주둔 미군에게는 영국, 프랑스에서 전투기를 직도입하면서 미국 내에선 들여온 부품과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완성차 회사들에게 부탁해 라이센스 생산까지 돌리게 된 것인데 이게 계획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내연기관을 탑재한 탈것이라는 공통분모 외엔 완성차 산업과 항공기 제작산업은 모든게 달랐습니다. 자동차 왕국답게 메르세데스 D3형 6기통수랭식 엔진을 거의 카피한 12기통 수랭식 SOHC 엔진인 리버티(Liberty)를 바탕으로 4,,6,8기통 모델들을 자동차 공장에서 생산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지만, 미국은 6억 5천만 달러라는 천문학전인 조달 예산 대부분이 혹시나 홍차와 바게뜨 아가리로 쑤셔들어갈까 큰 불만이었고 완성차 입장에서도 엔진을 제외한 항공기 동체는 양산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저조한 생산량과 치솟는 불량율에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그냥 하던대로 차나 만들면 편하고 좋으니까요. 


미국은 완성차 공장을 이용한 완성 항공기 라이센스 생산은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다행히 빨리 깨닫고 자국 내 항공기 산업을 키우기 위한 작업에 들어갑니다. 앞에서 설명한 Manufacturing Co.라는 회사가 Standard Aero가 되어 자회사인 Standard Aircraft Corporation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고, 정부차원에서 라이트 형제와 글렌 커티스의 Curtiss Airplane and Motor Company (이하 커티스) 사이에 오랫동안 진행중인 특허 분쟁에 적극 개입하여 양사의 특허를 공동 라이센스하고 제작되는 항공기에 쓰인 특허의 비율에 따라 각각 로열티를 지급하는 중재안도 빠르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이런 배경이 없었다면 라이트 형제와 커티스의 특허 분쟁은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나아가서는 미국의 항공산업이라는 것이 매우 오랫동안 경색된 채로 유럽에 비해 훨씬 뒤쳐져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런 과정을 통해 뉴욕에 위치한 커티스가 자사의 JN Jenny를 포함한 연합군이 요구하는 전투기 모델 대부분을 생산하는 조달계약을, 오하이오의 데이튼에 위치한 데이튼-라이트社(Dayton-Wright Company, 오빌 라이트는 이름만 빌려줬을 뿐 이 회사의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와 피셔 바디 디비전社(Fisher Body Division, 종전 후 GM이 인수합니다. 항공기 생산 이사회가 일을 맡기기 전엔 원래 마차와 자동차 차체를 하청 받아 만들던 회사였습니다.)가 영국 왕립 항공대가 사용하는 DH.4 관측기 겸 폭격기의 생산 및 개량 조달계획을 각각 맺고 포드와 같은 완성차 회사들은 리버티 엔진을 포함한 조립 가능한 엔진 생산에 집중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오면 좀 원활하게 일이 진행되었을까요? 산업이라는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리버티 L-12의 원형이 되는 메르세데스 D3형 SOHC 인라인 6기통 수랭엔진 (위), 프랑스의 르 론 9C(Le Rhône 9C) 9기통 공랭 로터리 엔진 (아래)>



프랑스는 영국에는 주었던 엔진 설계도는 미국에 제공하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추측하기엔 아마도 자국의 스파드(SPAD) SA-1~4에는 르 론 9C(Le Rhône 9C) 9기통 공랭 로터리 엔진을 올렸고, 영국에만 르 론 로터리 엔진 설계도를 준 것은 브리스톨 스카우트와 브리스톨 M1과 같이 소형 로터리 엔진 관측기에 탑재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영국 생산품을 수입도 했고요. 미국은 당시 로터리 엔진 경험도 미천하고 (그럼에도 포드가 소량 생산해서 보내긴 했습니다.) 무엇보다 프랑스가 미국에게서 조달하고자 한 전투기 엔진들은 80마력짜리 소형 로터리가 아닌 영국 브리스톨 F.2, DH.4, 프랑스의 스파드 S.VII 같은 대배기량 V형 엔진 탑재 전투기, 폭격기를 원했기 때문에 로터리 엔진 설계도 대신 메르세데스 D3형 인라인 엔진 실기를 대신 준게 아닌가 개인적으로 추측합니다.





<롤스로이스 이글(Eagle) 12기통 SOHC 수랭식 엔진. 피스톤 뱅크각 60도.>







<롤스로이스 팔콘 (Falcon) 3형 12기통 SOHC 수랭식 엔진. 피스톤 뱅크각 역시 60도 입니다.>







<팩커드 모터스의 Jesse G. Vincent와 스콧 홀 모터스의 Elbert J. Hall이 급하게 D3형 엔진을 카피한 리버티 12기통 SOHC 수랭식 엔진. 뱅크각 45도입니다.>


영국군 납품을 위해 롤스로이스 엔진 출력을 충족하려고 피스톤 보어가 넓어지고 스트로크도 짧게 뺀데다 뱅크각마저 15도 좁아서 롤스로이스 Eagle 시리즈 엔진과 Falcon 시리즈 엔진보다 크기도 위로 커지고 무거워졌습니다. 이 크기와 무게 때문에 납품이 거절되면서 뒤늦게 4기통 인라인, 6기통 인라인, 8기통 엔진을 만들지만 미군을 제외한 연합군이 여전히 사용을 꺼려했기에 대부분 유럽 주둔 미군이 사용하게 됩니다. 다만 덩치가 커진만큼 출력은 충분해서 영국에선 엔진만 받아다 H.9A 경폭격기, DH.10 중폭격기에 골고로 얹어서 썼고, 나중엔 차량용 라디에이터를 인티해서 크루세이더 전차와 크롬웰 전차 극소수의 초기형에도 얹는 등 2차 세계대전까지 장수했습니다.



이제 미국의 항공기 제작사는 미군이 요구하는 전투기 외에도 유럽 연합군에 필요한 전투기도 생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이를 생산하는데 명확한 조달 지침을 주지 않았어요. 정부가 생각하는 조달 명령이라는건 '영국에서 쓸 브리스톨 F.2 2천대 뽑으시오.' '프랑스에 보낼 스파드 3천대도 뽑으시오.' 'DH.4 신품 생산하면서 기존의 DH.4는 받아다가 연료라인 오버홀 하시오.' 수준이었습니다. 커티스와 데이튼-라이트가 '브리스톨하고 스파드에 우리 리버티 엔진이 들어갈까요? 리버티 엔진 블럭이 좀 길어서요. 엔진 크기 때문에 DH.4의 기총 위치를 변경해야 할 수도 있겠는데요?' 물어보면 '응? 뭐 엔진? 기관총 위치? 그건 나도 몰?루' 해버리는 것이었죠. 이런식이니 기껏 브리스톨에 리버티 엔진을 우겨넣어서 영국에 보내보면 '이게 뭐시여? 이거 엔진이 너무 길고 무거워서 우린 못(안)써유.' 빠꾸 먹어 결국 유럽 주둔 미군에서만 쓰이는 물건이 되어버립니다. 그래도 이런 거한 삽질을 거치면서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제공한 전투기 설계도, 자체 제작한 항공기 엔진, 항력설계, 동체제작 전반을 아우르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되집어오면서 알게되는 것은 미국의 본격적인 항공기 산업은 그 태동부터 전쟁, 군수계약과 함께했다는 것이죠. 생산을 위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 법안의 교통정리, 발전에 필요한 자금으로 구성된 계획된 전시경제는 이 셋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유지가 어렵습니다. 1차 대전기간 중에 미국 정부의 정책으로 설립된 항공산업 회사는 1919년판 미국 항공연감 기록을 기준으로 31개, 고용 규모는 최대치를 찍었을 때 20만여명, 평균 17만여명을 유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참전한 첫 해와 종전에 이르기까지 산업규모를 비교하면 겨우 4년여의 시간동안 폭발적이라는 말로도 묘사가 어려운 성장을 달성한 것이죠. (얼마나 다양한 회사들이 있었는지는 Aerial Age라는 주간지에 수록된 회사들의 광고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주간지인 만큼 웹에 아카이브가 많이 있어요.) 이 회사들이 1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은 후엔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1억달러 규모의 조달계획을 파기하면서 제작회사와 공장 상당수는 곧바로 문을 닫습니다. 이어서 대전기 보유하게 된 항공기도 대부분을 해외로 팔아치우면서 일정 규모 이상의 민간 항공기 제작회사 혹은 정부가 필라델피아 조선소에 설립한 해군 항공기 공장(NAF)을 제외하면 항공기, 유지 보수 산업도 상당 부분이 증발해버린거죠. 이 항공기 매각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직접 설립에 개입했던 Standard Aircraft Corporation 마저 일본의 미쓰이 상사에(현재의 Mitsui & Co,) 매각 되어버립니다.








<1919년판 항공연감을 찾아보면 매각에 대해 짧게 나옵니다만, 사실 이게 좀 복잡합니다.>


Standard Aircraft Corporation의 모태는 존 에어 슬론의 Sloane Manufacturing Co.를 기반으로 미쓰이의 법률고문이었던 헨리 밍글((Henry Bowers Mingle)이라는 변호사가 합자로 세운 Standard Aero Co. 라는 법인이었습니다. 헨리 밍글이 슬론의 Sloane Manufacturing Co. 지분을 일부 매입해서 Standard Aero Co. 법인을 설립하는데 미쓰이의 자금이 사용되었고 이를 모르던 슬론은 자신이 보유한 Sloane Manufacturing Co.의 지분 절반을 1918년에 미쓰이에 담보로 넘기고 제정 러시아군에 납품할 전투기 개발용 자금을 빌렸습니다. 하필 이때 혁명이 터지면서 납품계약은 날아갔고 그해 1차 세계대전도 종전을 맞으면서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자 미쓰이는 담보로 받은 지분을 곧바로 밍글의 Standard Aero Co. 에 다시 넘겨버립니다. 이렇게 미쓰이가 자연스럽게 대주주가 되어버린 것이죠. 경영이라는게 이렇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미국의 항공산업은 하루 아침에 날벼락을 맞은데 이어 찾아온 대공황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항공기 제작회사들도 경영악화로 폐업하거나 합병하게 됩니다. 커티스도 대공황에 이은 경영 예측 실패로 오빌 라이트의 회사에 인수합병되어 버리면서 이때의 경험으로 전시경제의 호황은 너무나 향긋하고 달콤한 단술처럼 쉽게 들이켜 취하게 만들지만 언젠가 술이 깨면 대가리가 깨지는듯한 숙취처럼 불황이 덮쳐와 사업 자체가 거꾸러져버린다는 불안과 공포가 항공 산업의 경영인들에게 각인되어 버린거죠.


항공산업에서 전시경제와 정부조달계획이 너무나 핵심적이고 중요한 사업이었지만 그렇다고 유럽과 미국의 항공기 제작사들이 손놓고 폐업될 날만 기다린건 아니었습니다. 대전기 동안 기업이 쌓은 경험과 엔지니어, 숙련공마저 공장과 함께 증발해버린건 아니니까 이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태동이 일어납니다. 영국이 일찌기 수상기가 가진 수송능력에 주목하여 Imperial Airways라는 초호화 장거리 수상 여객기 사업을 시작해 중국-인도-유럽, 유럽-캐나다-미국 (또는 호주)을 잇는 대서양 항로를 열었는데, 미국에서도 유럽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민간 항공 산업에 뛰어들었죠. 항공기를 보편적인 교통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미국 항공산업의 다양한 시도가 이때 일어납니다. 장거리 화물운송, 특히 대륙간 우편사업에 이어 Pan-am社(이하 팬암)가 캘리포니아와 하와이를 잇는 태평양 항로를 개척하며 여객산업을 시작하는데 이게 무척 장사가 잘 되어서 얼마 뒤엔 2차 세계대전에 쑥대밭이 되는 미드웨이와 웨이크 섬에도 수상기 계류 기지를 만들어 중간 환승 사업도 벌입니다.


이때의 민간 항공기 트렌드는 지금 우리가 이용하는 지상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아니라 바다와 호수에서 이착륙하는 수상기였습니다. 당시 기술로는 지상에서 바퀴로 이착륙하는 비행기보다는 수상기가 대형화, 고중량 화물의 운송에 더 적합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커티스의 수상기들이 꽤 대박을 치면서 각국의 항공기 연구 개발 방향이 수상기로 쏠린 이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 대륙을 오가는 장거리 항로가 개척되면서 대양의 암초나 섬에도 보급기지 정도는 간단하게 설치할 수 있으니 중간 기착과 보급에도 수상기가 무척 편리했기 때문이기도 했죠. 무엇보다 수십명의 여행객과 화물을 가득 싣는 대형 항공기를 여러대 동시에 이착륙 시킬 육상 활주로는 유럽에도 미국에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종전 부터 2차 대전 개전 사이에 등장한 몇 가지 기념비적인 수상기를 소개하겠습니다.




<리버티 6기통 인라인 수랭엔진을 탑재한 윌리엄 보잉(William Edward Boeing)의 역사적 첫 2인승 민항 수상기 B-1 (1919년)>






<커티스가 대전기간 기념비적인 판매를 기록한 (약 7천대) JN Jenny 설계를 바탕으로 만든 F-5L, 리버티 대신 롤스로이스를 얹었습니다.>





<영국 Imperial Airways의 'Short calcutta'>



1928년부터 지중해 노선에서 런던-꼴까따-現 파키스탄 카라치를 운행했고, 인도 노선의 높은 여객 수요로 이듬해 엔진을 하나 더 붙인 자매기가 도입됐습니다.>




<루프트 한자(Deutsche Luft Hansa)의 도르니에 Do. X. 근대적 럭셔리 장거리 여객산업의 기념비적 모델입니다.>


1928년부터 2차 세계대전 개전까지 승객 66명을 싣고 대서양 노선에서 뉴욕-런던(환승)-베를린 구간을 운행했습니다. 파워 돈지랄 여객기로 개장되어 라운지 같은걸 쑤셔넣느라 6발인데도 출력이 부족해 느린 속도에 뉴욕에서 베를린까지 무기착 운항은 못하고 런던에서 급유 겸 환승을 해야 했습니다만 이게 또 럭셔리한 유람개념으로 먹혀서 당대 누구나 한 번은 타고 싶었던 꿈의 여객기였습니다.








<팬 아메리칸 항공 (Pan Ameican Airways PAA 이하 팬암) 시콜스키 (Sikorsky) S-42. 통칭 양키 클리퍼 (Yankee Clipper)>


1934년부터 남미 노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취항한 미국의 럭셔리 여객기였습니다.






<팬암의 태평양 노선을 열었던 (샌프란시스코 - 하와이 호놀룰루 - 미드웨이 섬- 웨이크 섬- 괌 - 영국령 홍콩) 마틴 M-130 (Martin M-130) 통칭 차이나 클리퍼 (China Clipper)>




S-42와 1935년 취항한 M-130은 이후 팬암이 차세대 양키 클리퍼로 보잉의 B-314 (통칭 Atlantic air Queen)을 도입하기 전 까지 팬암을 대표하는 장거리 여객기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1939년 팬암이 도입한 보잉의 B-314 Clipper 통칭 Atlantic air Queen>


뉴욕-리스본-마르세유 구간과 뉴욕, 사우스햄튼, 런던 구간을 최대 36시간 무기착 운항하던 초호화 럭셔리 여객기로 영국 Imperial Airways도 3대를 도입했습니다.



아래는 B-314의 취항로.






<라이트 형제의 짧은 동력 비행으로부터 36년. 무기착 대서양 횡단 여객 사업 시대가 도래합니다. 짧은 전쟁을 통해 인간이 달성한 속도와 항공기술이 이정도...>



이렇게 종전 후 살아남은 항공기 제작회사들은 민간항공산업이라는 새로운 시장에서 오래오래 잘먹고 잘살았습니다로 이야기가 끝을 맺으면 좋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세계대전이라는 초악재와 만나게 됩니다.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던 대륙간 항로가 막히고, 여객산업이 침체되면서 여러 항공사가 폐업, 항공기 제작사는 많은 주문이 끊겨버립니다. 유럽 회사 입장에선 다행히 전시경제로 빠르게 전환하면서 군용기를 생산하는 것으로 숨을 돌렸지만, 미국의 항공기 제작회사들은 공식적으로 2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하고 또 다시 연합군의 군수공장으로 전환하기 전까진 1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의 각인된 기억을 떠올리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어쨌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항공기 생산 이사회가 바쁘게 돌아가고 각 항공기 회사에는 막대한 연구 개발비와 군 조달 계약이 쏟아져 들어갑니다. 이렇게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연합군을 거의 부양하다시피하며 엄청난 기술과 부를 쌓은 항공기 제작사들은 마냥 행복했을까요? 그럴수는 없었던거죠 1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각인된 기억으로 늘 불안에 시달렸으니까요. 특히 2차 세계대전은 대전기 동안 다양한 기술적 특이점이 발견되면서 이전의 군수산업과는 다르게 전쟁 무기를 개발하고 생산하는데 고학력 엔지니어를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엔지니어는 데리고 있는 것 만으로도 고정비가 많이 발생하지만 해고도 쉽지가 않습니다. 노동법은 강화되었고, 각 회사에는 노조가 생겼으니까요. 종전이 찾아오면 당장 정부에선 다시 군용기 조달 계약을 취소해버릴 것이고 전시경제로 순식간에 부풀려진 기업 규모는 그 자체로 엄청난 재정 부담이 될겁니다. 그래서 항공기 제작사들은 종전이 찾아오기 전에 스스로 합병을 해나가면서 언젠가 다시 정상화 될 민간 항공산업 시장에 보험을 들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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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로 이어집니다-








이건 1937년 팬암 클리퍼를 탑승했던 여행객이 촬영한 필름을 담은 다큐멘터리 인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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