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느냐? 꽉 끼는 곳이라던가, 하는 것들 말이니라."


"그렇게 크게 불편한 곳은 없습니다."


다리에 휘감겨지는 천의 촉감이 어색하다 못해 매우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을 빼면.


쫙 달라붙는 것도 아니고 휘감겨서 붙는 느낌이 이상했다.


제자리를 한 바퀴 걸어보니 움직이는 데에 불편한 것도 없었고, 가슴이 답답하다던가 하는 것도 없었다.


그냥, 치마를 입고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불편한 점이었다.


카운터 쪽에서 연신 박수를 치며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하는 직원에게 적당히 해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저으니, 그제서야 칭찬이 멈추었다.


"아, 죄송해요. 놀리는 것처럼 느껴지셨나요?"


"아닙니다. 너무 금칠을 해주시니 제 얼굴이 붉어질 정도입니다."


뺨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열기는 거울로 내 얼굴을 안 보아도 빨갛게 달아올랐을 게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어느샌가 코에서 흐르는 빨간색 액체를 닦아낸 청하가 내게 다가와서는, 내 몸 주위를 쉬지도 않고 계속 돌면서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살펴보고 있었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느낌으로 위아래로 움직이는 책의 모습은 덤이었다.


단순히 옛날의 복식인 한복을 내게 입혔을 뿐인데 뭐가 그렇게 만족스러운 건지.


제 할 일을 다 해서 만족감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만들어진 목적이 사람의 환복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했으니, 그 목적을 달성한 책은 어떻게 되나.


그런 의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이제 사람도 보았고 의상도 환복했으니,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모르겠느니라."


책에서 무감정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야되는 건지를 모르는,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같은 목소리였다.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청하도 걸음을 멈추고는, 책을 쳐다봤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본인의 선택만이 남은 것이니라."


"무엇을 선택하는 겁니까?"


"자신의 목적을 다 했으니 지식을 넘기거나, 아니면 말하는 책으로서 계속해서 살아갈 것인가."


여태까지 들어본 적 없었던 목소리로, 내게 설명하는 청하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냉정하게 느껴졌다.


같은 동족이 만든 물건이기에 감정, 동정이라던가 안타까움을 느꼈으니 내게 오라고 한 게 아니었나 싶었지만, 그게 아닌 듯 싶었다.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만 돌려 청하의 얼굴을 보니 내게 보여주던 표정들이 지워진 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사람의 표정에서 감정이 빠진다는 게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느껴지는 건지 알고 싶지 않았다.


같은 동족이 만들었을 뿐인, 말 그대로 물건을 본다는 시선이었다.


그런 청하의 표정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 청하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느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용이라는 종족은 다들 이런 걸까.


낯선 곳에서 사람이, 같은 동족이 만든 물건을 보게 된다면 나는 기뻐할 것 같은데.


여전히 용의 생태에 대해서, 감정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겠지.


시간 감각을 비롯해서 온갖 것들이 사람과는 다르니까.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청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흠, 흐음. 생각보다 고민이 되느니라."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며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책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카운터 쪽으로 빠져서 직원에게 손을 내미는 청하의 모습이 보였다.


"책갈피 하나만 주게."


"여기 있습니다, 사장님."


카운터 밑을 뒤적거리던 직원이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푸른색의 책갈피를 청하의 손에 올려놓고, 그걸 받은 청하는 책 쪽으로 걸어갔다.


뭘 하려는 건지 몰라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니 제 손에 올라간 책갈피를 한번 만지작거리고는 책에게 내밀었다.


"지식을 넘기겠느냐, 아니면 책으로 남아있겠느냐."


끄응 하고 침음만 내면서 고민하던 책은 이내, 팔랑거리며 책장을 넘기던 것을 멈추었다.


"지식을 넘기겠느니라. 다만, 그 대상은 내가 정해도 괜찮겠느냐?"


"상관은 없다만, 누구에게 넘길 건지만 알려주게."


"자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누구에게 넘길 건지."


"그렇기는 하다만, 그래도 받을 지 말지는 선택할 권리가 있지 않나."


"끄응…."


머리를 부여잡는 듯한 소리를 내며, 파도처럼 위아래로 출렁거리며 부유하던 책은, 내 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코 앞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가까이 다가와서는, 책장을 촤르륵 펼쳤다.


"그대, 인간이여. 나의 지식을 받겠느냐?"


"안 받습니다."


"그래… 뭣?!"


"뭣?!"


"네?!"


세 명, 아니. 두 명과 책 하나의 경악이 들렸지만, 이건 나도 모르게 나와버린 대답이었다.


목소리가 마치 그… 종교를 권유하는 듯한 느낌이라 무의식적으로 거절해버렸다.


그런 내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는 지, 잠깐이지만 도서관 안에는 침묵만이 가득 채웠다.


위에서 어딘가를 향해 날아다니는 책들이 움직이는 소리만을 제외하고는.


"…무심결에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제 대답은 같습니다. 안 받습니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니 그 지식을 내게 건네리라는 것은 예상은 했지만,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옷을 갈아입히는 주술이라는 게 얼마나 편한 건지는 몸으로 직접 느껴보았지만, 역시 사람이니까 옷을 갈아입는 것은 내 손으로 직접 하고 싶다.


마법도 어디까지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들의 연장선이라는 느낌으로 배우고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지팡이라던가 아니면 청하의 비늘에 담긴 마력을 이용하는 수준에 한해서만.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툭 하고 내게 주술이 건네지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몸 안에 마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지팡이나 청하의 마력을 사용하기에는 직접 갈아입는 게 더 빠르다.


그 과정을 단축시켜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매력적이기는 했지만… 역시,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내 대답을 듣고 잠깐 침묵하던 책은, 푸하하! 하고 쾌활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인간이지! 이게 인간이라는 생물이었어! 언제나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지!"


"…그래서, 이제 책 흉내는 그만두는 것이냐?"


"그럼! 이제는 책을 흉내내지 않아도 되니 그만둘 생각이니라!"


"책 흉내…입니까?"


흉내라는 말에 책을 바라보니, 마치 사람이 걸어다니는 듯한 느낌으로, 청하와 비슷한 높이에서 날아다녔다.


"내가 안 통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멋대로 인간을 재단하려고 한 내 잘못이지 않겠나!"


"이제 어쩔 생각인가."


"목적도 달성했으니 사라져야지."


방금까지 목소리에서 기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으면서도 순식간에 감정이 빠져버린 목소리로 말을 하는 책의 모습에 역시, 청하와 같은 동족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를 볼 때만 하더라도 방글방글 웃는 모습을 보여주던 청하도 다른 곳으로 고개가 돌아가면 표정에서 감정이 빠져버린다.


금향이나 직원, 아니면 아는 종족에게는 그나마 덜한 편이기는 했지만, 가끔은 그런 표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감정이 빠져버린다는 느낌을 책에게서 받고 있었다.


"내 지식…은 필요 없겠지, 작은 동족이여?"


"필요 없느니라! 그런 변태같은 주술…."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려왔지만, 일부러 들려주는 것 같았다.


슬쩍 내 모습을 흘낏거리면서 자기 옷과 내 옷을 번갈아가는 모습이 보였으니.


고민하는 청하는 뒤로 하고, 책은 내 앞으로 날아왔다.


"인간.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어째서 거절했던 건지 알려줄 수 있나?"


"거절한 이유는 별 것 없습니다. 그저…."


"그저?"


"…사람이 직접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직접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마력으로 손에서 물이나 불, 바람을 만드는 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옷을 갈아입는다는 행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손을 쓰지 않고 옷을 갈아입는다는 게 확실히 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편리함에 매몰되다보면 다 귀찮아지기 마련이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는 느낌으로 책장을 펼쳐보인 책은, 또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핫! 맞다. 그게 맞느니라! 인간이 직접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직접 해야지! 요즘 것들은 이런 간단한 것들도 마법이나 주술에 의지하려고 한단 말이지."


에잉, 쯧쯧. 인간만도 못 한 것들이야.


책이 머릿속으로 말을 건네오는 것에 움찔하고 작게 떨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깝구나. 내 개인적으로 아깝기도 하고, 너도 조금은 아깝지 않느냐?"


"아깝습니다만, 그래도 직접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이런 부분에서 고집이 센 게 인간이었지."


오랜만에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기뻤느니라.


그렇게 내게 말하며, 책의 끝부분부터 천천히 젖기 시작했다.


저걸 그대로 냅둬도 괜찮은 건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청하를 바라보니, 내게 손을 내밀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듯이 제지하고 있었다.


"죽는 것도 아니니 냅두거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뿐이니."


"그래서, 작은 동족이여. 언제쯤이면 돌아올 생각인가?"


"돌아갈 생각 없느니라. 거기가 뭐가 재밌다고 돌아가겠나."


"그것도 그렇지! 이제는 인간도 없는 곳이니, 네게는 노인정에 가깝겠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동족도 노인에 가깝겠지만.


청하에게 들리지 않도록, 내게만 목소리를 건네오는 것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렸다.


청하가 어린애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나이를 따지자면….


거기까지 생각을 했을 쯤에, 소매가 잡아당겨졌다.


"너무 무례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느니라."


"…저번에 생각은 안 읽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렇게 대놓고 말을 건네오는 데 못 알아들은 척을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주빈, 네게 건네는 말인데."


눈에 독기를 품고 젖어가는 책을 노려보는 청하의 시선에, 이크 하고 꼬리에 불이 붙은 동물처럼 청하에게서 벗어나서는 내 등 뒤로 숨는 책이 보였다.


"비겁하게 주빈의 뒤에 숨지 말거라!"


"어허, 비겁이라니. 이것도 전략이니라."


…아직은 어린 동족이니, 잘 보살펴주게나.


그렇게 내게 말을 건네오고 나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등 뒤를 돌아보니 다 젖은 책이 땅에 떨어져서는 물처럼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