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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 아메리칸은 함상 제트 전투기


XFJ-1 퓨리(노스 아메리칸 명칭NA-134)를 개발하고 있었다.


XFJ-1 퓨리는 4000마력 비재연소식 J35 터보제트 엔진을 장착하며,


무장은 6정의 50구경 기관총이었다.


XFJ-1 퓨리는 1946년 9월 12일, 머록에서 처녀비행을 실시하였으며


고도 12,000 피트(3657m)에서 545마일(877km/h)의 속도로 비행하였다.


XFJ-1 퓨리는 3대의 원형기 개발후, 1945년 1월 1일에 해군에 정식 채택되어


초도 제작기들은 항모 복서의 VF-5A 비행대에 배치되었다.


노스 아메리칸 최초의 해군기 FJ-1 퓨리는 FJ-2, 3, 4 시리즈로 이어진다.







미 해군 최초의 함상 제트 전투기 FJ-1 퓨리. 동체에 표기된 B는 항모 복서(Boxer)함재기를 뜻한다.


노스 아메리칸 사상 최초의 해군용 기체가된 FJ-1 퓨리는 원형기 3대와 오직 30대만 제작되었다.


이후 후퇴익을 채용한 FJ-2 퓨리부터 시리즈로 개발된다


노스 아메리칸은 1944년 11월 22일부터 공군용 기체 개발에 나서게된다.





XP-86


이것이 해군용 NA-134를 공군용으로 개발한 NA-140으로서 XP-86이된다.


XP-86은 XFJ-1 퓨리와 흡사한 형체를 가지고있었다.


동체가 조금 날렵하게 개량되었으나 주익과 미익은 똑 같았고, 엔진도 동일하게 J35 -C-3 터보제트 엔진을 장착했는데,





General Electric/Allison J35


추력이 약한 J35엔진으로는 공군이 요구한 600마일(965km/h)의 속도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제트 항공 기술이 미국에 입수되었다.


노스 아메리칸 수석 기술자 래리 그린은 독일 항공 기술에관한 번역 문서를 입수하였다.


그 문서에는 음속에 근접하는 풍동 테스터 데이터와 후퇴익의 공기저항 감소 등의 장점들이 기록되어있었다.


1945년 9월, 노스 아메리칸 기술자 해리슨 스톰은 래리 그린이 입수한 문서를 연구하였다.


그는 문서에 기록된 독일 항공 기술들을 XP-86에 적용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였다.


제트 엔진에 걸맞는 동체 제작기술도 함께 발전해야만했다.


독일의 후퇴익기에서 힌트를 얻은 해리슨 스톰은 XP-86의 곧은 날개를 후퇴익으로 변경하면 약 75마일 정도 증가된 속도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문제는 빠른 속도를 얻는대신 저속에서 안정된 비행 특성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주익 전면에 슬랫을 설치함으로서 해결된다.





노스 아메리칸은 후퇴익에 슬랫을 설치한 모형을 제작하여 풍동 테스트에 들어갔다.


풍동 테스트 결과는 XP-86이 계산상 650마일(1046km/h)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군도 풍동 테스트 결과에 만족하여 1945년 11월 1일, 3대의 원형기 개발 계약을 체결하였다.


1947년 8월 8일, XP-86 원형 제1호기(45-59597)가 노스 아메리칸 잉글우드 공장에서 제작 완료되었다.


원형기는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원형 1호기는 지상 테스트를 마친 다음, 1947년 10월 1일에 머록 드라이 레이크에서 처녀 비행을 하였다.






XP-86의 처녀 비행이 성공하자 공군은 그 놀라운 성능에 매우 흥분하였다.


35도의 후퇴각을 갖는 후퇴익기는 낮은 공기 저항을가져 음속 돌파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후퇴익기가 곧은 날개를 가진 기체보다 고속에서 더 큰 양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공군은


XP-86이 수직 하강 비행을 한다면 마하의 속도를 얻을 수도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XP-86은 동체 하부와 후방 측면에 에어 브레이크가 설치되었는데,


이 감속 시스템은 어떠한 속도나 각도에서도 작동이 가능하며, 미군 전투기 사상 최초의 사례가되었다.


XP-86은 시계가 뛰어난 버블 캐노피를 비롯하여 주익 앞전면에 설치된 슬랫은 저속 비행 안정성과


선회 반경을 줄이는 효과가있어 고기동의 격렬한 공중전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만약 시제기와달리 주익 전면에 확장된 슬랫을 설치한 항공기가


이륙 도중 양력을 잃게되면 기체의 이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결론은 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양산형 F-86A 세이버는 5200마력의 J47-GE-I 엔진을 장착하게되지만


3대의 원형기 중 한 대에 J47-GE-3 엔진을 장착하게된다. 1948년 4월 26일,


조지 웰치가 J47-GE-3 엔진 장착형 원형기를 전속력으로 수직 급하강 비행하여 음속을 돌파하게된다.


음속을 돌파 이전에 실시되었던 제1차 테스트는 30시간의 무사고 비행이었으며,


1차 테스트가 완료되자 제2차 테스트는 공군에의해 실시되었다. 캔 칠스트롬 공군 소령은 일주일간 총 10시간 11분/총 11회의 단거리 이착륙 비행 테스트를 실시하였다.


제3차 테스트는 실제 비행 테스트이며 이때 서방 국가에서는 전투기 사상 최초로 마하1을 돌파하게된 것이었다.


원형1호기는 1952년 9월 추락으로 손실되었고 2, 3호기는 각각 202, 75시간의 비행을 마친 후


1953년에 원형기로서의 각종 테스트 임무를 마감했다. 이후 추적기(pursuit plane)가 전투기(fighter)로 공식 표기 변경되면서 XP-86은 XF-86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XF-86 테스트 프로그램이 성공하자 공군은 양산형 F-86A 세이버를 주문하게된다.


공군은 1946년 12월 20일 계획하였던 초도분 33기를 1947년 10월 16일에 정식 주문한다.


F-86A 세이버는 XF-86과 기본적으로 크게 변화된 점은 없다.


양산형 F-86A-1 세이버는 J35 엔진대신 5200마력 J47-GE-I 엔진을 장착하여




General Electric J47


음속에 근접하는 수준까지의 속도를 얻을 수 있었다.


로버트 존슨 소령은 1948년 9월 15일 670.98마일(1078km/h)의 세계기록을 수립하였다.


XF-86에 없었던 50구경 기관총이 노즈 측면에 각각 3정씩 고정 장착되고,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내부에 전기 가동식 포문을 설치하여 사격시에만 열리도록 하였다.


고속 비행용 비상 탈출 사출좌석이 설치되고, XF-86에 설치되었던 동체 하부의


에어 브레이크는 제거되고 후방 측면에만 설치되었다.


후기형인 F-86A-5는 슬라이딩 개폐식 캐노피의 라운드형 전면부가 V-자형 방탄유리로 바뀌고


전기 가동식 포문이 제거되었다. 또한 주익 파일런에 여러 종류의 무기들을 운용할 수 있게 강화된 형이다.


F-86A-5는 주익 파일런에 500, 1000파운드 폭탄과 206갤런 외부 연료탱크를 장착할 수 있으며,


추가적으로 5인치 HVAR을 장착할 수 있게 개량되었다.

그리고 엔진은 5200마력 J47-GE-5와 J47-GE-7 등으로 지속적인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져


유지성과 신뢰성이 강화되었다.


초도 생산된 33대의 F-86A-1은 각종 테스트용으로 사용되며,


F-86A-5는 1949년 2월, 로스엔젤레스 영공 방위를 책임진 제1전투비행단부터 장비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랭글리 공군기지의 제4전투비행단과 커트랜드 공군기지 제81전투비행단을 비롯한


총5개 비행단이 F-86 세이버를 운용하게된다.


1950년 12월 22일에는 워싱턴 주방위공군 제116전투요격비행대에도 도입이 결정되는 등


결과적으로 공군은 178,408.00 달러의 예산으로 총554대의 F-86A 세이버를 도입하게된다.


1950년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대량의 항공기를 투입하는데,


F-86세이버는 한반도 상공의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게된다.





F-86C/YF-93A


F-86C세이버는 전략폭격기 호위용 장거리 전투기 개발을 원했던 전략공군사령부의 요청으로 계획된 형이다.


후퇴익만 그대로 유지하였을 뿐 동체와 엔진은 F-86A과 크게 달라졌는데


엔진은 애프터버너가 장착된 프랫 앤 휘트니 추력 8000 파운드 J48-P-1로서,




Pratt & Whitney J48


엔진의 크기 때문에 동체는 확대되어야만했다.


F-86A보다 전장이 44피트 더 길어졌으며 폭은 6.5피트 더 증가되었다.


기체가 커지면서 연료는 총 1,580갤런을 적재할 수 있으며 증가한 중량을 위해 메인 랜딩기어는 2개의 바퀴로 변경되었다.


기본무장은 20mm 기관포이며 기수 레이돔에 SCR-720 탐색 레이더가 내장되었다.


수의 에어 인테이크 덕트는 동체 측면에 각각 하나씩의 스쿠퍼가 설치되는 NACA 형식으로 변경되고,


기수에는 블랙박스가 설치될 예정이었다.


동체 후부의 스피드 브레이크는 폐지하고 동체 하부에 대형 스피드 브레이크를 설치하였다.


캐노피의 높이도 낮아지고 에리어 룰(area rule)을 적용하여 날씬한 동체가되었다.


당시로서는 신 기술이었던 에리어 룰 법칙은 나중에 센추리 시리즈의 기체들이 사용하게된다.


F-86C는 원형기인 F-86A에 비하여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공군은 YF-93A로 명칭을 변경하게된다.





YF-93A


공군은 1948년 6월 9일, 118대를 주문하였고, YF-93A 원형기는 1949년말에 제작 완료되어


1950년 1월 25일에 처녀 비행을 실시하였다.


YF-93A 원형기는 2대(48-317,48-318)가 제작되어 테스트되었다.


YF-93A는 전투 중량이 26,500파운드(12,000kg) 였으며, 최고속도는 708(1139km/h)마일을 기록했고,


외부 연료탱크를 장착하면 항속거리가 2,000마일(3218km)로 늘어났다.


미 전략공군은 YF-93A를 소련 표적 타격에 나서는 폭격기 호위용 침공 전투기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그동안 B-47과 B-52같은 장거리 제트 폭격기가 개발됨에따라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사라져버렸다.


공군은 YF-93A 개발/발주 계획을 취소하고 그 비용으로 더 많은 폭격기를 도입하게된다.


2대의 YF-93A 원형기는 1950년대 중반까지 NACA(NASA)에서 테스트 및 추적기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