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의 바다

 

 다온하람

 

 

 애키저의 생각에 따르면, 바다는 위선자 새끼가 된다.

 

 겨우 며칠 전, 그녀와 그녀의 소대는 관광지 근처의 섬을 점령한 붕괴수들을 토벌하기 위해 바다로 숨어들었다. 붕괴수들은 약했고 섬은 고립되어 있었으니 처리하기에는 문제가 없으리라는 판단 하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때까진 바다는 그들의 울타리였다.

 

 물론 울타리는 쓰기에 따라 감옥도 방책도 될 수 있다. 그들은 바다가 그들의 방책이 되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달빛 아래에서 흔들리는 잔잔한 파도는 그들을 향한 초대장이었으니까.

 

 그래서 바다는 위선자다. 어떻게 보면 사기꾼이겠지만 아직도 잔잔한 파도가 부서지는 걸 보니 위선자가 분명하다.

 

 애키저는 해변의 바위에 숨어 길게 찢어진 팔뚝을 바라보았다. 출혈은 멎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피를 흘리고 있다. 그녀는 바위 뒤로 고개를 내밀어 해변의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고운 모래 위, 구름에 가려져 미미하게 내려오는 달빛 속에 그녀의 동료들이 쓰러져 있었다. 장례식일까. 이것이 장례식이라면 그녀는 곧 상주에서 고인이 될지도 모른다.

 

 상처가 위협적인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저 바다였다. 깊숙한 바닷속에 잠들어 있던 붕괴수들이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버텨야 해…….”

 

 애키저는 바위의 그림자에 숨어 섬 안쪽으로 움직였다. 거친 숲속에도 붕괴수는 있지만, 심해의 수압을 받아내며 성장한 저 지랄맞은 붕괴수보다는 간단하다.

 

 그래서 그녀는 숲속에 숨어들었다. 고인들과 저 가증스런 위선자 새끼를 뒤로하고.

 

 

-

 

 

 그녀의 예상대로, 상처를 입었다 한들 숲속의 붕괴수들은 그다지 겁낼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A급 발키리인 그녀가 성 7308 연구소제 파일 벙커를 갈기고 나면 웬만한 놈들은 공평하게 한 방이니까.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던 돌진급 붕괴수가 추락했을 때쯤 그녀의 주위에는 붕괴수 시체 대여섯 구가 쌓여 있었다.

 

 사흘째 이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산발이 된 머리를 뒤로 넘기고 바위 뒤에 숨겨두었던 가방을 꺼냈다. 하루를 모조리 바친 결과는 붕괴수 시체와 이 가방에 담긴 열매 몇 알이었다.

 

 눈길이 파일 벙커를 향해 빨려들어간다. 그녀의 손끝이 붕괴수의 체액으로 점철된 강철 말뚝을 쓸고 지나가 아직 뜨거운 끝자락에서 멈췄다.

 

 굵다. 그리고 뾰족하다. 무언가를 뚫고 지나가기에 손색없는 강력함을 자랑하는 그 모습. 그 증거는 붕괴수의 시체를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될 것이다.

 

 붕괴능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말뚝을 사출하는 빠르기는 총알에 필적한다. 적에게 운동 에너지의 위대함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셈이다. 물리 선생님의 필수 장비가 아닐까.

 

 ‘정신이 나갔군. 개소리나 하는 거 보니까.’

 

 동료를 모조리 잃고 사흘째. 시체는 수습도 하지 못했고 어쩌면 이미 붕괴수들의 밥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애키저의 머릿속으로 바닷물이 들이닥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운 나무에 머리를 박았다.

 

 애키저는 움직이지 않고 시선만 돌려 파일 벙커를 바라보았다. 가령, 사람 목에 저것을 가져다 대고 발사한다면 어떨까? 목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갈 것이다. 예외는 거의 없을 테지.

 

 고로 그녀는 지금 최고의 자살 수단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애키저의 발이 잡초 위를 밟았다. 붕괴수의 체액이 튀어 질척해져 있었지만, 그녀는 그걸 알아차릴 수 없었다.

 

 밤이 보낸 바람에 나무들이 흐느낀다. 그녀는 파일 벙커의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려는 그것을 꽉 끌어안고, 말뚝의 끝자락에 목을 가져다 댔다.

 

 날카로운, 하지만 아직 뜨거운 감촉이 생생하다. 숨을 쉴 때마다 그 열기가 폐를 유린하는 듯하다. 죽음의 끝에서 삶을 실감하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레버를 당기려는 순간.

 

 “우…….”

 

 붕괴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방향은? 미처 그것까지는 잡지 못했다. 그녀는 파일 벙커를 목에서 떼고 귀를 기울였다.

 

 밤, 나무들의 흐느낌. 달도 가려진 밤, 잡초 위를 흐르는 붕괴수의 체액. 죽음을 맞이하려 했던 밤, 애키저를 자극하는 붕괴수의 울음소리.

 

 ‘해변가 방향. 그것도 내가 왔던.’

 

 그 생각에 도달하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이 죽어 버렸다. 바쁘게 돌아다니던 생각이 멈추고 사위의 소리만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우우우우, 우우우우……. 연달아 들려오는 소리는 점점 커져 오고 있었다. 풀잎 뭉그러지는 소리마저 함께 들려오기 시작했을 무렵,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싹을 틔웠다.

 

 놈들은 해변가에서 왔다.

 

 해변가에서 왔다면, 놈들은 아마 심해에서 튀어나온 그 붕괴수들일 것이다.

 

 놈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거쳐서 왔다.

 

 그리고 붕괴수는 인간을 먹기도 한다.

 

 애키저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어지러운 걸까? 왜 시야가 이지러지는 걸까? 그녀는 비틀거리다 나무에 기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놈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먹었을까? 장례도 치러주지 못한 채 바닷바람에 내던져진 그들을?

 

 먹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먹었을 것이다. 붕괴능을 몸에 축적한 맛있는 식사거리를 놈들이 놓칠까? 아니!

 

 절대 놓칠 리가 없지.

 

 시야가 일그러진다. 그제야 그녀는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분명히 어지러웠고, 시야는 이지러지고 있었다. 분노가 피운 아지랑이로 인해.

 

 애키저는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 발걸음이었다. 소리를 들었는지 붕괴수가 울부짖는다. 거친 소리가 나무들의 흐느낌을 잠재운다.

 

 그래. 오렴. 이곳으로 오렴. 애키저는 그 말을 되뇌며 파일 벙커를 손이 하얘지도록 쥐었다.

 

 뚫을 수 있을까? 적어도 같은 곳에 두 번은 적중시켜야 두꺼운 장갑이 뚫릴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 불평등하더라도 세 방만 맞추면 동료들을 향한 장례는 치러질 것이다.

 

 그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멈추기에는 늦은 시점이었다.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으아아아아아!”

 

 기습보다는 돌진이다. 한순간 부풀어 올랐던 종아리가 폭발하듯 그녀를 쏘아 보낸다. 수풀이 우거진 숲속, 시야를 가리는 온갖 나뭇잎들 사이에서 붕괴수의 윤곽만은 선명했다.

 

 말뚝의 끝자락이 붕괴수의 장갑에 닿는다. 그녀는 생각할 틈도 없이 레버를 쥐었다.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겠어.

 

 폭발에 가까운 충격이 붕괴수를 날려 보낸다. 나뭇가지가 공중으로 비산하는 가운데, 그녀는 놈의 윤곽을 놓치지 않았다.

 

 곧장 달려들어 파일 벙커를 발사한다. 금이 가 있던 붕괴수의 장갑에 강철 말뚝이 작렬한다. 장갑 파편이 나뭇가지의 비행에 합류했다.

 

 붕괴수가 찌그러지고 나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뭇가지와 장갑 파편의 비행은 이미 막을 내린 뒤였다.

 

 붕괴수가 날아가며 어느 정도 정리된 수풀 속, 그녀는 파일 벙커를 쓰러진 놈의 맨살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눈가에 동료의 뒷모습이 스치운다.

 

 어쩌면 이 속에 동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한 줄기 실마리에 닿은 그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레버에서 손을 떼고,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다. 떨림은 온몸을 감염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애키저는 이를 악물었다. 놈의 살을 도려내는 데에 있어 방해가 되면 안 될 테니까.

 

 나이프를 역수로 쥐고 놈의 맨살을 푹 찔렀다. 체액이 팍 튀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누가 들어 있는 거지? 너인가? 아니면 너인가?

 

 기어코 그녀는 붕괴수의 맨살을 찢고 장기를 발견했다. 떨림이 더 심해지고 체액은 온몸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눈이 멀었을지도 모른다. 아스라이 흔들리는 희망과 그녀에게 씌워진 분노의 안대 탓에.

 

 어디선가 날아온 붕괴수가 그녀를 깔아뭉갰다. 허리가 으스러지는 아픔이 엄습했다.

 

 정신이 점선처럼 뚝뚝 떨어졌다. 날아드는 놈의 발톱을 가까스로 피한 그녀는 수풀을 기어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발 앞으로 나무가 쓰러졌다. 정신이 끊겼다가 겨우 이어진다.

 

 ‘조금만 더 하면, 그럼 됐는데.’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나무에 기대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미처 참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다시 주저앉자마자 애키저는 다른 나무로 몸을 굴렸다. 곧 날아드는 묵직한 충격과, 이어져서 쓰러지는 나무는 그녀를 뒤흔들었다.

 

 숨이 잘 쉬어지질 않는다. 시야가 검다. 무기는? 파일 벙커는 어디에 있지? 아니야. 그전에, 놈은 어디에 있지?

 

 “아…….”

 

 눈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애키저는 덜덜 떨리는 턱을 다물고 파일 벙커를 몸 앞으로 끌어왔다. 폭음이 터진다. 붕괴수가 날아가 나무에 부딪힌다.

 

 “심해 놈들, 개새끼들이…… 어?”

 

 장전하던 그녀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아니, 들어왔다기보다는 눈치챘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애키저는 그제야 자신이 대상을 착각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심해 놈들의 특징은 수압에 눌리고 눌려 두껍고 단단하게 변한 청회색 장갑이다. 그러니까 눈앞의 새하얀 저놈은 적어도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왜? 그녀의 머릿속으로 온갖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파일 벙커의 공정성 앞에서 무너지는 수많은 붕괴수들.

 

 ‘이런 놈들은 없었는데?’

 

 멈칫한 사이에 놈이 다시 일어난다. 놈은 애키저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포효했다. 풍압에 시야가 흔들린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한 줄기 생각이 스쳤다. 만일, 심해 놈들이 아니라 일반 붕괴수들이 동료들을 먹었다면?

 

 시체의 수니 붕괴수의 붕괴능 흡수력이니 따질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지쳤고 의심은 싹을 틔웠다.

 

 짐승이 되어 숨을 내쉬고. 그녀는 온몸을 비틀며 붕괴수의 앞으로 향했다. 놈이 다리를 든다. 내리찍으려는 건가? 애키저는 찢어지는 고함과 함께 놈의 턱주가리에 파일 벙커를 겨누었다.

 

 터져 나오는 폭음. 그리고 장전, 폭음. 장전, 폭음. 말뚝이 놈의 턱을 깨부술 때마다 거대한 몸뚱이가 나무에 부딪혔다 튕겨 나오길 반복한다.

 

 마침내 붕괴수의 체액으로 범벅된 그녀의 앞으로 육중한 시체가 쓰러진다. 완전히 으깨진 머리는 더이상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나이프, 나이프를.

 

 그것은 차라리 광기에 가까웠다. 파일 벙커를 내팽개치고 나이프를 찾아 허리춤을 뒤졌다. 하지만 손은 차가운 흙으로 더러워진 벨트만을 긁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붕괴수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파일 벙커로라도 구멍을 뚫어 주지. 시체 속에서 썩어 가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순간 그녀의 머리에서 탁 풀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야가 깜깜해지며 그녀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오고 있는 것은 고통이었다. 슬픔이었고 직감이었다.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직감. 그녀의 손 끝이 벨트에서 미끄러져 툭 떨어진다. 머리를 집어삼킨 것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왜일까? 어쩌면 반쯤 망가진 허리 탓일지도 모르고 장례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하는 무력감 탓일지도 모른다. 애키저의 볼을 타고 눈물이 가로지른다.

 

 눈물은 그녀의 광기를 안고 너른 평원을 질주한다. 거친 능선을 타고 넘어 마침내 절벽에 도달해 투신한다. 풀잎에 이슬 맺히듯 눈물이 떨어졌다.

 

 “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애키저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단지 자세를 바꿔 나뭇잎 사이로 밤하늘을 보는 것과 눈물을 흘려보내는 것 외에는.

 

 시야가 어두워진다. 냉기가 손끝을 타고 올라온다. 그녀는 고개를 비틀어 구름 사이로 삐져나온 달을 바라보았다.

 

 달빛조차 어둠 속에 사그라져 간다. 점점 어두워진다.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그대로 어둠 속으로 잠기려는 사이, 애키저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비쳤다.

 

 그것은 흐린 구름 너머 달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아니, 달을 가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

 

 

-

 

 

 어딘가를 비행하고 있는 것 같다. 애키저는 눈을 떴다. 바람이 몰려와 얼굴을 쓰다듬고 사라진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흐린 밤하늘. 넓게 펼쳐진 바다. 우뚝 솟은 봉우리.

 

 봉우리? 애키저는 눈을 떴다. 밤하늘과 바다가 걷히고 숲속이 드러난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누구…….”

 

 “깨셨나요.”

 

 여자? 발키리? 기억의 절벽을 타고 올라온 편린이 되살아났다. 붕괴수를 두 마리 정도 죽였던 것 같은데. 나는? 어떻게 됐지? 애키저의 눈동자가 휙휙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다가와 그녀의 눈을 감겨 주며 말했다.

 

 “쉬어요.”

 

 짤막했지만 따뜻한 울림이었다. 애키저는 숨이 막힌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물었다.

 

 “발키리…… 입니까?”

 

 유약해진 목소리가 선명했다. 애키저는 새삼 살아 있음을 느꼈다.

 

 “붕괴수, 붕괴수가.”

 

 “알아요. 근처에 있는 몇 마리는 처리했으니 걱정마세요.”

 

 “당신은.”

 

 “발키리예요. 천명 소속은 아니지만.”

 

 애키저의 머릿속에 네겐트로피와 요르문간드, 기타 작은 조직들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네겐트로피는 아닌가. 발키리보다는 기갑 위주니까.

 

 그럼 이 사람은 누구지?

 

 “우미라고 불러 주세요.”

 

 애키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소속이 중요한 게 아닐 테지.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 일…… 텐데.

 

 동료들은 어떻게 됐지?

 

 “해변가에서 시체 못 봤습니까. 발키리 열 명 정도가 그곳에서 전사했어요.”

 

 “열이나……. 미안해요. 묻어줄 수 있었던 건 둘 정도였어요.”

 

 애키저는 눈을 떴다. 슬며시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흐릿한 달빛이 내려온다.

 

 숲은 어두웠다. 그리고 고요했다. 기절하기 전처럼 흐느끼고 몸을 뒤트는 나무들의 소리조차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숲이 죽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애키저는 일어나려고 했다. 허리를 타고 미끄러지는 통증만 없었더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도로 땅바닥에 털썩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붕괴수의 시체는, 아니. 지금, 그러니까 저를 언제.”

 

 “이틀 전. 갓 죽은 붕괴수 옆에 쓰러져 있었어요. 동귀어진이라도 할 생각이었나요?”

 

 마지막 말은 애키저에게 들리지 않았다. 갓 죽은 붕괴수라고 하는 것을 보아 기절한 직후에 발견된 모양이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달력이 지나갔다.

 

 닷새. 동료들이 죽은 지 닷새가 지났다. 붕괴수에게 이미 먹혔다면…….

 

 애키저의 속에서 토기가 치솟았다. 장례도 치러주지 못하고 무능하게 쓰러진 자신을 향한 혐오이자 이미 녹아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동료를 향한 죄책감. 그녀는 땅을 긁었다. 차가운 흙이 한 움큼 패였다.

 

 발키리 일을 하면서 장수할 생각은 없었다. 애당초 수명을 깎아 가면서 지원하는 일이니까. 시체의 상태가 참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그럴 수 있었고 그런 사례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하필 왜 우리에게? 애키저는 눈을 부릅뜨고 우미를 바라보았다. 아직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그녀의 새까만 머리는 잘 보였다.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내 애키저는 눈을 도로 감았다. 속에서 들끓는 열불을 토해낼 곳이 없었다. 왜 늦게 왔냐고 우미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녀는 웅크리기로 했다. 제 속에서 불길이 썩어서 사그라지기를 바라면서.

 

 “우미 씨.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투는 딱딱했지만 목소리는 유약하다. 그녀 자신조차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제 동료들의 시체를 먹은 그 개자식들을…… 처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직접 하고 싶지 않아요?”

 

 “몸 상태가 이래서는 무리겠죠.”

 

 “그런가요.”

 

 우미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동안 애키저는 눈을 감았고, 숨을 가라앉혔고, 손에 힘을 뺐고, 속을 태우는 불길에 집중했다.

 

 “상태가 괜찮아지면 말씀하세요. 바로 다녀올게요.”

 

 “감사합니다.”

 

 

-

 

 

 우미는 사람을 돌보는 데에 익숙한 것 같았다. 묘한 거리감과 함께하는 따스함. 애키저가 깨어난 지 이틀째, 적당히 세운 임시 거처에서 우미는 열매 껍질을 벗겨내고 있었다.

 

 우미는 후드를 벗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항상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채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애키저가 볼 수 있었던 건 해봐야 그녀의 하관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키가 애키저와 비슷하다는 점, 그러니까 여자 기준으로는 꽤 큰 키라는 점과 전투에 능하다는 점. 그녀의 머릿속으로 단체 이름이 줄줄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그만두기로 했다.

 

 ‘아는 게 없네.’

 

 만난 지 이틀째. 정확히는 나흘이다. 절반은 기절해 있었지만. 그래도 이틀 동안 계속 같이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그녀의 정체도 이야기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

 

 “왜 여기로 온 겁니까?”

 

 “애키저는요?”

 

 되물음이라. 애키저는 그냥 제 이야기를 먼저 풀어놓기로 했다.

 

 “이 섬 가까이에 관광지가 하나 있는 건 아실 겁니다. 붕괴의 초기 진압에 성공하고 몇십 년이 지난 뒤에야 세워진 모양인데, 이 섬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라.”

 

 “뒤늦게 소탕에 나선 거군요.”

 

 우미는 그녀에게 열매 한 조각을 건넸다. 묘하게 달면서도 떫은 맛이었다. 애키저는 이상한 표정으로 열매를 씹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천명치고는 일처리가 시원찮았죠. 전산 오류인지 누군가 게으름을 피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계 성능은 뛰어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아마 그게 맞지 않을까요?”

 

 “그 소리, 며칠 전에도 들었습니다.”

 

 “동료에게서요?”

 

 “예, 뭐.”

 

 애키저와 동료들 사이의 관계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애당초 사지를 같이 살아나온 사이끼리 관계가 파탄 날 수가 없겠지만. 파탄 난 관계였다면 그녀는 이미 무덤에 있었을 것이다.

 

 농담과 시답잖은 잡담이 많을 수밖에. 그중 한 대원이 무심코 내던진 질문이 있었다.

 

 ‘천명 레이더에 왜 이게 안 걸린 걸까요?’

 

 작전 투입 전날의 긴장된 공기는 곧장 조각나 흩어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토론의 열기였다. 학구열에 가까운 무언가를 소리치는 누군가와 그냥 개소리를 하고 싶었던 누군가, 기타 여러 종류의 대원의.

 

 가장 적극적으로 개 짖는 소리를 열창했던 자는 대장이었다.

 

 ‘외계인이 붕괴 묻어서 붕괴수가 되었고, 그래서 레이더에 안 걸린 게 아닐까? 분명해! 특이 케이스니까 레이더에 안 걸린 거야!’

 

 불쌍한 이에게 연민의 시선이 쏟아졌다. 불쌍한 사람. 전장에서 구르다가 그만 저런 개 짖는 소리를…….

 

 꽤 많은 개소리와 그럴듯한 주장이 모이면 길고 긴 토론은 완성된다. 개소리는 농담거리로 추락하고 어느새 그럴듯한 주장 두 가지가 뽑혀 그들의 화제가 되는 것도 꽤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레이더 정비를 잘못한 거 아니야? 엔지니어가 실수한 거지.’

 

 ‘글쎄요, 그냥 조금 늦게 따로 붕괴가 일어난 게 아닐까요?’

 

 ‘이렇게 작은 섬인데?’

 

 ‘시끄러워! 잠이나 자, 이것들아!’

 

 물론, 토론이 밤 늦게까지 이어진다면 누군가가 화낸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순리다. 그래서 토론은 다음날로 미뤄졌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애키저는 그 토론이 영구적으로 미뤄졌음을 알았다.

 

 “대략 그런 거죠. 영화라든지 소설이라든지, 사망 플래그가 꽂히는 순간. 그걸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해하실 것까지야.”

 

 일어날 수만 있다면 곧장 웅크리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고 싶다. 애키저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우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나무에 기대 앉은 채 열매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쪽은요?”

 

 “관광지에 왔다가 근처에 붕괴 에너지가 느껴지길래.”

 

 “민감하시군요.”

 

 “원체 그런 체질이라서요.”

 

 우미는 싱긋 웃으며 남은 열매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밤이 다 됐네요. 달이 뜨고 있는 걸 보니까.”

 

 “근처에 붕괴수는 없습니까?”

 

 애키저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굳은 표정을 본 우미는 그녀의 팔을 토닥여 주곤 저도 바닥에 몸을 누였다.

 

 “없어요. 안심하고 주무세요.”

 

 “그런가요.”

 

 애키저는 표정을 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쌓아 만든 조악한 것이었지만 그것으로도 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천장은 밤 탓인지 약간 푸르스름한 회색으로 보였다. 우미의 후드 색과 같은.

 

 애키저는 눈동자만 굴려 제 팔에 얹어진 우미의 손을 바라보았다. 길고 예쁘지만 거칠다.

 

 

-

 

 

 발키리답게 애키저는 빠르게 회복해가고 있었다. 사흘 정도가 더 흘렀을 무렵엔 어느 정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허리 상태가 이래서야 달리기는 무리겠지만.

 

 파일 벙커가 굉음을 내며 말뚝을 발사했다. 반동은 온몸으로 퍼지고 굳건히 바닥에 박힌 두 발은 그것을 받아낸다. 그것이 정상적인 흐름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애키저는 반동에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허리가 아팠다.

 

 “괜찮아요?”

 

 급히 달려 나온 우미가 그녀를 부축했다. 파일 벙커가 떨어져 흙바닥을 뒹굴었다.

 

 애키저가 겨우겨우 나뭇잎을 깐 바닥에 주저앉자 풀잎 조각이 먼지처럼 흩날렸다. 그녀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맨바닥을 나뒹구는 파일 벙커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저건 당분간 쓰기 힘들 것 같네요.”

 

 애키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일 벙커가 새삼 멀어 보였다. 얼마나 달려가야 잡을 수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달려야 하는 건 몇 미터 남짓의 거리가 아닌 아득한 시간의 거리일지도 모른다.

 

 “허리가 나을 수 있을까요.”

 

 “천명의 기술력이라면요.”

 

 “허리가 나으면 싸울 수 있을까요.”

 

 우미는 대답하려다 말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애키저는 시선을 파일 벙커에 고정한 채 입이라는 구멍으로 문장을 쏟아냈다.

 

 “못 싸울 것 같습니다. 저는 안 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제가 괜찮아지면 부탁할 일.”

 

 말이 뚝뚝 끊겨 흐트러진 것 같았다. 쏟아져서 마구잡이로 섞인 것처럼.

 

 애키저는 여전히 파일 벙커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정말 미안하지만, 붕괴수를 처리해줄 수 있겠습니까.”

 

 우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키저는 쭈그린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에는 번개가 정말로 많이 쳤다. 우미가 붕괴수들을 처리하러 나간 지 몇 시간, 어느새 하늘은 폭풍에 휘말려 어두워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빗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폭풍이 소리를 죽이고 간 모양이었다. 그녀의 귀에는 천둥소리만이 가득했으니까.

 

 한참을 바닥에 머물던 파일 벙커는 이제 빗물에 젖어 더러워져 있었다. 애키저는 그것을 품에 꼭 안고서 숲속을 걸었다.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빽빽한 나무에 막혀 잦아든다.

 

 며칠 전엔가 숲속을 떠돌던 중에 꽤 괜찮은 곳을 본 적이 있었다. 꽃이 꽤 피어 있었고, 높이 솟은 나무는 탁 트인 풍경을 보여주려는 듯 옆으로 비켜 서 있었다. 바위 절벽 위는 위험하다기보다는 아름다웠다. 동료들을 위한 무덤으로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애키저는 그 절벽에 서서 꽃들을, 나무를,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았다. 축 젖어 쓰러져 버린 꽃. 부러진 나뭇가지를 땅에 떨구고 만 앙상한 나무. 본색을 드러낸 위선적인 바다.

 

 그녀는 파일 벙커를 품에 끌어안고 절벽에 앉았다. 아름다웠던 풍경은 파괴되었다. 잔재만이 남아 그녀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해변이 있는 방향이다. 동료들이 죽고 잡아먹힌 그곳.

 

 그리고 그녀는 절벽에 있다. 제대로 쓰지도 못할 파일 벙커를 품에 안고, 채 이루지 못한 장례를 다른 이에게 맡기고.

 

 번개가 쳤다. 곧 천둥이 이어졌다. 그녀의 온몸에 남기고 간 그림자에 못을 박아 고정하는 것 같다.

 

 애키저는 파일 벙커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팔다리로 고정한 채 턱을 말뚝 위에 얹어 놓는다. 차가운 말뚝이 그녀에게 노크한다.

 

 “스읍, 푸후…….”

 

 빗물 탓에 숨쉬기가 불편했다. 얼굴을 적신 빗물은 눈에서 볼로, 그리고 턱으로 향해 말뚝을 적셨다. 떨리는 손끝이 파일 벙커의 몸통을 훑고 지나 레버를 쥐었다.

 

 번개가 쳤다. 곧 천둥이 이어졌다.

 

 “애키저 씨?”

 

 “우미 씨.”

 

 애키저는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붕괴수는 어떻게 됐죠?”

 

 “다 처리했어요.”

 

 “감사합니다.”

 

 애키저는 말한다기보다는 흘리는 것 같았다. 벌린 입술을 타고 고인 말들이 빗물에 휩쓸려서.

 

 우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키저는 레버를 쥔 손이 하얗게 되도록 힘을 준 채 말을 흘렸다.

 

 “보기 싫은 일이 일어날 겁니다.”

 

 “보기 싫은 일이라는 자각은 있으시네요.”

 

 “도와준 당신에게 있어서는 보기 좋지 않을 수밖에요.”

 

 “저에게만 보기 좋지 않은 일은 아닐 거예요.”

 

 “동료들이 걱정할 겁니다, 같은 말을 하려고 오신 겁니까.”

 

 애키저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후드를 뒤집어쓴 우미나, 파일 벙커를 턱에 가져다 댄 그녀나 빗물로 축 젖어 있었다.

 

 “동료들은 죽었습니다. 더이상 저를 걱정할 필요도, 그럴 수도 없지요.”

 

 “살아 있었다면 당신을 걱정했을 거예요.”

 

 “하지만 죽었습니다. 바다로 건너오는 중에…… 심해에서 올라온 붕괴수들에게…….”

 

 애키저는 말이 막힌 듯 입안에 고인 빗물을 뱉어냈다. 그리고 우미를 노려보았다.

 

 “심지어 그중 대부분은 녹아 사라졌단 말입니다!”

 

 무려 몇 년을 같이한 동료들이다. 훈련생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친구도 있었고 전장에 처음 배치되고 나서부터 달려온 믿음직한 이들도 있었다. 그것이 정신 나간 대장이었든, 깍듯이 예의를 차리던 후배였든, 조금 배려가 없는 동료였든.

 

 “그런 동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바다에 빠져서 죽었거나 목이 부러져 죽었거나 붕괴수 놈들에게 다져져 죽었단 말입니다. 그걸로 끝도 나지 않았지요. 녹아서 사라지고, 바다에서 썩어갈지도 모르는 이들이 열 명은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내게! 박혀 있었던 이들이! 모조리 떨어져 나가다 못해 바스라졌단 말입니다!”

 

 그녀가 소리칠 때마다 빗물이 몰아쳐 파일 벙커를 적셨다. 애키저는 고개를 가슴에 푹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무력하게 앉아 있죠.”

 

 쏟아진 말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든다. 애키저는 이를 갈면서 계속 말을 흘렸다.

 

 “동료들을 잃고 나서 사흘을 고민했습니다. 나는 왜 살아 있지?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붕괴에게 잡아먹히고 사라졌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건 쓰지도 못할 파일 벙커와 더 싸울 수 있을지나 의심스런 몸뚱이가 답니다. 저는 왜 살아 있는 걸까요?”

 

 흘리고 흘리다가 결국은 격류가 되어 쏟아지도록.

 

 “적어도 붕괴수의 살이라도 씹어 먹었다면, 내가 직접 잡아서 그놈들의 배를 갈라 녹아 버린 옷자락이라도 꺼내 들었다면! 그럼 장례라도 치러줄 수 있는 건데! 적어도 당당한 나로서 그 애들을 추모할 수 있었을 텐데!”

 

 애키저의 손이 레버를 쥔 손을 덮었다.

 

 “그 애들에게 당당하지도 못한 나는 왜 살아 있는 건데!”

 

 우미의 손이 그녀의 양손을 감쌌다. 차가운 빗물을 뚫고 따스한 온기가 전해진다.

 

 “살아 있으니 살아 있어요.”

 

 “난, 그 애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당장은 없을지라도 나중을 생각한다면, 괜찮아요. 뭐든 괜찮을 거예요. 당신은 많이 슬퍼했잖아요.”

 

 “그게 전부야.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

 

 “그럼 그걸 계속하면 될 뿐. 그들을 사랑하고 추억하면 돼요. 계속하면 되는 거예요.”

 

 우미는 한 번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면 길이 나타나겠죠. 당신에겐 부디 바른 길이기를.”

 

 애키저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입을 여는 대신 우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이전에 봤던 대로 거칠었다. 오랫동안 무기를 잡아 온 손일 테지. 꽤 긴 시간, 그녀도 붕괴에 맞서 싸워 왔을 것이다.

 

 당신도 잃은 게 있습니까? 가슴 속에서 차오른 말이 꾹 닫힌 입술에 막혀 입안에 고였다. 애키저는 레버에서 손을 뗐다. 흘릴 뿐이었던 말이 비로소 ‘말한다는’ 동작으로 튀어나왔다.

 

 “미안해.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정말…….”

 

 그것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아님을 우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애키저를 끌어안았다. 레버에 힘없이 걸쳐졌던 두 손은 자연스레 우미의 등을 감쌌다.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등을 토닥여 주며 나지막이 흘려 보내는 괜찮아, 괜찮아. 세 음절짜리 짧은 언어에서 애키저는 온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우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마주했다. 비에 푹 젖었지만 후드가 벗겨져 드러난 그녀의 얼굴에는 축축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에게서 손이 떨어지려는 것 같다. 애키저는 양손으로 그녀의 손목 부근을 살포시 잡았다. 그리고 입을 맞추듯 얼굴을 묻었다.

 

 비가 그쳤다. 구름 사이로 은은한 햇빛이 비치는 사이, 빗물로 울던 그녀는 그제야 눈물을 흘렸다.

 

 

-

 

 

 시체는 둘뿐이었지만 묻을 사람은 열한 명이었다. 비참하게 뒤틀린 그들의 사지를 바로잡고, 애키저는 그들의 차가운 얼굴을 쓰다듬고는 삽을 들었다.

 

 침묵하는 숲속에서 흙 쏟아지는 소리가 적막하게 울렸다.

 

 탁 트인 풍경, 그곳을 비추려는 듯 비켜선 나무. 비록 꽃은 비에 휩쓸려 사라졌지만, 적어도 답답한 나무의 감옥 속보다는 넓게 펼쳐진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마지막 삽질이 끝나고, 덩굴로 나무 조각을 묶어 만든 십자가를 세워 준 애키저는 무덤을 바라보았다. 고요하다. 평화로운 의미로.

 

 그 모든 과정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미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애키저는 그녀를 바라보며 살포시 웃었다.

 

 되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붕괴수의 포효도, 숲의 흐느낌도 그 무엇도 없었다. 자박거리는 발소리만이 고요히 가는 길을 비춰 주고 있다.

 

 “붕괴수는 얼마나 있었습니까.”

 

 “스무 마리 조금 넘게 있었어요. 흩어져 있었죠.”

 

 “고생했겠군요. 감사합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서 고마워요.”

 

 우미는 싱긋 웃었다. 똑같이 미소로 화답한 애키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의 감옥. 이제는 동료의 무덤이 있는.

 

 언젠가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 어쩌면 후속 소대나 분대가 와서 심해의 붕괴수들을 처리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배를 타고 그들의 무덤을 보러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탈출에 대해서는, 아마 천명의 구조대가 올 것이다. 일주일 넘게 연락이 끊겨 있었으니 앞으로 일주일 정도 내에는 오겠지.

 

 숲속을 훑던 그녀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새하얀 것. 붕괴수다. 정확히는 그 시체다. 움직이지 않으니까.

 

 문득 가까이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키저는 잠시 멈춰 그곳을 바라보았다.

 

 “우미 씨, 먼저 가세요.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열매라도 찾으셨나요?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 와요.”

 

 “자살시도는 안 할 겁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붕괴수의 시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무를 짚고 빽빽한 숲속을 걷던 그녀는 어느샌가 나무가 사라졌음을 알아챘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원을 그리며 나무가 모조리 부러져 있다. 아니, 베여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검게 탄 나무의 단면은 깔끔했다.

 

 ‘이게 무슨.’

 

 범위는 꽤 넓다. 애키저는 반원의 경계에 서서 나무가 잘려나간 범위를 가늠해 보았다. 전차급 붕괴수 다섯 마리 정도는 들어갈까?

 

 새까맣게 변한 나무를 지나 붕괴수의 시체를 살폈다. 깔끔하게 머리를 잘라 놓았다. 마찬가지로 단면은 그을려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 혹시 지금 이 배를 가르면 동료의 부산물이나마…….

 

 “윽.”

 

 손끝이 붕괴수의 시체에 닿자 스파크가 튀었다. 따끔거리는 손끝을 문지르며 그녀는 불탄 나무 위에 앉았다. 깔끔해서 의자로 써도 괜찮을 것 같다.

 

 ‘이미 늦었어.’

 

 그녀는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붕괴수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더이상 그곳에 동료의 잔재는 남아 있지 않을 테지. 그야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으니까.

 

 애키저는 그곳에 앉아 우미를 떠올려 보았다. 거친 손을 보면 훈련을 꽤 많이 한 모양이고, 이렇게 넓은 범위의 나무를 ‘도려낸’ 걸 보니 분명 강력한 발키리가 맞았다. 스파크가 튀는 걸 보니 전기를 다루거나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고.

 

 “…….”

 

 어느 고참 발키리와의 잡담이 떠올랐다. 천명과 요르문간드의 협력, 산호섬에서 나타난 번개의 율자. 그 대화에서 느꼈던 미묘한 감정은 아직도 기억할 수 있었다. 요르문간드의 계획이라는 걸 들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이건 불멸의 칼날 쪽 친구한테서 들은 거니까 확실해!’

 

 라고, 발키리는 단언했다.

 

 그날 밤은 번개가 많이 쳤다. 애키저는 한참을 그곳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고요했다. 어쩌면 숲이 빈사 상태에 빠져 조용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흐린 하늘을 보고, 빽빽한 숲을 보았다가, 풀잎이 마구잡이로 솟은 길을 보고는, 마지막으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눈가를 더듬어 본다. 그날의 온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돌아갔을 때 우미는 나뭇잎 바닥 위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발소리를 알아챈 듯 금방 눈을 떠 그녀를 맞이하긴 했지만.

 

 “왔어요?”

 

 애키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 온 배가 있어요. 붕괴수들이 조금 방해가 되겠지만, 빨리 나가면 어떻게 따라오는 것들은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나가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현대 문명이 그립지 않나요?”

 

 애키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녁에 나갈까요. 붕괴수들에게도 잘 안 보일 테니.”

 

 우미는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명상에 들어갔다. 애키저는 한 걸음 내디뎠다가, 다시 발을 거두었다. 그리고 뒤돌아 걸어온 길을 밟았다.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는 듯한 역행이었다. 동시에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동료들의 무덤 앞에 와 섰다.

 

 나무에 기대 앉은 그녀는 주머니에서 열매 조각을 하나 꺼내 우물거렸다. 그리고 한참을 무덤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무덤가였다. 그녀가 파일 벙커를 목에 가져다 댔던, 그리고 우미가 그녀를 위로했던.

 

 우미가 애키저를 위로했던.

 

 비로소 그녀의 세상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우미는 따뜻했고, 아름다웠고, 그녀를 안아 주었다. 길의 희망을 알려주며 동료들을 사랑하고 추억하라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요르문간드의 간부라면. 그 계획의 실행자라면. 그녀는 열매 몇 조각을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넣고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온몸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당신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습니까.”

 

 독백은 허공을 맴돌다 흩어졌다. 질문이 되지 못한 질문은 땅에 떨어지고, 시선은 천천히 올라가 동료들의 잠자리를 향했다.

 

 빛이 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점점 붉게 물드는 하늘에는 어느새 황혼의 빛깔이 떠오르고 있었다.

 

 애키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잡한 감정을 말로 토해내지도 못한 채, 그녀의 시선은 손끝에 머무르다 조악한 묘비로 움직였다.

 

 ‘잘 있어.’

 

 난 물어보고 올게. 왜 그랬냐고. 그런 사람이 대체 왜 그런 계획을 알고도 그곳에 있는지, 알지 않고는 힘들 것 같아.

 

 “가끔씩 올게. 올 수 있다면. 대장님도 안녕히 계시고요. 외계인 소리는 꽤 인상 깊었어요.”

 

 톡톡 묘비에서 전해져 오는 감각은 거칠었다.

 

 

-

 

 

 그날 밤도 구름이 많이 껴 있었다. 흐린 달빛이 커튼에 가려지듯 구름에는 미미한 빛의 잔재만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하늘이 그녀의 의심을 키우는 것 같았다. 어느새 밤, 우미의 제안으로 잠시 섬을 돌아다니던 애키저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파일 벙커가 걸음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여긴 좀 괜찮네요.”

 

 우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탁 트인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숲에서 살짝 튀어나온 절벽이었다. 메마르고, 딱딱하고, 어두운 바다를 위한 장송곡 같은. 그래서 애키저는 우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우미 씨.”

 

 반쯤은 충동이었을 것이다. 세 글자가 그녀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순간 애키저는 그녀 자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 글자는 못을 박는다. 우미는 그녀를 돌아보았고, 대답을 기다렸다. 애키저는 파일 벙커를 꽉 쥐고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은, 번개의 율자인가요?”

 

 정적. 소리만이 아닌 시야조차. 우미의, 메이의 얼굴은 그야말로 정적이었다. 생명의 그것은 무생물로 전락하고, 남은 껍데기가 애키저를 바라보는 것 같다.

 

 “당신은, 아니, 미안해요. 그래, 미안해요. 하지만 고마워요. 알아봐 주시니.”

 

 기시감이다. 메이는 말한다기보다는 말을 흘리고 있다. 불과 하루이틀 전의 그녀처럼.

 

 ‘하지만 나는 우미…… 메이 씨를 몰라.’

 

 미안하다는 건 속여서일까. 그렇다면 고맙다는 건 무엇일까. 애키저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검은 번개가 기어 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속을 태우고 찌르면서.

 

 그래서였는지, 애키저는 불쑥 말하고 말았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아니에요.”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아니에요.”

 

 “사람에게 사랑하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미안하지만 다 아니에요.”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났다. 메이는 그녀에게 대답할수록 울 것 같은, 어두운 표정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런 당신이 요르문간드에 왜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하지 않아도 돼요. 않아야 하는 일이고요.”

 

 “당신은 저에게 사랑하고 추억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바른 길이 열릴 거라고.”

 

 애키저는 한 발자국 내딛으려다 그만두었다. 동시에 꺼내려던 말도 막히고 말았다. 이미 메이는 대답하고 있었기에. 표정으로, 온몸으로.

 

 “요르문간드를 안다니, 그건 꽤 신기한 일이네요.”

 

 화제를 돌리려는 기색이 다분했다. 메이의 얼굴에는 모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불안과 차분함.

 

 “불멸의 칼날 대원의 지인이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불멸의 칼날, 그렇네요. 요르문간드가 악질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네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질문은 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대답을 거부하는 질문이다. 애키저가 머뭇거리는 사이 메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꽤 흐리죠. 요즘 계속 그랬을 거예요. 태양을 보기가 싫었거든요. 그런 사람이에요, 저는. 악질 단체의 간부고, 동시에 천명의 배신자니까.”

 

 ‘태양을 보기가 무서웠거든요.’ 애키저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요즘 태양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달도, 별도, 구름에 가려져 그녀를 비추지 않고 있었다.

 

 두려움의 대상은 누구일까. 답은 정해져 있겠지.

 

 “적어도 제겐 태양 같은 사람이 당신이었습니다. 악질 단체의 간부보다는 위로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었고, 동료를 아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위선이라고 말할 건가요?”

 

 애키저의 눈길이 자연스레 바다로 향했다. 위선자. 그것을 배경으로 한, 따뜻한 위선자.

 

 “위선, 위선이라. 네, 위선이네요. 위선일 수밖에요. 아마 뭘 해도 위선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인걸요. 잘 알고 있어요.”

 

 “난, 난, 당신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애키저는 힘겹게 손을 들어 얼굴 반쪽을 가렸다. 나머지 한쪽 눈마저 메이를 응시하다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것을 본 메이는 살포시 웃었다.

 

 “위선자를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지요.”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해하면 안 될 사람이에요. 무엇보다 당신은 저에 대한 답을 아직 내리지 못했을 테니…….”

 

 마지막 문장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하다. 애키저는 고개를 홱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메이의 일그러진 표정. 애키저의 손이 제 얼굴을 더듬는다. 그녀도, 일그러져 있었다.

 

 “이해하면 안 되는 거군요.”

 

 “그 정도의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런 일이군요…….”

 

 메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돌아가세요. 당신이 상륙했던 그 해변에 배가 하나 있을 거예요. 지금은 밤이니까, 들키지 않고 돌아갈 수 있겠죠.”

 

 “그래요.”

 

 애키저는 말 한 마디를 흘리고 돌아섰다. 저릿거리는 발을 옮겨 한 발 한 발 풀잎을 밟는다. 그녀는 천천히, 숲속으로 향했다.

 

 “고마웠어요. 날 잠시 동안만 몰라줘서.”

 

 풍덩, 소리가 났다. 애키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메이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지만, 그곳에는 황량한 바닷바람만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 뿐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 소리는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이해받아서는 안 될, 하지만 자신은 타인을 이해하려 하는.

 

 숲속의 길은 어두웠다. 소리조차 잡아먹는 어둠 속, 그녀는 정적 위를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한참 뒤, 느린 걸음으로 숲속을 빠져나왔을 때, 동료가 죽었던 모래사장에 발을 올렸을 때, 그녀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모래 위에 쓸쓸한 배 한 척이 있었다. 바다는 차가운 파도로 모래사장을 적시고 있었고, 바닷바람은 그녀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구름 사이로 슬며시 비춰지는 은색의 달빛 아래, 붕괴수의 시체가 바다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애키저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위에서 흔들거리는 번개 한 가닥을.

 

 무릎을 박은 모래사장이 조금씩 젖어 든다. 애키저는 떨리는 손을 들어 볼을 닦아 보았다. 눈물이 흐르고 있다. 그제야 귀가 트인다.

 

 숲속의 어둠에 죽어 있던 흐느낌이 되살아났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속에 스민 흐느낌은 그녀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마지막 인사였다. 애키저는 구름이 걷히는 하늘을 향해 울었다.

 

 

-

 

 

 바닷속. 구름에 가려진 달빛은 희미하게 수면을 비출 뿐 바닷속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흐늘거리는 메이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녀는 수면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바다, 달빛. 세상과 단절된.

 

 그곳에서 그녀는 잠시 우미로 있을 수 있었다. 위선자 메이가 아닌 따뜻한 우미로. 하지만 한계는 언젠가 찾아오는 걸까.

 

 메이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러나온대도 아무도 모르는 바다다. 어차피 그녀의 눈물은 바닷물에 삼켜져 사라질 테니. 그래서 그녀는 한참 눈을 감고 있었다.

 

 바닷속에서도 그녀는 죽지 않는다. 단지, 깊이 침잠한다. 아래로, 더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