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륵.


어렸을 땐 발키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각 사각.


정확하게는 전장에서 활약하는 발키리.

성흔을 등에 새기고 무기를 쥔 채, 붕괴수와 망자들을 쓰러트리며 시민들을 구조하는 그런 영웅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건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자신은 적성이 없다. 붕괴능을 다룰 수 없다. 성흔을 등에 새기면 그건 발키리가 아니라 되는 게 아니라 망자가 되어 자살하는 꼴이다.


━드르륵.


그래도, 영웅이 되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 말해주었다. 꼭 전장의 최전선에 서야만 영웅이 되는 건 아니라고. 그들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서, 빛을 받는 영웅들을 지탱해주는 또 다른 영웅이 있노라고.

새하얀 머리에 아담한 체구를 가진 학원장, 테레사 아포칼립스님에게 들은 말이다.

그것을 계기로 그녀는 전장에서 싸우는 발키리가 되는 것은 포기했다. 하지만 뒤에서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성 프레이야 학원의 청소부도 일단은 발키리다. 그런 말단에서 시작하면 뭐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둥바둥 살아오기를 10년.

그녀는 천명 극동 지부의 거대 함선, 히페리온 호의 함장이 되어 극동 지부 소속 발키리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때, 자신을 격려해주었던 테레사 학원장도 지금은 같은 함선에 타고 있었다.


"흐으...."


그리, 낭만적인 일은 아니다.

붕괴와 싸우는 것은 엄연히 전쟁이었고 발키리들은 전사였으니까. 

전장에 나간 발키리들은 다쳐서 돌아오는 경우가 잦다. 회복할 수 있는 상처라면 다행이다. 

성흔을 지닌 발키리는 회복력도 뛰어나다지만 손 쓸 방도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다쳐서 돌아오는 경우도 잦았고, 목숨이 끊긴 채 몸만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으며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은 돌아왔다는 것이다. 몸도 목숨도.


"키아나..."


몇 달 만에 돌아온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반대로 몇 달 동안 히페리온에 홀로 머물렀던 메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함장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녀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알고는 있는데, 왜.

물어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걸까.


"키아나 괜찮아?"

"함장, 나 너무 힘든데 조금 있다가...."

"그게 아니라 키아나..읏?"


뻗은 손을 탁 쳐내는 손길. 율자 코어를 지니고 있는 발키리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발키리라지만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함장은 그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무슨 돌에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손등이 쓰라렸다.


"....."

"미, 미안해 키아나..."


걱정되서 물은 건데. 그런 표정을 하고 있자 소녀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짓더니 함장을 지나쳐 의무실 쪽으로 향했다.

테레사와 아인슈타인. 두 사람은 자신과 다르게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야 당연하다. 그들은 적당히 눈치를 보고 있었으니까. 소녀의 상태가 결코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함장도 그걸 모르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눈치가 없었다면 한 지부를 대표하는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구태여 눈치채지 못한 척 그녀에게 말을 건 이유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그런 뒤틀린 파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키아나...괜찮아?"


눈치가 없느냐는 눈빛을 테레사를 비롯한 다른 히페리온의 인원에게서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백발 소녀의 방을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들어갔다.

문이 열린 순간 등을 조금 돌려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한 소녀는 그대로 다시 돌아누웠다. 얼굴이 벽에 향해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던 땋은 양갈래 머리도 완전히 풀어 헤친 채였다.


"밥, 가지고 왔는데..."


메이가 키아나를 배신했다.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히페리온에 상주하는 인원 대부분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외다. 정복의 보석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붕괴 에너지를 너무 많이 받은 몸. 밥도 안 먹으면 위험하다.


"먹기 싫은 건 알겠지만 키아나...밥은 꼭 먹어야 해."

"....."

"지금도 기운 없잖아. 일단 밥부터 먹고 기운 차리자. 그래야 메이도 다시 볼 수 있..."


컥? 함장은 목이 꽉 막히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이아몬드처럼 푸르던 두 눈이 순간 노랗게 물들었다. 율자의 침식. 싸늘한 살기가 함장의 등허리를 타고 올랐다.

막대한 붕괴 에너지. 율자의 힘. 발키리.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그녀는 반응은커녕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까...흐윽...?"


퍽! 손을 움직여 팔을 쳐보지만 미약한 발버둥에 불과했다. 

그녀로서는 어찌 할 방법도 없을 정도로 손아귀의 힘이 강했다.

쿵. 전선이 뽑힌 기계처럼 실없이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켁, 켁. 목에 시뻘건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 목을 졸린 그녀는 한참이나 기침을 하고 나서야 숨을 되찾았다.


"하, 함장?"


이윽고 당황한 키아나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율자의 침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아무렴, 그녀가 내면까지 악한 건 아니다. 남의 얼굴이 보기 싫으면 고개를 돌리지 목을 조르는 것은 그녀의 본성이 아니었다.

다행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숨이 막혀 얼굴이 붉어진 건지 흥분해서 얼굴이 붉어진 건지 들키지 않을 테니까.


"함장 괜찮아...?"

"미안해 키아나.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지....? 미안, 미안해."

"아, 아냐! 함장은 잘못한 거 없어. 내가 못나서..."


그 후로 이어지는 자책과 자기 혐오. 함장은 소녀의 푸른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기 혐오를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이 율자의 침식을 가속시키는 건 아닐까.

함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음식과 함께 가져온 수저를 들었다. 

소녀가 좋아하는 반찬으로 이루어진 식판. 그녀는 밥을 한 술 떠서 소녀를 향해 내밀었다.


"일단 밥은 꼭 먹자. 그래야 기운 차리지."

"으, 응."


수저를 넘겨 받아 입안에 집어 넣는 소녀. 입맛이 없어보였지만 키아나는 밥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눈치를 살피는 척 함장은 소녀를 잠시 바라본다. 그러고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키아나, 메이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

"분명히 나한테는 키아나 너를 데리고 오겠다고, 그러고 나갔는데 왜..."

".....함장."

"이야기 해줄 수, 없을까?"


그 이야기는 하지 마.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함장은 일부러 키아나의 목소리보다 조금 더 크게 말했다.

그러고서는 듣지 못했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미안해 키아나. 방금 못 들었는데 무슨 말 했는지 다시..."

"그 이야기, 하지 말라고!"


순식간에 눈이 샛노랗게 변한다. 다시 찾아온 율자의 침식. 

그리고 또 한 번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손이 다가온다.

컥! 다시금 목이 막혔다. 이번에는 그걸로 끝나지 않아 반은 율자, 반은 인간인 소녀가 함장을 밀어붙였다. 벽에 부딪치자 그 아래로, 원래 소녀가 누워 있었던 침대 위로 함장의 몸이 팽개쳐졌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픈 까닭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끄, 흐으...!"


남들에게 밝힌다면 지저분하고 천박하다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욕망. 

소녀에게 목이 졸리며 그녀는 아래가 젖어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사고가 끊겨가지만 그마저도 흥분을 가속시킬 뿐.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미 뒷전이었다.


"그, 이야기! 하지 말랬지!"


키아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율자의 목소리. 손짓 한 번에 수백의 타이탄을 파괴하는 공간의 율자.

그녀가 노란 눈을 빛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목을 조르다가 진짜로 머리가 하얗게 된 함장이 손을 치자 소녀의 손이 떨어졌다.

율자가 봐준 것이 아니다. 몸의 주도권을 쥐고 싸우는 키아나의 행동이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그 증거였다.

폭력성은 곧 다른 형태로 발현되었다.


"꺅...?!"


쫘아악! 하얀 제복. 히페리온에서 유일하게 그녀만 입을 수 있는 함장복이 찢어졌다. 

새하얀 가슴이 튀어나와서 흔들거린다. 눈길. 율자의 눈이 가슴을 향했다.

부정적인 감정 중 하나, 욕망. 키아나가 남자가 아닌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와 같은 몸에서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율자 또한 그 영향을 받은 걸까.

율자의 욕망이 함장을 향했다. 유방을 꽉 쥐는 손길. 손톱이 파고드는 아찔한 감각에 함장은 허리를 튕겼다.


"흐, 흐윽.."


숨이 막혀 튀어 나온 눈물을 공포의 눈물로 속인다.

눈물 말고, 다른 물로 속옷이 젖어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율자는? 아마, 벌레 같은 년이라고 매도하겠지. 

그러면 키아나는? 글쎄, 모르겠다. 

어쩌면 알 수 있을 지도...?

가슴을 움켜쥔 손에 힘이 빠지고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며 함장이 입술을 열었다.

가학심을 자극해 율자가 선을 넘으려 한다면, 키아나가 깨어날 것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고서 두려움에 떠는 소녀 연기를 했다.


"제...죄송...해요."

"....."

"듣기 싫은 이야기 한 거...잘못, 했어요."


율자의 눈이 흔들렸다. 여왕을 자칭하기에 가학심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걸까.

다른 방법. 어떤 방법을 써야 키아나가 깨어날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소녀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명을 지르던 소녀는 곧 힘없이 그녀의 몸 위로 떨어졌다.


"아...?"


눈동자의 색이 오락가락하더니 다시 푸른색으로 되돌아온다. 

질식으로 붉게 물든 얼굴. 옷이 찢어지는 바람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가슴. 소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이 함장을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깜짝 놀라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함장?"

"괜찮아 키아나."


그녀는 제 변태적인 욕망을 숨기고 소녀를 품에 끌어 안았다. 가슴에 소녀의 얼굴이 닿았다.

여자끼린데 뭐 어떤가. 물론 그녀도, 소녀도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게 흥분하는 쪽이었지만.

하지만 함장은, 율자보다는 키아나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속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듣기 싫은 말을 한 건 사실이니까."

"아냐, 함장 그게..."

"응?"

"메이 이야기만 하면, 안 좋은 생각들이 떠올라서..."


역시, 그것 때문이었구나. 함장은 제 가슴을 베고 누워 있는 키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키아나. 부정적인 감정들...그러니까, 키아나의 나쁜 생각들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 같아."

"아...?"

"율자 말이야. 율자는, 키아나가 나쁜 생각을 해서 키아나가 약해지면 그때를 노리는 거야."

"그, 그런 걸까...?"

"응. 내가 메이 이야기를 했을 때, 키아나의 몸 안에 있는 율자가 두 번이나 튀어 나왔는 걸."


소녀의 표정이 어둡게 물들었다. 

몇 달이나 율자와 내면에서 다투어 왔을 것이다. 아마 그녀도 속으론 어렴풋하게 인지하고 있으리라.

그걸 남한테 들켰다는 게 그녀가 어두운 표정을 짓게 된 원인이리라.

그에, 함장은 욕망을 조금씩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키아나 내가...방법을 하나 알려줄까?"

"응?"

"나한테 풀어."

".....엥?"

"부정적인 감정들은, 응. 물감 같은 거야. 물감을 묻힌 붓을 계속 쓰면 색이 옅어지잖아?"

"으, 응."

"그러니까 율자가 키아나의 몸을 차지하게 만드는 나쁜 감정들을...나한테 쏟아내는 거야."


아래에서 흐른 물이 이불까지 적신 것이 느껴졌다. 움찔. 그 위에 있는 소녀의 다리가 살짝 떨렸다.

망설이는 표정. 아무래도 쉽게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함장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키아나의 함장인걸. 발키리가 힘들어하는 걸 해결해주는 것도 함장의 몫이야."

"그, 그래도..."

"키아나가 하고 싶은대로 해도 괜찮아. 여기...이 팔을 꺾거나."

"....."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함장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하복부를 가리켰다.

여성에게 있어서 더없이 소중한 곳. 자궁이 위치한 곳. 정확히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면 여기를...마구 때리거나."

"아..."

"목을 조르거나 막, 깔개로 써도 돼."


여전히 망설이는 표정. 함장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제 붉은 머리카락으로 포니테일을 만들었다.

고개를 살짝 돌린 그녀는 그 머리를 살짝 흔들면서 말했다.


"이거, 잡아당기면서 손잡이로 써도 돼."

"함...장."

"키아나가 하고 싶은 거, 키아나의 나쁜 감정들 나는 다 받아줄 수 있어. 나를 망가뜨려도 돼."


음란하고, 또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유혹했고.


"어떻게 할래?"


백발의 소녀는 그녀를 향해 욕망에 젖은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