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나는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회색빛의 세상이 다른 사람의 시야와 다르다는 것을 안 것은 아주 어릴 때였다. 

 

 "독자야 개나리가 참 예쁘지 않니?"

 "네! 그런데 엄마, 저 옆에 있는 꽃도 개나리에요?"

 "저건 벚꽃이야. 색이 다르니까 다른 꽃이지."

 "내 눈엔 똑같은데..."

 "응? 독자야, 저길 보렴. 저 건물은 어떻게 보여? 개나리랑 같아 보이니?"

 "네. 저 건물도, 저 나무도, 저 자동차도 전부 똑같아요." 

 

 덕분에 친구들과 놀러 갈 때도 

 

 "나 옷 좀 골라줘. 이거랑 이거 중에 뭐가 나아?"

 "뭐가 다른거야?"

 "이건 파란색이고 이건 검은색이잖아." 

 

 수업을 들을 때도 

 

 "가을이 되면 날씨가 추워져 엽록소가 줄고 색을 내는 색소가 늘어나서 낙엽은 초록색이 아닌..." 

 

 지금처럼 벚꽃축제로 다들 들떠있을 때도.

 나 혼자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다.

 

 

 *

 "오늘 입학식이니까 종치면 체육관으로 가라." 

 

 꽃이 피기 시작하는 3월.

 새 학년이 시작되고 신입생도 들어왔다.

 그렇지만 나는 꼼짝없이 수험생 신세다. 

 

 "아 고3이 왜 입학식까지 가야되는건데"

 "그러니까 진짜.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입학식 안가도 공부 안하잖아."

 "쉿. 그냥 넘어가."

 "야 5분 남았다. 슬슬 가자." 

 

 체육관에 도착한 우리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벌써 후드를 뒤집어쓰고 자는 아이도 있고 단어장을 꺼내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도 있다. 

 

 "와... 여기까지 와서 공부하네."

 "저런 애 중에서 전교권 한 명도 본적 없어. 시작한다. 앞에 봐라."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래가 끝난 후에는 국민의례, 교가 제창 등 형식적인 절차가 이어졌다. 

 

 "하아암. 언제까지 있어야 되냐."

 "아직 30분 넘게 남았어. 교장쌤 말씀도 아직 안 했고." 

 

 [다음은 신입생 대표 선서가 있겠습니다.] 

 

 한 여학생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입생을 대표해 올라온 12반 한수영이라고..."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 잠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지러움이 멈춘 후 무대 위 여학생은 더이상 흰색이나 검은색이 아니었다.

 무채색이었던 내 세상에 색이 칠해진 순간이었다.

 

 “야, 야야.”

 “왜 갑자기.”

 "우리학교 교복 무슨 색이냐?"

 "교복? 조끼랑 마이, 넥타이 다 검은색이지."

 "조끼에 다른 색은 없어?"

 "아래쪽에 빨간색이랑 하얀 줄 있어. 갑자기 왜 그래?" 

 

 빨간색.

 저게 빨간색이구나.

 

 “사람 입술도 빨간색이지?”

 “보통은 그렇지...?”

 “피부는? 피부는 무슨 색이냐?”

 “살색. 근데 너 색맹 아니었냐?”

 

 맞다. 아직 세상의 대부분은 회색빛이다.

 그런데도 무대위에서 말하고 있는 저 아이의 색만큼은 모두 구별할 수 있다.

 

 “야. 너 꿈이 의사라고 했지.”

 “그치. 왜?”

 “색맹이 갑자기 치료되는 경우도 있냐?”

 “아직은 없을걸...?”

 “그럼 색 몇 개만 보이는 경우는. 이것도 없어?”

 “들어본 적은 없어. 근데 왜... 너 설마...”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친... 대박이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감이 잡힌다.

 

 

 

 *

 컬러버스.

 색맹인 사람이 특정 인물을 만나면 색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세계관을 말한다.

 보통 한번에 모든 색이 보이는데 어제의 일 이후 내가 구별할 수 있는 색은 교복에 있던 빨간색과 살색 뿐이다.

 어쨌든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나에게도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음... 그럼 일단 그 애를 만나야 하겠는데... 뭘 아는게 있어야 만나지.”

 

 내가 그 아이를 본 건 입학식 때가 전부다.

 그러니까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게 있을 리가 없다.

 

 “하... 생각 좀 나라...”

 

 머리를 헝클이며 생각에 빠졌다.

 

 “모르겠다 ■발. 어떻게든 되겠지 뭐. 이대로도 잘 살았잖아?”

 

 

 

 *

 그런 날이 있다.

 아무 것도 제대로 되지 않고 꼬이기만 하는 날이.

 

 “김독자, 지각이다. 남아서 청소해라.”

 

 등굣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버스가 멈춰 지각하고

 

 “김독자! 안일어나?!”

 

 그 덕분에 뛰어서 등교해 수업시간에 졸고

 

 “김독자, 사서 선생님께서 책 5권 연체라고 하신다. 제때 좀 반납해라.”

 

 하루종일 정신없는 상태로 보낸 탓에 책을 반납하는 것도 까먹은 오늘은 딱 그런 하루였다.

 

 “반납할게요.”

 “빨리도 가져오는구나.”

 “어차피 도서관 거의 저만 오니까 괜찮잖아요.”

 “이제 아니야. 저기 보이니? 1학년인 것 같던데 소설을 아주 좋아하더라.”

 

 그 아이가 분명했다.

 신입생 대표였고 내 세상에 색을 칠한 그 아이.

 

 “저 애도 이 책 찾았는데 니가 빌려가서 못 빌린다니까 다른 책 찾고 있어. 얘! 수영아!”

 “네?”

 “찾던 책 방금 반납됐어. 와서 빌려가.”

 

 그 아이가 데스크로 오자 사서 선생님이 나를 가르키며 말했다.

 

 “얘가 소설이라면 미쳐서 도서관에서 사는데 친하게 지내지 그래? 생긴 건 이래도 착해.”

 “쌤, 생긴 게 이렇다니...”

 “난 한수영이라고 해.”

 “난 김독자야. 너도 소설 좋아해?”

 “좋아하지. 히가시노 게이고랑 파울로 쿄엘로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랑 연금술사 재밌게 봤어.”

 “진짜? 그거 말고도...”

 

 “이자식들아 연애질은 나가서 하지?”

 “연애질이라뇨 오늘 처음 봤는데. 그리고 친하게 지내라고 한 건 사서쌤이잖아요.”

 “그래도 도서관은 책읽는 곳이지 연애하는 곳이 아니다. 얌전히 책이나 읽다 가.”

 “어차피 우리 말고 사람도 없는데.”

 “이 자식이.”

 

 한수영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같이 책이나 고를래?”

 “이거 빌릴거 아니었어?”

 “하나만 빌리긴 그렇잖아. 가자.”

 

 “이건 어때? 읽어봤어?”

 “그런 책 좋아하면 이거랑 이거랑...”

 “아 그 책 나도 읽어봤는데. 나는 그거보다 이게 더...”

 

 [점심시간이 5분 남았습니다. 운동장이나 교실 밖에 있는 학생들은 다음 수업을 위해 교실로 돌아가주시기 바랍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교실 가야겠다.”

 

 한수영이 노트 귀퉁이에 뭔가를 적고 건냈다.

 

 “이거 내 번호야. 친구 됐으니까 연락처 교환해야지.”

 “그럼 내가 먼저 연락할게.”

 “그래.”

 

 “이거랑 이거 빌릴게요.”

 “둘이 벌써 그렇게 친해졌어? 책이 좋긴 하다니까. 여자친구도 만들어주고. 원래 연체라서 못 빌리는데 특별히 해주는거야.”

 “여자친구 아니라니까요. 가자.”

 

 도서관을 나와 계단으로 갔다.

 

 “넌 안 내려와?”

 “난 3학년이라서 올라가야돼.”

 “3학년?? 죄송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야, 그러지 마. 나도 부담스러워. 그냥 아까처럼 해줘,”

 “아... 그럼 가볼게! 안녕!”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간 나는 빌린 책을 꺼내 정리했다.

 그 중 낯선 책이 눈에 띄었다.

 

 “이건 걔가 빌린 건데. 잘못 가져왔나보다.”

 

 핸드폰을 켜서 메신저를 열었다.

 

 — 한수영?

 — 누구세요?

 — 아까 도서관에서 만났는데

 — 아 김독자? 무슨 일이야?

 — 내가 책 하나 잘못 가져온 것 같아서. 돌려주려고.

 — 하나가 어디갔나 했는데 거기 있었구나. 혹시 여기로 와줄 수 있어?

 — 어딘데?

 — [위치 정보를 전송했습니다.]

 우리 집인데 사정이 있어서 멀리 못 가. 부탁할게.

 — 조금만 기다려.

 

 한수영의 집은 우리 집에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 도착했어.

 — 잠깐만. 금방 나갈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그 아이가 보이는 순간 새로운 색이 칠해졌다.

 

 “너 옷...”

 “옷? 아 내가 보라색을 좋아해서.”

 “옷 예쁘다.”

 

 저 색이 보라색이구나.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

 “얼마 걸리지도 않던데 뭘. 자 여기.”

 “고마워. 내일 학교에서 봐.”

 

 그 후 우리는 매일같이 도서관에서 만났고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야 김독자. 내 책 내놔. 오늘까지 반납이란 말이야.”

 “그래?? 나 그거 집에 두고 왔는데 어떡하지...”

 

 “한수영. 너 오늘 약속 있냐? 같이 서점갈래?”

 “서점? 그래! 사고 싶은 책 있었는데 사야겠다.”

 

 그러다보니 쓸데없는 오해도 생겼다.

 

 “야 김독자. 너 여친 생겼냐?”

 “응?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 있잖아. 단발머리에 하얀 애. 키 작고. 너 맨날 도서관에서 걔랑 놀더만.”

 “여친은 무슨. 그냥 친구야.”

 “친구? 확실해? 이쁘던데.”

 “헛소리 그만하고. 다음 교시 뭐야?”

 “수학. 이거 끝나면 점심이네. 너 또 도서관 갈거지?”

 “그렇겠지.”

 “원래도 책 좋아하긴 했는데 요즘따라 더한 것 같다? 친구랑 놀아주지도 않고 나 서운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럼 오늘은 오랜만에 카드게임이나 할래?”

 “좋지.”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가 시작될 즈음 한수영이 찾아왔다.

 

 “김독자 누가 너 찾는데?”

 “응? 누구?”

 “그러게 얘 친구 없는데.”

 “이 새끼가. 근데 진짜 누구지?”

 “1학년같던데? 암튼 가봐.”

 

 “한수영? 우리 반까지 무슨 일이야?”

 “왜 오늘 도서관 안 왔냐?.”

 “오늘은 친구랑 좀 놀았어.”

 “친구 있었냐? 매일 도서관만 오니까 없는 줄 알았네.”

 “뭐라고?”

 “장난이야, 장난. 암튼 이번 주말에 시간 돼?”

 “주말? 딱히 약속은 없어. 왜?”

 “같이 서점 좀 가자고. 토요일에 학교 정문에서 보자.”

 “뭐 그래.”

 

 

 

 *

 “김독자! 일찍 왔네? 나도 5분 일찍 왔는데.”

 “그냥 일찍 오는 게 습관이 됐어. 가자.”

 

 서점에 가서 한수영이 봐뒀던 책을 사고

 

 “이거야. 파울로 쿄엘로 신간!”

 

 내 책도 샀다.

 

 “이건 뭐야?”

 “너 읽으라고. 전에 이 작가 좋아한다고 했잖아. 선물이야.”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갑자기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친구? 확실해? 예쁘던데.’

 

 “야 괜찮아? 얼굴이 빨개.”

 

 갑자기 그런 말이 왜 떠오른 건지.

 

 “괜찮아. 더워서 그래.”

 “아직 초봄이라서 쌀쌀한데...”

 “다 골랐어? 그럼 가자.”

 

 서점을 나온 뒤엔 같이 밥을 먹고

 

 “떡볶이 좋아해? 먹으러 갈래?”

 

 편의점에서 사탕을 사고

 

 “난 레몬 사탕이 그렇게 좋더라.”

 

 영화를 보고

 

 “이 영화 보고싶었는데. 소설 원작이라서 더.”

 

 노을이 질 쯤 같이 공원을 걸었다.

 

 “오늘 재밌었다. 데이트같았어.”

 “...”

 “또 얼굴 빨개졌다. 진짜 괜찮은거지?”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흐음... 그럼 다행이고. 그나저나 벚꽃이 벌써 다 폈네. 아직 축제까지는 좀 남았는데.”

 

 벚꽃 축제.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별 의미 없는 행사였다.

 

 “언제 시작인데?”

 “다음주 토요일일걸? 그때까지 펴 있겠지?”

 “글쎄.”

 “다음주에 또 볼래? 벚꽃 축제 가자.”

 “그래. 그러자.”

 

 시간은 흘러 축제일이 되었다.

 바람에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벚꽃은 예쁘게 피어 있었다.

 오히려 떨어진 벚꽃이 바닥에 깔려 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했다.

 

 “김독자. 여기! 나 사진 찍어줘.”

 

 한수영이 벚꽃 가지를 잡고 포즈를 잡았다.

 순간 꽃의 색이 분홍색으로 칠해졌다.

 

 벚꽃이 이렇게도 예쁜 꽃이었구나.

 

 “김독자? 울어?”

 “아니야. 그럼 찍을게. 하나, 둘, 셋”

 

 찰칵

 

 “잘 나왔다. 이거 봐.”

 “사진 잘찍네? 이따 보내줘.”

 

 축제가 진행되는 거리를 길거리 음식을 사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김독자, 넌 꿈이 뭐야?”

 “꿈? 생각 안해봤는데.”

 “난 작가가 되고 싶어. 장편 소설을 쓰는 게 꿈이야. 한 3천 편정도?”

 “3천? 너무 긴거 아니야?”

 “솔직히 지금은 자신 없어. 그러니까 니가 읽어준다고 약속해.”

 “내가? 나 그렇게 좋은 독자가 아닌데.”

 “읽으라면 읽어.”

 “알았어. 읽을게.”

 “진짜?”

 “진짜지 그럼.”

 “재미 없을 수도 있는데.”

 “니가 쓰는 게 재미없을 리가 없잖아. 장르는 뭘로 쓸건데?”

 “그건 그때 봐서.”

 “로맨스는 어때?”

 “......로맨스를 어떻게 3천 편이나 쓰냐?”

 

 “여기서 좀 기다려봐. 나 뭐 좀 사올게.”

 “그래. 갔다와.”

 

 잠시 후 한수영은 내 입에 뭔가를 넣었다.

 

 “뭐야 레몬 사탕? 맛있네. 고마워.”

 “근데 그거 내가 먹던 건데.”

 “근데?”

 “재미없네 진짜.”

 

 한참을 걷다 말을 꺼냈다.

 

 “수영아.”

 “응? 왜 갑자기 성을 빼고 불러.”

 “우리 사귈래?”

 “응? 뭐, 뭐라고?”

 “사귀자.”

 “갑자기? 진짜?”

 “당연히 진심이지. 꼭 지금 대답 안해도 괜찮......”

 “좋아.”

 “뭐라고?”

 “좋다고. 좋아해 김독자.”

 

 우리는 파란 하늘을 보며 걸었다.

 분홍 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더 이상 벚꽃이 없는 곳에는 나무가 마치 터널처럼 자라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초록색 빛에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