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가끔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힐 때 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세 시대의 수도원에서는 침묵의 시간이라 해서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행위를 일종의 수행으로 삼았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이곳은 현대의 수도원이 되는 건가…?


잘 모르겠다.


라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골백번도 더 생각해보지만 아무리 봐도 내 앞에 있는 저 여자는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다.

왜 저 미치광이 같은 여자가 아직도 정신병원에 입원이 되지 않았는지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제 와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오로지 저 여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조용히 목숨을 부지하는 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게 전부다.


달칵- 


예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릇은 텅 비어있었다.


"잘 먹었어,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뇨, 괜찮아요, 제가 설거지할게요, 저 자신 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설거지에요, 그냥 맘 편하게 있어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부디 내가 안 보이는 어딘가에 박혀 주기를 부탁합니다.


"오늘따라 꼭 다른 사람 같네, 마치 다른 사람이 네 몸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야.

뭐…. 나는 아름이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 우리 아름이 행세하고 있으면…. 난 너무 화날 것 같아."


"하 끅-"


구라 안치고 엄청나게 놀랐다. 저 여자는 제3의 눈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왜 무협지 같은 걸 보면 사람의 본질을 꿰뚫는 심미안이라든지 뭐 그런 걸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에 여기서 내가 원래의 아름이가 아니라 평행 세계의 아름이라는 것을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한아름이 한/아/름으로 되버리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그녀의 성격을 고려해봤을 때 그건 도저히 공상으로 웃고 넘길 만한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점점 풀리면서, 라면의 면발을 잡고 있던 젓가락이 라면 그릇 위로 떨어졌다.


지금까지 먹고 있던 라면의 국물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무미. 혓바닥에서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떨리는 눈으로 예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 수 없는 차가운 인상, 미술관의 석고상처럼 딱딱한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도무지 그녀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농담이야, 나의 이름도 아니고 설마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잖니.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하고 있어 아름아? 혹시 어디 아픈 데라도 있니?"


"아뇨 없어요…. 저는 괜찮아요, 멀쩡해요…."


"체한 것 같은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는걸"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저 멀쩡해요,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그냥 편하게 있어 주세요"


"...그래? 내가 보기에는 안 괜찮아 보이는데"


예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섰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예진은 허리를 구부려 앉아있는 나와 눈높이를 마주쳤다.


예진의 길게 쭉 뻗은 속눈썹의 개수를 헤아릴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코에서 나오는 바람이 내 콧잔등에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바짝 다가왔다.

저 오세아니아의 바다에 있다는 블루 홀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청색의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피가 마른다, 침이 비쩍비쩍 마르기 시작해 혓바닥이 논두렁처럼 갈라지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숨…. 숨…. 숨 막혀….


그냥,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할까?

아 저는 한아름이지만, 당신이 알고 있던 한아름이 아니라고. 나는 남자와 여자의 성 역할이 반전된 곳에 온 평행세계의 한 아름이라고 그녀에게 말할까?


분명 그녀는 헛소리라고 치부하겠지, 재수가 좋으면 정신 병원에 나를 입원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면 적어도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만큼은 목숨을 위협받을 일이 없겠지, 하지만,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아름아?


그런 말을 내뱉으며 열이 있는 대로 받은 예진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두 번의 회귀 동안 나는 예진이 화를 낸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저 깊은 심연과도 같은 어둠만이 존재하고 있었을 뿐 나는 단 한 번도 그녀가 화를 내고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과연 진심으로 화를 내는 예진의 모습은 어떨까?

내 머릿속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그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의 분노는 지금까지 감당해왔던 그 어떤 것들보다 더 무섭고 섬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고 싶어….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여기서 이런 미치광이 같은 여자랑 같은 집에서 라면을 먹고 있어야 하는 거지?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 아무 걱정 없이 낮잠을 자고 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까?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다시 예진의 얼굴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그녀는 잠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되겠다. 아름아 내가 보기에는 넌 좀 휴식을 더 취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내가 반쯤 먹다 남긴 라면 그릇을 음식물 처리기에 갖다 버린 후 공주님 안기…. 아니 이 세계에서는 왕자님 안기가 되는 걸까?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예진이 나를 들어 올린 탓에 부끄럽지만 내 입에서 마치 소녀 같은 비명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꺄-


시발…. 이게 어떻게 예비역 병장이 낼 수 있는 비명인지….

더럽고 끔찍하다. 근묵자흑이라고 정조역전 세계에서 살아가다 보니 나도 점점 이 세계의 남자들처럼 여성스러워 지는 것은 아닐까?


... 내 미래가 정말로 두렵다. 어쩌면…. 꿈속에서의 나처럼 나중에는 하와 와와 아기 아름 장이라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내뱉고 다니는 건 아닐지….


"... 얼굴이 더 창백해졌는데,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아름아 병원에 갈까?"


"아니요, 괜찮아요, 저기 거실 앞에 흔들의자에 앉아서 쉬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아요."


하여튼 나를 들어 올린 그녀는 정원이 보이는 창문에 있는 흔들의자에 나를 앉혔다.

되는 데로 말을 내뱉기는 했는데 정말 시야에 탁 트인 정원이 보이니 가슴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코스모스는 피어나고 이런 날엔


"산책하러 나가고 싶니?"


와!! 이예진!!! 네가 거기서 왜 말해!!! 이 세계의 최종 보스!!! 약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 기분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칼부터 냅다 휘두르고 보거든요.


칼에 찔리면 겁나 아픈 대신 과거로 회귀할 수 있습니다. 

진짜 겁. 나 아픕니다.


"날씨가 좋구나, 나들이 가기 딱 좋은 날씨야, 일단 설거지를 하고 나서 뭘 할지 결정해보자.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내 뒤에 있는 예진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그 뒤, 뒤로 돌아서 설거지를 하러 갔는지, 뒤편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조용한 침묵보다는 약간의 소음이 인간 건강에 더 좋다는 연구 결과를 어디서 읽었던 것 같다.


침묵은 사람을 미치게 하지만 생활을 하면서 나오는 백색 소음은 인간의 정신을 윤택하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그런 연구였는데….

어디에서 읽었지…? 오래전에 스치듯이 읽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 뭐 일단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백색 소음이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달그락거리며 그릇과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물이 달라지는 소리 등등은 널뛰기 뛰듯이 날뛰는 내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


정원을 바라보니, 정원사가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 좀 힘들어 보이는데, 날씨가 가을 날씨인데 반소매를 입고 움직이는 정원사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각종 기피 업종에서 일을 해봐서 아는데, 혼자서 이렇게 넓은 정원을 정리하려면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했다.

만약에 나보고 이런 일을 하라고 하면 3일도 안 돼서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했을 텐데, 입 꾹 다물고 조경 일을 하는 정원사를 보니 존경스러웠다.


떨리는 손과 발이 진정되고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 박동도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이 세계의 한 아름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빨리 이 세계의 한 아름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그 기록을 읽고, 최대한 한아름과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저 눈치 빠르고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는 일에 있어 조금의 손 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예진에게 골백번도 난도질을 당할 게 분명했다.

물론 높은 확률로 정신병원에 감금될 확률이 높겠지만, 아니지, 정신 병원에 가두기 전 까지 그녀는 왜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한아름이랑 다르게 행동하느냐고 나에게 물어볼 게 분명했다.


안전핀이 뽑혀나간 수류탄처럼 불안정한 정신 사고를 하고 있는 그녀가 나를 앞에 세우고 뭐라 물어보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그건 분명 썩 즐거운 장면은 아니었다.


"뭐 하고 놀까?"


"네?"


예진이 내가 앉은 흔들의자를 거실로 향하게 돌렸다.

성인 남성이 앉은 의자를 힘으로 돌리다니, 이 여자 힘이 얼마나 센 걸까?


아까 왕자님 안기로 나를 들어 올린 것도 그렇고, 자세한 사항은 모르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진은 충분히 두 손으로 나를 때려 팰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건 여기 아름이 기준이 아니라 원래 세계의 아름이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는건 이 세계 아름이는... 뭐 안 봐도 비디오다.


"뭐 하고 놀고 싶니…?"


"에…. 저기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있어지고 싶은데요?"


무릎을 굽혀 내 눈과 눈높이를 맞춘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뭐 좋을 대로 하자-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아- 그래 그렇지, 그걸 잊고 있었네!"


예진은 뭔가 생각이 난 게 있는 듯, 쪼그리고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냉장고 문을 연 뒤에 어디서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마한 소쿠리 안에 사과를 몇 개 정도 담은 후 다시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나와 얼굴을 마주 보고 싶은 듯 거실에 조그마한 소파 하나를 가지고 와 앉았다.

예진은 사과가 담긴 조그마한 바구니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뒤, 소쿠리 안에서 날카로운 과도를 꺼내 들었다.


과도를 자르기 위한 은빛 날이 태양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며 내 눈을 비췄고, 나는 그 풍경에 그만 흔들의자에서 균형을 잃고 자빠지고 말았다.


"끼에에에에에엑!!!"


"아…. 아름아??"


남자의 비명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날카로운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이제는 본능에 각인된 공포감이 다시 스멀스멀 내 의식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칼을 들고 있는 이예진 그건 바로 내 죽음이라는 공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느꼈던 그 어떤 공포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섬뜩한 느낌이 내 명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찌푸려질 것 같은 그런 공포감에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의식이 흐려지고…. 바지 아랫도리에 축축한 무언가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현상에 대해서 나는 조금도 신경 쓸 수 없었다. 어떻게든 내 다리는 본능이 가는 대로 어떻게든 엉금엉금 움직이면서 그녀와 최대한 멀어지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고

힘이 풀린 다리를 대신해서 내 몸통을 지지해주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아름아…? 아름아…?"


"카…. 카…. 아…. 카아…. 카….:"


분명 이성은 그녀가 사과를 깎기 위해서 과도를 들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 진정하자…. 진정하자 한아름….

근데 만약에 과도로 내 몸통을 찌르면 어떻게 하지? 두 번이나 예진은 칼로 내 몸을 찌른 적이 있었고 이번이 3번째가 되지 말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괜찮아, 아름아…. 괜찮아, 진정해, 여기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어 아름아…. 진정해…. 착하지…?"


추하게 바지에 오줌을 지린체 뒷걸음질을 치는 내게 예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은빛 광택이 반짝거리는 과도를 들고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나와 간격을 좁히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들고 있던 과도가 어떤 과도인지 눈치를 챘다.

저 과도는……. 나를 두 번이나 찔러 죽였던 그 칼이었다. 나는 되도록 저 칼에 대해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왜 저 여자가 저 칼로 내 몸을 찔러 죽일 것 같은 공포감이 들까?

한국인은 삼세번이라는 말처럼 이번에도 예진이 날카로운 과도로 내 몸통을 찌를 것 같은 강렬한 공포감이 내 사지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예진이 한쪽 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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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