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낯선 천장이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핑크빛의 레이스가 북극의 오로라처럼 내 눈앞에서 살랑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레이스가 흔들리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자고 있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일어나고 보니 살랑거리는 레이스가 내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살랑살랑하며 내 얼굴을 스치고라는 느낌은 어린 시절 강변에 있는 강아지풀로 내 얼굴을 간지럽히는 느낌과 매우 비슷했다.


거슬리네, 나중에 시간 있으면 다 뜯어버리든가 해야지.

대체 나는 얼마나 잔 것일까?


소주와 맥주를 섞은 술을 연속해 10회 연속으로 먹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다.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니 팔과 다리에 힘이 없다.

당분이 부족하거나, 오랜 시간 동안 밥을 굶어서, 아니면 둘 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이 수전증에 걸린 사람의 손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배고프다.


창문을 통해서 밝은 햇살이 잔뜩 쏟아질 듯 내리쬐고 있었다. 분명 어제 잠에서 일어났을 때 한밤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는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배에서 자꾸만 꼬륵꼬륵- 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분명 밥을 좀 달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겠지, 한창 먹을 나이인 20대에 1일 1식은 너무나도 잔혹한 식단이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정원사 한 명이 정원의 나무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정원 여기저기에 고슴도치처럼 가지가 삐죽삐죽 솟은 나무들이 많은 걸 봐서 정원사는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제 그 약은 무엇일까…?


예진은 나에게 이상한 약을 먹였다.

나에게 입을 맞추며 그녀의 입에 들어가 있던 알약을 삼키자마자 내 의식은 물에 빠진 것처럼 흐리멍덩하게 변해버렸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대낮에 일어나게 되었다.

몸은 괜찮겠지? 수면제? 안정제?? 그런 종류의 약인 것일까? 


원래 세계에서는 감기약 하나 안 먹은 건강한 몸이었는데, 여기서는 먹자마자 바로 잠에 빠질 만큼의 독한 약을 먹으니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그러고 보니 몸도 좀 야위었네.


반쯤 걷어 올려진 잠옷 소매 사이로 얇은 팔목이 드러났다.


입고 있던 잠옷을 벗어 던지고 화장실 앞의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한번 바라보았다.

...목욕탕에서 봤을 때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의식하고 자세히 보니 확실히 이건 내 몸이 아니었다.


골격이 가늘어졌다고 해야 할지, 근육과 살이 없어졌다거나 전체적으로 야리야리하게 변한 내 몸이 조금 어색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여성스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핏줄이 비칠 만큼 얇고 새하얀 피부와 여성의 몸처럼 가느다란 몸이 내 눈에 들어왔다.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펴보고, 팔을 구부리면서 힘을 주기도 했지만, 주지 않았을 때랑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몸에 근육이란 근육은 다 없어진 것 같았다.


팔뚝을 한번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성인 남성의 팔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말랑거리는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여성의 팔처럼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팔, 붕붕 휘둘러보아도 위압감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팔뚝이었다.


어떻게 남자가 돼서, 운동을 이렇게 안 할 수가 있냐…?


원래 몸 주인에게 묻고 싶었지만, 연락을 할 방법이 있을리가 없었다. 

내가 살고 있던 시대에서도 보통의 여자들은 근력운동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이 세계의 아름이도 근력 운동을 등한시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리고 가슴에 이거는 멍인가? 인제 보니 팔에도 멍이 났네.


손가락으로 왼쪽 가슴에 난 멍 자국을 한번 바라보았다…. 뭐 거의 다 아물어가서 제대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확인하지 못할 그런 멍 자국이었지만

내 왼쪽 가슴에는 아주 희미한 멍 자국이 남아 있었고, 팔에도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건 뭐 얼룩무늬 젖소도 아니고.


이런 것들은 언제 다 생겨난 거지?


...그걸 내가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점집을 차렸지.

이쯤하고 일단 배고프니까 밥부터 좀 먹어야겠다.


... 목에도 났네…?


손을 들어 목울대에 난 붉은 자국을 손으로 쓸어 만져봤다.

마치 누군가가 밧줄로 묶은 것처럼 내 목에 새겨진 한줄기의 흉터. 이쯤 되면 내가 목욕탕에서 몸을 씻을 때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게 용할 정도였다.


...아니면 이번 회귀 때 변한 사항일 수도 있고.


내 휴대전화의 전화번호 목록이 없어진 것처럼, 이런 신체 변화 역시 회귀 때 새로 바뀐 사항일 수도 있었다.

.... 혹시….


"상태창"


변화는 없었다. 그럼 그렇지.


"사용자 한아름"


.... 설마 해서 기대 한 내가 바보 병신이지

방바닥에 널브러진 윗도리를 다시 입고 방문을 열었다.


방학 때 학교 도서관을 찾은 것처럼 조용하기 그지없는 집, 2층의 중간 부분은 뻥 뚫려있어 1층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여서, 나는 고개를 살짝 내밀어 1층을 한번 바라보았다.

집이 너무 넓어서 1층 거실과 주방밖에 볼 수 없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집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는 건가…?


계단을 내려가 1층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덕션 위에 냄비가 있길래 뚜껑을 열어보니 어제 먹다 남은 카레가 있었다.


으음…. 카레 싫어, 싫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밥솥을 열어보니, 이 역시 어제 먹다 남은 콩밥이 있었다.


콩밥에 카레라니, 다시 봐도 정말 가슴이 웅장해질 것만 같은 환상의 듀오였다.

어디 뭐 라면 같은 거 있으면 그거나 끓여 먹고 싶은데.


인덕션 아래에 선반을 열어보니 참치통조림, 햄 통조림, 꽁치 통조림, 즉석 밥 같은 것들이 보관되어있는 것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쪼그려 앉아서 그 선반을 뒤져보면 라면도 충분히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부리 완성탕면- 거 참 고놈 오동통통하게 생겼네


나는 어렵지 않게 주황색 포장지에 너구리가 그려진 라면을 찾을 수 있었다.


노부리 완성탕면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 그 맛이랑 비슷한 건가? 나는 진라면이 좋은데, 뭐 없으면 없는 대로 먹을까?


라면 끓일 때 쓰는 냄비도 어디 잘 찾아보면 있을 것 같은데- 싱크대 아래쪽을 한번 볼까?


역시 냄비 같은 건 싱크대 아래쪽 선반에 놓는 게 국룰이긴 하지, 그러면 물 좀 받아놓고, 인덕션 이거는 어떻게 키는 거지?

음…. 원래 본가에서나 자취할 때나 가스레인지를 사용해서 오늘 처음 인덕션을 만져보는 건데….


대충 이게 전원인가…?


손가락으로 인덕션 앞에 있는 원형 표식이 그려진 버튼을 누르니 버튼에 붉은빛이 한번 점멸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키고 싶은 위치를 한번 누르고 전원 버튼에 있는 화살표 중 위에 있는 화살표를 몇 번 누르니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인덕션.


오늘 처음 써보는 거지만 별로 어려울 건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구조 자체도 가스레인지랑 비슷한 구조였으니까.

인덕션 위에 물을 받아놓은 냄비를 올리고, 물이 보글보글 끓기 전까지 기다리기 뭐해서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라면에는 역시 달걀이지, 파가 있으면 좋기는 좋은데, 그러면 손이 너무 많이 가니까 대충 간단하게 달걀만 까 넣을까…? 너무 깔끔한데?


CF에서 나올법한 그런 냉장고네….


2열로 잘 정리된 마실 것들, 그리고 채소류는 채소끼리 과일은 또 과일끼리, 육류와 어류는 또 그것끼리 정리된 냉장고였다.


일반 가정집에서 볼 수 없는 그런 냉장고, 자취하면서 친구들 집에 있는 냉장고나 아니면 본가의 냉장고와 비교 하는 게 실례가 될 정도로 너무나도 깔끔하게 정돈된 냉장고였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구조라 나는 별로 어렵지 않게 달걀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오동통통 농심 너구리~ 너구리 한 마리 하고 가세끼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옷!!!"


냉장고 문을 닫으니 예진이 내 옆에 서 있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언제 왔는지 내 옆에 서 있는 예진을 보자, 진짜 농담 안 하고 하현우의 고음 따위는 그냥 씹어먹을 고음의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시발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오냐…. 시발 오면 온다고 말이나 해주던가, 진짜 구라 안치고 심장마비로 죽을뻔했다.


"...뭐 하는 거니?"


"라면 먹을 건데요…?"


"라면…? 라면이라…."


내가 라면을 끓여 먹겠다고 말하니 예진은 입으로 몇 번 라면이라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뭐 실수 한 건가?? 마음대로 냉장고 문을 열어서 화라도 난 건가? 아니면 쪼잔하게 내 것만 끓여서 삔또가 상한 건 아닐까?


아니 뭐 알면 같이 끓여주지, 내가 뭐 안 끓여줄 사람으로 보이나…?

뭐 겨우 라면 하나 가지고 엄청나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냐….


"배가 고팠나 보구나, 자리에 있어 내가 끓여줄게."


"...? 괜찮아요, 라면 정도는 혼자 끓여 먹을 수 있어요."


"..어?"


콩밥 카레밥, 그런 걸 맛있다고 먹는 예진의 식성을 봐서 빅데이터적인 사고방식을 고려해봤을 때

라면 물을 분명 한강으로 만들어 놓을 게 분명했다.


왜?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밥에다가 콩을 섞어 넣을 사람이라면 충분히 라면 국물도 한강처럼 불려놓을 가능성이 컸다.

수학공식의 그것처럼 콩밥을 자주 먹는 사람들은 통계학적으로 봤을 때 한강 라면을 먹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물론 예진이 그런 사람일 것이라고는 검증되지 않았지만


굳이 불필요한 도박을 하느라 내 소중한 한 끼를 날려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 그리고 뭐 수틀리면 칼이나 휘두르는 저런 여자랑 더는 같이 뭘 하고 싶지 않았다.

라면이 끓여지기만 하면 냄비를 들고 내 방에서 라면을 먹는 게 내 계획이니까-


"그래? 그러니…?"


명치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는 예진, 그녀는 내 말에 엄청난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는 예진,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분명 전 회귀 때랑, 전전 회귀 때도 이런 반응을 보였던 것 같은데, 설마 또 칼부림을 추지는 않겠지?

아니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 게 무슨 대역죄라도 되는 걸까? 


".... 그러면 혹시 내 것도 같이 끓여줄 수 있겠니?"


"아니 뭐 안될 건 없지요, 대신 달걀은 제거에요"


아니 뭐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뭐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인 줄 알았네.

나는 냉장고에서 달걀을 하나 더 꺼낸 뒤, 냄비에 물을 맞추고 선반에서 라면을 한 봉지 더 꺼냈다.


뭐……. 식사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이번 회귀에서 그녀는 별로 나에게 거칠게 굴지 않았다.


전 회귀 때 잔혹하게 칼을 휘두른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아주 얌전히 의자에 앉아 내가 라면을 끓여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독심술을 내가 배우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게 별로 커다란 위협이 되지 않아 보였다.


... 굳이 표현하자면 철창에 갇힌 사자? 호랑이 같은 그런 느낌?

무섭지만, 지금 당장은 헤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수프를 넣고 면을 넣었다. 면이 다 익기 전에 예진과 내 앞에 들어먹을 개인 접시를 가져다 놓았다.

뭐 김치나 그런 것도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니까 그건 어쩔 수 없고.


그리고 팔팔 끓는 물에 달걀을 집어넣은 뒤, 달걀의 가장자리가 새하얗게 점점 익어가는 걸 보자마자 나는 인덕션을 끄고 냄비를 들었다.


"...우리 옛날에 라면 이렇게 많이 먹었는데, 생각나니 아름아?"


아니요


"그때는 뭘 해도 재밌었는데, 같이 라면만 먹어도 행복하고 가슴 설렜는데…. 왜 그때는 내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미안해…. 미안해 아름아…."


예진은 두 발을 의자 위에 올린 뒤 자신의 팔로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은 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왜 예진이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이 세계의 아름이와 여러 말썽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일단 울고 있는 예진을 달래주는 게 가장 급선무이지 않을까?


지난 회귀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 중 하나는…. 억측이긴 하지만 예진의 정신이 좀 불안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래 위에 쌓아 올린 누각처럼 정신이 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냥 버틸 수 있는 그런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휘두르고 사람을 헤치는 급작스러운 행동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충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일단 그녀를 달래줘서 그녀의 정신을 보듬어주는 게 내가 살 방법이 아닐까?


"배고프다, 라면 먹자"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앉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젓가락을 손에 쥔 체 나를 바라보는 예진, 그녀는 방금 이런저런 사연 있는 말을 한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를 위로 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그녀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잠시 할 말을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