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은 갑옷을 안 입었다는 주장을 하는 병1신같은 것들의 반박 및 보충을 목적으로 작성돼는 글임.



우선 먼저 적는 글은.


조선은 경국대전에서 법으로 병사가 무장을 갗춰야만 병사로서 모집이 가능했으며.


병사는 농민중에서만 모집하였다. 또한 군사로 뽑인 사람을 경제적으로 보조하여 제대로 된 무장과 갑옷을 갗춰입게 하기 위하여


1명의 정인 즉 정군을 뽑을 시 그 정군을 경제적으로 보조하는 보인,즉 다른 농민 3명을 두어 그것이 보장돼게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갑옷을 안 입었다는 글이나 다른 모자란 병1신같은것들이 반박된다.


타 국가야 해당 1인에게만 무장을 하도록 하여 장비가 상당히 부실한 경우가 있겠지만.


조선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거기다 법에다 박아넣을정도로 무장에 대해 철저하였다.



예시로 고산리전투, 여진족 2천을 상대로 조선군 단 1백이 승리하여 여진족을 학살하며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점


그리고 을묘왜변 당시 조선군 70이 왜구 1천을 도륙한 것을 들 수 있다.


갑옷을 입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전과이다.



또한 임진왜란 전과 당시의 기록을 보면.


임란 5년 전인 1587년 3월 2일 정해왜변 직후에 경상도 암행어사 이정립이 ‘병력은 출동준비를 갖췄고 궁시, 총통도 확보했고 철갑과 철환이 부족하나 현재 만들고 있다’고 보고하는 실록 기사도 있고, 조선 전후기를 통틀어 두정갑 등 갑옷을 대량으로 제작한 기록이 종종 나오니 임란 당시 장수나 군관이 아닌 일반 수졸들도 상당수가 갑옷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왜란시기 가장 신뢰성 있는 사료인 난중일기를 보면.


19일(무신) 맑음. 품방(品防)에 해자 파고 쇠사슬 구멍 뚫는 일로 아침에 군관을 정 해 보내고, 나도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를 직접 독려했 다. 오후에 상격대(上隔臺)를 순시했다. 이날 분부군(奔赴軍) 7 백 명이 역사에 점고를 맞았다.


6일(병인) 맑음. 아침 먹은 뒤에 나가 앉아 무기를 검열해 보니 활, 갑옷, 투구, 전 통, 환도 등도 깨어지고 헐어서 볼꼴 없이 된 것이 많았으므로 색리(色吏)와 궁장 (弓匠), 감고(監考) 등을 처벌했다.



에 직접적으로 무기를 점고(점검)할 시 활,갑옷,투구,전통,환도를 다 점검함을 알 수 있고.한 진을 점검했을때 구체적인 숫자인 군사 7백명을 적어놨다.


저 점고할때 7백명의 갑옷과 무기를 점검했다라는 걸 알 수 있는건 제대로 안 됬을시에는 이순신장군은 직접 처벌하였다고 기록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이거 말고도 조선군이 대량으로 갑옷을 입었다는 증거는 난중일기의 저런 점고가 셀 수 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몇개를 가져오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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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기록

 

1월

19일(경진)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 본 뒤에 각 군대를 점고했다.

 

25일(병진) 흐림. 여러 가지 전쟁 방비의 결함이 많으므로 군관과 색리(色吏)들에 게 벌을 주고 첨사(命使)를 잡아들이고 교수(敎授)는 내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서 가장 못하건만 순찰사가 표창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검사하지 

못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을 일이다. 역풍이 크게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으므로 눌러 유숙했다.

 

26일(정사)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개이도(介伊島)〔추도(楸島), 즉 싸리섬〕에 이르 니 여도(呂島)〔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배와 방답(防踏)〔여수시 돌산읍〕 마중배가 나 와 기다렸다. 

날이 저물어서야 방답에 이르러 공사례(公私禮)를 마친 뒤에 무기 를 점고하였다. 

긴 편전〔長片箭〕은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어 참으로 딱했으나 전선은 조금 완전하니 반가웠다.

 

27일(무오) 흐림. 아침 점고를 마친 뒤에 북봉(北峯)으로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따로 떨어져 외롭고 위태한 섬이라 사방으로 적을 받게 되었고, 성과 못 역시 지극 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못했으니 어 찌하랴. 

느지막이 배를 타고 경도(京島)〔여천군 화정면〕에 이르니 여필(汝弼)과 조 이립(趙而立)과 군관 우후(軍官虞侯)들이 술을 싣고

 마중을 나와 함께 즐기다가 해 진 뒤에야 본청으로 돌아왔다. 

 

2월

 

11일(임인) 맑음. 식후에 배에 나가 새로 뽑은 군사들을 점고했다.

 

16일(정미)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 본 뒤에 활 6순을 쏘고 신구번(新舊番) 군사들 을 점고했다.

 

20일(신해) 맑음. 아침에 온갖 방비와 전선을 점고해 본즉, 모두 새로 만들었고 무기도 얼마쯤 완비되어 있었다. 

늦게 떠나서 영주(贏州)〔고흥(高興)〕에 이르니 좌우 의 산꽃과 들가의 봄풀이 그림 같았다. 옛날에 영주가 있다더니 역시 이 같은 경치던가.

 

22일(계축) 아침에 공무를 마친 뒤 녹도(鹿島)로 갔다. 황숙도도 동행했다. 먼저 흥 양 전선소(興陽戰船所)〔고흥읍〕에 이르러 배와 기구들을 친히 점검하고 그길로 녹 도로 가서 바로 새로 쌓은 문루(門樓) 위로 올라가 보니 경치의 아름다움이 군내에 서는 으뜸이었다. 만호(萬戶)의 애쓴 정성이 안 미친 곳이 없었다. 흥양 원과 황능 성(黃綾城)과 만호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또 겸하여 대포 쏘는 것도 보았다. 촛 불을 밝힌 뒤 이슥해서 파했다.

 

3월

 

1일(신유) 망궐례(望闕禮)를 드렸다. 식후에 별방군(別防軍)과 정규병을 점고하고 하번군(下番軍)을 점고하여 놓아 보냈다. 공무를 마친 뒤에 활 10순을 쏘았다.

 

6일(병인) 맑음. 아침 먹은 뒤에 나가 앉아 무기를 검열해 보니 활, 갑옷, 투구, 전 통, 환도 등도 깨어지고 헐어서 볼꼴 없이 된 것이 많았으므로 색리(色吏)와 궁장 (弓匠), 감고(監考) 등을 처벌했다.

 

16일(정축)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 보았다. 각 고을 벼슬아치들과 색리(色吏)들 이 인사차 왔다.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로 곤장을 때렸다. 우후(虞侯), 가수(假守)들도 역시 검칙(檢飭)하지 않기를 이렇게까지 했으니 해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런 일은 돌아보지 않 으니 앞날 일도 역시 짐작하겠다. 

성 밑에 사는 토병(土兵) 박몽세(朴夢世)가 석수 랍시고 돌 뜨는 데로 가서 이웃집 개에게까지 폐해를 끼치기로 곤장 80대를 때렸다.

 

19일(경진)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 본 뒤에 각 군대를 점고했다

 

4월

 

1일(경인) 흐림. 새벽에 망궐례(望闕禮)를 드렸다. 공무 본 뒤에 활 5순을 쏘았다. 별조방(別助防)을 점고하였다.

 

19일(무신) 맑음. 품방(品防)에 해자 파고 쇠사슬 구멍 뚫는 일로 아침에 군관을 정 해 보내고, 나도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를 직접 독려했 다. 오후에 상격대(上隔臺)를 순시했다. 이날 분부군(奔赴軍) 7 백 명이 역사에 점고를 맞았다.

 

 

93년 

 

임진왜란 후 난중일기 기록

 

11일(정해) 궂은비가 오고 큰 바람이 불면서 종일 그치지 아니했다. 울(蔚)이 가는 데 곤란할 것이 걱정되었고 면(葂)의 병이 어떠한가도 궁금했다. 장계를 친히 기초 (起草)했다. 

경상 순무(巡撫)〔서성(徐渻)〕의 공문이 왔는데, 원 수사가 불평을 많이 말하였다는 것이었다. 오후에 군관들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봉학(奉鶴)도 함께 쏘았다. 윤언침(尹彦忱)이 점고를 받기 위해 왔기에 점심을 먹여 보냈다. 저물녘에 비바람이 크게 치면서 밤새 계속되었다. 충청 수사가 보러 왔다.

 

 

23일(무술) 맑으나 바람이 사나웠다. 일찍이 사정에 나가 공문을 처결하였다. 원 수사가 와서 군사 기밀을 의논하고 갔다. 

낙안 군사, 본영 군사 51명, 방답 수군 45명을 점고하였다. 고성 인민들이 등장(等狀)하였다. 진주(晋州) 강운(姜雲)의 죄 를 다스렸다. 보성(寶城)에서 데려온 소관(召官) 황천석(黃千錫)은 보다 엄히 신문 하였다. 

광주(光州)에 가두어 둔 창평현(昌平縣) 색리 김의동(金義同)은 사형에 처 하라는 군령을 내려 내보냈다.

 저녁에 충청 수사 및 마량 첨사〔강응호(姜應虎)〕가 보러 왔다가 밤이 깊어 돌아갔다. 오후 8시께 복춘(福春)이 와서 사사로운 얘기를 하다가 닭이 운 뒤에야 돌아갔다.

 

 

경상 순무(巡撫)〔서성(徐渻)〕의 공문이 왔는데, 원 수사가 불평을 많이 말하였다는 것이었다. 오후에 군관들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봉학(奉鶴)도 함께 쏘았다. 윤언침(尹彦忱)이 점고를 받기 위해 왔기에 점심을 먹여 보냈다. 저물녘에 비바람이 크게 치면서 밤새 계속되었다. 충청 수사가 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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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 초기 부산진성의 기록을 보면 병사 5백과 전선 3척이 있었다고 적혀있고,그 3척을 불사르고 5백명이 성을 수비하다 모두 죽었음을 알 수 있는데,난중일기의 기록은 이러한 진성중 한곳을 점검한 것으로 보이고 부산진성의 5백명이 갑옷을 안 입었다고 어느 사료에도 적혀있지 않으며 특히 부산진성은 2만의 적군을 상대로 하루를 버틴 곳이다. 과연 갑옷이 없었으면 그것이 가능할까 상식적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애초에 경국대전으로 조선 초기 국법부터 병사들이 갑옷 다 갗춰입게 하게끔 하는게 조선이다. 이유는 주변 타 국가(특히 중국)에 비해 인구가 부족하여 병사의 무구나 질적우위를 통해서 이를 보완하려고 했기 때문.


갑옷을 안 입었다고 주장하는 병1신들은 임진왜란 끝난 이후 50년 지난 비변사에서 논의된 것을 가져다가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순신 수군에 갑옷을 입는 제도가 없었다

를 가지고 조선군이 갑옷을 입지 않았다고 하고, 조선군 전군에게 갑옷을 입혔을지 모른다 고 적었으나.


제도가 없다 한들 왜란에 실제로 참전하였으며 가장 신뢰도 있는 기록을 작성한 이순신장군이 직접 갑옷을 점검하였고 그것이 대량임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는데.(한 진의 군사가 7백여명이며 모두 갑옷을 입었으며 무기를 잘 갗추었는지 점검한 부분이 난중일기에 나온다.또한 다른 진들의 점검 역시 수없이 나온다. ) 갑옷을 안 입었다고 주장하는게 가장 어이없다고 생각된다. 왜란에 직접 참전하여 수많은 기록을 남긴 이순신장군과 전쟁 끝난 50년 이후 비변사에서 당시 일은 아예 모르는 신하 한명이 한 헛소리를 비교할 수 없다.


당장 냉병기로 전투가 많이 일어난 중세 전장에서 그렇게 갑옷을 안 입고 전투를 한다는건 사실상 나 죽여줍소 하는거나 다름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 돈이 없다 한들 어느 재질의 갑옷이던 갗춰 입었다는건 상식수준으로 생각해봐도 당연한 일이다.


즉 상식도 없이 갑옷을 안 입었다고 주장하는것은 병1신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보면


일본에서 일본 기록과 증언만을 가지고 작성된 사료인데 분명히


(조선의) 병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터키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한 일 양측의 사료에 조선군은 갑옷을 모두 입었다고 적혀있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건 그냥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리고 역사의 기본은 교차검증,즉 양측의 기록을 비교해봐서 사실을 가려내는것인데. 갑옷을 안 입었다고 주장하는 병1신들은 그 기본조차 안 된 병1신들이다.


또한 그 병1신들은 수군은 배 위에서 활동하여 빠져죽을수 있기 때문에 갑옷을 안 입었다고 주장하나.


갑옷을 입고도 활동이 무리없이 가능한것은 판금갑옷이라도 가능한데 무겁다고 활동이 힘들다고 전투에 갑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당장 왜란시기 왜병들은 갑옷을 그럼 왜 입었는지 설명이 안된다.  

 
갑옷을 입던 안 입던 전투에서 어차피 물에 빠지면 죽을수도 있다면 갑옷을 입는게 더 안전하다는건 당연한 이치다.
그리고 갑옷을 입고 수영을 하는 영상도 있는데 갑옷을 입으면 물에 빠졌을시 무게때문에 무조건 빠져 죽는다는건 기가막힐 뿐이다.

https://oo.peyoutu.be="" tlct5j7yg9k"="" target="_blank">https://youtu.be/TLcT5J7yg9k" target="_blank">https://youtu.be/TLcT5J7yg9k   https://oo.peyoutu.be="" bwd2zeav2ve"="" target="_blank">https://youtu.be/bwd2ZEav2vE" target="_blank">https://youtu.be/bwd2ZEav2vE


그리고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왜란기의 일본군은 왜 해전시 갑옷을 입었는지 설명을 해보라 하면 조선군은 갑옷 안 입었다는 병1신들은 답을 할 수가 없다.


또한 최근에 들어서 알 수 있는 사실로


왜란시 선상전투 대부분이 1~200보 사이라는걸 진주박물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수많은 전투를 통해서도 이순신 지휘하의 수군은 사상자가 기적적으로 적은데. 이는 갑옷을 입지 않았다면 설명돼지 않는 부분이다.


갑옷 안 입었다고 주장하는 병1신들은 갑옷을 안 입은채로 화려한 무빙스킬로 1~2백보 내 초 근접전에서 70번의 전투 내내 10여명의 사상자밖에 안나온게 이순신 장군임 이라고 설명하고싶은가본데. 그냥 지능이 모자란거같다.


1줄요약


인터넷에 기본도 안된 기본적인 상식없는,지능이 없는 모자라는  병1신들이 조선군 갑옷 안 입었다고 하나 역사적인 사실을 교차검증하면 입었다는게 검증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