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딸랑- 딸랑-



예약한 식당의 출입문을 밀어 열자 훈훈한 공기가 밀려들며 얼굴을 간지럽혔다.



출입문 옆 카운터에서 대기하던 종업원이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몇분이신가요?"

"저희 어제 4인실 예약했는데요. 208호로요."

"아 네네, 잠시만요... 이백...팔호... 박한별 님? 맞으시죠."

"네."

"네, 계단 올라가셔서 맨끝방으로 가시면 되세요."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걸린 계단과 아늑한 느낌을 주는 조명이 깔린 복도를 지나 208 이라는 숫자가 적힌 단체실의 문을 열었다. 나란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던 부모님이 이쪽을 봤다.



"아이구 이제 다 왔네."

"엄마 생축!"

"생신 축하드려요."

"좀 늦었네?"

"엉, 오빠가 카페에 폰 놓고 와서."

"니네 늦길래 먼저 시켜서 먹고 있으려다 꾹 참았다."

"오올~ 우리 최여사님 의리쟁이?"

"얘는 꼭 이렇게 엄마를 놀려."



적당히 대화를 나누며 착석하자 아빠가 메뉴판을 우리쪽으로 넘겼다.



"우린 다 정했다."

"뭐 골랐어?"

"엄마는 안심스테이크, 아빠는 폭립."

"그럼 난 파스타 시키고 아빠꺼 좀 뺏어먹으면 되겠다. 오빠는?"

"난..."



시선이 메뉴판 위를 어지러이 맴돌았다. 각양각색의 음식 사진들 중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식욕 자체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메뉴판 위로 손가락을 짚었다.



"난... 핫샌드위치랑 양송이 스프."

"아 오빤 무슨 여기까지 와서 샌드위치야. 비싼 거 먹어, 비싼 거."

"이것도 맛있-"

"스테이크 먹어. 남으면 내가 먹게."



멋대로 말을 끊은 한별이가 벨을 눌렀다.



"우리 아들 동생 잘 둬서 호강하네."



내 속도 모른 채 옆에서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러게요."



영혼없는 말이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체실의 문이 열렸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고객님."

"네, 저희 안심스테이크 둘, 굽기는 둘 다 미디움레어로 해주시고, 폭립 하나, 게살 로제파스타 하나, 그리고 음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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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크는 훌륭했다. 입맛이 없던 게 거짓말로 느껴질 정도여서, 접시를 깨끗이 비울 뻔했다.



식사 도중 한별이가 내 허벅지를 만져대기 시작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읏..."



등골을 타고 기어오르는 오싹오싹한 느낌에 저항하기 바빠서 방금 입에 들어간 게 아스파라거스인지 소고기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앉은 자세를 고치는 척 하면서 허벅지를 옆으로 슬며시 뺐지만, 한별이가 손톱을 세우는 바람에 얌전히 몸을 맡겨야 했다.



"엄마, 우리 와인도 한 병 딸까?"

"얘는 차도 끌고 온 애가 무슨 와인?"

"대리 부르면 되지."



한손으로는 나를 추행하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그런 대화를 주고 받는 모습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대체 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집에서도 가끔씩 부모님이 안 보는 틈을 타서 내 몸을 주무르긴 했지만, 밖에서 이럴 정도로 분별없지는 않았는데.



"근데 우리 딸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돈 들어왔다고 그렇게 막 쓰면-"

"아 원래 인생은 한번이야 엄마."

"얘는 가끔 보면 인생 다 산 것처럼 말한다?"

"......"



엄마가 이쪽을 보며 동의를 구하는 듯 말씀하셔서 나는 대답 대신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한별이가 잠시, 아주 잠시,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또 뭔가 기분을 상하게 한 걸까.



슬며시 눈치를 보며 내몫의 음료를 마시는데 한별이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엄마 선물!"

"얘는 저녁도 샀으면서 무슨 선물을 또..."



그렇게 말씀하시는 엄마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엄마, 근데 나 그거 아까 차에 놓고 온 거 같거든? 나 잠깐만 내려갔다 올게."

"아유~ 됐다 얘. 줄 거 있으면 그냥 집에 가서 주고 밥이나 마저 먹어."

"그래, 거 뭐 거의 다 먹었구만."



엄마가 손사래치자 아빠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 안돼. 오늘 밥먹으면서 줄라고 했단 말야. 금방 갔다 올테니까 와인 시켜서 마시고 있어. 응?"



그렇게 말한 한별이는 벗어놨던 코트를 다시 걸치고는 곧장 단체실을 나섰다.



"정신없다 정신없어."



엄마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근데 엄마 선물, 차에서 내릴 때 챙겨서 코트 주머니에 넣지 않았었나?



의아해하는데 바지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오는 길에 한별이가 돌려준-이 부르르 떨렸다.



[화장실 간다고 하고 잠깐 나와]



한별이가 보낸 카톡이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나는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단체실을 나섰다.



나오라는 건... 주차장으로 나오란 거겠지. 그렇게 판단하고 계단으로 향하는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팔이 날 잡아끌었다.



"오빠."



모퉁이에서 기다리던 한별이였다.



"잠깐 이리 와봐."

"어엇..."



이렇다할 저항도 못한 채 그대로 팔을 붙잡혀 끌려간 곳은 화장실 앞이었다.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식당에 도착하기 전에 보여준 한별이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떠올랐다.



"한별-읍."

"다물어."



내 입을 틀어막은 한별이가 화장실 문을 밀어 열었다. 화장실 특유의 방향제 냄새와 희미한 락스 냄새가 코끝에 달라붙었다.



"아무도 없네. 다행이다."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한 한별이가 날 끌고 들어갔다.



끼이익-



칸막이 문을 하나씩 열어본 한별이가 가장 널찍한 칸-기저귀 교환대가 딸려있는 칸-에 나를 밀어넣고 따라 들어왔다.



달칵.



나를 좌변기 뚜껑 위에 앉힌 한별이가 문고리를 잠갔다. 몇번 흔들어서 열리지 않는걸 확인한 뒤, 벽에 달린 옷걸이용 쇠장식에 코트를 벗어 걸고 나서 내쪽을 돌아본다.



"오빠."



예쁜 눈매를 살짝 좁힌 한별이가 힐난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올 것이 왔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역시 기분이 나쁜 거구나.



아까 날 용서한 게 아니었어.



그래서 벌을 주려고...



"왜 자꾸 나 나쁜년 만들어?"

"미안해."



뱃속이 오그라드는 걸 느끼며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가 미안한지는 알고?"



한별이가 어디 말해보라는 듯 팔짱을 낀 채 문에 등을 기댔다. 체중이 실린 문에서 가볍게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카페에서 딴 여자랑 시시덕거린거랑, 오는 길에 너한테, 그.... 대들었던, 거랑..."

"아니. 말고."

"...메뉴 고를 때 두 번 말하게 한-"

"아니. 말고."

"...엄마가 너 흉보는데 고개 끄덕인-"

"크흡!"



작게 웃음을 터트린 한별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오빠 그거 방금 개그친 거야?"



...뭐지? 화난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한별이가 팔짱을 풀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자 한별이의 손이 내 뺨을 슥슥 쓰다듬었다. 보드랍고 따뜻한 손.



"그거 말고. 왜 나 무서워하는데 자꾸."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한별이가 손가락 사이에 내 귀를 끼우고 만지작거렸다.



"평소처럼 해, 평소처럼. 엄마가 아까부터 우리 디게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거든?"

"어?"

"오빠가 자꾸 내 눈치 보는 거, 다 티 난다고."



티가 날 정도였나.



"미안해."

"맨날 미안하대 무슨. 진짜 미안하긴 하고?"

"......"



말문이 막혀 손톱만 만지작거리는 날 보고 한별이가 피식 웃었다.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오빠. 오늘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다."



알긴 아네.



어디까지나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별이가 대뜸 타일 바닥 위로 무릎을 꿇었다.



"하, 한별아, 그럴 것까진..."



대경실색해서 일어서려고 하자 한별이가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입으로 해줄 테니까, 기분 풀어?"



......그런 거였나.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나는 반쯤 떼었던 엉덩이를 얌전히 붙였다.



한별이의 입 안은 무척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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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으, 맛 진짜 이상해."

"그러게 뱉으라니깐..."

"웃기시네. 삼킨 거 보여주니까 좋아 죽을라고 했으면서."

"......"

"오빠 오늘부터 고기 먹지 마."

"야, 그건 좀... 봐주라."



5분 후 화장실을 나선 우리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단체실로 돌아왔다.



선물을 차 안에 떨어뜨려서 찾느라 늦었다는 핑계를 대며 돌아온 한별이는 엄마한테 처음 듣는 명품 브랜드의 립스틱을 드렸다.



"오빠랑 같이 산 건데 맘에 들어?"

"어머어머, 얘는 진짜... 어머어머... 어머..."



엄마는 감탄사만 연발하시느라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하셨다.



그렇게 긴 저녁이 마무리됐다.



결국 와인은 주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갓길에는 다시 한별이가 운전대를 잡았다.



올 때와는 다르게 무척 부드러운 주행이었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 있을 때 한별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오빠."

"어?"

"사랑해."

"......."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신호가 바뀌고,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한숨쉬듯 대답할 수 있었다.



"......나도."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이거면...




1,2 편 둘다 가져온줄 알았는데 1편만 가져왔노 이게 진짜 마지막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