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무더운 여름 날의 밤이었다. 생활습관이 망가진 탓일까, 요즘 들어 불면증에 시달린다. 잠을 설치는 것은 익숙하지만 닷새째 잠을 잘 자지 못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고 잠기운을 느끼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눈을 뜨고 거의 새벽까지 밤을 지새우는 게 일상이 됐다. 

새벽 4시가 거의 넘어가는 지금도 나는 이리저리 몸을 굴리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자포자기하고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안을 몽롱한 시야로 바라보며 팔을 움직여 휴대전화를 찾았다. 곧 그것으로 추정되는 딱딱한 것을 집고 눈 앞으로 들고 와 전원을 켰다. 밝은 불빛이 갑작스레 안구에 들어오자 눈이 따가워 시야가 더욱 흐릿했다. 스크린에 비춰지는 시각은 오전 4시 35분. 거의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오늘 잠에 드는 것은 글렀다. 내일 어떡하든 다시 노력해보자 라는 생각이 든 나는 휴대전화의 잠금을 푼 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생각을 했다. 이리저리 휴대전화에 저장된 앱을 둘러보고 있던 찰나, 묘한 이름을 순간 확인한 나는 손가락을 멈췄다. 일년전까지 몰두했던 폰 게임의 앱이었다. 삭제를 하지 않았던가? 의문이 들어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내가 게임을 시작했을 무렵이 이 게임이 정식으로 오픈한 시기와 동일했다. 다른 캐릭터 수집게임이 그러하 듯 수려한 일러스트레이션에 이끌려 오픈 초기에 사람이 몰렸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고, 그 당시에는 자주 오랜 시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예쁘고 캐주얼한 애니메이션 화풍의 세계관과는 달리 전략 알피지 형식의 높은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게임이었다. 이러한 신선함에 반한 유저들이 꽤 있었고 게임은 그들을 이끌고 당시에 꽤 잘나갔었다. 그러나 캐릭터들 간의 밸런스 격차, 느린 업데이트와 비 정기적인 소통 그리고 몇몇의 사건과 논란에 휩쓸려 유저수가 점차 빠져나갔다.

나도 분명 그 시기에 게임을 그만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계정은 삭제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에 앱은 삭제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어째서 이 앱이 남아있지? 오류인가? 실은 내가 삭제하지 않았던가?

의문은 점점 부풀어오르다 어느 순간 확 꺼졌다. 그 대신 이 게임이 지금도 서버를 운영하고 있을지. 점차 게임이 망하던 그때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을 지가 더욱 궁금해졌다. 

한번 게임만 켜서 내용물만 확인해볼 생각으로 나는 앱을 터치해서 게임을 켰다. 그리운 로고 몇개와 함께 게임의 타이틀이 지나가고 몽환스러운 음악이 흘렀다. 그러고보니 이 게임 음악도 참 좋았지 라는 생각을 하며 화면을 터치하자 자동으로 로그인이 완료됐다. 계정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게임시작 버튼을 누르자, 업데이트를 하라는 내용의 창이 떴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한숨을 쉬고 화면을 터치했다. 

 

일 초, 이 초가 지나갈 때마다 업데이트바는 쥐꼬리만큼 올라갔다. 일 년 게임을 그만뒀었던 동안 열심히 업데이트라도 했나 싶은 생각과 지금 이걸 기다려 무엇 하나 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시간을 다시 확인하자 새벽 5시가 거의 다 됐다. 나는 휴대전화를 침대 아무 곳에 놓고 손으로 이마를 주물렀다.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지 이마 속이 타는 듯했다. 갑작스레 밀려온 두통과 더불어 짜증까지 나서 입 밖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과의 시작을 한 시간 앞둔 상황이지만, 몸상태가 영 좋지 않다. 이대로 라면 길을 걷다가 잠들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 잠들어버린다면 분명 늦잠을 잘 게 뻔하다. 차라리 내일이 휴일이었다면 이런 걱정하지 않고 이른 아침부터 잠을 잘 수 있을 텐데. 여러 생각이 맞물리는 와중, 의식이 점점 희미해 가는 것을 느꼈다. 아, 지금 자면 안되는데. 마지막으로 그렇게 생각을 한 뒤, 의식이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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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다. 얼음이라도 닿은 것 마냥 등, 팔, 다리의 뒷부분이 차가웠다. 편안하기만 하던 수면을 해치려 하는 감촉을 느낀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무척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지, 시야가 흐려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손으로 짚고 일어나려 하자, 예상치 못한 딱딱하고 까슬까슬한 느낌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내가 있는 곳이 평소 자던 침대와 다른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냉수를 뒤집어쓴 것 마냥 정신이 멀쩡해졌다.

 

처음으로 시야에 잡힌 것은 넓게 탁 트인 밤하늘이었다. 하늘 위 쪽은 짙은 보라색에 조그마한 별들이 여기저기 바늘로 뚫은 것 마냥 놓여있었고, 밑으로 갈 수록 색은 연해져 군청색이 되어갔다. 생전 처음보는 이색적이며 아름다운 밤하늘 풍경에 멍 해진 것도 찰나였다.

먼저 눈을 뜨면 보여야할 익숙한 천장이 보이지 않는 사실에 나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일어나 내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자 딱딱한 벽돌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보였다. 주변을 살피자, 내가 있는 곳이 마치 옛날에 지어진 듯한 전망대 같은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달려나가 정교하게 쌓인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자 밑에는 커다랗고 긴 성과 그 너머로 숲이 보였다. 

 

그런 풍경들을 보자 나는 마치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거 마냥 멍했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지? 나는 분명 내 방 침대에서 잤을 텐데. 순간 휴대전화를 찾아보자 라는 생각이 번뜩 들어 옷 주머니를 뒤지려 밑을 내려다봤다. 분명 반바지에 티셔츠차림으로 자고 있었는데, 눈에 비친 것은 재질이 나빠 보이는 천 옷 같은 것이었다. 점점 영문모를 상황에 식은 땀을 흘리며 좁은 전망대 바닥을 훑듯이 찾아봤지만 입구로 짐작되는 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휴대전화를 침대 어딘가에 두고 잠에 든 생각이 떠올라 다시금 식겁했다.

 

어딘지 짐작이 되지 않는 곳에 갑작스레 잠에 빠진 채 이끌려와 옷도 바뀐 상태에서 버려졌다. 곱씹어봐도 황당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 공포와 걱정만이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갔다. 여러 가능성과 이유를 추론하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금 울타리 밖을 내다봤다. 짐승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어두컴컴한 숲에 둘러 쌓인 성이 비스듬하게 보였는데, 성에 달린 몇몇 창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있는 것일까 하고 기뻤던 것도 잠시였다. 이렇게 웅장한 성이 국내에 있다는 사실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외국일 확률이 높은데, 어떡하든 영어와 몸짓을 동원해 상황을 설명해 영사관에 연락을 넣는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가능성이 생각났다. 그리고 아까 봤던 입구로 추정되는 문이 생각나 그곳으로 재빨리 갔다. 문의 재질은 짙은 색 나무였다. 갈라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약간 흔들거리는 모습이 보여 낡았다 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문에 다가가 조심스레 손으로 그것을 약간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 뒤, 서서히 문이 열렸다.

 

낡은 문 너머는 금이 간 벽 곳곳에 걸린 횃불이 밑을 향해 쭉 뻗은 나선형 계단을 비추었다. 고개를 내밀어 나선의 중심을 통해 밑을 바라보자 내려갈 수록 점점 어두워져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깊이에 내려가기가 무서워졌다. 한 순간 공포가 들이닥치니 더더욱 무서움은 커져만 갔다. 과연 저 성에는 정말 사람이 살고 있는지. 이런 외딴 성에 나를 버린 것이 정말 사람이 한 짓일지. 아무리 생각해도 잠을 자던 사람을 한국에서 어딘지 모를 성으로 납치할 방법이나 수단이 떠오르지 않는다. 설령 방법이 있다하더라도 며칠이 아닌 수면을 취한 단 몇시간 동안 모든 것을 해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꿈일까? 두려움이 앞선 나머지, 방금 전까지 샘솟던 행동력은 사라져 차마 발을 앞으로 내딛을 수 없었다. 

 

내가 갈팡질팡하며 망설이고 있던 무렵, 갑작스레 나선 계단의 밑부분에서 또각, 또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고요한 때라, 그런지 그 소리는 더욱 선명했고, 울림이 컸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어, 밑에서 신발을 신은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소리의 주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짧아지는 게 뜀박질이라도 하는 듯했다. 누군가가 숨을 거세게 내쉬고 내뱉은 소리가 들려온 것만 같아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그 다가오는 무언가를 두려워해 어딘가로 숨기로 했다. 심장이 크고 빠르게 맥박을 뛰기 시작했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거의 쫓기는 듯이 문 옆에 마련된 좁은 구석에 숨기로 했다. 숨었다고 하기에는 묘하게 트인 공간이나, 불평하기에는 숨을 공간이 이곳 말고는 없었다.

 

나는 그곳의 가장자리 쪽에 몸을 숨긴 뒤, 더 커진 발소리를 듣지 않으려 애쓰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밤바람이 더욱 차갑게 불었지만, 나는 전력질주라도 한 마냥 땀을 쏟아냈다. 누구지? 이 성에 사는 사람인가? 무척이나 다급한 발소리가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아서 나는 더욱 불안해졌다.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장본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 숨은 의미가 없다. 암울한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숨은 점점 가빠져 입을 틀어막았음에도 그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고,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공포에 질린다는 감각을 처음 느꼈다. 

 

공포에 떨던 시간은 쾅, 하고 거세게 문을 여는 소리에 깨졌다. 상당히 세게 내려쳐서 나무 문이 부서졌는지 저 옆으로 그 파편이 튀는 모습이 엿보였다.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허억... 허억...”

상당히 빠르게 뛰어왔는지 거세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더욱 웅크렸다. 눈을 감은 채로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며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곱씹었다. 내 감각으로는 수십초가 지나간 게 분명한데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방금 박차고 들어온 누군가는 아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지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끝내 줬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어, 제발 움직이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내 기도가 통했는지, 두 번 정도 발소리가 들리더니 다시금 멈췄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상황이 궁금해 눈을 떴다. 

 

내가 바라본 곳에는 어느 한 여인이 서있었다. 날카롭고 이색적인 용모를 지니고 있었고, 나풀거리는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가 산발이 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그녀의 동공은 한계까지 커져 있었으며, 거세게 숨을 몰아쉬는지 몸 전체가 빠르게 들썩거렸다.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는데, 그 시선에 담긴 뜻을 알기 어려웠다. 잠시간 서로 마주본 뒤, 그녀가 덜덜 떨리는 입을 열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온 그 말은 저 머나먼 외국의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 몇 번 중얼거린 그녀는 이윽고 크게 뜬 눈동자에서 눈물을 몇 방울 쏟아내더니 한걸음 앞을 향해 걸은 뒤, 갑작스레 나에게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나는 깜작 놀라 움직이지 못했고 그녀는 그런 나에게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어 한번 바라본 후, 나를 꽉 껴안았다. 갑작스런 그녀의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저 혼란스러워 했다. 누군데 갑자기 껴안는거지? 아무리 봐도 아는 사람은 아닌데?

 

"으…"

 

순간 나를 껴안는 그녀의 힘이 강해져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었다. 그녀는 내 목과 허리에 팔을 하나씩 갖다 대고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 마냥 힘을 꽉 주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그녀는 나를 거세게 껴안았다. 

 

"흑…흑…"

 

그러던 와중 울음소리가 들려 밑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울면서 몸을 들썩거릴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내 목과 허리에 두른 그녀의 두 팔에 담긴 힘은 약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강해졌다. 갑작스레 그녀가 내게 체중을 싣자 얼떨결에 나는 넘어져버렸다. 그녀는 이제는 가슴팍에서 얼굴을 때고 엉엉 소리를 내며 크게 흐느꼈다. 살면서 저렇게 서글프게 우는 사람을 본 적은 장례식장 말고 없었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나는 멍하니 그녀가 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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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간이 흘러간 뒤, 그녀는 더 이상 짜낼 눈물이 없는지 딸국질을 하며 부은 눈가를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간신히 눈물을 그친 그녀를 바라본 나는 드디어 말을 꺼내기로 했다.
 
"저기… 괜찮으세요?"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자연스레 나온 그 말을 그녀가 듣고는 황급히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그 뒤, 그녀는 떨리고, 빠른 어조로 무언가를 긴박하게 말했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어딘가 외국 사람이라고 추론한 나는 그녀에게 영어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표정을 찡그리며 다시금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크게 소리를 지르듯이 되물었다.

 

내가 말하려 입을 열려고 했을 때,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 팔을 붙잡던 양손을 때며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난 그녀를 내가 올려다보며 가만히 있던 그 순간, 갑작스레 온몸이 꽉 조였다. 다리가 서로 맞붙을 정도로 갑작스레 느낀 조임에 나는 놀라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힘겹게 호흡을 하며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갑자기 머리를 황급히 숙이고는 큰 소리로 몇 마디를 내뱉었다. 고개를 내려 몸을 확인해봤지만 내 몸을 결박하고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내 몸이 내가 일부로 그러는 것 마냥 서로 달라붙어 꼼작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묻기 위해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숙인 고개를 들고는 재빨리 뛰어 전망대 출구를 통해 다시금 계단으로 내려가는 듯 했다.

갑작스런 그 행동에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이 죄어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절망감과 차가운 밤 바람을 느끼며 나는 가만히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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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주인님이 갑작스레 사라진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꽃이 세번 피고 질 동안 이 외딴 성에 갑작스레 남겨진 우리는 흩어지고 또 사라졌다. 왜? 라는 끝없는 궁금증과 끝없는 어두운 구멍속에 던져진 듯한 절망감이 느껴지는 것은 처음 2년간이었다. 그래서는 안되지만 찾아올 것만 같은 익숙함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고 이유모를 짜증과 허탈함이 갑작스레 솟아나기 시작했다. 주인님을 잊어버리려 하는 걸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단지,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주인밈의 행방과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는 자신에게 그런 감정이 들 뿐이다. 

그리움이 커질 수록 좋지 않은 생각들도 덩달아 커져 갔고, 그런 망상을 떨처 내려 애쓰는 것이 지금 내 일상이다.
 
노란 횃불 불빛이 어지러이 비추는 성의 복도를 나는 걷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자 이미 해는 져 어두운 밤의 밑부분이 깔리고 있었다. 또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채로 하루가 가버리는 구나. 나는 매일 느끼는 허탈함을 다시금 느꼈다. 주인님이 사라지고 난 뒤, 시간은 보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자 앞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사뿐사뿐 걷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앞을 바라봤다.
 
"실례합니다 앨리스님. 방에 찾아가보았지만 계시지 않길래…"
 
흰 머리를 어깨까지 내리고 갈색 피부를 약간 드러낸 메이드 복을 입은 소녀가 그곳에 서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차가운 눈매를 가진 눈을 감더니 고개를 나에게 숙였다. 그러고보니 오늘 보고를 받는 걸 잊고 있었네.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눈앞의 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좋아요. 오늘도 별다를 건 없겠지만, 일단 듣기는 해야겠죠."
 
내 말을 들은 소녀는 그럼, 하고 한번 더 머리를 숙이더니 정돈된 어조로 말을 골라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침입자는 한 명도 오지 않았습니다. 결계는 아직도 제대로 작동하나, 술식의 점검이 필요하여 도로시님이 다시금 보강하시러 방금 나가셨습니다."

슬슬 그런 시기가 됐나, 이상하게 시간이 느리면서도 참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사람은 무사히 조달했나요? 수가 변한 건 있나요?"
 
"아뇨. 항상 마찬가지로 삼백명 정도 조달을 했습니다. 마리아 언니께서 뒷처리도 들키지 않게끔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계의 보수는 며칠이 걸린다고 말 하지 않던가요?"
 
"아뇨…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런 말씀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이는 소녀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사라진 뒤, 절망에 휩싸인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닌 것을 이럴 때 다시금 느낀다. 어쩐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까 전에 본 휘청거리며 느린 발걸음으로 성을 나가는, 마치 망자가 걷는 듯한 도로시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우득, 나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약한 척 힘든 척하며 어리광부리려 하는 그 모습이 항상 거슬린다. 그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파수꾼의 동태는 어때요? 뭔가 수상쩍은 움직임이라도 없나요?"

짜증을 떨처 내려 내가 묻자 소녀는 준비해온 답변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관 속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가 관리하는 마수들도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위험한 것은 아직까지 잠에 들어있나 보구나. 그런 생각을 한 나는 설마 하는 심경으로 다른 주제를 물었다.
 
"안나… 안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설마 오늘도 마스터의 방에 있는 건 아니겠죠?"
 
"그…그게…"
 
내가 다급한 어조로 묻자 소녀는 어깨를 움츠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 그늘진 표정을 보자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깨달아 머리에 두통이 찾아왔다. 어제 분명히 그렇게 단단히 일러두었는데도 또 다시 멋대로 방에 들어가? 같잖은 변명거리를 대며 추잡한 본심을 가지고 기어오르려 하는구나. 화가 나기 시작했지만, 나는 참으려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당장 가죠."
 
나는 분노에 휩쓸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으며 소녀의 옷깃을 잡아채고 끌었다. 소녀는 주눅이 든 채로 나에게 잡혀 휘청거린 뒤, 자세를 바로잡아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손톱을 깨물며 소녀에게 소리치듯이 말했다.

 

"다음부터 그럴 기색이 엿보이면 분명히 말하세요. 그 방은 저 말고는 출입불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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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빠르게 걸어 도착한 곳은 커다란 문 두 짝이 달린 방 문 앞이었다. 그 고급스러운 문을 보자, 그리움과 외로움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문이 망가지지 않게끔 조심스레 밀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동안 안에 있을 가증스러운 여자의 얼굴을 생각하자,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제처럼 참을 필요는 없다. 이르기만 해서 안된다면, 힘의 우위를 새겨 넣어주면 된다.

 

문이 열리자 어두컴컴한 방의 내부를 복도의 불빛이 점차 침입하기 시작했다. 커튼도 닫았는지, 방 안 쪽은 어둠으로 휩싸여 있었다. 그런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이 방에 발을 들이자, 그리움에 가슴이 울컥해 입술을 씹어 그것을 견뎠다. 사랑스러운 방 가구 하나하나를 빠르게 훑던 와중 방 가장자리에 놓인 침대에서 이물질을 발견했다. 안나였다. 그림자가 진 퀭한 눈초리로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는 속옷만 입고 있었다. 그녀는 이 방 주인의 옷가지를 몸에 두르거나 꼭 껴안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본 나는 정신이 아른거리고, 숨이 가빠졌다. 

내가 성큼성큼 안나를 향해 다가가도 안나는 멍하니 앉아 이쪽을 바라볼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안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평소에는 한 갈래로 묶고 다니던 머리를 풀어 밑으로 내렸는데, 몰골이 초췌하여 꼭 귀신 형상 마냥 공포스러웠다. 그 모습이 자신이 힘들다고 주장하는 것 같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옷가지를 더욱 꽉 껴안았다. 나는 입술을 씹었다.
 
“일어나세요.”

최대한 분노를 죽이고 말해도, 안나는 나를 한번 올려다보았을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에요. 그만 일어나서 다시 방으로 돌아가세요.”
선고를 내리듯 말하자 안나의 안색이 변했다. 멍한 눈초리에 반항심과 분노가 섞였고,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나를 한 대 때릴 기색이었다.

“...왜?”

처음으로 그녀가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는지, 목소리가 잠겨 원래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갈라져 듣기 거북했다. 나는 안나의 말을 듣고 눈썹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내가 다시금 되묻자 안나는 입을 한 번 우물거린 뒤, 다시 말을 꺼냈다.

 
“왜? 왜 여기는 너만 들어올 수 있는 건데? 왜 나는 여기에 들어오면 안 되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쏟아내는 말을 듣고도 나는 여유로웠다. 언젠가 한 번 터져 나왔을 반항심이 이런 식으로 표출된다면 환영하는 바이다. 뒤에서 계략을 꾸미거나, 암살을 노리지 않는 것만 해도 나았다. 나는 그녀의 초췌한 몰골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이 곳의 관리자이기 때문이죠. 이 성에서 이 곳을 관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제가 하는 겁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말하자, 안나는 내 말을 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짓말. 너는 그냥 독차지하고 싶은 것 뿐이잖아. 그냥 남이 이 곳에 들어와 있는 꼴을 보기 싫은 거잖아?”

추궁하듯이 내뱉는 그 말을 듣고 나는 태연하게 웃었다. 설마 안나 본인은 저 말로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봤자 힘의 관계는 여전하고 형색은 그대로인데.
 
“뭐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 말도 어느정도는 맞는 것 같아요. 당신이 이 방을 어지럽힌 꼴을 보고 있자니 견디기가 힘들거든요. 이제 그만 일어나주세요. 계속 그러시면 강제로 방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어요.”

내 말이 끝난 뒤에도 안나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속에 분노가 더 쌓인 듯, 나를 죽일듯이 노려봤다.
 
“그 관리자 행세도 웃기는 일이야. 삼 년 전까지 만해도 너도 나랑 같았잖아. 아니, 내가 더 쓸모 있었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일을 뺏기지는 않았으니깐.”

마치 내 역린을 일부로 건드리려는 듯한 말에 나는 마음을 다잡고 차분함을 연기했다.
도대체 오늘 왜 이렇게 안나가 공격적인지 모르겠다. 예전에 한번 얻어맞았을 때 분명 고분고분해진 줄 알았는데. 서서히 그녀의 정신도 미쳐가는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당신도 웃기네요. 그냥 옆을 졸졸 따라다니기만 한 걸 경호 한 걸로 착각하다니. 당신도 잘 알잖아요? 사실 당신이 하는 일은..."

"닥쳐!"
안나는 크게 소리친 후에 침대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나가 일어나면서 그녀가 껴안고 있던 옷가지들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나는 그곳으로 눈길이 갔다.
안나는 크게 소리친 후에 침대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키가 커서 몸짓도 덩달아 역동적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껴안고 있던 옷가지들이 바닥에 전부 떨어졌다. 나는 옷들이 떨어진 바닥으로 눈길이 갔다. 방금까지 안나가 했던 도발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그의 옷들이 바닥에 떨어져 혹여 먼지가 묻었을까 싶어 안나의 무심함에 더욱 화가났다.

나는 씩씩대는 안나를 지나쳐 떨어진 옷가지들을 주웠다.

“봤죠? 이 곳에서 우리 둘이 만난 이상 벌어지는 건 싸움 밖엔 없어요. 난 이곳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텐데요.”

쌀쌀하게 말하자 안나는 옷을 줍는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큰 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안 왔어도...”

끝내 약해지는 목소리를 들은 나는 주운 옷을 팔에 걸고 일어나서 안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제가 안 왔으면 여기가 더 어질러지기 밖에 더 했겠어요? 얼른 나가요. 나도 나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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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 말을 끝으로 안나는 씩씩거리면서도 더 이상 다툴 의지가 없는지 고분고분하게 밖으로 나갔다. 나도 옷가지를 다 주워서 가지런하게 침대 위에 올려 둔 뒤, 방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배짱있게 나왔더라면 한번 더 교육시켜주는건데. 만족스럽게 일이 해결됐음에도, 어딘가 찜찜하여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나는 내가 방 밖으로 빠져나와 문고리를 잠근 것을 확인하자마자 복도를 따라 그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내가 그런 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머리 한 곳이 찡하고 울렸고, 성 외진 곳에 있는 전망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다시 머리 한 켠이 시원해지더니, 그 전망대 옥상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곳에 있는 한 남성이 보였다. 이 일련의 과정이 한 순간에 지나간 뒤, 나는 숨이 멎는 듯 했다. 그곳에 있던 남성은 분명 주인님이 틀림없었다.

‘마법이 발동됐다?’
예전에 주인님이 모습을 감추고 난 뒤, 도로시가 궁리하여 성 전체를 감싸듯이 설치한 마법. 특정 사람이 마법 감지 범위 내에 들어올 경우, 그 마법을 만든 장본인이나, 정해진 사람에게 주의를 보내고, 그 사람이 있는 위치까지 보내주는 마법이다. 주인님이 돌아오실 경우 언제라도 그 사실을 알고 맞이하러 갈 수 있게끔 설치한 것인데, 반응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갑작스레 다가온 상황에 순간 당황하고 제자리에 가만이 서있자, 내 옆에 서 있던 카린이 괜찮으십니까? 하고 물어왔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인가?’
머리에 열이 화끈 올라오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호흡이 빨라졌다. 방금 머릿속에 연상된 그 모습은 영락없는 주인님의 모습이었다. 다시 한번 떠올리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짜르르한 소름이 느껴졌다. 어찌됐든 무조건 가서 확인을 해봐야 한다.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카린.”

“네?”
갑작스레 변한 내 표정을 엿본 카린은 근심어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계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소 뜬금없는 내 명령에도 카린은 아무런 군소리 없이 승낙했다. 나는 그런 카린의 대답을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복도를 걸었고 카린의 모습이 뒤에서 사라질 때 쯤에는 성 복도를 필사적으로 달려나갔다.

‘만약 마법이 잘못 발동한 거면?’

‘도로시가 파둔 함정일 수도 있는데.’

여러 불안들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그의 모습을 다시 떠올린 후에는, 나는 그저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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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전망대 옥상으로 향하는 낡은 문을 열었다. 다소 힘을 세게 줬는지 파편이 튀어나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개의치 않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밤하늘이 펼쳐진 전망대에 도착한 내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허탈함이 느껴진 나는 그대로 주저 앉을 뻔 했으나, 이윽고 단서를 찾았다. 냄새, 냄새가 났다. 희미하게 밤 바람을 따라 퍼지는 그 냄새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무척이나 그리워했던 냄새였다. 뒤. 뒤에서 난다. 재빠르게 방향을 찾은 나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디어 찾아냈다. 주인님은 전망대 입구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숨어계셨다.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전체적인 모습만으로 나는 알 수 있었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돌아와주셨다. 그런 말 만이 머리 속에서 뒤엉키며 돌아다녔다.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터져 목끝까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답답하면서도 가슴 중앙을 옥죄이는 느낌에 그만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발끝에서부터 희열과 슬픔이 뒤섞여 머리를 향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낀 것 마냥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전신의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헉, 헉 미친듯이 숨을 내뱉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시야가 다시금 또렷해졌을 때, 나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이마가 불타는 듯이 뜨거웠고, 흐느낌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서야. 이제서야. 그런 생각이 계속 맴돌았고, 그럴 때 마다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따뜻한 감촉이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팔을 그의 허리와 목에 휘감았다. 서로의 몸이 꽉 밀착하게끔 나는 힘을 줬다. 그러자 희열감이 몸 안에서 솟구쳐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설 만큼 짜릿한 느낌이 척추를 통해 전해졌고, 몸이 마치 불에 달군 쇠마냥 엄청나게 뜨거워졌다. 그럼에도 가슴 한 구석이 어딘가 애절한 느낌이 들어 나는 더욱 힘을 줘 그의 몸을 껴안았다. 말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뜨거운 몸에 모든 걸 맡기고 나는 그저 눈물을 흘렸다.

뜨거운 포옹이 영겁과도 느껴질 와중 드디어 흐느낌이 멎어들기 시작했고, 열락으로 가득찼던 몸과 머리의 일부분이 식혀졌다. 나는 눈가를 가려 시야를 막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고 그의 품에서 조금 떨어져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목구비, 인상, 머리카락 모든 게 빠짐없이 그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었다. 절대 가짜가 아니다. 논리적인 근거가 아니라, 나는 인상만으로 그렇게 단정지었다. 주인님의 얼굴을 무아지경으로 바라보고 있자, 주인님은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무언가를 말했다.

나는 한 순간 당황했다. 주인님이 내뱉은 언어는 내가 전혀 모르는 말이었다. 나름대로 많은 지역을 돌아본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의 뜻은 커녕 어느 지역의 말인지 조차 짐작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순간 주인님이 나에게 장난을 치나 싶었으나,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다시 돌아와주셨군요... 지금까지 어디에 계셨던 거에요...”
흐느낌이 반 섞인 목소리로 묻자 주인님은 내 말을 듣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쯤되니 나도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 주인님이 다음으로 꺼낼 말을 기다렸다.
주인님은 망설이더니,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언어로 말을 했다. 그러나, 다르다라는 느낌만 알 수 있을 뿐이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아무래도 무언가 주인님에게 이상이 생긴 것 같다. 나는 재빨리 그렇게 느꼈다. 재회의 여운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오싹한 느낌이 들어 큰 목소리로 물었다.

“제, 제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나요!?”

주인님은 내 고함을 듣더니 몸을 움찔거리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큰일이다. 정말 주인님에게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짧은 찰나 머리를 굴리던 와중 무언가가 떠올랐다.

단지 말이 통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아티팩트를 쓰면 분명...
빠르게 상황 판단을 내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님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도망치지 않을까?’
주인님에게 무언가 이상이 있음은 틀림없다.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한 낌새도 그렇고, 언어도 그렇다. 마치 어딘가 외딴 곳에 있다가 갑자기 이 곳에 온 것만 같았다.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 도망친다면... 그런 생각이 든 후에는, 마법으로 묶어두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주인님에게 내 마법 따위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주인님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그런 짓을 하면...

고개를 내려 주인님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런 고민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일단 시도는 해보자 라는 생각에 속박 마법을 걸자, 내 예상을 빗나갔다. 너무 시원스레 걸려 주인님이 꼼짝도 못한 채 바닥에 엎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당황스러워 나는 머리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은 사죄를 하는 나를 힙겹게 쳐다봤다. 그런 주인님을 보고 나는 재빨리 가져와야겠다 싶어 서둘러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전망대를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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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그렇게 빨리 달려본 적은 없다고 느낄 정도로 필사적으로 뛰어 카린과 헤어진 복도까지 도착했다. 카린은 힘겹게 뛰어오는 나를 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카린에게 서둘러 그 아티팩트를 가져오도록 시켰고, 카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어가려 했으나, 내가 서두르라고 고함을 치자 그제서야 뛰어가기 시작했다.

“여, 여기 가져왔습니다.”
올 때도 마찬가지로 전속력으로 뛰어온 카린은 땀하나 흘리지 않고 있었다. 카린은 손에 소중히 쥔 반지를 나에게 보여주더니 그대로 내밀었다. 세밀하게 세공된 푸른 색 보석이 박혀있는 반지였다. 나는 그걸 받아들고는 카린에게 일렀다.

“제가 다시 뛰기 시작한 다음 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쯤에 천천히 걸어서 전망대 앞으로 오세요.”
카린은 가볍게 승낙했고, 그녀가 고개를 숙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다시금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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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로 다시 도착하자 몸부림치기를 포기 한 것인지 축늘어진 주인님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죄악감에 휩쓸려 재빨리 마법을 해제했다. 그러자, 주인님은 손발을 이리저리 휘저어보더니 손으로 땅을 짚어 일어나려하다 다시금 쓰러졌다. 아무래도 불편한 자세로 계속 있다보니 손발이 저린 듯했다.

“제가 일으켜드릴게요.”

주인님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살며시 힘을 주어 당겼다.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주인님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내 힘에 이끌려 앉는 자세가 되었다. 나는 묘한 만족감과 이상한 쾌감이 느껴져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려 했다. 어딘가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또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 말하는 주인님을 본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주인님의 손을 붙잡았다. 살며시 부드러운 손을 붙잡자 주인님이 순간 힘을 주어 손을 다시 빼려했다. 나도모르게 그 손을 붙잡은 내 손에 힘을 꽉 주어 손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약간 아팠는지, 주인님이 낮게 소리를 내자, 나는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반지를 그의 손가락에 끼웠다.

손을 풀어주자, 그는 반지를 빼려했다.

“빼면 안 돼요!”

내가 소리치자 주인님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어, 어. 어떻게…"

당황한 듯 내뱉은 그 말에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드디어 말이 통하게 된 것이 기뻐 다시금 재회의 감상을 전했다.

“돌아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어디서 무얼 했는지, 왜 떠났는지, 그런 건 묻지 않을테니...제발 다시는 저를 버리고 떠나지 말아주세요...”

다시금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이를 악 물고 작게 내뱉은 내 말을 들은 주인님은 내 얼굴을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저기, 죄송하지만 누구세요?"

“네?”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그만 당황해 다시 되묻고 말았다. 누구라니. 설마 삼년이라는 시간동안 내 존재를 잊어버린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온 몸에서 힘이 다 빠지는 듯 했다. 근데, 여기가 어디냐니. 설마 이 곳의 존재도 잊어버린 걸까.

“저에요. 앨리스. 기억안나세요? 삼년밖에 지나지 않았잖아요...”
내가 다시금 울음을 터뜨릴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자 그는 진지하게 다시 말했다.

“죄송한데요. 진짜 모르겠어요. 누군지도 모를 뿐더러 여기가 어딘지조차 모르겠어요. 진짜 지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모자라 이 곳에 어딘지 조차 잊어버렸다고? 생각보다 심각한 그의 상태에 나는 상황을 확인하려 물었다.

“삼 년전에 저를 떠나가신 것은 기억하세요?”

“삼 년전? 저, 오늘 처음 보는 건데...”

“네...?”
대화가 이어질 수록 상황은 점점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아무래도 주인님의 반응을 보아, 잊어버린 것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정말로 이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모르는 듯했다.

“그러면 삼 년전 일은 기억나세요?"

"네? 삼년전이요?"

그는 잠시 생각이 잠긴 듯 하다가 말을 꺼냈다.

"아뇨 별 특별한 건 기억 안나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질문을 쏟아냈다.

"저기… 여기가 도대체 어디죠?? 눈 떠보니 여기 있었는데… 혹시 한국이라는 나라 아세요?"

한국? 처음 들어 보는 지명에 머리가 멍해졌다. 단어의 뉘앙스도 그렇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국가명이었다. 삼년 전 이 곳을 떠나고 그 한국이란 곳에 정착을 한 것일까? 어딘가 작은 지명 이름이면 내가 모를 수도 있겠다싶어 물었다.

"아뇨… 짐작이 가는 바는 없지만, 혹시 대륙명이라도 아시나요?"

"대륙명이요? …음, 동아시아쪽에 있는 건데… 그 일본 옆에…"

동아시아? 일본?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고유 명사가 나와 내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찼다.

'이건… 모르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기억을…'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상태에 대해 추론했다. 기억의 대부분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이상하게 변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다, 주인님 답지 않게 내 마법에 손쉽게 걸려들었다. 어딘가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다고 하기에는 기억을 잃은 부분이 걸렸다.

'기억을 잃게 하는 것보단 조작한 쪽에 가까운데…'
설령 기억을 조작했다 하더라도 동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일부로 기억을 바꿔가면서까지 존재조차 불분명한 지역에서 산 기억과 낯선 언어를 머릿속에 집어넣기에는 왜 그렇게 해야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님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요상한 방법보다는 마법이 통한 시점에서 더 쉬운 길이 있었을텐데. 애시당초에 주인님이 이런 마법에 걸려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했다.

'도로시에게 물어봐야하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절로 도로시와 주인님이 재회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조그만 꼬맹이는 분명 세상이 끝난 것 처럼 눈물을 쏟아낼 거고 주인님의 품으로 뛰어들 것이다. 그러고는 그때마냥 가련한 척 내숭을 떨며 주인님의 곁에서 한시라도 떨어지려 하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런 모습이 그려지자 저절로 도로시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애초에 주인님을 지금 다른 누군가와 꼭 만나게 해야하나?'
번뜩 머리를 스쳐지나간 생각에 나는 고개를 들어 주인님을 올려다봤다. 주인님은 내가 끼워 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설마,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계셨다.

'지금 이 성에서 주인님이 돌아온 사실을 아는 것은 나 뿐이다. 도로시도 안나도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방해가 되는 년들은 전부 이 년전에 주인님을 찾는 다는 명목으로 이 성을 버리고 떠났다. 지금 주인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나 이외에는 없다. 그래, 나 말고는…

예전에 꿈을 꿨던 적이 있다. 주인님이 떠나시기 한 참 전, 같이 여행을 다닐 적에 자주 그렸던 풍경이다. 어딘가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에 아늑한 집을 짓고, 그곳에서 주인님과 단 둘이서 오붓하게 사는 꿈. 그나마 다른 사람들이 무리에 들어오기 전이라 여유가 있어서 그런 망상을 하루에 몇 번이고 했다. 지금이라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머리가 열로 화끈거렸다. 가장 경계해야 할 두 사람은 모른다. 그나마 전망대 밑에서 대기하고 있는 카린이 가장 이 곳에 가까웠다. 카린은 괜찮았다. 여기서 그를 데리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과연 그가 내 말을 믿고 따라와줄까?
한번 유혹에 빠지니 그 다음부터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들이 계속 생각났다. 주인님을 속여볼까? 아니면 아까 전처럼 마법으로…

내가 가만히 고민에 빠져 있던 순간.

"저기… 여기 국가 이름이 뭔가요...?"
혼자 무언가 결론을 찾은 굳은 표정으로 주인님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말을 흘러보내고는 침을 한 번 삼켰다. 주인님은 지금 무척이나 당황해하고 계신다. 게다가 겁에 질린 듯한 모습도 보여줬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그 모습. 마치 잔뜩 경계를 하면서도 기댈 곳을 찾는 듯한 그 모습에 나는 확신했다. 내가 그 유일한 안식처가 될 수 있다고. 이 위험한 곳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그를 지킬 수 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인 그를 물들일 수 있겠다고.

꿀걱, 마치 보물을 앞둔 것 마냥 몸을 다 매우는 욕망이 느껴져 침을 삼켰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고, 또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였다. 여기서 내가 주인님을 데리고 도망친다고 해도,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이틀 안에 눈치챌 것이 뻔하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또 주저 앉아 뒤에서 울며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어느 한 인물의 얼굴이 떠 오르자 자연스레 옛날로 돌아갈까 겁이 난 나는 결심을 굳혔다. 다시금 주인님을 바라보자, 주인님은 꺼림칙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원래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같이 가요. 그렇게 생각한 나는 속에서 억눌린 슬픔을 꺼내어 연기를 했다.

"…정말 다 잊어버린 거에요?…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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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갤 다시 살아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