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청하를 따라서 도서관의 카운터까지 걸어가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직원이 앉아서 책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나 청하가 온 것도 모를 정도로 집중해서 정리하고 있었다.


에흠, 하고 청하가 헛기침 소리를 내기 전까지 계속해서 작업을 진행해가던 직원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 사장님 오셨나요! 손님도 같이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직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전했다.


"그래서, 예의 그 책은 어디에 있는가?"


"사장님이 건네주신 보자기에 담아서 나오지 못하게 묶어는 놨는데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니, 보자기 안에서 이리저리 날뛰는 무언가가 보였다.


저 무언가가 책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안에 담겨있는 게 동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날뛰는 책을 담고 있던 보자기의 천이 스르륵 풀리더니, 책은 곧장 밖으로 튀어나와서 허공에 떠 있었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느낌으로 책의 중간을 펼쳤다 닫혔다를 반복하며 불만을 표출하다가도 내 모습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오래 가지는 못할 거라 생각은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네요."


"어쩔 수 없느니라. 저것도 나와 같은 동족이 만든 책이니."


옆에 있던 청하의 한숨소리와 함께, 움직임을 멈췄던 책은 이쪽을 향해 천천히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려터져서 직접 다가가는 게 더 빠르다고 생각될 정도로 느렸다.


약간의 답답함을 느낀 정도였던 나에 비해 청하는 천천히 날아오는 모습이 너무나도 답답했는 지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다가오는 청하의 모습을 본 책은 그 자리에서 멈춰서는, 쳐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청하를 향해 책표지를 보였다.


고개를 돌려 직원을 보니 직원도 나를 보며 어색한 웃음만 짓다가 아까 내려놓았던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 못했던 작업을 마무리하려는 듯한 행동에 나도 고개를 돌려 청하와 책이 있는 곳을 보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둘 다 쳐다보기만 하는 상황이었다.


사람과 책이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란 참으로 기묘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어온 것처럼 서로 입으로 대화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서로 무슨 말을 꺼내야하는 건지 몰라서 쳐다보는 걸 수도 있었고.


책이 말을 한다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사람을 보여달라며 난리를 피웠다고 하니 직접, 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청하와 같은 동족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뭔가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평상시에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특정 상황이나 어떤 이유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는 청하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저 책도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책이니까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적기도 하겠고, 뭔가 하려고 하면 청하가 막아주겠지.


막아주겠…지? 약간의 불안이 마음속에서 솟아났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청하라면 안 막을리가 없었다.


만약의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책을 도와서 내게 뭔가를 하려고 할 지도 몰랐지만, 그런 짓까지 하지는 않으리라 믿고 있다.


"…단순히 보기만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아무런 짓도 안 한다니까, 영 믿음을 못 주는구나."


"나와 같은 동족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나."


"그것도 그렇기는 하다만, 에잉."


노인처럼 쯧 쯧 하고 혀를 찬 책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젊은 편이었다.


겉으로 들려오는 말은 나이많은 어르신의 말이었는데, 정작 들려오는 목소리는 젊으니 괴리감이 엄청 났다.


청하의 말투도 그렇고, 같은 동족이 만들었다는 책의 말투도 그렇고, 전부 같은 말투라고 하더니 사실이었나.


"내가 쳐다보고 있을 테니 이상한 짓은 하지 말거라."


"내 명예를 걸고 인간에게 아무런 짓도 안 할테니 걱정 말거라!"


"용의 명예같은 건 인간에 비하면 싼 편이지 않느냐!"


"그나마 내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명예나 이 책에 적힌 지식밖에 없는데 뭘 바라는 거냐!"


책에 눈이 달려있었더라면 청하를 노려보고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이 되었다가도, 청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자마자 그 분위기가 눈이 녹듯이 사라졌다.


방금의 분위기에 약간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역시 용이 만든 물건이니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아무런 짓도 안 한다고는 해도 그걸 내가 믿을 수 있냐 없냐는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고.


조심스레 발을 떼어 책에게 다가가니, 청하가 옆으로 자리를 비켰다.


책을 마주본 상태로, 뭔가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내 옆에 선 청하를 잠깐 쳐다보니, 괜찮다는 듯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약간이지만 안심할 수 있게 되어, 그제서야 책으로 고개를 돌리니 입을 열었다 닫았다하는 것처럼 책을 펼쳤다 닫았다를 반복하는 게 보였다.


그러고는, 이상한 점은 없나 살펴보는 느낌으로 내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샅샅이 살펴보는, 관찰하는 듯한 느낌이라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짓은 하지 않았기에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진짜 인간이군, 진짜 인간이야."


"그럼, 거짓말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가?"


"반쪽이기는 해도 인간이라고 소개시켜줄 줄 알았구나."


"그런 짓은 하지 않느니라! 내가 인간이라고 말하면 인간이지, 뭣하러 그런 짓을 하겠느냐!"


"어허. 내가 너 보다 나이가 많은데 말본새가 왜 그러느냐."


슬쩍, 청하를 살펴보니 주먹을 꽉 쥐고는 벌벌 떨리는 팔이 보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책을 찢어버릴 것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어휴. 저것도 동족이 남긴 물건이니."


"그럼, 그럼. 이제는 몇 없는 동족이 남긴 지식이 담긴 책이지."


"그래서, 왜 그렇게 난리를 피웠던 건지 알려주게나."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만들어진 목적을 다하기 위해서지!"


엣헴! 하고 책을 대각선으로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는 몰라도 청하가 코를 세우고 우쭐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이 안 가는 목소리였지만, 느낌상으로는 청하와 비슷하달까.


동족이라고 해서 뭔가 비슷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비슷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청하가 둘이나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머리가 살짝 어지러워질 뻔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책의 반응을 보고는 코웃음을 친 청하가 손가락으로 책을 가리켰다.


"목적이라고 해봤자 변태같은 것 아니겠나! 나와 같은 동족이 만들었다면, 분명히 불순한 목적일 게 틀림없느니라!"


"뭣! 전혀 그런 목적이 아니다! …아마도. 요즘에는 어떻게 받아들일 지 잘 모르겠구나."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는 청하의 모습이 얼핏 보인 것 같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책이었다.


약간, 시무룩하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아래로 기울어진 것 같았다.


청하와 같은 동족이 만든 책에 사람에게 목적이 있다는 말이 왜 이렇게 불안하게 느껴지는 건지.


게다가, 방금도 요즘에는 어떨지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나.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요즘에는 이상한 일이 되는 경우도 왁왁 있었기에.


불안감을 품고 입을 천천히 떼었다.


"그래서,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 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오, 그럼. 당연하지. 물어봐도 괜찮느니라. 내가 만들어진 목적은 인간의 의복을 빠르게 갈아입히기 위함이니라!"


"…환복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내 동족이라지만 참, 특이한 목적이로구나."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하는 청하의 말에 반쯤은 동의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번 옷을 갈아입는 것도 꽤 귀찮은 일이었기에 나름 괜찮은 목적이 아닌가 싶었다.


근데, 그게 내 의지가 아니라 책의 의지에 달려있다면 충분히 문제가 될 법한 상황이겠지만.


어째선지는 몰라도 목적에 대해 들으니 불안감이 더 솟아났다.


인간을 보고 싶다고 난리를 피웠던 것도 어쩌면, 사람의 옷을 갈아입히고 싶다는 것 때문에 그랬다는 것 아닌가.


남들에게 내 몸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도 없었고, 노출하는 취향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다 해결이 된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었다.


"환복 말고도 원하는 옷이 있다면 그걸로 다 갈아입힐 수 있구나. 일단, 책에 저장된 의복만 하더라도 수십가지가 가뿐히 넘어가니."


"…예?"


"책에 적혀있는 게 단순히 지식만 남아있는 게 아니라 물건을 포함할 수도 있다는 소리니라."


"나 같은 경우에는 그렇구나! 물론, 다른 책을 본 적이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보나마나 뻔할 뻔자로구나. 어떤 변태같은 동족이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히려고 만든 책인가."


"어허, 변태같다니! 선지자라고 해주면 좋겠구나! 나를 만든 동족에게 미안하지도 않는가!"


"…그래서, 어떤 의복이 있느냐?"


"그거는 말로 떠드는 것보다는 더 좋은 대화수단이 있지 않느냐."


고개만 돌려 나를 살펴보는 청하의 시선이 뭔가 수상쩍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이상한 짓을 하려는 기미는 안 보였기에 가만히 있었다.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해도 내가 거부하면 되는 일이었고.


청하가 내게 강압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하지는 않았… 아니, 한 번은 있었지만 그건 청하의 상태도 이상했던 데다가 미수로 끝났으니 넘어가고.


쭈그려 앉은 청하와 그런 청하의 키에 맞춰서 내려온 책은 서로 말은 없었지만 충분히 수상스러운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수상스러워서 당장 집이나 카페, 아니면 금향에게 연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언제쯤 전화를 거는 게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더니, 어느샌가 대화가 끝난 듯 다리를 피고 일어서는 청하가 보였다.


잠깐 쭈그리고 앉아있었을 뿐인데도 끄으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런 부분에서는 사람이랑 별다른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의견은 잘 알았느니라. 그렇지만, 당사자의 생각은 어떤 지 물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도 그렇군. 그래서, 인간의 생각은 어떤가?"


"…예?"


청하와 책, 둘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며 물어보았지만, 정작 들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에 내 입에서는 의문만 나올 뿐이었다.


"아, 이런. 말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까먹는구나."


"나도 가끔은 그런 경우가 종종 있으니 괜찮느니라. 그래서 머릿속으로 말을 걸기도 했고."


"뭣. 그건 참으로 부러운… 아니, 어흠. 에흠. 아무 것도 아니니라."


입도 없고 손도 없을 텐데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은 착각이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책이 청하와 비슷한 모습으로 보였다.


같은 동족이라고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말투나 행동이 청하와 비슷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그래서, 주빈은 어떤 의복을 입고 싶으냐?"


"예?"


"어허. 저번에 금향 녀석이 입혔던 의복은 잊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곘지?"


"…아."


같이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공원에서 난리가 일어났던 그 사건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게 왜 여기서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청하는 책을 가리켰다.


"내가 원하는 의복을 입어줬으면 좋겠구나!"


"예?"


내 입에서는 아까부터 같은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다. 이해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지만, 여기서 안 입겠다고 거절하면 청하가 난리를 치지 않을까.


금향의 옷은 입어줬으면서 내 옷은 왜 안 입어주냐고. 그것도 아니면 한동안 삐져서는 말도 안 거는 게 아닌가.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었기에 청하가 어떤 옷을 원하는 지 부터 물어봐야 했다.


"어떤 옷…을 말하십니까?"


"나랑 비슷한 의복이니라!"


청하의 의복, 그러니까 옷을 본다.


전체적으로 푸른색의 한복이었다.


입어달라는 옷이 아마 한복인 듯 싶었다.


문제라면 치마라는 점이었고, 나는 치마가 입고싶지 않았다.


그래도, 짧은 것보다는 그나마 낫…나? 아니, 애초에 안 입으면 되지 않나.


짧은 시간동안 머릿속으로 수많은 고뇌가 지나갔고,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하나였다.


"…알, 겠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거절하는 순간 귀찮게 구는 청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도때도 없이 옷을 입어달라고 난리를 치는 모습이라던가, 꼬리로 내 허리나 팔을 휘감아서 못 움직이게 한다던가, 내 등에 매달린다던가 하는 것들.


그런 귀찮음을 감수할 바에야 잠깐의 부끄러움만 이겨내면 끝나는 일이었다.


"의복은 알아서 준비할테니, 잠깐만 기다리거라!"


어딘가를 향해 도도도 달려가는 청하의 등 뒤로 보이는 꼬리는, 기분이 좋은 것을 감출 기미도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묘하게 신나보이는 책도 청하를 따라 날아가는 게 보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생각을 해봤지만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사진같은 매체로 안 남는다는 게 그나마의 위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