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와 대화는 실제 역사와는 그렇게 큰 연관성이 없습니다





고려국 개경 이인임의 사저.



유명무실해진 왕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고려를 주무르는 이인임이 사는 이곳에서는 오늘도 이인임과 그의 측근들이 거나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진귀하디 진귀한 온갖 산해진미와 고량진미.


맛 좋은 술.


그리고 그들의 술시중을 들 아리따운 기생들까지.


그야말로 극락의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완벽한 술자리였다.


"하하하! 여기 한잔 더 따라라!"


"끄윽..대감! 너무 취하셨소이다! 적당히 좀 드시오!"


"무슨 소리! 아직 더 마실 수 있소이다, 자, 임 공도 한잔하시오!"


그들은 기생들이 따라주는 갖은 술을 퍼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그랬듯이, 같은 주제의 이야기였다.


누군가의 땅이 매우 기름지길래 헐값을 주고 빼았았다는 둥.


누군가의 아내가 어여쁘길래 그 남편을 겁박하여 강제로 빼았았다는 둥.


누군가에게 터무늬없는 이자의 고리대를 강제로 지게 해 재산을 강제로 빼앗고 그 처자식들을 강제로 자기 집 노예로 팔게 만들었다는 둥,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온갖 추악한 이야기로 하여금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주지육림의 술잔치가 무르익었을 무렵에, 임견미가 이인임에게 다가오며 귓속말로 말했다.


"이인임 대감,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 뭔가? 어서 말해보게나."


취기가 돈 이인임이 술을 들이키며 말했다.


"듣는 귀가 많습니다, 우선 저들부터 내보내시는게."


그러자 이인임이 기녀들을 둘러보며 손짓을 했고, 기녀들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면서 재빨리 방 안을 나갔다.


이윽고 방 안에는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래, 대관절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길래 기녀들까지 내보내야 하는 겐가? 어서 얘기해보게."


이인임이 술잔을 비우며 답을 재촉했다.


이윽고 임견미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입을 어렵사리 떼어내 말하기 시작했다.


"대감, 최영 말입니다, 그 노인네를 슬슬 정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그 노인네는 명망이 꽤나 있는지라 언제든 대감의 자리를 노릴 수 있어 위험합니다,  또 건방지기까지 합니다, 대감 면전에서 욕을 한 적도 있잖습니까?"


"그 노인네가 선수를 치기 전에 먼저 그 노인내를 쳐야 합니다, 그럼 물 아래에서 우리를 호시탐탐 끌어내릴 생각이 가득한 놈들도 알아서 고개를 처박을 겁니다."


"맞습니다 대감, 허락만 해 주신다면 지금 당장 그 노인네에게 역모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죽여버릴 수 있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이인임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술잔을 비웠을 뿐이었다. 그러자 둘은 이인임을 부추기며 결단을 촉구했다.



""대감!""


동시에 말한 그들의 음성을 잠시 곱씹은 이인임은, 술잔을 내려놓은 채 그들을 잠시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놈이 기녀들을 내보낸 이유가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잠시 이인임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럴 만도 한 이야기였다.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고려를 지배하고 있는 이들이라지만, 최영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이 스스로 말했다시피, 백성들 사이에서의 최영의 인망은 그 누구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들이 권력이 크다 한들 최영을 모함해 죽이려는 것이 백성들에게 흘러들어가면 꽤나 골치가 아파질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최영이 충분히 준비한다면, 그들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지배자가 될 조건을 충분히 갖춘 인물이라는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 것 때문에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리라.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 한 가지는, 최영은 그저 명령대로 움직이는 장기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최영은 나라에 충성하고 우직한 성품의 참군인이다.


이러한 성품 때문에 바로 백성들이 그를 믿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그에게 정치적인 감각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최영은 이인임이 왕의 유모와 결탁한 세력을 내치는 데 동조하기도 한, 이인임과 같은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를 해치자고 말하는 그의 측근들을 짜게 바라본 이인임은, 다시 입을 열어 그들에게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들 말게나, 그는 우리와 근본이 같은 사람일세, 


그가 나와 같은 뜻으로 행동한 것이 어디 한두번인가?


여러 번 나와 여러번 행동을 같이 한 그런 이를 제거한다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형님.."


"그만, 이 이상 욕보일 생각이 아니라면 이 얘기는 그만들 두게나, 그리고 최영 그 친구는 담백하고 우직한 군인이지, 나같이 노회한 정치꾼이 아닐세,


정치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이를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애초에 그는 나와 같은 편인데, 그가 우리를 해칠 리가 있겠는가?"


"그래도..."


"그만 하라니까."



이인임이 굳은 표정을 한 채 싸늘하게 답했고, 임견미와 염흥방은 풀이 죽은 채로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있었다.


이인임은 그들을 바라보고는, 이내 표정을 풀며 말했다.



"음, 내가 너무 심했나보네, 미안허이."


"아, 아닙니다. 저희가 대감을 언짢게 해 드려서 오히려 더 송구할 따름입니다."



"거 사람 무안하게시리...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시게나, 자네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니까, 하지만 최영은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네."


"네..넵, 대감, 잘 새겨듣겠나이다."


이윽고 그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이인임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빈자리에서 스스로 술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그 술을 입 안으로 털어넣었다.


"어리석은 것들."


술잔을 탁자에 탁 내리며 이인임이 한심해하는 말투로 말했다.


"최영을 죽이자니,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더냐? 네놈들의 목이 붙어 있는게 최영 덕분임을 모른단 말이냐?"


실로 그러했다.


애초에 이 나라가 위태롭게라도 유지되는 건 최영이 적들을 막아주는 것 덕분이다.


그런 그를 죽이자고? 당장 일선 병사들의 사기가 어떻게 될까? 그 전에 백성의 반응은? 과연 그들이 가만히 있을까? 


외적들은 또 어떻고? 최영이 무력화되었다는 소식을 그들이 듣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들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어쩌다가 저런 놈들과 한 패가 되어버렸을꼬....."


저리도 멍청한 놈들과 한패가 된 것에 대한   후회였는지,


아니면 나라가 망하든 말든 제 권력이 우선인 극악한 간신들과 어느새 같은 편이 된 제 꼬라지가 우습고 역겨웠는지 몰라도, 


그는 그저 술을 마시며 한숨만을 쉴 뿐이었다.



물론 설령 후자였다 할지라도, 그가 역사에 극악한 간신으로 남으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