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난지 어언 반년

처음의 네 모습은 하얀 종이였어

아무런 글자도 쓰여져 있지 않은

표지나 제목조차 지어져 있지 않은

텅 빈 책이었지

그러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하얗던 종이에 글자들이 아로 새겨졌어

너의 목소리

너의 웃는 얼굴

너의 손짓

온갖 미사어구들이 있었지만

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어

빼곡히 적힌 글자들이 빈 공간을 메울 때마다

나는 점점 책속으로 빨려 들어갔지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다급한 마음에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려다가

너무 흥분한 내 모습에

머뭇거린 적도 있었어

너무 궁금했지만 두렵기도하고 무섭기도 했어

왜냐하면 마지막 페이지에 내가 없을까봐

결말이 나있지 않을까봐

어느 페이지부터였을까

기나긴 문장들 속에 조금씩 다른 내용들이 쓰여지고 있었어

예상하지 못했던, 내가 바라지 않던 글들이 말야

그러다가 그 내용에 내가 등장하지 않게 됐어

누가 억지로 내용을 고쳐쓴 것 같이

겉잡을 수 없었어

열심히 수정해보지만 채워지는 내용을

이해하기도 감당할 수 조차 없었어

더 조바심이 났어 나라는 펜이 너라는 종이에 상처를 냈을 수도 있어

점점 마지막 페이지가 다가오고 있어

난 손을 멈췄어

더 이상 이 이야기속엔 나는 없었거든

너와 다른이의 이야기였거든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어

허무했어 책을 찢어버리고 싶었어

하지만 그만 뒀어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더라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자우개로 지워서

처음부터 다시 쓰면 되니까

그래서 이만 책을 덮었어

너라는 책을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