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직원이 카운터 밑에 있던 것으로 보이는 접이식 의자를 건네는 것을 받아서 설치한 뒤, 거기에 앉고서 청하와 책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직원은 자기 할 일에 열중하고 있었고, 나는 딱히 뭘 할 것도 없었기에 스마트폰을 꺼내어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사람과 관련된 것들이 더 없나 찾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청하가 이상한 옷만 안 들고 오기를 바라는 중이었다.


자기 것과 비슷한 옷이라고는 했지만 노출이 많다거나, 아니면 짧은 치마라던가 하는 것들이 아니기만을 바라며.


어느 쪽이든간에 청하와 비슷… 아니, 몸매를 생각해보면 애초에 비슷한 옷일리가 없었다.


품이라고 해야할 지, 가슴이 그렇게나 큰 덕에 나름대로 개량을 한 것처럼 보이는 청하의 한복이었으니.


그나저나, 간 지가 언제인데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올 생각인 건지를 모르겠다. 시간을 보니 10분 정도를 기다렸던 것 같은데.


되도록이면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 내 생각이 하늘에 닿았는 지, 아니면 청하에게 닿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청하와 그 옆에서 날아오는 책의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은 채였지만.


아무 것도 안 들려있다는 게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많이 기다렸느냐!"


"기다리게 했구나!"


"아닙니다…. 그래서, 옷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있지 않느냐, 여기."


청하가 손가락으로 책을 가리켰다.


책 안에 옷이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들렸지만, 아마 실제로도 그렇지 않을까.


책 스스로도 지식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옷도 들어있다고 직접 말했으니, 저 안에 집어넣고 와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말해본다.


정말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저 안에 들어있는 게 어떤 옷인지 감도 안 왔을 뿐더러, 환하게 웃고 있는 청하의 웃음이 오늘따라 내게 불안감밖에 주지 않았다.


"어흠, 그래서. 옷을 갈아입을 준비는 다 되었느냐?"


"준비고 자시고, 여기에는 제 몸을 가릴 천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다 필요없느니라! 이 몸이 있지 않느냐!"


"…예?"


청하가 아니라 책에서 들려온 말에 그쪽을 쳐다보니, 책 안이 촤르륵 펼쳐지더니 어느 부분에서 멈추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다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옷을 갈아입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지만, 생각보다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환복을 위한 공간도 따로 있느니라."


움츠러든 몸을 조심스럽게 풀며, 주위를 둘러보니 청하는 보이지 않았고, 한 공간 안에 책과 나만 있었다.


아까까지 보였던 도서관의 풍경이 아니라 어딘지도 모를 산 정상의, 지금의 계절과 맞지 않는 푸르디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난 것이 눈에 띄었다.


진짜 태양인건지는 모르겠지만, 피부에 닿는 느낌도 그렇고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느낌도 그렇고 어딘가로 이동된 게 아닌가 싶었다.


"다 허상에 불과한 거짓이니라."


그런 내 반응을 보고 있었는 지, 책에서 그런 말이 들려왔다.


거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현실감이 넘쳐났기에, 꿈이라도 꾸는 느낌이었다.


오른손으로 왼손등을 살짝 꼬집어보니 고통이 느껴지는 걸 보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맞았다.


"이게, 거짓이라는 게 믿기 힘듭니다."


"그럴 수밖에. 인간에게는 이런 대규모 주술을 겪어보는 일은 드무니."


그럼, 이런 것은 어떻느냐.


청하와 똑같이 내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어온 책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보이던 풍경이 다른 곳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까는 산 정상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현재 있는, 도서관의 풍경으로 바뀌었지만 그 안에는 직원과 청하가 없었다.


"다른 풍경도 보여주고 싶었지만, 내게 저장된 것이 얼마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살아있는 생물처럼 말하는 책을 보고 있자니, 용이라는 종족은 이런 책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내는 건가 궁금해졌지만 직접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청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물어봤다가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말을 듣고 나서야 대답을 해줄 것 같았다.


"그래서, 여기가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다른 곳을 보여주기를 원하느냐?"


"…다른 곳도 있습니까?"


"그럼. 당연하고 말고. 몇 군데 없기는 하지만, 보고 싶느냐?"


"예."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하니, 책장이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도서관의 풍경이 일그러지며 다른 곳으로 바뀌어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소부터 시작해서, 이렇게나 세세한 부분까지 구현이 되어있음에도 가짜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환경이 잘 구현된 곳까지.


마지막으로 본 곳은 해변가였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가파르게 깎여나간 절벽과 파란색으로 빛나는 바다, 그리고 소금기를 머금고 날아오는 바람.


언제부터 맨발이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모래의 바스락거리는 감촉.


책이 스스로 말하기를 허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라고 생각되었을 정도로 현실감이 넘쳐났다.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며 모래를 밟고있는 발등 위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한걸음을 옮겨보았다.


발바닥에서 모래가 떨어져나가는 느낌과 동시에, 바닷물에 닿아 축축한 모래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름답지 않느냐."


"아름답습니다."


책장이 스르륵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한낮처럼 떠 있던 태양이 저 멀리 수평선에 걸쳐졌다.


태양이 저물어가는 것을 표현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하늘에서 촘촘하게 박힌, 수많은 별들이 눈에 보였다.


"이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곳이니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아주, 마음에 듭니다."


마음 한 켠에서 이런 곳을 보아서 좋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고작해야 환복을 위해 준비한 공간이라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이런 것을 만들어낼 정도로 용의 주술이라는 게 대단했지만, 고작해야 환복이 뭐라고 이런 것을 만들어낸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청하의 말투도 그렇고, 어쩌면 청하가 보이는 모습들이 용들이 평소의 인간에게 보이는 모습인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딱히,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미야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도 않는 것도 그렇고, 금향에게도 녀석이라는 말을 붙이는 걸 보면 취급이 박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제 본론으로 넘어갈 시간이로구나!"


"…아."


풍경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것을 책이 일깨워주었다.


애초에 여기로 온 목적이 환복, 그러니까.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나.


책이라고는 해도 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사진같은 매체로 남는 것도 아니었고 성별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책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주섬주섬, 겉에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으려고 지퍼를 내리려고 하니, 책이 급하게 내 앞으로 날아왔다.


"잠깐, 잠깐! 왜 벗으려는 게냐!"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벗어야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 그렇구나. 그게 맞기는 한데, 애초에 내가 있지 않느냐. 옷을 벗지 않고도 갈아입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나란 말이지!"


당황하면서도, 여전히 우쭐하는 느낌으로 말을 걸어오는 책의 모습에 옷을 벗으려는 것을 멈췄다.


어떻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건지 궁금증에 찬 상태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팔을 좌우로 펼쳐주지 않겠느냐? 옳지, 그렇게. 잠깐만 그렇게 있어주면 되느니라."


십자로 팔을 펼치고, 책이 파라락거리며 넘어갔다.


넘어가는 책장의 사이로, 여러가지 옷들이 보였다.


안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밖으로 꺼내려는 건지. 아니, 지금의 공간도 가짜로 만들어진 곳인데 의상도 가짜인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허술하지는 않겠지 하고 믿었다.


…아주 약간의 불안감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차라리 눈을 감고 기다리는 게 더 낫다 싶어서 두 눈을 질끈 감고, 되도록이면 빠르게 옷이 갈아입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다가 어느 부분에서 멈추었다.


슬쩍, 눈이라도 떠서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굳이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가만히 눈만 감고 있었다.


"잠깐 몸이 공중에 뜨겠지만 당황하지 말거라."


그렇게 말하자마자 발이 공중에 뜨는 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싶으면서도,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괜히 버둥거렸다가 갈아입을 옷이나 갈아입혀질 내 옷에 문제가 생기는 건 바라지 않았으니.


공중에 뜬 채로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주 잠깐동안 그렇게 있었던 것 같았지만, 발이 공중에 떠 있다는 게 얼마나 불편한 느낌인건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이라면 발을 땅에 붙이고 살아야하는 법이었다.


발이 땅에 닿으니 그제서야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감았던 눈을 뜨니 눈 앞을 지나가는 책의 모습이 보였고, 슬쩍 아래로 고개를 내려보니 아까 입었던 옷이 아닌 다른 옷이 입혀진 게 보였다.


갈아입혀진다는 느낌도 없었는데, 순식간에 옷이 바뀌어있었다.


"엣헴. 어떻느냐! 마음에 들지 않느냐? 환복을 위해서 준비된 이 몸의 능력은!"


괜히 우쭐거리는 느낌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다.


확실히 능력은 있는 게 맞았다. 옷을 갈아입혀지는 동안에 공중에 살짝 떠있어야한다는 점을 뺀다면.


청바지와는 다르게 사라락거리며 다리에 달라붙는 천의 느낌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다리에 붙는 듯 하면서도, 그렇게 걸치적거리지는 않았다.


"여기, 거울이니라."


책에 내 앞으로 전신 거울을 내려놓으니,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 건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청하가 비슷한 옷이라고 했더니 정말로 비슷한 옷이기는 했다.


색깔도 그렇고, 소매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기 좋게 생겼다는 것도 그렇고.


다만, 치마… 라고 불러야하는 건지 어떻게 불러야하는 건지 모르는 곳에 주머니가 없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청하는 자기 가슴팍 안에 집어넣고 꺼내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푸른색과 흰색으로 조합된 한복을 입고있는 내 모습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간결하게 느껴지는, 그런 옷이었다.


"음, 음. 역시 같은 동족이라서 그런 건지 의복을 보는 눈이 있다는 건 인정해야겠구나!"


"…그렇습니까?"


"그렇고 말고. 가끔은, 의복에 대한 취향이 이상한 동족들도 꽤 있느니라!"


굳이 서양의 의복을 입히려는 변태같은 동족이라던가.


내 머릿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책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금향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며 지워버렸다.


적어도 금향은 그런 취향이 아닐 것이라 믿고 있었다.


…아니겠지?


"이제 옷도 갈아입었으니,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자꾸나!"


"…예."


치마…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불편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데에는 그렇게 큰 불편함이 있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발을 옮길 때마다 안의 천이 달라붙는 것만 빼면은.


저 멀리 수평선에 걸친 태양이 일그러지는 것을 시작으로, 바다가 일그러지고 하늘이 일그러지고는, 마지막으로 내가 서 있는 곳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도서관의 풍경이 보였다.


카운터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직원의 모습도 보였고,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쳐다보는 청하도 보였다.


비록, 입고있는 옷과는 안 어울리는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이기에는 완벽하게 옛날의 복식을 입고 있었다.


너풀거리는 소매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청하에게 천천히 다가가니, 굳은 채로 가만히 서 있던 청하가 그제서야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 앞에 바로 서서, 내려다보니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대는 게 눈에 보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내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려대며 대답을 피하던 청하가, 내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 마음에 드느니라! 최고다!"


…청하의 코에서 빨간색의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게 보였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지적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던데다가, 기억을 되짚어보면 금향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가? 아마, 보였지 않았나.


"잘 어울리세요, 손님!"


카운터에서 짝짝짝 하고 연신 박수를 치며 감탄하는 직원의 말에 약간의 머쓱함을 느끼며, 뒷목을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