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경비병을 사랑해버렸다 (38)

 

 

 

 

 

추론: 인간에게 자유 의지란 존재하는가?

 

 

 

 

 

77.

 

인간이란 무엇인가. 마녀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는 추측한다. 둘의 차이란, 짊어지고 있는 것의 차이라고.

 

인간이 짊어진 고난과 시련은, 마녀의 그것에 비하면 정말 하잘 것 없다고.

 

결혼을 하거나, 직업을 가지거나, 집을 구하거나, 그런 시시한 것만을 고민하다가

 

끝내 늙고 병들어 죽고 마는-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생물인가.

 

반면, 마녀들은. 우리들이 짊어지고 있는 것은 그것과 궤를 달리한다.

 

“또 시시한 망상을 하고 계시나요, 므네?”


“반론: 나의 추상은 망상이 아닌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임.”


“아아, 그러시겠죠.”


부활의 마녀, 키벨레. 그녀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나저나 이곳 냄새는 익숙해지질 않네요. 종이 냄새는 취향에 안 맞아요.”

 

우리가 있는 곳은 나, 책의 마녀가- 선대 책의 마녀들이 쌓아올린 마녀의 도서관이다.

 

이곳의 책들은 모두 선대들이 쓰고 제작한 책이며, 책의 탑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여기엔 그곳에도 없는 비밀스럽고 위험한 지식들이 가득했다.

 

……그래봤자 겉으로 보기엔 건물만한 책장이 끝도 없이 있는 미로일 뿐이지만 말이다.


“추론: 키벨레의 지적 수준이 낮아 책의 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임.”

 

“어머, 그건 그냥 못 넘어가겠는데요. 저 이래 뵈도 꽤 똑똑한 편인데요?”

 

“반론: 키벨레의 지적 수준은 평범한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음.”

 

“너무하셔라.”


키벨레가 내 책상에 앉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경론: 내 책상은 의자가 아님.”


“그보다도 유해는 찾으셨나요?”


키벨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유해는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거의 400년 전에 사라졌는데

 

내가 그걸 쉽게 찾을 수 있다면, 난 마녀가 아니라 고고학자일 것이다.

 

“이론: 내 계산이 옳다면 일주일 이내에 최소 1개 이상을 찾을 수 있음.”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거, 알고 계시나요?”


“반론: 왕은 아직 움직이지 않음.”
 
“아직, 이죠. 그리고 저는 왜 그가 움직이지 않는지도 알고 있죠.”


왕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알고 있다고?

 

“그는, 자신의 자식들 중 왕의 자질을 지닌 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셈이에요.”


“반론: 그렇다면 더더욱 자식들을 지켜야 함.”


“반대에요. 그렇기에 더더욱 자식들을 혹독하게 키우는 거예요. 마녀 따위한테

 

살해당할 정도로 약하고 어리석은 자식이라면, 당연히 왕도 될 수 없다고 말이죠.

 

현재 살아남은 건……3명 정도였나요? 1, 2……5였나, 6이었나. 아무튼 왕자 두 명에

 

공주 한 명. 그 중 공주는 실종 상태고, 제 2왕자는 거론할 가치도 없으니 실질적으론

 

미노스 왕자 하나만 제거하면 왕가는 끝장이에요. 복수가 이루어지고, 저희들은 이 왕국을

 

점령하여 마녀들이 지배하는……그래요, 마녀들의 왕국을 세울 수 있게 되는 거죠.”

 

마녀들의 왕국. 그렇다, 나는 그걸 위해 키벨레에게 협조하고 있었다.

 

자애의 죽음 따윈 아무래도 좋다. 내게 그녀의 가치란 길가의 돌멩이와 다름없었다.

 

“미노스는, 그 남자는 조금 위험할지도 몰라요. 그 남자는 자기 아버지를 빼닮아

 

용맹하고……거침없죠. 아마 지금쯤이면 마녀 토벌대를 구축해서 저희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을 거예요. 거기엔 초월자인 라비스나 도나도 포함됐을 테죠.”

 

“담론: 제 2왕자는 어떻게 처리할 것임?”


“그 광대 왕자 말이죠? 내버려두세요. 그 인간이 하는 일이라곤 매일 축제를

 

벌이고 거기서 재주를 넘는 것뿐이니까요. 정치도, 패도에도 관심이 없어요. 전혀 말이죠.

 

죽이든 말든 아무 영향도 없을 테고……애초에 왕도 왕자라고 인정해주지도 않는 것 같아요.”

 

그런가. 공주는 실종됐고- 아마 십중팔구 살해당했을 터이니 실질적으론 미노스 왕자가

 

마지막 남은 벽일 것이다. 왕은 이미 늙고 병 들었으니, 우리가 굳이 뭘 하지 않아도

 

조만간 수명을 다할 터. 그렇게 되면 왕위를 계승할 자는 남지 않게 된다.

 

나아가 옥좌가 비게 되면……숱하게 많은 권력자들이 그걸 노리고 움직일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편승해 유해를 모으고, 때를 기다리면 된다.

 

“당신의 역할은 잘 이해하고 계시리라 믿어요. 유해를 찾기만 하면, 마녀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도 꿈이 아니에요. 이 모든 게 성공하면……더 이상 당신이 이 미궁에 갇혀 지낼 

 

필요도 없어지겠죠. 꿈꾸던 자유가 코앞에 있답니다, 므네.”

 

“……결론: 나의 역할은 달라지지 않음. 이제 방해하지 말 것.”
 
“네, 네. 그래야죠.”


키벨레가 돌아갔다. 나는 책을 다시 펼쳤다.

 

자유.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해내리라.

 

 

 

 

 

 

78.

 

“아- 그나저나 궁금한 게 생겼는데, 하늘은 왜 파란 색입니까?”


“그것도 모르는 게냐? 옛날에 신이 하늘에 파란 물감을 흘려서 그런 게야.”


“진짜입니까!? 아니, 왜 저만 그런 중요한 정보를 몰랐던 겁니까!?”


“농담인 게야!”

 

“농담이었습니까!?”


속았다. 완전히 속아버렸다, 너무 완벽한 거짓말이라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지금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도중 같았는데.

 

“그게 아니라! 왜 중요한 이야기 중에 하늘 이야기를 하는 게야, 너는?!”


“아참, 그랬습니다.”


“잘 듣는 게야! 마녀들은 거의 다 제멋대로니까 나중에 협조하겠다고 오는 마녀가

 

있다면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 게야! 우리에겐 지금 다른 방도가 없는 게야, 이해한 게야!?”

 

“아, 게야- 라고 하니까 대게가 먹고 싶어졌습니다!”
 
“하나도 안 들었어! 하나도 안 들은 게야! 완전 너무한 게야, 말도 안 되는 게야!”


그 순간, 우리의 등 뒤로 빛이 번쩍였다.

 

날씨도 좋은데 벼락이 치나- 했더니, 웬 처음 보는 여자가 거기 서 있었다.

 

“안녕하심까! 오, 형씨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계셨슴까?”
 
“저희 아는 사이입니까?”


“앗! 너는……공주를 납치한 그 마녀!”


……?

 

……잠깐, 이 사람이? 이 괴상망측한 옷을 입은 여자가, 공주 납치범이라고?


“꼬, 꼬, 꼬므짝!?”


“뭐라고 하신 검까?”


“꼼짝 말라고 한 걸 텐데, 분명 혀가 꼬여버린 게야.”


“꼬인 게 아니라……케흑, 혀를 깨물어버렸습니다.”


“완전 바보 아님까? 그렇슴다, 당신은 분명 바보가 분명함다!”


아파파……그나저나 왜 이 순간에 이 여자가 여기 나타난 거지?


나는 고개를 들어 마녀를 보았다. 꼬불꼬불하게 꼬인 보라색 머리카락에, 특이하게도

 

수 개의 구멍이 뚫린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구멍 너머로는 마녀의 속살이 그대로

 

보였는데, 저러고 거리를 돌아다니면 공연음란죄로 잡혀갈 게 뻔했다.

 

“아! 당신은 음란의 마녀입니까!?”


“무……무슨 말을 하시는 검까! 음란하지 않슴다! 저는 완전 순결함다!”


“순결하다는 사람이 그런 옷을 입고 다닐 리가 없잖습니까?”


“정론인 게야. 과연, 이 녀석은 음란의 마녀였던 게야. 분명 그랬던 게야.”


“아, 아니! 처음 만난 사람한테 그렇게 막말해도 되는 검까!?”


“하지만 사실은 사실 아닙니까. 구멍이 그렇게 뻥뻥 뚫린 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는

 

100% 변태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보셨으면 제 눈을 가려주셨을 겁니다.”

 

“에에잇! 제 소개를 하겠슴다! 그러면 오해도 풀린 검다……제 이름은!”

 

그렇게 말하며 음란의 마녀가 멋진 자세를 취했다. 아니, 음란한 자세인가?


“저는 구멍의 마녀, 레테……임다!”


“……구멍의 마녀라니, 그게 더 변태 같습니다.”


“과연 그런 게야. 구멍의 마녀라니, 진짜 음란한 게야. 이 여자, 분명 색정광인 게야.”


“아님다!! 저는 색정광이 아님다!! 아아아악! 왜 다들 저한테 이러시는 검까!?”


“아, 공주를 데려간 것도 자기 취향에 맞는 음란한 여자로 키우기 위해-”
 
“그만!! 그만, 오자마자 대체 이게 무슨 일임까, 저는 여기 동맹을 맺으러 온 건데……!”


동맹이라고? 레테가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어했다.

 

“후우……우선 제 소개를 다시 하자면, 저는 구멍의 마녀 레테임다. 부활, 그러니까

 

키벨레의……으음, 적이라고 해야 하나……아무튼 그런 검다.”

 

“키벨레의 적이라고?”


“그렇슴다! 그리고 저는 헬리온 씨의 부탁을 받고 여기 온 검다.”


헬리온이 누구더라? 아, 그랬다. 태양의 마녀. 방금 기억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슴다! 저는 키벨레가 의심됩니다!”
 
“아참! 그것보다도 공주님을 돌려주십시오! 아니면 설마……벌써 죽이신 겁니까?!”


“벌써 죽여서 바다에 버린 걸지도 모르는 게야!”

 

“히익!”


“아……아님다! 공주는 멀쩡히 살아있슴다, 오히려 너무 멀쩡해서 저희가 힘듬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나는 사실 공주님이 납치됐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 납치 사건이 벌어지면 살아남은 피해자가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우선……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슴다. 자애의 마녀, 에스티아가 죽은 건 알고 계심까?”
 
“……엄마의 죽음을……함부로 거론하지 말라는 게야.”

 

페르의 목소리가 순간 낮아졌다.

 

“저도 그 분의 죽음에 대해선, 정말로 유감이라고 생각함다. 저도 엄청 좋아하던 분이었슴다.

 

솔직히 미노스 왕자가 그 분을 죽였다고 들었을 땐, 당장 가서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했슴다.”

 

“그런데……?”


“그런데 말임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검다.”


레테가 근처에 있던 나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첫 번째 의문, 미노스 왕자는 어째서 에스티아 님을 죽인 건가?”

 

“그야……마녀니까……?”
 
“그렇지만 이상함다. 에스티아 님과 미노스 왕자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으니 만났고

 

살인이 벌어졌다는 건데……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슴까?”

 

듣고 보니 그랬다. 나도 미노스 왕자가 그 에스티아라는 마녀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왜 죽였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두 번째 의문, 키벨레는 어떻게 에스티아 님을 죽인 게 미노스인지 알았고, 그

 

모든 계획을 바로 세우고 실행했는가……임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설명하겠슴다. 에스티아 님의 시체를 수습한 사람은, 바로 그 키벨레임다.

 

키벨레는 에스티아 님이 미노스 왕자에게 살해당했으며 에스티아 님의 복수를 해야 한다며 

 

저희들을 선동했슴다. 대다수는 거기에 넘어가 지금 키벨레한테 협력 중임다.”

 

나는 페르를 보았다. 페르도 왠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잠깐, 뭔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키벨레는 부활의 마녀……그러니까 죽은 생물을

 

부활시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럼 왜 에스티아를-”

 

“간단한 문제인 게야. 엄마의 머리가, 없어진 게야.”


“머리가……?”


“부활의 마법은 만능이 아닌 게야. 부활을 위해선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들이

 

필요한 게야. 일반적으론 몸통과 머리인데……머리가 없으면 부활도 할 수 없는 게야.”

 

그렇다면……잠시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를 놓친 듯한…….

 

“……뭔가……이상합니다. 그렇다면……미노스 왕자는 어째서 머리를 가져간 겁니까?


부활의 마녀를 알고 있지 않은 한,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바로 그검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추론을 했슴다…….”

 

에스티아 님을 죽인 사람은, 키벨레다.

 

그 한 마디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말 너머에 숨겨진 무언가가 나를 소름 돋게 했다.

 

“그럴 리 없는 게야.”


페르가 말했다.

 

“나도 키벨레를 좋아하진 않는 게야, 그렇지만 그 녀석은……누구보다도, 어쩌면

 

나보다도 엄마를 사랑했던 게야……그것만은 분명 거짓이 아닌 게야. 확실한 게야.”

 

“저도 그리 알고 있슴다, 그렇지만 이러면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됨다. 아님까?”

 

침묵이 이어졌다. 페르는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저……이해가 잘 안 되는데 다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요약하자면 이런 검다. 범인이 키벨레인 경우, 그녀가 부활하지 못하도록 목을 베었을 검다.

 

만약 미노스 왕자가 범인이라면 부활의 마법을 알지 못하니 그런 짓을 안 했을 검다.

 

게다가 곧장 에스티아 님의 죽음을 미끼삼아 마녀들을 선동했잖슴까? 이러면 앞뒤가

 

얼추 맞슴다. 키벨레가 마녀들을 선동하기 위하여 에스티아 님을 살해-”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없어. 키벨레는 정말로, 정말로 엄마를 사랑했어.”

 

“모든 거짓을 제외한 나머지가 진실임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함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걸 확인하고자 하는데……그걸 위해 여러분의 협력이 필요함다.”

 

“협력 말입니까……?”
 
“여러분은 얀데르손의 기억을 되찾고 싶고, 저는 정보를 얻고 싶슴다. 그러려면

 

키벨레의 측근 중 한 명을 공략하여 정보를 얻어야 함다. 이해가 되심까?”

 

키벨레의 측근……과연, 책의 마녀 므네를 말하는 건가.

 

“저의 마법은 공간에 구멍을 만드는 것. 그걸 사용하면 마녀의 도서관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슴다. 어떠심까? 꽤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함다.”

 

“잠깐, 왜 우리가 필요한 게야? 그런 거라면 혼자 가서-”
 
“저 혼자 므네를 상대하는 건 벅참다. 전투에 특화된 건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므네가 약하다는 것도 아님다. 아시잖슴까? 마녀들은 자기 영역에서 훨씬 강해짐다.

 

도서관에 있는 동안엔 므네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강할 검다.”

 

“하지만 저랑 페르는……별로 강하지 않습니다.”


“시선을 분산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함다. 뭐, 믿건 말건 그쪽의 자유이니 더 이상

 

강요하진 않을 검다……만, 지금 여러분께 다른 선택지는 없을 검다. 아님까?”

 

맞는 말이다. 지금 우리에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게 설령 함정이라 할지언정 가야만 하는 이유도 있다.

 

“……어쩔 게야, 얀센?”
 
“다른 방법이 없잖습니까.”


내겐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선, 위험한 다리라도 건너겠다.

 

“가겠습니다, 마녀의 도서관으로!”

 

 

 

 

 

 

 

 

 

 

 

원래 좀 더 쉬었다가 연재하려고 했는데 그냥 오늘 썼음.

챕터 5는 연애 요소가 거의 없을 예정이다...

표지 의뢰는 이번에 지원금이랑 월급 받고 해야겠음, 소라게 키운다고 돈을 너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