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나치 독일에 대해 생각하는 이미지는 당연히 악의 제국, 나치즘 광신도, 학살마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치 독일에 대해 잘못된 사실이나 이미지가 있다 대표적인 오류는 '나치 독일은 전쟁도 잘 준비하고 경제도 잘 살렸다는 것이다.'


틀렸다. 나치 독일은 전쟁을 너무 급하게 준비했고, 경제는 사실상 영끌족이나 다름 없었으며 1939년 시점에서는 한계 직전이었다.


먼저 나치 독일의 전쟁 준비가 얼마나 급하고 조악했는지 서술하겠다. 



나치 독일 집권기인 1933년으로 가보자, 그 당시에는 비록 비밀스러운 재무장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의 한계로 인해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보다도 못한 수준의 무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수 공업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 제국 시절에 비하면 사실상 씨가 마른 수준이었다.


또한 당시 독일은 대공황이라는 최악의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나치 독일은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MEFO 채권을 발행하여 공공사업을 진행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 방향성에서 논쟁을 겪었다. 경제계 인사들은 민간 산업을 중심으로 투자하여 장기적으로 건실한 경제를 구축하는 것을 선호했다. 허나 그 방법은 기각되었다. 히틀러는 단기간에 성과를 보여주고 싶은 동시에, 빠른 시기에 강력한 국방력을 구축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히틀러는 폴란드, 프랑스, 심지어 소련과의 전쟁을 목표로 삼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치 독일은 1933년부터 군수 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1936년에 이르러 자급자족 군국주의 경제를 목적으로 삼은 4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군수 산업이 1순위로 발전하였으며, 민간 산업, 제철, 제련, 교통, 물류 등 나머지 산업들은 군수 산업을 보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오죽하면 국민들을 위해 폭스바겐을 수립하였지만, 정작 국민들을 위해 생산한 비틀(폭스바겐 초창기의 자가용)은 1000대도 넘지 않았다. 그 폭스바겐이 1936년부터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군수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경제의 안정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말이다. 경제 발전을 위해 채권을 무리하게 남발하는 것을 넘어 그렇게 얻은 자금을 수익성이 없는 군수 산업에 투자한 나치 독일은 경제의 핵심인 금이 고갈되고 인플레이션이 생기기 시작한다. 히틀러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구시대적인 '약탈'을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고 그 나라의 금과 금융 자산들을 확보하여, 그것들로 경제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었다. 4개년 계획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많은 비용이 고갈되고 있었다. 4개년 계획 이후에도 1940년대 중반까지 군수 산업을 발전시킬 계획이었는데, 절반도 못끝내고 경제가 망하게 생긴 것이다. 


결국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공격한다. 처음 침공할 때는 폴란드의 주력 부대들을 빠르게 궤멸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 바르샤바 전투에서 탄약이 고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군수 산업이 아예 초기화 된 상황에서 6년 동안 영끌해서 군수 산업을 키웠지만, 수백만의 군대로 장기전을 치루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었다. 게다가 나치 독일은 단기전을 상정했지 총력전을 상정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총동원령도 개시하지 않았다... 


뭐 어찌저찌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항복시킨 뒤 폴란드 보급물자를 약탈해서 때우기 시작했지만, 반년이 지난 1940년 6월 경 까지 장기전을 치루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3호전차, 4호 전차같은 신형 중형 전차들로 기갑사단을 무장시키고, 많은 수의 병력들을 차량화, 기계화하여 기동전에 완벽하게 특화된 육군을 필두로 연합국을 압도해야했다. 해군은 수백척의 유보트를 중심으로 적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늑대떼가 되야했다. 공군은 최신예 전투기와 폭격기로 무장하여 제공권을 압도해야했다. 


하지만 계획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육군은 전쟁 초기에서는 중형 전차들이 아직 부족해서 1호, 2호 전차를 그대로 쓰고 있었고 나아가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서 긴빠이한 전차를 그대로 써야했다. 해군은 유보트 50척조차 준비되지 않은 상태. 그나마 공군이 상황이 좋았다 그러나 영국에 겨우 비빌 수준이었다.  


이 상황에서 프랑스와 영국과의 장기전을 치룬다면 나치 독일은 그대로 망할 운명이었다. 영국은 몰라도 프랑스는 확실하게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929년부터,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과 대공황에 시달려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점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마지노선이다. 그들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에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여기서 벨기에와의 국경 쪽이 고도로 요새화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 지역은 너무 평지라서 요새를 구축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독일이 벨기에를 공격하려 한다면 연합군이 벨기에의 딜 강 방어선으로 결집해 막을 생각이었다. 


비록 프랑스는 경제 문제로 인해서 독일처럼 급격하게 군수 공업을 성장시키진 않았지만, 군대를 거의 처음부터 다시 재건해야했던 독일과 달리 프랑스 군대는 전간기 내내 큰 규모를 유지한 상태였다. 1938년 주데텐란트 위기 당시에는 프랑스은 독일을 제압하고도 남을 수준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동원도 준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을 과대평가해서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웃긴건 이렇게 기회를 놓쳐 독일은 1년의 시간을 벌었지만, 그 1년의 시간이 지났어도 영국과 프랑스보다 독일의 장기적인 전쟁 준비가 열악한 상태였다. 


영국도 독일처럼 급하게 전쟁을 준비하긴 했다. 다만 독일과 달리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과 그리고 파운드 스털링화와 대영제국으로 대표되는 강인한 경제 기반덕분에, 비록 독일보단 늦었어도 2차 대전기동안 빠르게 군수물자 생산이 증가하여 2차 대전 중반기에는 항공기 생산에서 독일을 거의 따라잡을 정도였다. 


요약하자면 독일은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전쟁을 준비했지만 겨우 단기결전을 치룰 수 있을 정도 까지였고,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느리거나 늦었어도 최소한 장기적인 전쟁이 가능했고, 나아가 독일보다 더 높은 전쟁 수행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가 6주를 당한게 문제였지만. 



다음에는 독일 경제가 얼마나 영끌족이나 다름 없는 조악한 것이었는지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