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이 양반전에 쓴 글을 보면

"과거시험 문과에 합격해 사대부로 진출하면 온갖 재물이 다 생기니 과거시험 합격증이 바로 돈 자루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당시 부정부패가 극에 치달았음



당시 양반들은 이웃집 소도 제집 소처럼 부릴 수 있었고 동네 사람들을 붙잡아다 제집 밭일도 시킬 수 있었다고 함



많이 알려진 연산군의 애첩 장녹수나 유명한 기생이었던 황진이도 양반 사생아였는데

당시 양반들의 종년 겁탈은 관행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양반은 역모와 관련된 죄가 아니면 속전으로 처리되거나 가노가 대신 받았고 병역의 의무도 없었음

쉽게 말해서 회사에서 사장이 범죄 저질러도 부하 직원이 대신 교도소 가서 복역한다는 뜻임


관직에 오르고 활동하는데에도 상당한 뇌물이 필요했으므로

결국 백성을 수탈하고 돈을 뜯어내는데 혈안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였음



원칙적으로는 농사 짓는 농민들도 과거시험을 보고 벼슬을 할 수는 있었지만(천민은 제외)

애초에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종일 뼈 빠지게 일만 하는 평민들이 과거시험을 본다는건 불가능에 가까웠음


넓은 땅을 소유했던 양반들은 하루종일 공부만 했기 때문에 훨씬 유리할 뿐더러

과거로 뽑는 관리는 일 년에 끽해야 10여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책 살 돈도 없었던 농민들은 언강생심 꿈도 못꿈


또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당시에 가죽신이나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했음

어쩌다 돈이 생긴 평민이 비단옷을 입거나 하면 도둑으로 몰리거나 해서 양반집에 끌려가 멍석말이 매맞다가 뒤지기도 했음


그리고 말이나 소를 타고 가다가 양반집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내린 후에 걸어서 지나가야 했고 그냥 탄 채로 가면 그 집 하인들에게 끌려가서 또 개처럼 두들겨 맞는것임


당연히 길을 걷다가도 양반을 만나면 바로 구석으로 물러나서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해야함


당시 양반들은 모든 부를 독점하며 토지를 차지하고 소작농을 부렸으면서

겉으로는 물질적인 것에는 관심 없는 척하면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임

사농공상이라며 상인들을 천대시하고 업신여겼지만 실제로는 상인의 뒤를 봐주면서 뒷돈을 받아먹었음


조선의 백성들은 개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고 국가 경제력이나 국방력은 피폐해져

고작 왜나라 해적무리에도 속수무책으로 민가는 강탈 당하고 결국 외세의 침략을 불러오게됨