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명나라나 조선이나 갑옷은 사실상 거기서 거기였음.


입는거 보면 찰갑,그리고 두정갑. 둘 중 하나 입었음.


쇄자갑이라고 사슬갑옷이나 거기에 철판 좀 덧붙인 경번갑이라고 있긴 하지만


병사던 장군이던 대부분은 찰갑 아니면 두정갑을 입었음. 대량생산이 용이했고 유지보수가 쉬웠기 때문에.


그리고 유지보수측면에서 두정갑이 월등히 우월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두정갑의 생산이 더 많아지고 동북아 대부분 나라의 주력이 됨. 찰갑보다 방어력도 우수하고 갑옷의 철편도 찰갑의 연철이 아닌 강철에 대형화된 철편이라 담금질이 가능해 더 튼튼했으니까.

거기다 겉감 및 안감 사이에 철편을 박아넣은 구조상 철조각이 충격량을 흡수하는 찰갑과 비교했을시 다층구조 및 투사체에 겉감이 휘감기며 위력을 반감시키는 효과도 있었기에 더욱더 생존성이 높았기에 자연스럽게 다 두정갑 입고다녔음.





그리고 조선과 명의 제철기술은 사실상 당대 세계 최고였음. 기계를 이용하여 풀무질을 하여 고른 열을 가하여 일정한 품질의 철을 생산하였으며


주철 및 강철,연철 등을 구분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취급하며 생산하게

강철(强鐵), 정철(正鐵), 정철(丁鐵), 빈철(鑌鐵)


등으로 구분하여 불렀으며 유럽은 17세기에서야 주철 및 강철 생산이 시작됨.



거기다 유럽에서 17세기 후반에서야 코크스를 써서 강철을 생산했는데.

이건 아시아에선 송나라때 즉 700년 앞서서 이미 하고있었음. 또한 기구나 기계장치로 열처리를 하니 품질이 타 국가와 비교했을때 고르고 안정적이였음. 비교 대상조차 안됨. 




https://books.google.de/books?id=WF9QEAAAQBAJ&pg=PA287&lpg=PA287&dq=%EA%B0%95%EC%B2%A0+%EC%A0%95%EC%B2%A0+%EB%B9%88%EC%B2%A0&source=bl&ots=mA1VXZBTtF&sig=ACfU3U2CuY0VtET2SFH3m5I-ifO7fdCzuQ&hl=de&sa=X&ved=2ahUKEwiU8deZ_Mj_AhUHOewKHSrlAREQ6AF6BAgKEAM#v=onepage&q=%EA%B0%95%EC%B2%A0%20%EC%A0%95%EC%B2%A0%20%EB%B9%88%EC%B2%A0&f=false







출처는 한국 금속 문명사.




한국과 중국에서는 강철을 생산해냈는데.


이는 우수한 품질의 철광산을 보유했기 때문임. 


조선의 철 생산량은 실록 기록에 따르면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001028_005


5개의 철장에서 12만근이며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B2%A0%EC%9E%A5(%E9%90%B5%E5%8C%A0)





에 따르면 전국의 철장은 36개소이다. 그리고 점점 늘어나서 69개소가 된다.


다만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24_0040_0010_0020_0020





의 자료를 따르면 아래의 표를 보듯이 67개소이다.


도·읍명토공 및 토산철산지·철장소재지명 및 貢鐵量
<경기도>
永 平 縣

土産:水鐵

産縣北金洞山 鍊沙成鐵
<충청도>
忠 州 牧
淸 風 郡
懷 仁 縣
恩 津 縣
懷 德 縣
石 城 縣
瑞 山 郡

土産   
土産:沙鐵
土産:石鐵
土産:沙鐵
土産:石鐵
土産:沙鐵
土産   

鐵場在州南末訖金(中品)
産縣西三十里許㫆吾之
産縣南老聖山
産縣南七里鵲旨·熊田·吐串等處皆品下
産縣北二十里稷洞(下品)
産縣南三山里(下品)
鐵場在郡西都飛山南
<경상도>
慶 州 府
密陽都護府
蔚 山 郡

彦 陽 縣
安東大都護府

醴 泉 郡
盈 德 縣

尙 州 牧
陜 川 郡
龍 宮 縣

金海都護府
昌原都護府
山 陰 縣
三 嘉 縣

土産:沙鐵
土産:石鐵
土産   

土産:沙鐵
土産:沙鐵

土産:沙鐵
土産:沙鐵

土産:沙鐵
土産:沙鐵
土産:沙鐵

土産:沙鐵
土産:沙鐵
土産:沙鐵
土産:沙鐵

産府東感恩浦(有鐵場歲貢正鐵 6,533斤)
産府東松谷山
鐵場在郡北達川里, 産白銅鐵·水鐵·生鐵(歲貢山鐵
12,500斤)
産縣西石南洞
産臨河縣北沙等羅里·本谷里等處(有鐵場歲貢正鐵
9,950斤)
産多仁縣東大谷灘(鍊正鐵以貢)
産縣南烏浦項及南驛浦河等處(有鐵場歲貢正鐵
1,724斤)
産州北松羅灘
産冶爐縣南心妙里(有鐵場歲貢正鐵 9,500斤)
産縣南無訖灘·鵲灘·修正灘·明柳(有鐵場歲貢正鐵
8,878斤)
産府東甘勿村
産府南岳山里夫乙無山
産縣北馬淵洞山(歲貢正鐵 7,794斤)
産三岐縣北毛台亦里檻頂山
<전라도>
咸 平 縣
務 安 縣

茂 朱 縣

昌 平 郡
和 順 縣
同 福 縣

土産:沙鐵
土産   

土産   

土産   
土産   
土産   


鐵場二, 一在縣東南柴口洞 一在縣南炭洞(品皆上)
(鍊鐵 1,586斤 納于軍器監)
鐵場在縣東十里蓬村(鐵場 2,200斤 納于繕工監
914斤 納于全州)
鐵場在縣南深谷里洞
鐵場在縣北水冷川里(品中)
鐵場在縣西靈神寺洞(品中)
<황해도>
遂 安 郡
新 恩 縣
海 州 牧
載 寧 郡

牛 峯 縣
文 化 縣
松 禾 縣
殷 栗 縣
長 淵 縣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産:正鐵
土貢   

土貢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   
土貢   


石鐵産縣南二十五里草田里(下品)
産州北五十五里靑山里(下品)
石鐵産郡東五里大棗毛老(鍊正鐵以貢又貢生鐵)
石鐵産郡北十五里泥洞
石鐵産縣西十里仇時山及十三里觀音岾(鍊正鐵以貢)


石鐵産縣北十九里金山里(中品)(鍊正鐵以貢)
石鐵産縣西道道里剛(下品)(鍊正鐵以貢)
<강원도>
江陵大都護府
襄陽都護府
旌 善 郡
原 州 牧
寧 越 郡
橫 城 郡
洪 川 郡
淮陽都護府
金 城 縣
金 化 縣
平 康 縣
伊 川 縣
三陟都護府
蔚 珍 縣
春川都護府
狼 川 縣
楊 口 縣
麟 蹄 縣
枰 城 郡
高 城 郡
通 川 郡
歙 谷 縣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鐵 
土貢:鐵 
土貢: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土貢:正鐵


石鐵産府西十里鐵掘山
石鐵産郡南五十里許能箭山東





石鐵産岐城東四十五里釜嵓也音浦小川
石鐵産縣東二十里方洞川


沙鐵産府東六里浦汀








 
<평안도>
順 安 縣
价 川 郡
雲 山 郡

土貢   
土貢   
土貢   

鐵冶在縣北公田里
鐵場在郡東卯結山腰(品好, 又産水鐵)
水鐵場在郡東和斤岩
<함길도>
北靑都護府
文 川 郡
吉 州 牧
端 川 郡
鏡 城 郡

土産:石鐵
土産:沙鐵
土産:沙鐵
土産:石鐵
土産:沙鐵

産府東六十里多甫和西山
産郡西十五里豆衣山(下品)
産州東南四十里多信浦項海汀
産郡西六十里龍林峴西大山
産處二, 一在郡東五村里 一在郡南朱乙溫里
산철지 계 67개 읍


즉 1,560,000 근 정도의 최대 철 생산량을 산출해 낼 수 있다.


이걸 톤으로 환산하면 약 936톤으로 추산이 가능하다.


평균 철 생산량을 추산하면 약 840,000근 즉 500여톤으로 추산 가능하다.



다만 이 계산은 1근을 600그램으로 한것이고 1근을 500그램으로 하였을 시는 모르겠다 누가 계산좀 시발 조선시대 근은 500그램이 맞다는데 시발 지금 근변환기는 600그램만 계산하니 빡침.


충청도는 5개 읍에 철장도회가 개설되어 있었던 세종 10년(1428) 현재 선공감·군기감에 세납하는 공철량이 모두 20,885근이었고 황해도는 동왕 12년 현재 선공감 정철 5,520근, 군기감 정철 5,163근 4량으로 모두 10,683근 4량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공철량은≪세종실록지리지≫에만 나타나 있는데 전라도는 철장도회읍 5군데 중 무안은 2개소의 철장에서 1,586근을 군기감에 세납하였고 무주는 2,200근을 선공감에, 914근을 전주감영에 각각 납부하였으며 창평·화순·동복 등 3개소의 철장도회에는 공철량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경상도 예천을 제외한 각 철장도회마다 공철량이 명시되어 있어, 경주의 6,533근, 안동 9,950근, 영덕 1,724근, 합천 9,500근, 용궁 8,878근, 산음 7,794근과 울산 12,500근 등 도합 56,879근이 세납되었다.

이상의 충청도와 황해도 및 경상도는 약간의 시기상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공철의 총량이 드러나 있고 전라도도 절반 가까이 밝혀진 셈이지만 그 외 다른 도의 공철량은 상고할 수 없다. 우선 상기한 4개 도에 명시된 兩監의 공철량을 간추려 보면 충청도 20,885근, 황해도 10,683근 4량, 경상도 56,879근, 전라도 무안·무주 3,786근(全羅監營納 914근 不計) 등 모두 92,233근 4량이다. 이 밖에 평안·함경·강원도 및 전라도의 3개 철장도회 등에서 생산된 공철을 모두 합친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액수에 달했을 것이다.


https://m.cafe.daum.net/Goodsam/JcY1/823?svc=cafeapi





홍무6년(1391년)             7,460,000

영락초년(1403-1410년)   19,575,026



중국의 생산량은 더 미침. 톤으로 

58,716 톤이 생산됨.





일본은? 좆도 없음. 기록 자체가 없음. 난장판이였던 전국시대가 아닌 헤이안시대 기록 없음. 전무함.

에도시대에도 마찬가지로 기록을 찾을수가 없음. 생산량 자체가 국가적으로 기록돼지 않은거같음.있더라도 내가 찾을 수 없었음. 아는사람은 언젠가 글 적어주길 바람.


또한 일본은 지질상 화산섬이라 화산재 성분 등 불순물이 잔뜩 섞인 사철이 주된 철 원료였음.

좆같은 일뽕새끼들이 부르짖는 모찌테츠,餅鉄떡철은 좋은 철이지 않냐 지랄하지만.


 露天掘り跡から採取した磁鉄鉱
「これは安政四年(1857)に大島高任が現在の釜石市甲子町大橋に洋式高炉を建設し、鉄鉱石による製錬を行なった際に採掘した露天掘り跡から採取したもので、いろいろな文献にでてくる「岩鉄」である。」(「岩手の製鉄歴史」 新沼鐵夫) 


응 좆까 그거 19세기 들어와서 현대 제철기술로 만든 제철소 슬러지야.


http://www.konnodenki.com/souken/mochitetu/motitetutowa2.html


거기다 일본 특성상 특정 지역의 특산물을 얻을수 있나? 에도시대에도 불가능하고 쇼군정도야 가능하지 서로 늘 적국취급한 다이묘들인데 에도시대 그 이전엔 늘 갈라져서 서로 칼로 찢어죽이는 전국시대인데? 좆도 기본 상식도 없는 장애년들. 

도쿠가와 막부 붕괴한것도 서로 갈라져서 죽여서이고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 한 다음에도 서로 칼빵놓고싶어서 안달해가면서 대본영에서 육군 해군 나뉘어서 지랄하다 핵 두방 쳐맞고 그나마 나아진게 지금인데 아직도 지역감정 쩌는게 좆본인데 염병할 상식도 없는 또라이들.




일본 역사를 찾아봐도 나오는 사실이, 일본의 강철은 수입임.


室町期、日本の国情を調査した明の鄭瞬功は、「鉄はシャムや福建からの輸入に多くを頼っている」と述べている(日本一鑑)
即ち、古代から江戸中期まで、ある時期を除き※1、 潤沢な舶載鉄の流入に依って、鉄の国産化も、量産性の改革も社会的必要性が殆
(ほとん)ど無かったからに他ならない。永いタタラの歴史の中で、なぜ製鉄法の進化がなかったかの謎がこれで全て氷塊する。


http://ohmura-study.net/401.html


여기에 나오듯이 강철은 샴,즉 태국과 중국의 푸젠성에서 수입하고.이것도 부족하니 조선에서도 강철을 수입함.

≪世宗實錄≫권 61, 세종 15년 윤 3월 갑인.


이건 외국 대학에서도 확정된 역사학계의 정설.


https://dh.scu.edu/exhibits/exhibits/show/pieces-of-the-past--weapons-an/japanese#:~:text=Japanese%20iron%20was%20of%20both%20low%20quality%20and%20quantity.

https://dh.scu.edu/exhibits/exhibits/show/pieces-of-the-past--weapons-an/japanese#:~:text=Japanese%20iron%20was%20of%20both%20low%20quality%20and%20quantity.





Japanese iron was of both low quality and quantity.


일본은 강철을 생산할 제철기술도 안돼고 기술이 없었지만 있다 하더라도 화산섬 특유의 불순물이 많은 사철(다른나라도 사철을 사용하였으나 일본처럼 불순물이 가득하진 않았다) 때문에 일본은 타 국가와 철의 품질을 비교하였을 때 지극히 떨어지는 열악한 품질의 쓰레기 철만이 생산돼었음.


그렇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사활을 걸었던 것이 좋은 강철의 수입이였으나 그 양은 지극히 적어서 일부 고위 귀족에게 소수만이 사용됨.


그리고 이러한 쓰레기같은 저품질의 철,거기에 저질의 기술등이 더해져서 장인에 엄청나게 의존하게 됨. 접쇠로 이러한 철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쓸만하게 만드는데, 낮은 제철기술상 대장장이 개개인의 실력등에 편차가 엄청 심하게 나왔기 때문임.


동시기 명나라나 조선은 그런거 없다. 제철기술은 국가의 관리와 통제하에 있었고 표준 생산기술과 절차,원료량등을 기록하여 체계적으로 강철을 생산했음.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A0%95%EC%B2%A0%EC%9E%A5(%E6%AD%A3%E9%90%B5%E5%8C%A0)#:~:text=%E3%80%8E%EC%98%A4%EC%A3%BC%EC%97%B0%EB%AC%B8%EC%9E%A5%EC%A0%84%EC%82%B0%EA%B3%A0(%E4%BA%94%E6%B4%B2,%EB%95%8C%EB%AC%B8%EC%97%90%20%EB%95%8C%EB%A6%AC%EB%A9%B4%20%EC%89%BD%EA%B2%8C%20%EB%B6%80%EC%84%9C%EC%A7%84%EB%8B%A4.





일본이 장인을 빨아주는 이유가 이게 전부임.


제철기술이 딸리고 체계적이지 않고 뒤죽박죽에 철 재료도 쓰레기다보니까. 이게 다임.



이러한 이유로 일본 갑옷은 대부분 연철,무기도 연철이 대부분이였고 주철이 소수나마 고위무사에서 사용됬으나 강철?

다이묘나 한두명 입지 없음.


동시기 조선이나 명은 강철제 무기나 갑옷이 주력인대 비하여 이러한 차이는 결정적임.


거기다 일본은 갑옷이 다 찰갑계인 당세구족,오오요로이가 전부인데.


찰갑은 작은 철조각이 충격을 유연하게 분산하여 방호해주는 원리인데 일본은 생산성을 높인다고(이해는 감 찰갑 하나 만드는데 철조각 몇천개 묶어서 만드니까)

철판을 크게 만들어서 그것을 이어붙여서 만들었는데.


문제는 이러면 오히려 방호력이 떨어짐. 충격 분산이 안돼고 1점에 집중돼니 관통이 더 잘됨.

https://youtu.be/sI1VaJZKl9Y?t=40








영상에 보듯이 판갑은 관통이 됨. 찰갑은 안됨.





https://youtu.be/rAIqOtw1j7o?t=1598










 영상을 보면 조선이나 명에서 주력으로 쓰이던 두정갑과는 더욱 더 그 차이는 벌어짐.

제대로 만든 찰갑이라도 두정갑의 방어력에 비해서는 낮아 철편이 찰갑은 심하게 구부러지고 부러지기 직전이나 구조상 두정갑은 철편이 살짝 구부러지는게 다임.

https://youtu.be/Nj9oRqcVHQk

https://youtu.be/Nj9oRqcVHQk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cbest&no=36431&_dcbest=1&search_pos=-45841&s_type=search_subject_memo&s_keyword=.EA.B0.91.EC.98.B7&page=1









https://youtu.be/D9OvaL2W6BA?t=1149









아래 영상은 일본의 그 좆같이 허접한 유미로 갑옷 테스트 한건데도 그냥 뜷림.

만약 조선이나 명나라 활로 테스트 했다면?

https://youtu.be/vYaG8ZPqfAI?t=90











https://youtu.be/Cwod-m1YlLQ









아마 못 살아남을거임.



1줄요약 일본 갑옷 좆병신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