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있는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같은 학교에서, 같은 학교로 가는 교환학생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그녀의 미소에, 목소리에 반해 버렸습니다.


그녀와 쇼핑을 하고 돌아오던 날, 그녀에게 용기를 내어, 혹시 매일 이렇게 같이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녀의 룸메이트 때문에 주방이 더럽다는 한탄에, 언제든지 우리 주방으로 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를 위해서 삼겹살 파티를 준비하고, 생전 처음 제육볶음을 만들어 보고 남에게 대접해 보았습니다.




첫사랑의 마법은, 그녀가 그녀의 친구와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 저주로 변했습니다.




첫 한 달은, 밤마다 친구들에게 디스코드로 한탄했습니다.


포기해야 함을 알면서도, 처음으로 알게 된 이 감정을, 내가 준비되었는지 따위 상관없이 찾아오는 이 감정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잘해줄 수밖에 없는 마음과, 그 마음을 막아야 하는 현실의 괴리에 데킬라를 마신 듯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썩어들어가는 마음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쏟아내 버렸습니다.


타지에서 고생이 많다며, 그저 묵묵히 들어준 친구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두 번째 달에는, 파티에서 그녀가 나의 룸메이트와 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멋들어진 곱슬머리와 입담이 매력적인, 매 파티마다 클럽 바깥에서 서로 다른 여자와 키스한다는 이탈리아 남자.


그 곱슬머리가 신기한지 연신 만져보며, 그의 말 한 마디에 소리내어 웃는 그녀.


이미 정리해야겠다 다짐했던 마음이 다시 일어나, 그 모습을 보고 격류를 일으켰습니다.


확신했습니다. 나는 절대 그녀가 저런 미소를 짓게 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룸메이트에게 괜히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봤습니다.


곱슬머리를 신기해했다는,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었다는 이야기. 나의 룸메이트는 좋은 사람입니다. 굳이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차라리 시도해 보라는 그의 말에서 위안을 얻는 자신이 혐오스러웠습니다.




우울증의 전조가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노래만 들었습니다. 쇼핑을 하다가도, 세탁기에 옷가지를 넣다가도, 문득 화가 나거나 슬퍼졌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 마침 찾아온 주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교환학생이라면 해야 할 것 같아 고민하던 여행지 선택도, 부담되던 모임들도 모두 그만두고, 방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습니다.


게임을 하고, 디스코드로 듀얼을 했습니다. 질리면 유튜브를 보다가 낮잠을 잤습니다. 이탈리아 친구가 안 보는 틈을 타, 마늘 다섯 쪽을 넣은 파스타를 해 먹었습니다. 공강이었던 월요일까지 사흘을 그렇게 지내자, 겨우 우울증을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특별한 술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녀를 따라 교환학생을 나와, 정작 다른 곳으로 가게 된 그녀의 남자친구가 함께하는 자리였습니다.


감정의 격류가 한 차례 지나가, 잠시 텅 비어있던 나는 무사히 사고 없이 술자리를 끝마쳤으며


그 와중에 그녀와 그가 함께하는 순간 지은 미소는, 나의 확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민이 끝나고, 정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세 번째 달은 오히려 괜찮았습니다.


집에서 날아온 학사경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있는 아침 수업 등 현실적인 문제가 잠시 나를 탈출시켜 주었습니다.


바쁘게 지내고, 룸메이트들과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며 잠시 그녀에 관한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흠칫흠칫 올라오는 감정만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음이 부러질 뻔했던 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감정의 정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먼저 학기를 마치고 떠나는 날이 왔습니다. 한 학기 더 있을 수 있었지만, 그녀의 룸메이트 덕에 매일 바퀴벌레가 나오는 주방을 그녀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김치볶음밥과 데친 소시지. 내가 가진 재료와 그녀가 냉장고를 비우기 위해 가져온 재료로, 어느 날보다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김자반을 그녀의 제안에 따라 넣었습니다. 좋은 발견이었고, 앞으로도 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남겨두게 된 것들 일부를 받게 되었습니다. 남은 세제, 멀티탭, 굴소스 같은 것들.


그것들을 받으러 그녀의 방으로 갔습니다. 그녀의 다른 룸메이트들과도 이야기한 후, 그녀를 잠시 불렀습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그 동안 요리해준 것, 도와주려 한 것들. 그것들이 단순한 선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술게임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말해야 했을 때, 그녀를 가리킨 것이 그저 질문을 벗어나기 위한 변명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진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차마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직접 말하지 못했습니다.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괜찮다고 해 주었습니다.


그 동안 고마웠다고, 잘 지내라고 해 주며 그녀와 나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동안의 고뇌가 무색할 정도로, 아무 감정 없는 듯한 마무리였습니다.




그런데, 아프지 않습니다.


내 방에 돌아와서는, 그대로 쓰러져 오열하다 지쳐 잠들 줄 알았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무너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상상 이상으로 저는 괜찮습니다. 쓰러지기는커녕 목이 말라 물을 찾았고, 울지도 못해 멕시코 룸메이트의 데킬라를 빌려 마시고서야 눈물이 나왔습니다.


감정의 정리가 생각보다 많이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나의 감정이 생각보다 얕았던 것인지, 원래 사랑이란 게 이 정도인 것인지,


나는 아직 핸드폰을 볼 수 있습니다. 노트북으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숨을 쉬고, 목마름과 피곤함을 느낍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기억을 끊어내야 합니다. 그제서야 그것은 책상을 벗어나, 닫혀서는 책장에 꽂힌 한 권의 책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필히 고통스러울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


흔해빠진 이별 발라드의 화자처럼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소나기 속에서 소녀를 잃은 소년처럼,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아파오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의 연인이 되는 것을 본 굴착꾼처럼,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는 일도 없습니다.


기억이 추억이 되는 순간이, 마법이 저주가 되어 괴로워했던 시간들이 어릴 적 읽은 동화의 기억처럼 과거가 되는 순간이


너무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괜찮아도 되는 것인가, 죄책감이 들 정도로.




세 달의 첫사랑은, 별세계의 그녀를 사랑한 이야기는 그렇게 짝사랑으로 끝났습니다.


차라리 그 끝에 나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었기를 바람에도,


밤하늘은 소도시의 절제가 만들어낸 별자리들이 여전히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봄바람은, 알맞게 시원합니다.


사랑을 끝내버린 지금조차도, 나는 사랑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적어도 그녀와 함께 있던 이 장소에 남아있는 동안에는, 알아낼 수가 없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