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헤매는 흡혈귀 사냥꾼이 풍작신과 만나기까지

 

 

0.

 

강원도 영동의 산간지역.

그 깊은 골에서도 더욱이 깊은 골에 일찍이 신성한 산이 하나 있었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그 땅은 쉽게 입구를 드러내지 않는다.

매 달 보름 노을 질 때에야 겨우 장승 둘이 나란히 꽂힌 좁은 흙길이 나타난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어느 무당이 사는 기와집이 나온다.

 

그 신통력이 어찌나 용한지 사회에서 꽤 이름 날리는 사람들도 이따금 보름날을 기다리며 산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따금 바로된 길을 따르지 않고 산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무당의 소문을 듣고서 멋대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그저 길을 잃고 헤매다 우연히 산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겪는 공통된 말로는 영원한 속박이다.

허가받지 않고 성역을 범한 자는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산에 갇히게 된다.

 

무당을 제외하고 성역에 머무르는 것이 허가된 존재는 오직 한 사람.

숲의 왕, 성역의 사제, 혹은 여신의 배우자.

 

성산에서 지내는 그에게는 모든 것이 풍요롭다.

손을 뻗는 곳에 과실이 널린 정도를 넘어서, 나무가 허리를 굽혀 그 열매를 바친다.

 

하지만 외지인에게 그런 자비는 주어지지 않는다.

짐승뿐이 아니라 나무조차 그를 피하게 된다.

 

외지인에게는 오직 한 가지 기회만이 존재한다.

 

본래 있던 숲의 사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물론 숲은 남편을 보호한다.

그러나 딱 하나의 예외가 있다.

 

나무가 우거진 산 중앙, 거대한 신목이 하나 자라있다.

거기서 뻗어나온 황금빛 가지를 꺾는다면 그에게는 사제를 죽일 자격이 부여된다.

 

그 순간부터 숲은 사제를 지키기를 관둔다.

 

만약 사제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이제 그는 사제직을 계승하게 된다.

풍요의 여신이 새로운 배우자를 맞는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이 숲을 헤매다 사제를 마주한다면 의외의 모습에 놀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안락한 삶을 즐기는 자의 외견이 아니다.

 

그는 서슬퍼런 단검을 들고 사방을 경계한다.

아마도 수염은 덥수룩하고 안색은 창백하며 사지는 말라있다.

 

그 모습은 죽음에 찌든 광인의 것에 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견에 놀랄 틈도 없이 그는 당신을 죽이려들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언젠가 당신이 그를 죽일 테니까.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일찍이 사람들은 신의 힘이 깃든 사제가 늙으면 자연 역시 늙어간다고 믿었다.

 

그리고 메마른 자연은 사제의 노화와 함께 파멸을 맞고야 마는 것이다.

 

하여 사람들은 사제가 늙기 전에 젊은 피에게 그 직책을 넘겨줄 필요가 있었다.

 

만약 사제가 도전자를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아직 정력적이어 계승이 불필요함을 증명한 것이 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사제는 스스로의 노화를 증명하는 것이다.

 

숲을 그 몸에 받아들인 왕은 오직 죽음으로써 파면된다.

 

이 이야기는 어쩌다 숲의 왕이 되고 말았던 흡혈귀 사냥꾼의 이야기다.

 

다만 불필요한 내용은 조금 넘기고 상황이 뒤틀리기 시작하는 부분에서 출발하도록 하자.

 

이것은 뭐랄까… 그래. 사냥꾼과 풍작신, 장난꾸러기 흡혈귀, 그리고 여우가 엮인 익살극이다.

 

 

1.

 

호흡을 잠시 멈추고 손끝에 의식을 집중한다.

 

흔들림 없는 자세로 저 너머를 바라본다.

 

“……후우.”

 

방아쇠를 당긴다.

석궁의 시위가 퉁겨나며 볼트를 쏘아낸다.

 

그 화살은 소리 없이 날아가 사슴의 관자놀이를 꿰뚫는다.

 

한 번의 단말마 이후 짐승은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사냥감의 무력화를 확인하고서 사내는 숨어있던 풀숲에서 나왔다.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외견.

하지만 듬성듬성한 수염 탓에 조금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살짝 지저분한 옷 아래에서는 나름대로의 근육이 붙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분명 노련한 사냥꾼이라고 평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틀리지 않은 평가이리라.

그래. 그는 사냥꾼이다.

 

하지만 올바른 표현을 위하여는 오로지 한 가지 수식어가 더 필요한데,

그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미심쩍게 여길 만한 것이다.

 

허나 미리 말해두건대 이 서술에는 거짓이 없음을 밝혀둔다.

서술 트릭을 포함하여 일체의 독자를 속이려는 의도가 부재함을 여기서 선언해두는 바이다.

 

이리 변명을 해두고서야 겨우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겠는데,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 사내가 흡혈귀 사냥꾼이라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믿기지 않을 수 있겠으나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 세상에는 흡혈귀가 존재하고 그는 그런 흡혈귀를 사냥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흡혈귀만이 아니라 흡혈귀로 착각되는 다른 존재들 역시 그의 사냥감이었으나

결과론적으로 크게 다른 바는 없으리라고 생각하니 넘기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흡혈귀 사냥꾼이 산에서 사슴이나 사냥하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예전 일을 조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어느 때와 같이 그는 흡혈귀를 퇴치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협회를 거치지 않고 개인에게 직접 날아온 의뢰였다.

 

물론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공직에 있는 사람들도 지인에게 편의를 봐주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사적인 일이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은 게 당연했다.

 

혹은 조금 더 실력이 있는 사람을 직접 지명하여 맡기고 싶었다거나.

 

아무튼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니 이유도 다양했고

이 시점에서 그는 이 상황을 그다지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흡혈귀 중에서도 가장 만만하다는 중기(中期)의 것을 많은 돈을 쥐여가며 개인 의뢰로 맡겼던 점은 의아했지만

비밀 유지 조항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럭저럭 납득했다.

 

땅값 등의 비교적 사소한 이유로 어떻게든 사건을 조용히 덮으려는 사람을 그는 많이 봐왔다.

 

따라서 그 사내는 의뢰를 받았고, 준비를 하여 사냥을 떠났다.

 

그렇다면 눈치가 빠른 사람은 추측해볼 수 있겠다.

어쩌면 그 의뢰는 함정이었던 걸까?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 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의뢰를 받은 지역으로 가기도 전에 산에 발이 묶이고 말았던 것이다.

 

사냥꾼이라는 자가 길이라도 잃었냐며 그를 너무 비난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약간의 트러블이 생겨서 예정보다 시간을 잡아먹은 그는 산길을 가로질러 일정을 맞추기로 마음먹었다.

 

하필이면 그 산이 신령이 깃든 성스러운 산이어서

불경한 침입자를 가둬버리리라곤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산을 내려가려고 해도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것이 반복되자

그때서야 사내는 무언가 잘못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밤이 찾아올 무렵에야 겨우 탁 트인 곳에 나오게 되었다.

 

거기에는 작달막한 건물이 한 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와지붕을 떠받치고 있어 결코 현대식이라곤 말할 수 없었다.

 

그 마루에는 후드티를 입은 소녀가 벌러덩 드러누워 있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는 그녀의 외견은 얼추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지만

이 기이한 장소에 있다는 점과 온몸에서 피어나는 그 분위기 탓에 범상한 인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저기… 여기는 어디입니까?”

“아, 외지인이신가요.”

 

그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으니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시선을 맞추었다.

 

“이곳은 신이 머무는 산입니다.”

“그럼 당신이 신이십니까?”

“어라, 바로 믿으시네요.”

 

그제야 무표정이던 소녀는 눈썹을 아주 조금이지만 움직여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직업 때문에 조금 익숙합니다.”

“그런가요? 다만 착각을 정정하자면 저는 신이 아닙니다.”

 

하긴 후드티를 입고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신은 뭔가 이상하긴 했다.

 

“신을 뫼시는 무당이지요.”

 

…물론 무당으로 봐도 이미지 상으론 이상하다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건 그다지 못 믿으시는 표정이군요. 하긴 그래서 저도 손님을 받을 땐 색동 꼬까옷을 입습니다.”

 

무당이라는 작자가 무복(巫服)을 그렇게 표현하는 시점에서 뭔가 아이러니함이 느껴졌다.

 

“저도 휴일에는 편한 옷을 입고 지내고 싶거든요.”

“그렇… 습니까?”

 

하지만 괜히 이상한 소리를 했다가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제가 이 산을 내려가지 못하는 것도 이 산의 신령님과 관련이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올바른 길로 들어오지 않으면 묶이는 게 이 산의 규율이라서요.”

“그럼 어떻게 하면 신령님의 화를 풀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온갖 것들을 사냥하고 다니는 그로서는 조금 정도는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껏 받아온 저주는 양손을 쓰고 발가락까지 더해도 다 세지 못하리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서 황금빛 가지를 하나 꺾으십시오.”

“그러면 산을 내려갈 수 있습니까?”

“아뇨. 애초에 이건 그저 전제조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소녀는 그의 말을 듣더니 피식 웃었다.

그것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헛웃음에 가까웠다.

 

“그리고 산 어딘가에 있는 숲의 왕을 죽여서 신과 혼약을 맺으시면 됩니다.”

“사람을 죽이라… 그 소리입니까? 그래야 빠져나갈 수 있다고?”

“예?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서 사내는 약간 안도했다.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것이 있다면 분명 사람을 죽인다는 이야기겠지.

어쩌면 숲의 왕이라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짐승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당신은 이 산을 내려가지 못합니다. 방금 말해준 건 신의 화를 잠재울 방법일 뿐이지요.”

“……예?”

“당신은 신과 혼약을 맺어 다음 번 사제, 숲의 왕이 되는 겁니다.”

 

순간 자신이 말을 잘못 이해했나 싶어 사내는 굳어버렸다.

 

그걸 보더니 소녀는 또박또박 착실히 설명해주었다.

 

“당신과 같은 상황이었던 사람이 이 산에 있습니다.

가지를 꺾어 그를 죽일 자격을 받은 뒤 죽임으로써 그 자리를 계승하도록 하세요.”

 

즉, 그녀의 말은 그것이었다.

이 산에 있는 누군가를 죽이고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한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긴. 제가 뫼시는 분이 누군지는 알고 하는 소리입니까?”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며 소녀는 노려보았다.

그 귀기어린 시선에 사내는 무심코 한 걸음 물러서고 만다.

 

그녀의 말을 차마 거짓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이해했습니까?”

“…만약 거부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야 굶어죽지 않겠습니까.”

 

소녀는 다시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와 무덤덤하게 말했다.

 

“가지가 스스로 도망쳐 열매를 숨길 것이고, 짐승은 당신 근처에도 오지 않을 겁니다.

물조차도 당신이 손을 뻗으면 갈라져 몸을 뺄 테지요.”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너무 명확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죽고 싶지 않다면 사제를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아라.

 

“도구는 여기 있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길 빌지요.”

 

그리 말하고 소녀는 집 안으로 들어서더니 묵직한 단검을 하나 넘겨주었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해두도록 하지요.

제게 허튼 수작을 부렸다간 그 자리에서 피를 뿜으며 죽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주세요.”

 

이내 소녀는 다시금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사내는 멍하니 손에 들린 날붙이를 내려다보았다.

 

 

2.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내는 손에 피를 묻혔고 새로운 사제가 되었다.

 

죄책감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자신이 살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도 있었고,

어차피 현재의 사제도 살고자 누군가를 죽였음을 알아챘기 때문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사람을 죽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한 손으로도 꼽을 정도의 경험이지만 흡혈귀를 숭배하다시피 하는 광신도와 싸운 적도 있었다.

 

애시당초 흡혈귀라고 해도 대부분 사람과 별 다를 바 없는 지성체다.

 

이제 와서 자신의 평안을 위해 누군가를 죽였다고 한들 그다지 저항감은 없었다.

 

아예 아무 것도 느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가 죽인 남자에게 울고불고 사죄하면 그건 또 위선일 테다.

 

사내는 바닥에 널부러진 사슴에게로 유유히 다가갔다.

 

피와 거품을 연신 흘리고 있는 그 짐승의 목덜미에 나이프를 박아넣어 숨통을 끊는다.

 

이 숲에서 생활한 것이 벌써 2주를 넘겼다.

그는 이미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해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아주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손만 뻗으면 나무가 직접 가지를 늘어뜨려 열매를 내어주니 뭐가 불편하겠는가.

 

비록 고기는 직접 사냥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신체를 유일하게 자랑거리로 삼고 있었다.

 

그가 죽인 남자, 그러니까 전대 사제는 언제 습격자가 올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반쯤 미쳐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 사내는 그런 걱정도 꽤나 덜어둔 상태였다.

본래의 성정이 조금 여유로운 탓도 있고 나름의 대비를 해두었던 탓도 있었다.

 

흡혈귀용으로 준비해온 자재들로 각종 트랩을 깔아두니 이토록 안심될 수가 없었다.

비록 산의 구조 탓에 완전히 성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대인용으로는 충분할 터였다.

 

사실 여기서 평생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간간히 들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딱히 흡혈귀 사냥이라는 일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머니에게 훈련받은 대로 직업을 이어받았을 뿐이고

그에게 있어서 이 일은 먹고살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기왕이면 남들을 해치는 흡혈귀도 처리할 수 있으니 나름 뿌듯함은 있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요컨대, 그는 현재 풍족한 백수 라이프를 만끽하고 있었다.

 

인터넷도 전파도 닿지 않으니 바깥세상과 연결은 되지 않았지만

사냥도 시간을 보내기엔 나름 훌륭한 취미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심지어 주변에 자신을 걱정할 지인이 있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교우관계가 좁을뿐더러 그나마 있는 지인들마저 그가 어느 날 훌쩍 사라져도 신경도 안 쓰리라.

여기저기 쏘다녀야 하는 흡혈귀 사냥꾼으로서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아무튼 그는 별 걱정도 없이 이 생활을 즐기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는 소리다.

 

“……?”

 

콧노래를 부르며 사슴을 해체하고 있자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의아해하며 돌아보니 나뭇가지가 어깨 위에 올라와 있었다.

 

“뭐요. 불만이라도 있어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내가 여기 있는 짐승들 사냥하든 말든 당신이 뭔 상관입니까. 싫으면 내보내주지 그래요?”

 

이내 나뭇가지는 침울함을 표현하려는 듯이 축 늘어진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꺾어서 멀리 홱 던져버리곤 다시 사슴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 처음부터 이 생활에 아무런 걱정이 없었던 건 물론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컸던 염려는 이 산을 다스리는 신령에 대한 일이었다.

 

그의 경험에 미루어보면 신이라고 추앙받는 족속들을 마주하고 멀쩡히 끝난 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그의 전문분야는 숭배가 아니라 사냥이었기에

그들과 적대관계 내지는 적대적 중립으로 만난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는 처음에 그러한 이유로 불안감을 품었었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것도 이젠 아주 옛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옛적이라 해봐야 2주 정도지만 말이다.

 

어느 순간 알게 된 것인데 여기 사는 신령은 소심해도 그렇게 소심할 수가 없는 양반이었다.

 

지금만 해도 다른 신들이었으면 나뭇가지를 꺾자마자 벼락을 내쳐 죽였을 텐데

아무 대꾸도 못하고 그저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매번 그가 숲을 어지럽힐 때마다 나름의 용기를 내어서 항의하고는 있지만

한 번 강하게 나가면 그 이후로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그게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는 지금 신목이라고 하던 커다란 나무 근처에다 간이 오두막을 세워두었다.

 

겨우 비를 피할 정도의 허술한 건물을 손도끼로 지었을 뿐이지만

여기까지 해도 제재가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기 마련이다.

 

“뭐야, 또 왔어?”

 

그러다가 기척을 느끼고 곁을 살펴보면 불그스름한 여우 하나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쪼그려 앉은 그의 다리에 얼굴을 두어 번 비비더니 옆에 풀썩 앉아 시선을 사슴에 고정시킨다.

 

무엇이 목적인지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피식 웃고서 살점을 한 덩이 베어 넘겨주니 뭐가 그리도 좋은지

송곳니를 드러내고 헤실헤실 웃으며 고기에 달려든다.

 

별 생각 없이 손을 뻗자 여우는 발라당 드러누워선 배를 드밀었다.

 

“너 진짜 산짐승 맞냐?”

 

애교를 부려오는 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우스워서 무심코 그리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머리가 보통 머리가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어느 날 나무열매를 먹고 있자니 저 멀리에서부터 여우 한 마리가 보여왔다.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여우를 해체하는 법도 몰라서 잠자코 마주보고만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여우는 가만히 앉아있다가

약간의 변덕으로 열매 하나를 던져주니 좋아라하며 받아물고는 총총 떠나갔다.

 

그리고 그 여우는 다음날부터 계속 사내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추측컨대 나무가 그에게 열매를 바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곁에서 얻어먹으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2주 정도가 지나다보니 이젠 아주 곁에서 아양도 떨며 과일이니 고기니 하는 것들을 받아가고 있다.

 

영악한 사람을 여우라고 부르곤 하던데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더욱이 영악한 건 이놈은 제 모습 귀여운 줄 알고있는 듯 보인다는 점이었다.

 

어제는 자려고 누웠는데 잠자리에 스멀스멀 파고들기까지 하니 요물이 따로 없다.

 

아무리 불을 피워도 밤에는 좀 쌀쌀하여 그 온기를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유혹에는 넘어가고야 마니 이것이 참으로 인간의 나약함이로구나.

 

이쯤 되면 거의 애완동물에 가까운 느낌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사내는 다시 사슴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응? 무슨 일 있어?”

 

그러던 중 갑자기 여우가 컹컹대며 짖기 시작한 것은 사슴을 반쯤 찢어놓았을 즈음이었다.

 

벌떡 일어나서는 귀와 꼬리를 세우고 한쪽을 노려다본다.

 

여우의 그 행동을 지켜보다가 사내는 본능적으로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가 나무 뒤로 몸을 숨긴 것과 시야 너머에서 누군가 튀어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판단보다도 몸이 더 먼저 움직였다.

 

이 산에 들어온 인물의 결말을 두 가지뿐이다.

그에게 죽거나, 혹은 그를 죽이거나.


깊게 생각할 틈 따위는 없었다.


목덜미에 단검을 꽂아넣고 크게 베어낸 후에야 사내는 그 인물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20대 초반 정도 되어보이는 여성이었다.

갑작스러운 습격 탓인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음에도 그 미모가 느껴질 정도였다.

 

얼굴 조형을 보면 어쩐지 외국 쪽 피가 섞여있는 건 아닐까 싶어지는 외모였다.

 

그러나 그 미모도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핏줄기를 뿜으며 그녀는 지면에 철퍽 쓰러졌다.

 

“후우…….”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시체에서 눈을 돌렸다.

 

죄책감과는 별개로 역시 좋은 기분이 드는 행위는 아니었다.

 

“…….”

 

그래도 저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처리는 해야했다.

 

이 산에 들어오며 가져온 짐 중에 분명 삽이 있었을 터다.

어디 멀리 묻어두고 오든가 해야겠다고 사내는 생각하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야, 저건 먹는 거 아니거든?”

 

그러다가 여우의 시선을 깨닫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짐승은 사내의 뒤, 아마 시체가 쓰러져있을 장소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먹게 두는 건 양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이제 와서 그래봐야 위선에 불과하다는 건 알아도 역시 꺼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내가 손사래를 치자 여우는 마치 아쉽다는 듯이 끼잉 짧고 높게 울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다리로 조심스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

 

그제야 사내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 반응은 아쉬움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것처럼만 여겨졌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것은 그야말로 본능적인 행위였다.

 

“…윽?!”

 

바람이 뺨을 스치듯 휘몰아쳤다.

그게 옆으로 무언가 지나쳐서 생긴 현상임을 알아차린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바람길을 따라 시선을 향하자 무당이 신목이라 불렀던 거대한 나무에 올라탄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조금 전 그가 목을 찔렀을 터인 여자였다.

 

그 사실이 말하는 바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흡혈귀……!”

“사냥꾼, 기다려도 하도 오질 않기에 객사라도 했나 싶었소.”

 

그때가 되어서야 사내는 그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냄새는 명백히 흡혈귀의 것이었다.

 

어째서 이제야 알아차렸나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아무래도 많이 해이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흐음, 그러니까 이게 풍작신과의 이혼 서류다 그 말이구려?”

 

그리 말하며 그녀는 유유히 나무에서 자라난 황금빛 가지를 꺾었다.

그것은 저 여자에게 자신을 죽일 권리가 부여되었음을 상징하는 증표였다.

 

이 산에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내는 사냥을 하다 짐승에게 크게 물릴 뻔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여기저기서 굵은 나뭇가지가 뻗어나와 짐승의 움직임을 막았다.

아마도 자신의 사제를 지키기 위한 여신의 행동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보호가 이 순간 사라졌음을 사내는 짐작했다.

 

“기다렸다, 라고 하면… 당신이 제가 사냥하기로 된 흡혈귀입니까?”

 

사내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분명 여기저기 트랩을 깔아두긴 했다.

환경 탓에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대인용으로는 충분한 살상력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흡혈귀를 상대로는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일단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자 그는 시간을 끌기 위한 대화를 시작했다.

 

“그렇소. 덤으로 말해주자면 의뢰인 역시 이 몸이었지.”

“…어째서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않소? 그대를 내 아가리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요.”

 

좋아. 그러니까 애초부터 나를 엿먹이기 위한 함정이었다는 거군.

사내는 속으로 불평을 토해냈다.

 

그리고 더욱이 위기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악의를 품고 있으며

심지어 그건 여기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의 감정이다.

 

“어째서 저를?”

“그대의 어미가 이 몸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오.”

 

순식간에 그녀는 그의 눈앞까지 이동했다.

그 속도 탓에 머리칼이 바람에 날릴 정도였다.

 

사내의 어머니 역시 한 사람의 사냥꾼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그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으리라.


눈앞의 저 흡혈귀와 분쟁이 있었다고 한들 전혀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소리다.

 

“연좌제는 폐지된 줄로 아는데요…….”

“그건 이 몸도 아주 잘 알고 있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보려 농담을 던지자 여자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대의 어미는 참 강한 자요. 지금도 이 몸이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구려.”

“그, 그러면 어째서…?”

“간단하오. 그대를 박살내고 인질로 삼아 협박할 거요.”

“아, 이런 썅.”

 

그리 내뱉고야 만 것은 정말로 충동적인 일이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그런 소리를 들은 탓인지 흡혈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깔깔 웃는다.

 

“그대 참 재밌는 사람이지 않소. 이 상황에 면전에서 욕이 나오는 게요?”

“아뇨. 생각해봤더니 당신 목적의식이 너무 뚜렷해서 구슬릴 방법이 없네요.”

“정말로 흥미롭구려.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걸로 보이오만.”

 

그야 그게 사실이니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해주시렵니까?”

“그대가 바란다면야.”

 

그리고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녀는 사내의 목덜미에 손을 뻗었다.

 

사람 팔뚝만한 나뭇가지가 뻗어나와 그녀의 팔을 휘감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요?”

 

흡혈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신목을 바라보았다.

사내 역시 깜짝 놀라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당에게 들은 바로는 왕을 지키는 건 가지가 꺾이기 전까지라고 하였소만.”

 

그러나 나무는 전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럼 뭐요? 계약과 별개로 이 자를 지키고 싶은 게요?”

“…….”

“이보시오 할멈. 수도 없이 남편을 갈아치운 갈보가 이제 와서 무슨 생각이요?”

“…….”

“아, 그래. 좋소. 좋단 말이오. 어차피 인질은 살았을 때 가치가 높은 법. 원래 죽일 생각은 없었소.”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고 나뭇가지가 천천히 흔들렸다.

 

“…응?”

 

바지를 잡아끄는 감촉에 멍하니 있던 사내가 아래를 바라본 것은 그 즈음이었다.

 

여우가 그의 바지를 입에 물더니 약하게 당기고 있었다.

 

흘끔. 곁에 있던 흡혈귀를 바라본다.

 

“사지 멀쩡히 유지시켜주겠소. 대신에 이 몸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마시오.”

“…….”

“불만이라도 있소? 솔직히 말하리다. 이 몸은 당장이라도 구속을 끊어버릴 수 있소.”

“…….”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옛 신에 대한 배려일 뿐이요. 그러니 계약합시다.”

 

흡혈귀는 나무를 바라보다가 스스로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로 무언가를 그렸다.

 

…완전히 저쪽에 시선이 팔려있었다.

 

“그럼 계약을… 자, 잠깐?! 사냥꾼! 어디 가는 게요!”

“내가 미쳤다고 가만히 기다려주겠습니까?!”

“젠장, 정론을 내세우지 마시오!”

 

그 순간 사내는 몸을 홱 돌리곤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언가 만족스러운 듯이 기뻐 짖으며 여우도 그 곁을 따라 달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와의 이 만남이 앞으로 얼마나 큰 문제를 불러오게 될지는 전혀 모르고 있던 것이다.



전설들 기반으로 설정을 짜낸 글. 내용과는 별개로 분위기는 나름 가볍게 써보고 싶음.

기왕이니 분위기 맞게 문체도 조금 바꿔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