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채널

-2부입니다만 1부를 쓰고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야기가 또 길어져 한 부를 더 써야할 것 같습니다.....

-사진은 빠른시일내에 넣겠습니다.


일단 우리나라 내에서의 2차 대전은 끝났다. 그런데 프랑스,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의 다른 유럽 국가들은 몰라도 우리나라 네덜란드에는 또 한 가지의 문제점이 남아있었다. 바로 일본이었다. 네덜란드와 일본은 거리가 먼데 왜 일본이 문제가 되느냐면.....

 

 

 

지금은 인도네시아로 독립한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일본에게 여전히 피해를 당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직도 항복하지 않은 상태였다. 독일도, 이탈리아도 이젠 항복하고 있는데 일본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인지 여전히 설치는 중이었다. 동인도 지역에는 지금은 자카르타가 된 바타비아와 뉴기니 지역, 수마트라 지역 등의 여러 군도가 모아져있는 동인도 지역에서 일본군이 주둔하며 동인도 원주민들과 우리나라 본토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폭행, 강간 등을 당하면서까지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거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군인들이 동인도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있기도 했고 거기에는 미국군, 영국군, 호주군, 소련군 등도 같이 전투하며 죽어나가고 있었다. 네덜란드 본토에서도 동인도의 시민들을 지키려 군인으로 자원 입대를 하는 사람이 조금이기는 하나 있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커진 지금, 여왕 빌헬미나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본국으로 돌아왔다. 여왕이 전쟁 기간 중 보여준 성원에 수많은 시민들이 감명을 받아 여왕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고 있었다. 여왕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궁전으로 들어가는 대신 폭격으로 피해를 받은 근처의 한 집으로 들어가 생활을 해보겠다고 나섰고 그렇게 나온 여왕은 "그 동안 이런데에서 전쟁으로 신음하는 시민들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는 말을 눈물로 남기고 시민들도 눈물을 흘렸다.

 

 

 

새롭게 다시 시작한 우리나라는 새로 내각도 뽑고 경제도 회복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이 미국에 의해 원자폭탄을 투하받았다는 사실을 가족들과 라디오로 듣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이 항복하고 동인도를 내어줄것이라 예상했고 결과는 그대로였다.

 

그 무렵, 나는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이웃들도 다시 우리 마을로 속속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레리나를 꿈꾸던 누나는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뒤, 미국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독일, 프랑스, 영국 등등에 막대한 원조자금을 투여했다. 2차 대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시키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소련, 폴란드, 헝가리 등의 공산주의 진영과 경쟁에서지지 않으려는 속셈이기도 하였고.....

내가 10대 중반 가까이 됐을때였는데 이때 우리나라는 그나마 이런 싸움에서 자유로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독일 같은 나라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이 4나라가 베를린 등지에서 보이지 않은 각축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러던 내가 16살이던 1950, 결국 터질게 터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다툼이 물리적인 폭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코리아라는 나라에서 북쪽의 공산진영이 남쪽의 자유진영에 공격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터질게 터졌다. 쯧쯧하는 반응이었고 우리 엄마는 전 세계가 2차 대전을 겪고 더 이상의 전쟁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이게 끝나니 또 이렇게 되어버렸구나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다.

 

북쪽의 불법적인 침입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념과 관계없이 하나가 되어 북한 측을 나치와 같은 불법 침략자로 규정하여 비난하였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싸우고 몰아낸 동인도의 군인들이 한국으로 파견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군인들을 모집하여 한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침략자와 전투한다며 기꺼이 나선 그들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에 군인들을 보냈지만 그들도 우리나라와 똑같이 침략자들과 맞서서 싸운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19519, 아버지는 밖에서 신기하게 생긴 물건을 갖고 오셨다. 옆에 마크에 PHILIPS라 적혀있는 신기한 물건이었는데 스위치 버튼이 있길래 눌러봤더니 원 모양 그림에 각을 그려넣은 그림이 있었고 그 위에 테스트 중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신기했다. 근데 나는 아버지가 이 물건을 대체 왜 사왔는지 알 수 없어서 물어봤는데

 

텔레비전 이라고 하는 물건이란다. 안에 사람이 나와서 얘기하고 그런대나, 내달 2일에 방송을 시작한대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해 102, 한 여자 아나운서가 의자에 앉아있는 채로 인사했다. 그리고 ntstv방송을 축하한다는 내용을 읽었다. 안에 사람이 진짜 있어서 놀랐다. 그리고 텔레비전에 푹 빠져버렸다. 그 당시 텔레비전에 나왔다 하는 사람은 온 동네에 유명해졌다. 아나운서든 배우든 상관없었다. 또한 라디오에서처럼 사회주의방송협회 VARA, 예능방송국 AVRO, 개신교 방송국 NCRV, VPRO, 가톨릭 방송 협회 KRO 등이 한 채널에 시간을 나눠서 방송한다고 했다.

 

1952, 나는 18살이 되었고 그동안 5년 정도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였다. HAVO라는 비서과정, 실무중심의 학교였다. 사실 이때까지 나는 뭐가 될지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에 다닐 동안 여러 경험을 해보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일단은 일을 구해서 돈을 벌어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졸업하고 어느 회사에 비서로 들어갔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냥 돈벌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회사에 비서로 3년을 다닐 동안 회사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결국 파산되어버려 실직자가 되었다. 나에게는 비로소 내가 그 뒤에 뭐가 될지 생각해야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얻은 비서과정 같은거는 더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고용사무소에 일을 구하고자 갔는데 고용사무소 직원이 다른 일자리를 구해주었다. 잠깐만 거쳐가는 식으로 하려고 했다. 그리고 저녁마다 도서관에 가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공부했다. 외국어를 배워 해외여행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