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 날개를 비비며 울어대던 매미들이
이제 막 알을 깰때쯤
난 첫사랑에 빠져있었다
지금와서는 얼굴도
이름도 잘 기억나지않는다
심지어 좋아했던 이유까지도
다만 하나
언제나 웃고있던 그 표정이
한없이 해맑았던것만 남아있다
그 웃음이 눈에 들어오게 된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우리가 같은 빌라에 산다는걸
안 다음인것 같다
학교를 끝내고 혼자 집에 돌아오던 봄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던 그 애의
눈과 마주쳤을때
난 웃었고 그 애는 눈을 흘겼다
그 후로는 가능한 최선을 다했다
어떻게든 그 애와 가까워지기 위해
눈치보며 같은 청소조에 들어간다거나
그 애가 점심먹고 가던 도서관에 몰래 따라간다거나
여자애들이 좋아하던 캐릭터가 그려진 지우개를
몰래 산다거나 하는것들
당시의 내가 생각하기로
그 작전들은 꽤 성공적이었다
별로 말 할 일도 없던 아이와
자연스럽게 말을 했었고
같이 있는 시간도 늘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 애의 호감을 사는데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청소야 당연히 좋든 싫든 같이 해야하는 일이고
귀한 점심시간을
관심 없는 남자애의
앵무새같은 질문에 낭비한다는건
정말이지 불쾌한 일이었을테니
허나 난 그저 같이 있고 얘기하는 시간이
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이가 진전되고 있다 믿었고
그 아이의 인내심이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단걸
많이 늦되던 난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나비가 날던 하늘을 고추잠자리가 가를때쯤
난 큰 결심을 했다
사랑을 고백하겠다고
언제나처럼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던 그 아이를
멀찍이 따라가는 대신
중간쯤 가서 그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이윽고 내가 꺼낸 말은
장장 반년을 이어오던 노력에 비해서
너무나 소심했다
"저...진짜 할 말이 있는데..."
"나.. 너 좋아하는것같아..."
"아니야 진짜 거짓말 아니야"
"그냥.. 지금 말 안하면 죽을때까지 후회할것같아서...그랬어"
답이 어땠냐고?
난 아직도
여자가 그렇게 악을 쓰면서 소리치는걸 본적이 없다
6개월간 참아온 분노와 설움이
내 고백때문에 폭발한것이겠지
그렇게 우뢰같은 거절을 듣고
난 혼자 망연자실해 하염없이 걸었다
걷다 걷다 걸음을 멈춘것은
어느 오락실 코인노래방 안에 와서야였다
그전까지 난 단 한번도 노래방에 간적이 없었지만
그저 실연의 슬픔 하나로
사촌 형이 자주 듣던 노래를 목이 쉴때까지 불렀다
서로 다른 세상에 살아왔다느니
그대는 이미 누군가에게 큰 의미라느니
혼자서라도 사랑하겠다느니 따위의 가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채로 울면서 노래했다
그리고 찾아온 다음날
내 학교생활은 뒤집어졌다
말 그대로 내 책상은 뒤집혀져있었고
사물함의 물건은 쏟아져있었으며
필통은 쉬는시간마다 여자화장실에 던져졌다
간단한것이다
내 고백은 전교에 다 소문이 났고
고백멘트는 모두가 아는 유행어가 되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여자한테 차였다는건 놀림거리로 삼기에
차고 넘쳤으니까
그제서야 난 어제 내 입에서 외친 말들을
온전히 이해하게되었다
죽을때까지 후회한다는게 무엇인지
다른 세상에서 산다는게 어떤것인지
그렇게 늦됨을 핑계로
한 여자아이의 인내심을 시험하던 남자아이는
강제로 철이 들게되었다
또 시간이 흘러
6년 같은 6개월이 지나
여자화장실에 필통을 주우러가는 내 얼굴을
화장실 아주머니가 외울때쯤
종업식이 다가왔다
같은 반으로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
담임선생님은 흰 백지 한장을 가져왔다
1년간 하고싶던 말
고마웠던 말
하지 못한 말
전부 합쳐서 하나로 쓰라던 마지막시간
바라는거라곤 1초라도 이 시간이
빨리 끝나는게 다였던 난
10초 뒤에 물어도 대답 못할 내용만 쓰며
시간이 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싫어하는 나여서일까
내 롤링페이퍼는 가장 빠르게 돌아왔다
변태새끼,병신,찐따,자살해라
이런 귀에 못이 박힌 글들을 뒤로하고
난 그 애의 메세지를 찾았다
그렇게 한참을 뒤적이며
찾아낸 그 애의 마지막 말은
"널 싫어해서 미안해"
말이 되지않는다
어떻게 싫어한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이 같이 있을수가 있는가
싫으면 그냥 싫은것이지
미안할 이유가 어디있으며
미안하면 미안한것이지
어떻게 싫어한다는 말을 덧불일수있는가
내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만든 그 애가
어떻게 이런 모순된 말을 할수있는지
그때의 난
아니 아직도 난
그 말을 다 이해 하지 못했다
그렇게 혼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던 나에게 던져진것은
그 아이의 롤링페이퍼였다
내가 사랑했던 아이
이젠 증오하는 아이
싫어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아이
난 내 감정을 하나로 합치지 못하고
결국 마지막 한 장을 비워둘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알이었던 매미가 성충이 되어 수명을 다하고 나서야
마지막 페이지를 채우려한다
정리가 됐다면 거짓말이다
이해를 했다면 몹쓸말이다
그러나 이제야
너에게 또 나에게 솔직할 수 있을것같다
안녕?
우리 같은 빌라에 산다는거 알고나서
너랑 친해지고싶었어
너한테 선물해주려고 샀던 지우개
나 아직도 가지고있어
너랑 같이 있으려고 갔던 도서관이
이제는 내 직장이 됐어
너한테 차이고 처음 갔던 노래방이 취미가 됐고
그때 부른 노래는 내 18번이야
내 필통 주워주시던 화장실 아줌마하고는
아직도 가끔 통화해
내가 너한테 했던 일도
너가 나한테 했던 일도
이 한 마디를 못해서 그랬던것같아
어쩌면 인정하기 싫었나봐
그래도 이제야 마지막 한 칸을 채울 수 있을것같아
널 좋아해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