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0년 슬로이스(Sluys) 해전에서 영국군이 승리하다. 과세에 대한 의회의 동의 원칙을 확립하다.


슬로이스 해전을 그린 삽화. 에드워드 3세는 이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그 성과는 크지 않았다. 도리어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게 된 에드워드는 휴전을 맺고 물러나게 된다.


1346년 크레시(Crécy)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승리하다.


크레시 전투를 그린 삽화. 에드워드 3세는 휴전 후 부르타뉴 공령의 상속 후보자 지지를 명분으로 하여 다시 프랑스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장궁병이 활약했으며, 잘 훈련된 군대 조직도 승리의 주요 요인이었다. 여기서 먼나라 이웃나라를 쓴 이원복이란 교수의 실수가 나오는데, 잉글랜드는 석궁이 아닌 장궁을 활용했다는 점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석궁을 쓴 건 프랑스 쪽이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석궁병은 잘 활약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훈련 수준이 더 높았던 것에 기인했다.


1347년 영국이 칼레를 점령하다. 이 때 '칼레의 시민들'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등장하다.


칼레(Calais) 포위전 삽화. 칼레는 10개월동안 저항했지만 프랑스 왕 필리프 6세(Philippe)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장 오귀스트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The Burghers of Calais, 프랑스어 : Les Bourgeois de Calais )' 동상. 이들은 칼레에 있는 모든 자들을 몰살하는 것을 대신해 나온 6인의 시민들로, 이들이 죽으면 칼레의 주민들의 목숨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 동상은 상류층에 속했던 6인의 시민들이 죽음을 앞두고 절망하거나 체념한 모습을 생생히 담아냈다. 이 이야기는 상류층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희생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 시민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결국 죽지 않았으며,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필리파(Philipa)가 간청한 덕분이었다고 한다.


1348년 흑사병(Black Death)이 만연해지다.


1347년 이탈리아에서부터 급속도로 퍼진 흑사병은 사회적 위기를 불러왔으며, 이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끝낼 결정적 수단을 찾지 못하였다. 


흑사병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관에 실어 매장하고 있는 모습(14세기). 흑사병으로 인해 잉글랜드는 극심한 인구 감소 현상을 겪었다. 1300년에 대략 400만 정도였던 인구는 200만 정도로 약 50퍼센트가 줄어들었고, 이는 중세 장원제의 변화로 이어졌다.


1351년 노동자법(Statute of Labourers)성직록(성직자들에게 주는 녹봉)수여제한법을 제정하다.


1356년 푸아티에에서 영국군이 승리하다.


푸아티에(Poitiers) 전투를 그린 19세기경 삽화. 


1360년 브레티니(Bretigny)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다. - 이 조약으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요구와 칼레(Calais)와 퐁티외(Ponthieu)를 제외한 르와르 강 이북의 모든 땅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다. 대신 푸아투(Poitou), 기옌(Guienne), 가스코뉴(Gascogne), 리무쟁(Limousin) 등을 포함한 아키텐 전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양도받다.


1361년 흑사병이 다시 만연해지다.


1367년 흑태자 에드워드에스파냐를 침입하다.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의 초상. 에드워드 3세의 장자인 흑태자는 가스코뉴를 통치했으며, 1367년 프랑스와 동맹한 트라스타마라(Trastamara)의 엔리케(Enrique)와 분쟁하던 카스티야(Castilla) 왕 페드로(Pedro)를 원조하기 위해 에스파냐에 침입했다. 그러나 성과는 미미했고, 많은 전쟁 비용의 소모로 인해 재정이 궁핍해졌다. 

여기서는 에드워드가 단순한 왕의 아들이 아닌 가스코뉴라는 영지의 통치자라는 '군주'의 지위까지 겸한다는 것을 감안, 흑태자라 부르는 기존의 명칭을 따른다.


19세기 경에 그려진 흑태자의 초상


1370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리모즈(Limoge)의 주민 3000여명을 학살하다.


리모즈 포위를 그린 그림. 잉글랜드는 이 학살로 전세의 불리함을 뒤집을 수 없었으며, 프랑스군이 베르트랑 뒤 게클랭(Bertrand du Guesclin) 장군의 지휘 하에서 펼친 게릴라 전술과 카스티야 선박의 도움을 받아 강화된 해군력으로 우세를 점하자 고전하였다. 결국 1371년 흑태자 에드워드는 병을 얻고 귀국하였으며, 5년 후 사망한다.


1376년 선량의회(Good Parliament)가 개회되다. 흑태자가 사망하다.


캔터베리 대성당에 있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관.


1377년 에드워드 3세가 죽다. 리처드 2세가 즉위하다.


"보르도의" 리처드 2세(Richard II Of "Bordeaux")의 초상.


1378년 신학자 존 위클리프가 성서를 번역하다. 이 과정에서 위클리프가 기존 가톨릭 체계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초상. 이 신학자와 롤라드들에 대한 것은 추후 종교개혁 주석을 통해 다루도록 하겠다.


위클리프가 성서를 번역한 것을 알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 위클리프를 따라 종교에 대한 개혁을 주장한 자들은 롤라드(Lollards)라 불리었다.


1381년 농민 반란(와트 타일러의 반란)이 일어나다.


리처드 2세가 반란군과 교섭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농민 반란(Peasants' Revolt) 혹은 와트 타일러의 반란(Wat Tyler's Rebellion)이라 불리는 이 반란은 자연스러운 반란이었다. 농민들은 장원의 각종 의무를 강화하며, 앞서 언급한 노동자법을 통해서 임금을 억제하려고 한 지주 계층을 미워했다. 그들은 고위 성직자들의 부와 세속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에 따라 교회 재산의 몰수와 청빈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면서 교회의 계서제와 재물 소유를 비난한 롤라드들의 설교에 고무되었다. 

이렇게 고조된 농민들의 불만은 인두세라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자 폭발했다. 부유한 공작이나 가난한 농노나 모두 똑같은 금액을 납세케 한 이 세금은 상당히 불공평했던 것이다. 그들은 농노제의 폐지와 지대의 감면을 요구했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기대에 반하는 구체제적인 정치에 불만을 품었다.


왕 앞에서 처형당하는 와트 타일러(왼쪽 두건 쓴 자). 농민 반란은 6월 말까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진압되었고, 수많은 반란자들이 처형되었다. 리처드 2세는 "너희는 농노이며, 앞으로도 여전히 농노일 것이다."라는 말로 농민들과 교섭할 때 약속했던 농노제 폐지라는 것을 철회하였고, 이는 곧 농노들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농노제의 쇠퇴는 막을 수 없었으며, 1485년에 이르러 농노제는 소멸하였다.


1382년 위클리프의 주장에 대해 이단으로 규정하다.


이단으로 규정된 위클리프의 유골을 태우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1385년 문법학교라는 곳에서 영어로 하는 공부가 시작되다.


1387년 제프리 초서캔터베리 이야기를 출판하다.


19세기 경에 그려진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초상. 이 작가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는 중세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들의 장으로, 당시 중세인들의 정신과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작가의 작품들은 영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것들로 다뤄진다.


1388년 무자비(Merciless)의회가 개회되다.


1389년 리처드 2세의 친정이 시작되다.


1390년 존 위클리프를 따르던 롤라드들이 영역본 성서를 완성하다.


1394~1395년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로 원정을 가다.


1397~1399년 리처드 2세가 폭정을 하다.


1399년 리처드 2세가 폐위되다. 헨리 4세가 즉위하면서 랭커스터 왕가가 시작되다.


헨리 4세 "볼링브로크"(Henry IV "Bolingbroke")의 초상


1400년 웨일즈에서 오웨인 글린두어가 반란을 일으키다.


오웨인 글린두어(Owain Glyndŵr)와 반란군. 글린두어는 원래 잉글랜드 왕의 정책 실시를 위해 웨일즈에서 활동한 귀족층이었으나, 1400년경 변경 영주이자 헨리 4세의 자문관이기도 했던 루신(Ruthin)의 그레이(Grey) 경과 분쟁이 일어났고 이것이 사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자, 스스로 웨일즈 공을 자칭하며 웨일즈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다. 여기엔 많은 웨일즈인 학자와 노동자들도 가세해있었다.


1401년 이단자 화형법이 통과되다.


1402년 호밀던 힐(Homildon Hill)에서 스코틀랜드군이 패배하다.


1403년 ‘성급한’ 헨리가 슈루즈베리(Shrewsbury)에서 잉글랜드군에게 격파당하다. 


'성급한' 헨리 퍼시(Henry 'Hotspur' Percy)의 동상. 퍼시 가문은 잉글랜드 북부의 유력한 집안으로 웨일즈와의 경계 지역을 포함해 큰 영지를 갖고 있었다. 이 퍼시 가문과 퍼시 부자(노섬벌랜드(Northumberland) 백(伯) 헨리 퍼시와 아들 '성급한' 헨리)는 헨리 4세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일조했고, 웨일즈에서 반란을 일으킨 글린두어와 호밀던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에 맞섰다. 그러나, 헨리 4세가 이들의 봉사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지도 않았고 호밀던 힐에서 붙잡은 포로들의 몸값을 퍼시가가 차지하는 것도 불허했다. 그러자 퍼시 가문은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슈루즈베리에서 '성급한' 헨리가 패배하였고 아버지인 노섬벌랜드 백은 항복하여 벌금을 물고 사면되었다.


1403~1405년 프랑스인들이 잉글랜드 남부를 침범하다.


1405년 잉글랜드 북부의 반란을 진압하다.


1413년 헨리 4세가 죽다. 헨리 5세가 즉위하다.


"몬머스의" 헨리 5세(Henry V Of "Monmouth")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하다.


아쟁쿠르(Agincourt) 전투를 그린 그림. 1360년대에 되살아나던 프랑스 군대는 다시 약화되어 취약한 상태에 있었고, 당시 프랑스 왕인 샤를 6세는 정신이상에 걸려있었다. 또한 왕실은 부르고뉴의 장 무겁공(Jean sans peur)을 지지하는 파벌과 왕의 아우 오를레앙(Orleans) 공을 지지하는 파벌로 나뉘어 분쟁하고 있었다. 헨리 5세는 이런 상황에서 대프랑스 전쟁을 재개하고자 했고 프랑스에 있던 영지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가 거부하자, 1415년 다시 유사한 요구를 내걸었고 과연 다시 거부했다. 그렇게 백년전쟁은 다시 재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2000명의 중기병을 거느린 잉글랜드군보다 5배나 많은 10000명의 중기병을 거느렸음에도 잉글랜드의 정예 보병과 궁병, 그리고 세심한 전략에 의해 패배했다. 


1417~1420년 영국군이 노르망디를 정복하다.


1420년 트르와(Troyes) 조약을 맺다.


트르와 조약(Treaty de Troyes) 원본. 이 조약으로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사후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기로 했고, 샤를의 딸인 카트린(Cathrine)과 결혼했다. 또한 결혼 후 1421년 카트린이 장차 헨리 6세가 될 아들을 낳자, 기존의 왕세자였던 샤를(훗날 승리왕 샤를 7세)의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허나 남부 프랑스는 왕세자 샤를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이 조약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1422년 헨리 5세가 죽다. 헨리 6세가 즉위하다.


헨리 6세(Henry VI)의 초상


1428년 영국군이 오를레앙(Orleans)을 공격하다.



오를레앙(Orleans) 포위와 잔다르크(Jeanne d'Arc)를 그린 그림. 영국군은 르와르 강 이남으로 정복을 확대하고자 프랑스 남부 지방으로 나아가는 요충지인 오를레앙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잔다르크의 활약으로 오를레앙은 이 포위에서 구출되었다. 더 나아가 이 승리와 함께 자르고(Jargeau)와 파테(Patay)에서 프랑스군이 영국군을 분쇄하는데 성공하자,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샤를 왕세자가 샤를 7세로 즉위하게 됐고, 이는 프랑스군으로 전세가 기울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1431년 잔다르크를 화형에 처하다.


화형당하기 직전 잔다르크를 그린 그림. 잔다르크는 오를레앙과 다른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결국 부르고뉴파에게 잡혀 영국으로 인도되어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샤를 7세는 이를 방관했으며, 이런 행동에는 공세를 유지해 전쟁을 지속하자는 잔다르크의 의견과 마찰이 있었고 이런 확전에 대한 의견을 묵살하려는 일종의 정치적인 충돌이 있었던 걸로 짐작된다. 그렇게 잔다르크는 이단과 마녀로 단죄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에 들어서는 프랑스의 영웅으로 추켜세워지고 있으며, 성녀라고도 추앙되고 있다.


1435년 아라스(Arras)에서 회담을 하다. 평화를 주장하던 베드포드 공이 죽다.


아라스(Arras) 회담을 그린 그림. 잉글랜드는 지속된 전쟁으로 국부의 쇠퇴를 겪었으며, 재정은 바닥이 나고 급기야 파산의 위기에 처해졌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 의회의 하원에선 만성적인 세금 부담에 진저리가 나있었다. 또한 부르고뉴의 필리프 선량공이 잉글랜드에서 이반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아라스에서 회담이 열린 것은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 협상은 헨리 6세의 고집으로 결렬되었고, 부르고뉴가 프랑스 왕과 합류하게 되면서, 잉글랜드는 패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베드포드 공(Duke of Bedford)인 "랭커스터의" 존(John of "Lancaster"). 베드포드 공인 존은 전쟁을 지속하자는 글로스터 공(Duke of Gloucester)에 반대해 전쟁의 중지와 평화를 주장했다.


1449년 프랑스군이 노르망디를 공격하다.


1450년 잭 케이드가 반란을 일으키다.


잭 케이드(Jack Cade)의 반란을 그린 그림. 케이드는 켄트의 수령(Captain of Kent)을 자처하며 반란을 주도했다. 그러나 반란은 국지적으로만 일어났고, 두 달이 조금 넘는 단기간의 소란으로 그쳤다. 1381년의 농민반란과 비교하자면 그 당시엔 농민들이 주도한 반면에 소토지 지주와 중산층이 주도 세력이었고, 목적은 경제적인 것이라기보단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행정의 개혁과 법정에서의 부패의 종식, 그리고 대신들의 교체를 요구했다.


1453년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점령하고, 백년전쟁이 끝나다. 헨리 6세에게 정신병이 발병하다.


1455년 세인트 앨번즈(Saint Albans)에서 전투가 일어나며 장미전쟁이 발발하다.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에서 쓰인 요크 가문(House Of York)과 튜더 가문(House Of Tudor)의 장미 문장. 흰색이 요크, 붉은색이  이 튜더 가문의 장미이다. 장미 전쟁은 1471년에 사실상 끝이 나 요크 가문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저 붉은 장미가 랭커스터 가의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정보이며, 튜더 가문의 것이었다. 튜더 가문은 당시 랭커스터 가문에 가담했기에 자연스럽게 전쟁에서 주도적인 세력이던 랭커스터 가문의 것이라고 알려진 듯 보이며, 또 정작 전투에서 장미가 휘장으로 사용되지도 않았다. 또 나종일 교수가 저작한 '영국의 역사'란 책에서는 이 장미전쟁이라는 이름 자체도 19세기 스코틀랜드 문학가이던 월터 스콧(Walter Scott) 이전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장미전쟁은 후대에 이 당시 일어난 내전에 붙인 이름이라 짐작할 수 있다.


1459년 블로어히스(Bloreheath)의 전투에서 요크파가 승리하나, 뒤이은 러드포드 브리지(Ludford Bridge)의 전투에서 패배하다.


요크파의 수장인 요크 공 리처드 플랜태저닛(Richard Plantagenet, Duke of York). 


1461년 랭커스터의 헨리 6세가 폐위되다. 요크 왕가에드워드 4세가 즉위하다.


에드워드 4세(Edward IV)의 초상.


1469년 워윅 백(Duke of Warwick) 리처드 네빌이 반란을 일으키다.


워윅 백(Duke of Warwick)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의 초상. 필자 본인이 참조한 책 '영국의 역사(나종일 외 저)'에서는 워리크 백이라 했으나, 영어 원문대로 발음하여 워윅 백으로 옮겼다. 이 리처드 네빌의 별명은 King Maker, 왕을 세운 자로, 요크 가의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네빌 가문을 견제하고자, 랭커스터 가와 연관이 있는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과 1464년 비밀리에 결혼하게 되면서 마찰이 생겼고, 이외에도 대외 정책 면에서 프랑스와 부르고뉴에 대한 동맹 의견에도 차이를 보였다. 결국 리처드 네빌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1년 후 진압되어 프랑스로 피신하게 되었다.


1470년 에드워드 4세가 폐위되고, 헨리 6세가 복위되다.


1471년 바네트의 전투로 워윅 백이 전사하고 에드워드 4세가 복위되다.


바네트(Barnet) 전투를 그린 그림. 리처드 네빌은 1470년 9월 랭커스터 가와 네빌 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잉글랜드를 침입, 에드워드 4세를 도주케 했고, 런던탑에 유폐되어있던 헨리 6세를 복위시켰다. 그러나, 이미 정신병이 도질대로 도져 보통 인간으로서의 기능도 하지 못하게 된 왕이었기에 실질적인 권력자는 리처드 네빌이었다. 이후 에드워드 4세는 부르고뉴 공의 지원을 받아 1471년 4월 14일 바네트 전투에서 교전했고, 이 때 리처드 네빌은 패배해 전사했다. 헨리 6세는 붙잡혀 다시 런던탑에 유폐되었고, 얼마 뒤 죽었다. 에드워드는 '순전히 불안감과 우울증으로 숨졌다'고 했으나, 나종일 교수에 따르면 타살된 게 틀림없다고 한다.


1475년 에드워드 4세가 프랑스를 침공하다.


1477년 윌리엄 캑스턴의 인쇄술이 도입되다.


인쇄술을 도입한 윌리엄 캑스턴(William Caxton)의 초상. 15세기 말 캑스턴의 인쇄술은 잉글랜드 문화사에 큰 변혁을 몰고 왔다. 그는 켄트의 양모 상인으로서 브뤼헤에서 인쇄술을 배웠고, 1477년 그곳에서 들여온 인쇄기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경내에 설치했다. 이 때부터 지식의 일반화가 일어났고, 지식 면에서 봉건제를 파괴하는 데에 일조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고 리처드 3세가 즉위하다.


리처드 3세(Richard III)의 초상.

 

1485년 보즈워스의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죽다. 헨리 7세가 즉위하며, 튜더 왕가가 시작되다. 최초의 항해법이 제정되다.


보스워스 평야(Bosworth Field)의 전투를 묘사한 18세기경의 그림. 리처드는 자신을 정당한 왕위계승자라 주장하며 에드워드 5세의 왕위를 찬탈했다. 그 후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 요크의 리처드(Richard of York)는 런던탑 안에서 질식사하였으며, 이 배후는 리처드 3세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러한 사건은 리처드 3세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리처드 3세에 대한 민심은 하락했고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리처드는 반란자들을 모두 처형시켰지만 권력 기반은 더욱 약화되었고 마침내 튜더 가문의 헨리 튜더가 1485년 프랑스에서 출항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투에서 리처드 군대의 우익을 맡은 노섬벌랜드 백('성급한' 헨리의 증손자)은 전투를 거부했고, 그의 오랜 전우인 윌리엄 스탠리(William Stanley) 또한 헨리 튜더의 편으로 돌아섰다. 리처드는 왕관을 쓴 채 끝까지 싸우다 쓰러지며, 요크 왕가의 끝을 고했다.



헨리 7세 "튜더"(Henry VII "Tudor")의 초상. 리처드에게 승리한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을 통합했다. 사진에 보이는 붉으면서 하얀 장미는 바로 양 가문의 화해를 상징한다. 


여기서 왜 튜더 가문인 헨리 튜더가 왜 랭커스터 가냐는 의문이 들텐데, 보충 설명을 하자면 헨리 튜더는 할아버지 오웬 튜더(Owen Tudor)의 손자로, 오웬 튜더는 랭커스터 가의 헨리 5세의 아내였던 발루아의 캐서린(Catherine of Valois)과 결혼한 사이였다. 또한 아버지 에드먼드 튜더(Edmund Tudor)도 랭커스터 가의 마가렛 보우퍼트(Lady Margaret Beaufort)와 결혼했는데, 이 보우퍼트 가문은 거슬러 올라가면 초대 랭커스터 공(Lancaster)인 곤트의 존(John of Gaunt)이 그 조상이다. 따라서 헨리 7세는 튜더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피가 섞인 자손인 셈이다.


참고 문헌

나종일 외 저, 영국의 역사 상, 한울 아카데미(2005)

브라이언 타이어니 외 저, 서양 중세사 - 유럽의 형성과 발전, 이연규 옮김, 집문당(2015)

다니엘 리비에르 저, 프랑스의 역사 - 개정판, 최갑수 옮김, 까치글방(1999)


참조할 거리

영국 중세 후기 왕가 계보 https://arca.live/b/histor25385328036y/66059942

유럽사 주요 연대표 및 지도자 계보 https://arca.live/b/histor25385328036y/61811510


삽화 출처

영문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