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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노세 카나데.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고 있자면 왠지 스스로가 옛날 이야기를 해주는 할머니처럼 느껴진다.


기억도 안 날 만큼 까마득히 오래전, 혹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날 정도로 찰나의 시간이었을까.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순간은 어떨까, 까마득한 과거였을까,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이야기일까.



---



"등교 첫 날부터 지각이라니! 마마! 왜 안 깨워 준거야!?"


"분명 난 깨웠다? 세 번도 더 넘게 깨웠는데 네가..."


"크으으. 왜 더 격렬하게 깨워주지 않은 거야!"


"격렬하게 깨우는 게 뭐니, 빨리 학교 갈 준비나 해."


적당히 마른 머리를 대충 빗어 넘기고 옷을 갈아 입는다.


젖은 머리칼이 셔츠 칼라에 닿아 찝찝한 느낌이 들지만 한가롭게 머리나 말리고 있을 시간은 없다.


"아침밥은 어쩔래."


아침? 아침밥은 중요한데.


자고로 인간은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줘야 한다. 아침 식사가 어땠는지에 따라 그 날 하루 전체의 컨디션이 좌우되니, 하루 세 끼 중 가장 중요한 식사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 메뉴 뭔데?"


"검은콩 조림이랑 된장국..."


"아침 같은 거 먹을 시간 없다고!"


바쁘게 준비하는 내 모습을 보며 엄마가 된장국을 후루룩 마신다.


크으, 나도 배고프지만 등교 첫날은 학교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날이니까.


내 앞으로의 이미지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지각할 수 없다!


첫날부터 지각 했다가는 귀엽고 덤벙대는 아이라는 이미지가 박힐 것이다. 그러면 내 이케맨 데뷔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겨버린다. 그저 키 크고 잘생기고 예쁘고 그저 귀여운 여자 고등학생이 될 뿐이란 말이다!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와."


벌컥 문을 열고 나서자 봄 날 아침의 쌀쌀한 공기가 몸을 휘감는다.


- 짹짹


늦은 아침 특유의 묘하게 높은 햇빛과 평화로운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급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이 소리는 분명 아침에 지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지게 만드는 사악한 마법임에 틀림 없다.


"나도 하늘을 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늘을 날아서 학교에 간다면 하나도 힘들지 않을텐데. 이렇게 열심히 달릴 필요도 없고 일직선 상으로 쭉 갈 수 있으니까 빠르기도 할테고.


아니 날개짓 하는 것도 나름 힘드려나? 


그래도 달리는 거에 비하면 훨씬 편할 테니까.


이렇게 골목에서 튀어나온 여자아이와 부딪힐 일도 없고


"윽."


"가핰."


순간 눈 앞이 샛노랗게 물들었다.


세상이 노래졌다 같은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노랗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 눈 앞을 가린 것이다.


부딪힌 몸이 한 차례 크게 휘청, 가락가락 흩어지는 노란 빛 사이로 소녀의 얼굴이 수줍게 드러났다.


부딪힌 충격에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소녀.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아 한 바퀴 돌려 품에 안았다.


"괜찮아?"


"으... 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제대로 인지 못한 모양.


잠시 진정하게 둘까.


시야를 조금 내려보니 새하얀 블라우저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께에 찍힌 고급스러운 모양의 H 마크도.


"홀로 고교?"


옆 학교인가? 생긴 건 얼빵해 보이는데 공부는 엄청 잘 하는 모양이네.


그러고 보니 라덴도 홀로 고교에 붙었었지.


"아, 고맙습니다?"


한동안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자, 눈치를 살피던 소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물쭈물하며 양손을 모아 꼼지락 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얼굴을 붉히면서 놀라는 모습도.


"또 귀여워!"


내 몸을 슬쩍 밀어내며 살짝 찌푸리는, 나를 경멸하는 듯한 모습도.


"완전 귀여워!"



---



"뭐 그렇게 해서 사귀게 됐다는 말이지."


"잠깐, 방금 그 얘기의 어디에서?"


턱을 괴고 있던 라덴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3년 전 우리의 첫 만남과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범인이 어찌 내 마음을 이해할까. 너는 범부다. 그저 평범하고 공부 잘하는 고등학생에 지나지 않는 거야.


"갸하하..."


카나데가 쑥쓰러운 듯 내 팔을 당기며 품에 비집고 들어왔다.


라덴이 눈가를 좁히고는 번갈아가며 우리를 바라봤다.


"이야. 라덴쨩은 이런 이지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이란 말이지. 완전 반하겠어."


"그게 여자친구 앞에서 할 얘기냐고."


카나데도 불만인 듯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알았어 알겠다고.


"이렇게 밤새 떠드는 것도 나쁘지 않네."


"뭐, 어른의 특권이라는 거겠지."


라덴의 과장된 말투와 몸짓에 나와 카나데 모두 웃음을 터뜨려 버리고 만다. 라덴은 불만인 듯 볼을 부풀리지만,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는지 곧 어깨를 으쓱하며 따라 웃었다.


셋이 밤새 즐겁게 떠들며 노는 사이에도 시곗바늘은 부지런히 달려 어느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카나데쨩."


"?"


원래는 졸업식이 끝나고 주려 했는데, 분위기도 달아 올랐고, 왠지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 같았다.


그래서 꺼냈다.


마이 안 주머니에서 꺼낸 조그만 벨벳 상자. 그 안에는 그녀의 머리 색을 꼭 닮은 노란 보석의 반지가...


없다.


"응?"


반지가 없었다. 어디에도 없다. 상자 안에도, 상자 위에도, 상자 밑에도. 아니 상자조차 없다.


방금까지 손에 들려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인 것 마냥, 쥐고있던 감촉조차 착각이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된..."


반지에서 의식을 떼 놓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고요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공간, 별이 없는 우주의 가운데 나 혼자만이 빛나고 있었다.


라덴도, 카나데도 없어졌다. 아니 없었다.



---



- 삐비비빅 삐비비빅


익숙한 전자시계의 알람음.


언제나처럼 활기 넘치는 소리에 머리까지 머리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 삐비비빅 삐비비빅


물론 전자 시계군에게는 그런 나를 위해 알람을 조금 늦춰 준다거나 하는 배려심 따윈 없다. 묵묵히 기계적으로 할 일을 할 뿐.


정녕 너에겐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없는 것이냐.


- 삐비비빅 삐비비빅


결국 항복 선언을 한 쪽은 나였다. 이렇게 인간이 기계에게 지배 당하는 세상이 조금씩 다가오는 거겠지.


"네 네 갑니다 주인님. 오늘도 열심히 에너지 생산을 해야지요."


- 틱


버튼을 가볍게 누르자 삐삐 울어대던 녀석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그 전후 차이에 조금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흐아아아암."


내가 언제 잠든거지? 분명 방금 전 까지 카나데, 라덴이랑 떠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잠든 나를 두 사람이 집까지 데려다 준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까지 잠이 깊었던가."


아직 잘 뜨여지지 않는 눈가를 비비며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은 졸업식이니까. 평소보단 좀 부지런히 준비를 해볼까. 바로 카나데쨩이랑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야 하니까.


- 쿵 쿵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가,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왜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조금 높아진 것 같달까.


내가 하루 나갔다 오는 사이 집을 리모델링 한 걸까?


아니면 수상한 약을 먹고 내 키가 작아졌다던지? 오 이건 나름 일리가 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수상한 남자들의 거래 현장을 목격했다가 그 장면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다른 한 패가 등 뒤에서 접근한 걸 눈치채지 못한채 당해 버렸고, 이상한 약을 먹여진 채 집에서 눈을 뜬거지. 그렇다면 앞뒤 상황이 모두 설명이 된다!


물론 둘 다 가능성은 없으니 아직 잠에 취해있는 것이리라.


거실에 내려오자 소파에 앉아 아침 뉴스를 보던 엄마가 날 반겨 주었다.


"어머, 웬일이니 네가 주말 아침에 이렇게 일찍 다 일어나고."


"주말?"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오늘은 우리 학교랑 홀로 고교 졸업식인데, 오늘은 월요일이잖아?


"TV라도 보고 있어, 엄마가 금방 아침 차려줄 테니까."


"어라?"


엄마가 소파에서 일어난 모습을 보고 나서야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엄마 키 컸어?"


"그게 무슨 소리니, 엄마는 너 태어나기도 전에 다 컸는데."


설마, 설마!


우당탕 뛰어 거실 벽에 붙어있는 거울 앞에 선다.


평소라면 허리를 살짝 굽혀서 머리를 정리하던 거울이, 이제는 허리를 최대한 꼿꼿이 펴야 내 잘생긴 얼굴을 전부 담아준다.


거울이 조금 높아진 것 뿐 아니냐고?


아니, 이 잘생기면서도 조금 앳된 귀여움이 묻어 나오는 외모는 분명...


역시 그랬던 거였나!


"엄마! 나 검은 양복의 사내들한테 당했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