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전투 씬이 깁니다, 중요하진 않으니까 대충 스킵하셔도 돼요.]



3. 그녀는 지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그녀들은 적이 느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결투? 내가 왜?” 오늘 아침 오랜만에 마시던 물을 뿜었다.


학교 전통인 1대1 결투, 서로의 신념과 가치를 위해 기량을 겨루는 정정당당한 승부... 니 뭐니 하지만 결국엔 그냥 좆같은 상대를 합법적으로 패기 위한 수단이다.


공공연하게 결투장을 보냈다가 화가 풀린다던가 했다간 평생 이불킥 감이므로 대부분은 서로 싸우기 직전인 사람들을 주변에서 결투장 가라고 부추겨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식 결투장까지 써 보냈다는 건... 무슨 경우지????

“이야, 이 기만자 새끼 요즘 러브레터도 안 받더니 다른 거 받았네, 새로운 맛이라 좋겠다, 야!” 남자 새끼들이 옆을 지나가며 등을 툭툭 치고 지나갔다.


시발.


으아아아아아아악!!!!!!!!!!!!

안 그래도 환영회 준비한다고 소란스러워서 잠도 못 자겠는데 왜 이지랄이야!!!!!!!!!!!!!!!!!!!!

“왜 그래요, 선배?” 반쯤 영혼이 나가있는 내게 코토하가 다가왔다.


난 말없이 오늘 아침 도착한 결투장을 내밀었다.


“뭐, 매번 꼬이던 벌레들보다야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코토하가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음?”

“그냥, 선배가 매번 불편해하셨던 러브레터보단 나을 것 같아서요.”

“뭐, 어차피 잠깐이라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았긴 했는데...”

“그렇게 배려 안 해주셔도 돼요, 어차피 그 여자들 지금 이 자리엔 없잖아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저께 렌카와의 걸즈토크 이후로 조금 분위기가 무서워진 것 같긴 하지만 자세한 내용을 물으면 실례일테니 대충 넘어가도록 하자.


“아무튼, 이름만 적혀서 온 건데, ‘마츠리’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어?”

“마츠리요? 아마 1학년 차석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저도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요.” 코토하는 팔짱을 끼고 손끝으로 입술을 두드렸다.


“어어어어어어이!!!!!!!!!” 저 멀리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렌카가 뛸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러게 시끄럽게 소리치는 건 주목받는다니까.


“결투장 받았다며? 상대는 만나봤어?” 렌카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편지도 방금 뜯었는데 어떻게 알고 만났겠냐. 잠깐 체험학습이라도 다녀올까 고민중이다.” 벌써 소문이 저 멀리까지 퍼진 건가, 역시 소문이 무섭단 말이야.


“에이, 걸어온 싸움을 피하는 것도 그렇잖아? 처참하게 찍어눌러서 다시는 쳐다도 못보게 한다던지, 뭐 그런 건 어때?”

역시, 코토하가 무서워진 건 걸즈토크 때문이었어. 렌카까지 이렇게 변할 줄이야...


여자애들 수다가 얼마나 강력한지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귀찮은 거 해서 뭐해, 작년에 니 팬클럽한테 온 결투장 피해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번 해에는 그런 것 좀 없을 줄 알았는데....!” 책상을 쾅 내리치자 손날이 얼얼하게 달아올랐다.


“학교... 쨀까...” 난 책상에 축 늘어져 고개를 파묻었다.


“어머, 쉬러 가시는 거라면 저희 가문 저택이라도 방문하시겠어요? 조용한 방을 마련해둘게요.” 코토하가 양손을 모아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우리 그젯날 밤에 약속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코토하?”

“편지 검열부터 멈추시죠, 선배님?”

“글쎄, 누가 검열을 했다는 걸까?”

“작년에 선배가 받았어야 할 러브레터들이 지금 어디있는지 당사자들에게 공개해도 괜찮을까요?”

“날파리가 사라졌다고 좋아했던게 누구더라?”

또다시 여자들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알아들을 만한 말이 한 줄도 없으니 원.


“떠들거면 다른 곳에 가서 떠들어... 죽을 것 같으니까...” 심장을 부여잡고 옆에 있는 의자 위로 털썩 쓰러졌다.


“괜찮으세요, 선배?”

“야! 괜찮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웠다.


“귀찮음이 치사량이야...”

“정말이지, 글러먹은 사람이시네요. 그런 모습도... 읍!” 렌카의 손이 코토하의 입을 턱 틀어막았다.


시끄러워, 당사자는 이렇게 짜증나는데 주변 사람들만 들떠서는...


“둘 다 딴 데 가라고...” 난 가방에서 배게를 꺼내 두 귀를 틀어막았다.


“이 씨발... 귀찮아...”



“결국 이러니저러니 하셔도 결투장엔 나오셨네요?” 결투장 준비실엔 코토하가 앉아있었다.


“도망치려다 교수님한테 붙잡혔을 뿐이야.” 난 터덜터덜한 발걸음으로 준비실에 들어섰다.


젠장! 그 이상한 놈들만 아니었어도 안 들켰을텐데!

무슨 마츠리짱 팬클럽이니 뭐니 자기들 힘으론 잡지도 못하면서 소란만 피워가지고!

시발!

이 씨바아아알!

난 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토해냈다.


“셔츠 벗는 거, 도와드릴까요?” 코토하가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아냐, 결투복 정도야 혼자 입을 수...”

“벗는 거, 도와드릴까요?”

코토하가 내게 웃어보였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보랏빛 눈동자...


“선배, 이제 곧 나가실 시간이라구요?”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옷은 교복이 아니라 결투용 가죽 갑옷으로 바뀌어있었다.


“나 또 서서 잤어?”

“네, 옷 입으시다 잠드셨어요. 졸면서도 혼자 옷은 잘 갈아입으시던데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나가기 싫어!!!!” 가죽 안감의 거친 질감이 느껴지자 다시금 ㄴ가 무슨 상황에 쳐했는지 실감이 났다.


“어머, 1대 10도 이기시는 분이 무슨 걱정이신가요, 어차피 그런 날ㅍ, 아니 신입생 정도야 간단하게 이기실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아니 애초에, 학장님은 왜 내 의사도 없이 그런 조건을 내건 건데? 날 이기면 차석에서 수석으로 올려줘? 왜? 아니 그리고, 걔는 왜 그렇게 수석에 집착하는 건데? 뭐 수석하면 뭐가 달라지나?” 코토하의 말은 귓가에 들리지도 않았다.


난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학교에서 철저하게 선행학습을 하는 중이었다.


“학장... 내일 아침 쓰고 갈 가발을 싹 다 불태워버리겠어... 그 반질반질한 대머리를 끌고 나올 수 있나 어디 보자구...”

혼자 악에 받쳐 궁시렁거리는 동안, 어느새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코토하는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에 맞서느으으으으은! 3학년! 13전 13승! 무패의 전설! 입장합니다아아아아아아!!!!” 사회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하, 내가 왜 이런 경기를 해야하는 건지.


“그럼 다녀올...”

쪽, 무언가 뺨에 닿았다.


“코토하...? 방금 무슨...”

“시작했나보네요. 꼭 이기고 오세요, 왕자님?”

난 내 뺨에 닿은 물체가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코토하에게 떠밀려 반강제로 준비실 밖으로 끌려나갔다.


뭔가 촉촉한 무언가였는데... 뭐지... 개구리 같은 건 아닐테고...


“저기요, 긴장 좀 하시죠?”

생각에 빠진 내게 도전자가 말을 걸어왔다.


뒤로 묶은 포니테일머리, 꽤 큰 눈동자, 미형이라고 부르는 그런 얼굴이었다.


관중석에 있는 추종자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코토하가 봤다면 ‘어머, 꽤나 귀여운 아이네요?’라고 말할 법한 사람이다.


물론, 내겐 휴식을 방해하고 띄꺼운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는 끔찍한 악동이었다.


“자러 가야하니까 되도록 빨리 끝내자.”

「더블 채널」 , 「라이트닝」

“좀 진지하게 임하시라구요, 당신 같은 사람 상대하는 것도 거지같으니까.” 이거 말하는 뽄새 좀 보소.


“양측 준비하시고!”

“셋!” 상대가 검을 뽑았다. 육체전으로 가는 타입인가. 다행이야, 편하게 끝낼 수 있겠다.


“둘!”

“하나!”

“시작!”

“헤르메류, 1식, 「발도」 !”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격이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쾅!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흰 검기는 뒤의 벽까지 날아가 폭발했다.


그냥 육체파는 아닌가 보네.


시발.


상대는 일격으로 끝낼 생각이었는지, 피한 것에 조금 놀라더니 이내 공격을 퍼부었다.


“2식, 「경도(镜剑)」 .” 칼을 휘두르는 것과 정반대 방향에서 동시에 검격이 날아왔다.


바람을 이용한 건가? 독특하네.


쉬익! 쐐액! 머리, 목, 그다음 가슴, 아주 죽일 작정으로 덤벼드는구만.


좀 더 모아서 한번에 끝내려 했는데, 맞으면 더 귀찮을 것 같으니 빨리 끝내고 자러가야겠어.


“그렇게 피하기만 하셔서 이기실 수 있겠어요?”

시끄러워.


“지금이라도 항복하시지 그래요? 추한 꼴 보이기 싫으시면요!” 점점 더 칼을 휘두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하나 둘씩 날아오던 검기가 수십개가 되어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만 끝내자구요! 재수없는 아저씨!”

눈 앞에서 엄청난 크기의 검격이 휘몰아치듯 달려들었다.


“큿!”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맹렬한 바람에 몸을 쉽게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피하지도 못 하면서 재수없이 굴지 말라구요!” 순식간에 상대가 내 뒤로 뛰어올랐다.


칼이 내 등에 닿으려는 순간,

우르릉, 쾅! 콰쾅! 양팔에서 뻗어나온 번개에 허공에서 검기가 모조리 터져나갔다.


쾅! 콰콰쾅! 연쇄 폭발의 충격과 함께 상대의 작은 몸이 나가떨어졌다.


“피하기만 해서 뭐 어쨌다고?” 검기가 폭발하며 남긴 짙은 연기 속에서 마력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


“귀찮아.”

「트리플 채널」, 「궁니르-라이트닝」

콰직, 일자로 뻗어나간 번개가 상대의 배를 관통했다.


급소를 노렸다간 치료가 길어질테니 장기는 피했다.


렌카가 사람을 죽일 뻔했다며 따지는 걸 듣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심판? 빨리 좀 끝내줘요, 자러 가고 싶어.” 연기가 가라앉자 배에 작은 구멍이 뚫린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상대의 모습이 모두에게 드러났다.


“승자느으으으은!!!” 심판 옆에 앉은 렌카가 노골적으로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나한테 돈이라도 건 모습인데.


“잠깐... 아직 안 끝났어...” 마츠리가 배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궁니르-개화」” 배에 난 상처에서 수천 갈래의 번개가 뻗어나왔다.


갑옷의 보호 마법이 아니었다면 죽었겠지. 그래도 이젠 자러 갈 수 있어!

“아직... 아직이야....”

이런 시발! 아직이네?

상대의 몸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와 별개로 저 노란 액체는... 아니 저건 못 본 걸로 하자.


빨리 끝내는게 서로에게 이롭겠지.


“「트리플 채널」, 「궁니르-개화」” 조그만 몸 안에서 수천, 수만 번의 천둥이 울려퍼졌다.


왜인지 들떠보이는 렌카 말고는 전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 너무 심했나...


뭐, 죽는 것도 아니고! 빨리 자러 갈 수 있으면 그걸로 됐지!

나는 다시 심판을 올려다보았다.


“도, 도전자 패배! 경기 종료!” 아무도 환호성을 외치지 않았다. 준비실에서 창살 너머로 바라보는 코토하의 작은 외침을 뺀다면.


“아직...이야...” 쓰러졌던 마츠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인지 상처입은 고양이를 보는 것만 같아 가슴 한켠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저 상처를 낸 사람이 나니까 말이다...


“승부욕은 좋지만, 너도 여자애니까 몸을 좀 소중히 여기라고.”

「힐링」 . 등까지 벌어진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고통의 여운은 여전하겠지만 더 이상 새로운 고통이 찾아오진 않겠지.


“안돼... 다시... 다시 해... 나는... 수석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다들 네가 강한 건 알아.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그만해도 돼.”

만년 차석이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고.


나는 심판 옆에서 기뻐하는 렌카를 올려다보았다.


“빨리... 무기... 들어...” 털썩,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나려던 마츠리가 풀썩 쓰러졌다.


기력이 다한 건가.


바닥에 널부러진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작은 몸은 안쓰러움을 넘어 대견해보이기까지 했다.


킁킁, 보건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이상한 냄새가 느껴졌다.


다리 사이에서부터 바닥이 천천히 젖고 있었다.


전격 마법에 맞은 부작용인가...


굳었던 근육이 풀리니까... 이뇨근도...


나는 입고 있던 전투용 재킷을 벗어 마츠리의 하반신을 가려주었다.


“아이고, 애를 얼마나 세게 다룬 거니?” 옆에서 똥똥한 몸매의 보건 선생님이 걸어오셨다.


“약하게 때려서 계속 얻어맞는 것보단 이게 낫죠. 쌤도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그래, 잘했다. 차라리 한번에 기절하는게 낫지.” 보건선생님은 마법으로 마츠리의 상태를 살피시더니 이내 둥둥 떠다니는 들것 위에 올려 싣고 가셨다.


그럼 이제,

끝났다아아아아!!!!!

자러 가야지이이이이이이!!!!




“그럼 다들 과제 똑바로 해와라.” 눈이 번뜩 뜨였다.


이번 시간에는 좀 깨어있으려 했는데, 잠들었네.


오늘 1교시부터 결투를 했더니 몸에 아직도 피로가 잔뜩 쌓여있다.


“맞다! 어이 잠탱이! 나 좀 보자!” 악마학 담당인 카터 선생님께서 교실을 나가려는 나를 불러세우셨다.


“너 혼자 잠 자려고 만든 동아리 있지? 이번부터 규정이 바뀌어서 최소 부원 2명을 못 맞추면 폐부다.”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폐부라니! 폐부라니! 나의 수면 연구 동아리가 폐부라니!!!

코토하는 카터쌤이 맡고 계신 악마학 동아리에 있었고, 렌카는 약학 연구부야... 이런 동아리에 들어오려는 신입생도 없을 거고...


끔찍한 일이 하루에 두 번이나 있다니... 최악이야...


“뭘 그렇게 절망을 하냐.” 선생님은 이젠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부원 이미 모아놨다, 오늘 더 이상 악마학 강의 없으니까 이 교실에서 면접이라도 보려면 보고.”

“쌔애애애애애애앰!!!!!!!!!” 귀찮음이 모두 사라졌음을 말씀해주신 카터 선생님은 나의 격한 포옹을 옆으로 슥 움직여 피하셨다.


“몇 명인데요?”

“한 명.” 엥?

“그럼 면접을 보는 의미가 없지 않아요?”

“상대를 보면 알게 될 거야.” 카터 선생님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책을 챙겨 교실을 나가셨다.


“뭐야, 누구길래 저러셔...?”



“도대체 누가 전투마법 연구회나 약학 동아리 버리고 잠자는 곳을 왔나 했는데... 너였냐?” 악마학 교실의 삐걱거리는 샹들리에 아래에는 마츠리가 앉아있었다.


“저면 안되나요?” 이 애... 전부터 생각했지만 되게 싸가지 없네...


“여긴 왜 들어오려는 건데?”

“당신을 이기려고요.”

“...? 나는 왜 이기는데??”

“그래야... 아버지가 인정해주시니까요...”

“아버지? 잠깐, 너 성이 뭐라고?”

“아가츠카요. 마츠리 라 폴드 아가츠카.”

“아가츠카라면....”

“네, 국방성 장관 아가츠카 공작이요.” 그래서 이렇게 싸가지가 없었구나... 이래서 금수저 새끼들은...


아가츠카라면 극우파에 대대로 국방성에 소속된 뼈대 굵은 꼰대 집안이다. 2학년 때 만났을 땐 진짜 끔찍했지.


“나를 이기면 아버지가 인정해주신데?”

끄덕.


“못 이기면?”

“남동생한테 후계가 넘어가죠, 몰라서 물어요?” 마츠리가 다리를 딱 꼬고 나를 째려보았다.


진짜 싸가지가 뒤져버렸구나.


“면접 볼 필요 있어요? 어차피 저 한명 아니면 폐부라면서요?”

“세상에 만사가 귀찮아하는 사람은 많아.”

“최소한 이 학교엔 없죠, 당신처럼 의욕도 없고 목표도 없든 할 일 없는 인간은 원래 이 학교에 못 들어오니까요.” 이 새끼... 들을수록 빡치네...?

“여기 오면 날 이길 수 있기는 하고?”

“네?”

“날 이기는게 목표라며, 그럼 전투마법 연구회가 낫지 않아?”

“그건...” 마츠리는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거기서도 이렇게 싸가지 없이 굴다가 짤렸겠지.


“면접에서 짤렸어?”

“그런 적 없어요!” 마츠리가 책상을 쾅 내려쳤다.


정곡인가보네. 손 아프겠다.


“그 후계인가 뭔가 하는 거, 중요해?”

“미쳤어요? 다른 가문도 아니고 아가츠카 가문의 후계라구요. 하긴 뭐, 당신은 귀족도 아니니까 이런 건 이해못하겠죠.”

“부모님은 백작이셔, 계승권 포기하고 스스로 호적에서 파서 그렇지.”

마츠리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마치 목장에서 탭댄스를 추는 소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야.


“아무튼, 아가츠카가 가주, 그게 니 목표야?”

“그렇죠, 지금까지 계속 말했잖아요.”

“그건 니가 정한 거고?”

“그, 그거야...” 마츠리는 대답을 망설였다.


보나마나 뻔하다. 그 양반이 자기 자식한테 꿈을 꾸게 해줬을 리가 없지. 낮에는 훈련, 밤에는 공부. 어떻게 살아왔을지 눈에 선하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세뇌당한 걸 하려 하지 말고.” 난 벽장 뒤에 숨겨놓은 간이 침대를 펼쳐 드러누웠다. 카터 쌤 미안.


“날 귀찮게 하지도 말고.” 아무 동아리나 들어가서 남한테 피해 안 가게 잠이나 자야지.


“그리고, 아버지한테 저 오늘 잠이나 자는 동아리에 들어갔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도 없잖아?”

“동아리 명칭은 마법 무의식 연구부던데요.”

“그거야 대충 있어보이는 이름으로 지어야 승인해준다고 해서 그렇지.”

“정말이지, 한심하시네요.”

“그런 사람한테 제대로 데미지도 못 주고 쳐발린 넌?” 하- 통쾌하다. 그래 이 말이 하고 싶었어.


대답이 없다.


옆을 슬쩍 돌아보니 마츠리는 벌개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야, 울어?”

“아니거든요!” 마츠리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알러지라 그래요!” 그럴 리가 없잖아.


자기는 그렇게 싸가지 없게 말해놓고, 정작 남이 한마디 던지니 울어버린다라...


이성적으로 따지기엔 좆같았지만 너무 불쌍한 표정으로 울고 있는 마츠리였기에 더 이상 몰아붙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어나봐.” 마츠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 이긴다며, 일어나 보라고.” 아직도 눈물이 그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격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하나는 니가 오늘 아침 맞았던 전창형,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직접 접촉해서 전기를 흘리는 방출형.” 마츠리는 그제야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창형은 맞아봤으니, 방출형도 맞아봐야지?”

“자, 잠시만요! 전 당신을 이기려고 온 거지 이런 걸 맞으려고 온게...” 손에서 스파크가 튀자 마츠리가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한대도 안 맞고 이기려고? 너 번개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그, 그건 아니지만...”

마츠리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처음은 20분의 1 정도로 때린다.” 손바닥을 마츠리의 복부에 가져다 대고, 「마나 플로우」, 「스파크」.


파지지직! 정전기에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이 위로 붕 떠올랐다.


“꺄흑!” 음... 방금 조금 민망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허억... 허억...” 마츠리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볼에 떠오른 홍조는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으음... 이건 좀 많이 위험하네...


“이, 이게... 20분의 1이라고요...?” 헐떡이는 목소리가 은근히 자극이 강하다는 것은 처음 깨달았다.


“어, 어... 경기장에선 갑옷에 데미지 감소가 붙어있으니까 조금 덜 아프게 느껴지겠지만. 경기장에서 10분의 1으로 맞았을 때 이 정도일 거야.” 나는 마츠리의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그나마 렌카처럼 흉부의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게서 등을 돌리고 책상 위에 상반신을 얹은데다 저 표정...


다른 사람이 보면 위험하겠는걸.


“야, 신입생, 좀 쉬는 자세라도 바꾸는게 어때...?”

“...왜요...?”

그녀가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교실의 문이 쾅 열렸다.


“어머, 선배? 제가 두분의 시간을 방해하기라도 한 건가요?” 코토하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신입생에게 손을 대실 줄은 몰랐는데요.” 코토하의 뒤에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오는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잠깐! 오해야! 오해라고!”

“하, 한번만 더... 해주세요... 더 세게...” 하필 이 순간에 완전히 넋이 나간 마츠리가 결정타를 날렸다.


“내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기분탓이지?” 코토하의 뒤에서 정확히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렌카가 나타났다.





“아무리 결투 훈련이라도 이런 으슥한 곳에서 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선배.”

“그래, 남녀가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단둘이라니, 말도 안되지.” 장장 30분에 걸친 설명 끝에 정신을 차린 마츠리가 해명을 돕고 나서야 나는 후배에게 손을 댔다는 의혹을 벗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카터 쌤이 먼저 빌려주신 교실이라고...” 이 말만 지금 10번쯤 반복한 기분이다. 아, 기분만이 아닌가.


점점 짜증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래서, 부원으로 뽑을 거야?” 풀리나 싶던 두 사람의 표정이 다시금 싸늘해졌다.


“설마, 계속 여자랑 단둘이 계시려구요?”

“그러는 너희들도 나랑 둘이 있으...”

“그건 다른 거구요!”

“그건 다른 거고!” 두 사람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그저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날 때마다 날을 세우는 두 사람에 나는 물론이고 마츠리까지 움츠러들고 있었다.


“난 반대야, 결투야 전투마법 연구회 애들이 훨씬 나을거고, 널 이기겠다고 이런 동아리에 들어오는 건 말도 안돼.”

“그래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게 아니라면 말도 안되죠.” 이미 두 사람에게 내 의사는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좆같다, 시발.


“대체 왜 둘 다 그렇게 귀찮게 구는데, 그렇지 않아도 얘 때문에 한달치 귀찮음을 다 쓰고 있다고.” 결국 참다 못한 내가 짜증을 내며 입을 열자 두 사람 모두 조용해졌다.


“아침부터 좆같은 일로 힘을 뺐는데 니들까지 그래야겠냐?” 왜인지 마츠리까지 조용해진 것 같았지만 넘어가자.


“왜, 왜... 말을 그렇게...” 작아진 코토하가 말을 웅얼거렸다.


“그런 넌? 도대체 내가 이 꼬맹이 데리고 결투를 가르치든 혼자 잠만 쳐자든 뭔 상관인데?”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뭐? 뭔데? 말을 해봐!”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귀찮으니까 다 꺼져, 그냥.” 난 일어나 교실을 나가버렸다.


도대체가, 렌카야 원래 오지랖이 심했다지만 오늘은 정도가 지나쳤다. 코토하는 심지어 원래 이런 성격도 아니었을텐데.


다 좆같고 다 귀찮아.


집착하는 것도, 짜증나게 구는 것도.


“잠탱이, 부원 뽑기로 했어?” 마침 모퉁이에서 쌤이 튀어나오셨다.


“네, 동아리에 넣어주세요. 저도 쌤처럼 제자나 가르치죠, 뭐.” 둘 다 엿이나 먹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